창밖의 나무 한 그루

‘학림다방 30년 시리즈. ⓒ이충열

‘학림다방 30년 시리즈. ⓒ이충열

사진 속에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서 있다.
두 손으로 안으면 양 손끝이 닿을 정도로 가늘던 줄기는 여러 장의 사진들 속에서 점점 두터워진다.
잎을 잔뜩 매달아 도로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날도 있고,
헐벗은 가지마다 흰 눈을 수북이 얹고 있거나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 비를 맞으며 서 있기도 하다.

나무는 ‘학림다방 앞에 선 가로수다.
학림다방은 1956년 문을 연 이래 종로구 대학로 한자리에서 60년 넘게 성업 중인 곳이다.
서울대학교가 대학로에 있던 초창기부터 지성들의 단골다방이었고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사랑방이었다.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도 시간이 고여 있는 명소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30여 년간 학림다방을 운영해 온 이충열은 마치 나무처럼 한 장소에서 자리지킴을 하며,
다방 내부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마다 빠짐없이 플라타너스가 등장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어느 날은 나무 곁으로 구호가 쓰인 커다란 깃발을 들고 사람들이 뛴다.
폐지를 줍는 노인이 수레를 끌고,
멋쟁이 여성들이 나란히 걷는다.
온통 붉은 옷을 입은 ‘붉은 악마들이 나뭇잎 하나 낄 틈 없이 거리를 가득 메운 때도 있었다.
민주항쟁이 한창이던 80년대 시위 행렬부터 90년대 대학로를 일상의 배경으로 오가는 행인들,
2000년대 월드컵 축제 열기까지가 사진 시리즈 ‘학림다방 30년 속에 담겨있다.
긴 시간 동안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구도로 찍은 특이한 사진으로 옛 시절의 버내큘러(Vernacular,
그 시대·지방·집단 특유의)가 가득하다.

이충열은 오랫동안 순전히 개인적인 친분으로,
대학로를 스쳐간 많은 예술인들을 기록한 ‘드러나지 않은 사진가였다.
가수 김광석의 빛나던 시절부터 얼마 전 작고한 김민기씨도 그의 사진 속에서 청년기와 중장년기를 통과한다.

급변하는 서울 도심에서 사라지지도 허물리지도 않고 수십 년을 자리지킴 한 학림다방의 차창 밖 플라타너스. 사진 속에,
밑동이 최루탄 가스에 가려진 나무가 허공에 떠 있다.
나무가 겪은 시간이자,
80년대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이웃 종교의 순례길에서 ‘비움을 배우다

원영 청룡암 주지

원영 청룡암 주지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오묘하면서 무상함을 깨닫게 해준다.
그토록 애절하게 울부짖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더니 이젠 그 소리를 귀뚜라미가 대신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무더위와 열대야도 조금씩 다가오는 조석 찬바람에 기세가 꺾였는지 온순해졌다.
겹친 여름 자락과 가을 자락이 서툰 바느질로 금세라도 풀릴 것 같은 모양새다.
그렇다.
간절기이다.

이번 간절기 중 열흘을 종단 교육원에서 주관한 서유럽 4개국 순례에 할애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불편함도 반복되어 익숙해지면 편안함으로 뇌가 인지한다.
대부분 승려의 일상이 그럴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게 사실이다.
하루살이의 삶이라는 각오로 살아가는 수행자인 나는 두 번의 고심과 번복으로 하늘길에 오를 수 있었다.
칸트의 시간과 맞바꾼 셈이다.

고심 끝에 떠난 서유럽 순례길
종교 구분 넘어선 평화 되새겨
매너리즘 빠진 나를 비우게 돼

뭐든 쌓아두는 것을 경계한다.
마음이든 물건이든 제때 놓지 못하게 되면 집착이 되고,
결국 망상과 번뇌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기 때문이다.
해묵은 감정은 해묵은 쌀처럼 향기롭지 못하다.
그래서 이번 4개국 서유럽 순례의 화두를 ‘비움으로 정했다.
돌이켜보면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했고,
다가서야 할 때 다가서지 못했던 날들이 많았다.
익숙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태함과 소심함이다.
이것도 내가 버려야 할 하나의 과제였다.

순례를 주관한 교육원 관계자를 포함하여 70여 명 순례자의 첫 도착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위해 지어진 성당이다.
비록 대관식은 열리지 못했다지만,
고딕 양식 건축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순례자들은 길 위에서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였다.
이제 갓 결혼식을 마친 독일인 신랑 신부로부터 즉석 하객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이다.
웨딩드레스에 꽃을 든 신부와 깔끔하게 턱시도를 한 신랑이 정중하게 합장하며 사진 촬영을 청하는데,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존중이 느껴졌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종교의 구분을 넘어 기쁨을 함께하려는 그들에게 펼쳐질 인생 2막의 출발에 스님들은 흔쾌히 ‘길 위의 하객으로 변신하였고,
나는 자청해서 사진사가 되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그들의 무탈과 평온의 씨앗을 렌즈에 심었다.

4개국 순례 중 일정에 변수가 생겨 들르지 못한 곳이 스위스 베른 대성당이다.
하지만 그 아쉬움은 “안녕하세요,
스님 또박또박 우리말과 함께 공손하게 합장하는 스위스인으로부터 받은 감동의 인사로 대신할 수 있었다.
이국의 현지인에게 듣는 우리말이 반가우면서 한층 높아진 우리나라의 국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한류의 열풍을 일으키게 해준 우리나라 문화 예술계의 부단한 도전과 노력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스위스와 남프랑스를 거쳐 드디어 이번 순례의 종착지인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로마 제국으로부터 시작된 가톨릭 교회 역사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 성지순례 중 뇌리에 깊게 박혔던 곳이 순교자들의 지하 묘지 ‘카타콤베이다.
죽음이라는 극한의 두려움마저도 막지 못했던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통해 딜레마와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를 ‘비움으로 리셋할 수 있었다.

순례를 떠나기 불과 나흘 전 일이다.
12년을 진행했던 주말 아침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의 하차를 결정했다.
마지막 녹음을 마쳤을 때의 마음은 홀가분함과 서운함의 교차보다는 오랜 시간을 지속했던 내 일상의 한 부분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허망함이었다.
하지만 이번 순례를 통해 배운 것은 지속하지 못함에서 비롯된 허망함을 벗어난 숭고함이다.
그 숭고함은 바로 비움에서 나온다는 것을. 찬트(성가)가 울려 퍼지는 피렌체 대성당에서 나는 성심을 다하여 이웃 종교 하느님께 기도했다.
거창하게 지구촌의 화합과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기도가 아닌 내가 기억하고 함께하는 모든 이가 덜 고통받는 가운데 평온에 이르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부드러운 친절과 자비심을 베푸는 것이 그대로 자신의 종교라고 달라이 라마는 역설했다.
“이것이 나의 소박한 종교입니다.
복잡한 철학들이나 교회,
절간,
성당 같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자기의 머리,
자기의 심장이 곧 교회요,
절간이요,
성당입니다.
철학은 친절입니다.

여기에서 친절은 가장 보편적인 인간의 양심 중 하나이다.
철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게 무엇인가. 인간의 행복이다.
내 것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이기심으로 남을 존중하기는커녕 친절과 자비를 베풀지 못하는 것이다.
홀로 행복할 수 있을까.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무거웠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단언컨대 ‘구원의 동의어는 ‘평온이다.
그 평온을 위해 우리는 하나라도 더 채우려는 마음보다는 하나라도 더 비우려는 마음이 필요하겠다.

원영 청룡암 주지

멀쩡했던 노인 소변줄 차고 묶인다,
입원 한달 뒤 닥칠 일

병원에서 태어나 병원에서 떠나는 게 현대 인간의 일생이지요. 그런데 그 방법 뿐일까요? 임박한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암 전문가가 본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다룬 '김범석의 살아내다(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78)'입니다.

고령의 환자,병원에서 한 달 버티기 힘들다

일러스트 미드저니.

일러스트 미드저니.

개인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상에 입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암 환자가 되면 좀 달라진다.
외래에 오자마자 입원부터 시켜 달라고 하는 환자도 많고,
30분이면 끝나는 항암치료를 입원해서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사정하기도 한다.
좋아져서 퇴원하라고 해도 퇴원하지 않으려는 환자도 있다.
퇴원 후 집 대신 요양병원으로도 가는 경우도 많다.
특히 고령의 암 환자가 경우 그렇다.

팔십 중반의 어르신들이 병원에 입원하면,
입원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빠지는 일이 허다하다.
 병원에 입원하면 우선 공간이 제한된다.
집에서는 그래도 살살 집 밖에도 나가보고,
거실도 왔다 갔다 하고 소파에도 앉고,
화장실도 다니고,
식사하러 부엌까지 오는 등 소소한 활동을 하게 된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하면 아무리 1인실이라도 공간 여유가 없다.
특히 다인실이면 공간이 침대로 국한되니,
침대에 누워 있는 일밖에 딱히 할 일이 없게 된다.
노인분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잘 못한다.
병원 내에서 복도를 걸으며 산책하는 일도 잘 안 하려 한다.

젊은 사람도 침대에 2주만 누워 있으면 다리의 근육이 다 빠져서 못 일어나게 된다.
노인들은 근육 빠지는 속도가 빠르고,
한번 빠진 근육을 다시 만들기가 무척 힘들다.
병원에 입원한 노인분들은 대부분 종아리가 팔처럼 가늘고 흐느적거린다.
 그러면 병원에서는 낙상 위험이 높으니 침대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한다.
 침대에 누워서만 지내면 낙상은 안 하겠지만 대소변을 침대에서 봐야 하게 된다.
졸지에 화장실도 못 간다.
사람들이 와서 소변줄을 꽂고 기저귀를 채워 놓고 가버린다.
 누워서 기저귀에 대변을 보는 건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누워서 배변을 하려면 힘도 잘 들어가지 않는다.
대변을 치우는 간병인에게도 미안한 일이다.

온몸의 근육이 빠지면 삼키는 근육도 기능이 떨어져 식사할 때 사레가 걸린다.
콧줄을 달아 영양을 공급하기 시작한다.
콧줄이 목을 자극하니 자다가 무의식적으로 잡아 빼는데,
그러면 다시 콧줄을 못 빼도록 손발을 묶어 놓는다.
졸지에 소변줄,
콧줄,
기저귀를 찬 채 사지를 결박당하면 정신이 온전해질 리 없다.
그렇게 드러눕기 시작하면 한 두 달을 못 버티고 돌아가신다.
특히 팔순 중반의 노인분들은 아무리 잘 케어를 해도 그렇다.

당연히 의료진은 최선을 다했고,
가족들도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의료이고 효도일까.

임종을 지키는 자식은 따로 있다

환자가 곧 숨을 거둘 것 같았다.
환자 가까이 살던 막내딸을 비롯해 각지에 흩어져 살던 자녀들은 모두 일상을 팽개치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엄마… 엄마… 자식들은 울며 엄마 곁을 지켰다.
그토록 보고 싶던 자식들이 한데 모이자 할머니는 기운이 났는지 오히려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자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올게,
네가 수고 좀 해줘라,
하며 막냇동생에게 뒤를 부탁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평소에 늘 엄마와 함께 있던,
막내딸만 남게 되자 할머니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때가 되면 바통을 넘겨야 한다

그는 72세 폐암 환자였다.
폐암 중에서도 독한 유형이었다.
힘든 내색 없이 열심히 치료를 받던 그가 중요한 일이 있어 항암을 잠시 쉬겠다고 했다.
평생 일궈 온 사업을 정리해 자녀에게 물려주는 작업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윤영호 교수의 책 『나는 품위 있게 죽고 싶다』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삶은 이어달리기와 같다.
우리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기에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떠나야 하는 때가 오면 기꺼이 바통을 넘겨주어야 한다.

불멸의 그대에게

황주리 화가

황주리 화가

어느 애니메이션 제목이 며칠 동안 내게 꽂혔다.
어쩌면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건 불멸을 꿈꾸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는 문구를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우리 세대가 문득 텔레비전에서 “아이를 낳아 나라를 구합시다 같은 광고 메시지를 볼 때마다 세상이 너무 변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세상 너무 변해 막막해지지만
말년 마티스 색종이 그림처럼
내 그림도 불멸의 행복감 주길

그림=황주리

그림=황주리

인류는 후손의 대를 겨우겨우 이어나가 드디어는 불멸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이 대를 잇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각자의 소명을 다 하며 인류의 불멸에 기여할 것이다.
어느 영화 속에서 웃통을 벗은 조폭의 등허리에 불멸이라고 문신이 새겨져 있던 생각이 난다.
그때도 불멸이라는 조악한 글자가 한동안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언젠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적도 있다.
어제는 그 불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며 이화여대 캠퍼스가 마주 보이는 카페 3층에 앉아 한동안 멍때리고 있었다.
가을이 오고 있었고,
스무 살 시절의 내가 대강당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을 뾰족구두를 신고 허겁지겁 뛰어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9월 학기의 시작,
유독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졌던 나는 늘 수업 시간에 늦거나 아예 출석하지 않을 때도 잦았다.
채플 시간에 출석 날짜가 모자라 논문을 쓰고 졸업했고,
그 제목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 관하여」였다.
뜻밖에도 나는 무척 후한 점수를 받았다.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다가 누군가 올린 댓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시절 같은 과목을 들었던 누군가의 댓글이었다.
수업 시간에 출석을 부르는데 내 이름이 들릴 때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학기가 끝날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미술대학 황주리 하고 출석을 부르는데 그날도 내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한다.
그리고 언젠가 잡지에서 발견하고 페이스북에서 만났다는 댓글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이고,
그녀는 인문대학 출신일 것 같다.
댓글 중 “미술대학 황주리 하는 부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나의 이름을 기억하는 그녀가 너무 반가웠다.
지금도 누군가 그렇게 불러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사십 년도 더 지난 가을 그렇게 많게만 느껴지던 계단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득 그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단짝 친구와 수업을 땡땡이치고 음악감상실에서 책을 읽다가 명동 성당의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곤 했다.
우리들의 짧은 일탈이었다.
우리가 삶의 증인으로 참여했던 그들의 결혼은 행복했을까? 일찌감치 나는 모든 게 허무했다.
초등학생이 허무하면 어쩔 것인가? 내 어린 날의 허무는 자연스러운 인생의 태도로 자리 잡았다.
누가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빨리 늙어서 학교 안 가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길을 건널 때,
거리에서 앵벌이를 하는 장애인을 볼 때,
주인이 버린 개를 볼 때,
매일 아침 학교에서 영 소통이 되지 않는 짝의 옆자리를 향해 걸어갈 때,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속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볼 때만 경험하는 증세는 아니다.
모든 평상심에서 벗어날 때의 불안감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매일 불안을 경험한다.
이럴 때는 어른이 된 내 안의 어린이를 잘 대해줘야 한다.
무엇이 그 어린이를 불안하게 하는지 내 안의 어린이에게 물어보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선물해야 한다.
휴식이든 맛있는 음식이든 같이 있어 기분 좋은 사람이든. 나는 요즘 보기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생겼다.
벌써 얼굴 본 지 3년째 되어가는 집안일을 도와주는 동생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독립운동 후손으로 한국에 와 갖은 고생 다 하면서 자식 셋을 대학 졸업 시킨 그녀는 늘 콧노래를 부르며 일을 한다.
형편이 어렵지 않은데도 살아있으므로 일한다.
나는 울적할 때마다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집안일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 밝음이 내게로 온다.
아주 오래전 뉴욕의 미술관에서 맨 처음으로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을 보았을 때 나는 그 밝음의 불멸을 보았다.
건강 이상으로 붓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 말년의 마티스는 붓이 아닌 가위로 색종이 그림을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희망한다.
언젠가 내가 그린 해바라기 그림도 내가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을 보았을 때처럼 마음 어두운 사람들에게 불멸 같은 행복감을 선물하기를.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내 그림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면 한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앙리 마티스)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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