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일을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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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주인공들의 사랑이 아니었다.
대탈출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끝까지 배에 남아 연주를 멈추지 않던 연주자들이었다.
실제 이런 일은 1992년 2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분쟁에서도 일어났다.
총알이 빗발치던 전쟁터에 덥수룩한 수염의 한 남자가 가방을 든 채 나타났다.
빵을 사기 위해 모인 사람들 머리 위로 폭격이 가해진 다음 날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베드란 스마일로비치, 그가 가방에서 꺼낸 건 첼로였다.

사라예보 관현악단의 수석 첼리스트였던 그는 전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연미복 차림으로 아다지오 G단조를 연주했다.
연주는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서 22일간 이어졌다.
빵가게 폭격으로 사망한 22명 희생자의 숫자와 동일했다.
놀라운 건 죽은 자를 위한 위로였던 연주가 산 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발포 명령에도 세르비아 점령군 중 누구도 그의 머리에 직접 총을 겨누지 않았다.

긴급한 수술실, 배를 열자 온 장기에 퍼진 암세포를 발견한 외과 의사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수술은 크게 의미가 없다.
안타깝지만 수술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가 수술을 시작한다.
“밥은 먹게 해드려야지”라는 말이 수술의 이유였다.
하지현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이 장면을 읽었을 때 먹먹해졌다.
상황이 얼마나 나쁘든 지금 할 수 있는 일, 해결 가능한 문제에 최선을 다하는 게 오랜 임상 경험을 가진 그의 직업 윤리였을 것이란 문장이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 시민으로서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음악가인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라는 스마일로비치의 말처럼,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할 때 기적은 선물처럼 찾아온다.
그 일이 꼭 대단한 일일 필요는 없다.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행동만으로 세계는 조금씩 변한다.
기적은 죽은 나무에 핀 꽃이 아니다.
진짜 기적은 절망의 그날에도 당신이 정원에 매일 준 물이다.

나를 돌본다는 것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내가 산책하는 공원에는 저녁이면 청년 한 무리가 모인다.
인사 외에 거의 말이 없는 이 모임은 러너스 클럽인데, 공원 트랙을 한 바퀴 뛰면 별 대화 없이 각자 흩어진다.
혼자 있으면 외롭고 같이 있으면 괴로운 시대의 MZ식 해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노리나 허츠의 책 ‘고립의 시대’에는 감옥을 숙식과 돌봄이 있는 공동체로 인식해 일부러 경범죄를 저지르는 일본 노인 이야기가 나온다.
영국에는 외로움부 장관이, 일본에는 고립을 담당하는 장관이 있다.
이미 외로움이 국가 문제로 인식된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공동체의 붕괴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현대적 외로움은 역설적으로 24시간 연결된 세상과 연관돼 있다.

외로움은 별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자기 돌봄과도 직결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타인이 아닌 자신과 이룬 관계다.
하지만 나를 가장 소외시키는 게 자신인 경우가 많다.
최근 자기 돌봄을 자기 계발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보디 프로필을 찍고 특별한 곳을 여행하는 등 경험을 인증하는 게 자기 돌봄이라 믿는 것이다.
‘갓생’을 살면 정말 자존감이 올라갈까. 문제는 과도한 인증 문화가 경쟁을 부추겨 자신을 더 소외시킨다는 데 있다.

자기 돌봄은 보디 프로필 사진에 붙은 ‘좋아요’ 수보다, 불가능했던 푸시업 한 번을 해냈을 때의 뿌듯함에 가깝다.
남에게 보여주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나를 돌보는 건 그러므로 일정 부분 타인과 단절함을 전제한다.
홀로 일기를 쓰고 명상하듯 타인과 비교하는 지옥에서 벗어나 내 안의 진짜 목소리에 귀 기울여 응답하는 것이다.

3세대 항암제가 표적이 아닌 면역 치료제이듯, 외로움은 타인이 아니라 나와 건강하게 연결이 복원될 때 치유된다.
사실 외로움은 존재의 필연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부족한 나를 비난만 하지 않고 다독여 기다려주는 것이다.
타인이 아닌 나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가 될 때, 외로움은 끝내 견고한 고독으로 진화한다.

감사함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에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플라자 호텔, 입시를 마친 딸에게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꿈꾸던 뉴욕 여행을 선물한 지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 고마워하지 않는 딸을 마주하니 돌연 생각이 많아졌다고 했다.

이 오랜 고민의 레퍼토리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주인공 ‘리어왕’으로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뱀의 이빨보다 날카롭구나!”라는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사랑과 미움이 얼마나 강력히 연결되어 있는지는 최근 부쩍 늘어난 이혼 예능의 법정 싸움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장 맹렬한 안티 팬은 한때 그를 사랑했던 팬이다.

보너스를 받은 직원들의 입에서 “너무 적다!”란 불평이 아니라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는 건데 생색을 낸다!”는 말을 들은 후, 아예 보너스를 없앴다는 사장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한 아이가 고가 명품 패딩을 구입해 입고 다니는 걸 안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상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기버’와 ‘테이커’의 당연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중년의 동창회에서 흰머리가 늘었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탈모인 친구의 심정은 어떨까. 분명 그는 남아 있는 친구의 흰 머리카락이 부러워 부아가 날 것이다.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에세이의 맛

올여름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 근데 너는 ‘호호호’가 있는 것 같아!”라는 귀여운 문장에 꽂혀 영화감독 윤가은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요즘 ‘아네스 바르다’랑 ‘켄 로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뻥’이라며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을 보는 재미로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말에선 빵 터졌다.
문득 ‘니체’와 ‘프루스트’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주말이면 ‘반드시 끝내는 힘’ 같은 자기 계발서와 ‘나는 솔로’를 보며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 담는다고 말하는 내가 상상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는 마음으로 빅맥에 콜라를 원샷하는 비만 클리닉 의사 같은 기분이랄까.

전문가들의 사적인 에세이를 읽는 건 솔직함과 취향 때문이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재능. 그것은 바로 성실함이다”라는 문장에 꽂혀 읽은 김교석의 ‘아무튼 계속’에서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생활 습관을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집안 살림 개념이 모든 게 정확한 위치에 반듯하게 정리된 막 ‘체크인 한 호텔방’이라니. 잘 닫히지 않는 창문은 열지 않고, 깜빡대는 전구는 꺼서 결국 어둠에 익숙해지는 나 같은 게으른 적응론자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김영민 교수의 ‘가벼운 고백’을 읽다가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하는 것”이란 문장을 보고 8월 달력을 넘기려다 혼자 흠칫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산 그리고 산 넘어 산!”이란 말 앞에선,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술술 풀릴 줄 알았던 청춘을 지나, 칠팔십이 돼도 살아보지 않은 나이는 영 모르겠다는 예감에 겸손을 떠올렸다.
“적성을 찾는다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종류의 괴로움을 찾는 것”이란 말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했다.
치킨에는 맥주, 햄버거에는 감자튀김처럼 여름은 에세이를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하지현의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근데 저 같은 환자는 처음이시죠?”라는 걸 보고 팩폭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전작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역시 자신만 이상한 것 같다는 환자들의 말에 대한 세심한 답변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착하게 산 내게 왜! 왜 나만!’이란 비통함은 본인 얘기를 소설로 쓰면 책 한 권이라는 사람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내 남친과 바람이 났다거나, 은퇴 후로 미뤘던 세계 일주를 계획하던 순간 병을 진단받거나, 대출받아 투자한 가게가 폭삭 망하는 불행 역시 안타깝지만 흔하다.
이런 불행은 내가 전생에 죄를 지어서도, 잘못을 해서도 아니다.
100만 유튜브는 눈에 띄어도, 구독자 100명 미만인 수십 만 유튜버가 자신의 채널을 접고 떠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실패담은 뉴스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정신 치료는 비극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 보편적 불행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 것 역시 그런 이유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편안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나른하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 불행하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며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인간의 부정 편향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에서도 맹수의 존재를 파악해야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의 원시 뇌 때문인데, 99개의 선플 속에 달린 단 한 개의 악플이 우리를 불행으로 끌어당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저자의 말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그냥’이란 대답이 헤어질 땐 구구절절 수많은 이유가 되어 나오는 것도 행복에 비해 또렷한 불행의 구체성 때문이다.
불행은 바다에 파도가 치듯 일어난다.
불행이 삶의 디폴트값이라 여기면 얻는 심리적 이득은 예상보다 크다.
자기 자신에게 지금 행복한가를 과도하게 묻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 스트레스로 불행해지기 쉽다.
차가 망가졌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행복을 희귀하다고 믿으면 작은 행복에도 깊이 감사할 수 있다.


확신의 함정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에는 칠면조 우화가 나온다.
아침이면 먹이를 받아먹는 칠면조가 있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상이었다.
아침에 모이를 준다는 칠면조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농장에서 1000일을 보낸 칠면조에게 1001일 되던 추수감사절 전날이 찾아왔다.
그날 농장주의 손에는 모이가 없었다.
대신 그는 칠면조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칠면조의 운명을 결정한 건 평온했던 1000일이 아니라, 1001일이 되던 그 하루였다.

문학 포럼에서 음식이 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습하고 더운 장소를 떠올리는데 시인의 입에서 냉장고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상한 음식을 가장 많이 꺼낸 곳이 냉장고라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진짜 질문은 다음이었다.
왜 냉장고가 답이겠냐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냉장고 안에선 음식이 썩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이 안전할 거란 확신, 그것이 냉장고가 음식이 상하기 가장 쉬운 장소인 이유다.

1988년 옐로스톤의 궤멸적 화재는 확고한 기존 산불 방지 정책이 원인이었다.
번개에 의한 자연 발생적 산불까지 모두 진압한 탓에 산에 타기 쉬운 마른나무와 덤불이 너무 누적돼 오히려 불쏘시개가 된 것이다.
불은 무조건 꺼야 할까. 산에서 불길이 닥쳐 올 때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맞불을 놓으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역설은 뭘 의미할까.

‘심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문 ‘시인과 세계’에서 중요한 건 “나는 모르겠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재자, 광신자, 정치가의 특징이 당신이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확신은 정치인과 선동가의 언어지 지성인의 언어가 아니다.
확신은 쉽게 부패한다.
우리가 기존 신념을 깨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끝없이 의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와 시인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노잼 라이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오래전 조카가 하는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 다운받은 적이 있다.
시작하자마자 얻어터지고 게임이 바로 종료됐다.
게임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외워야 할 게 많았는데 이동, 공격, 방어, 아이템 사용 등 기본적 무기 사용 방법을 배워야 제대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게임에도 기초가 있어야 했다.

PT 수업을 받을 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웨이트 트레이닝처럼 재밌는 건 없다!”는 트레이너의 주장이었다.
공감이 전혀 안 되던 그 말이 이해된 건 지루한 근력 운동을 3개월 반복한 후, 두부 같던 팔뚝에 약간의 근육이 생긴 걸 느낀 다음부터다.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재미의 기쁨은 즉각적일 때도 있지만 나중에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재미에도 진입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취미라고 말하는 독서나 음악, 미술 같은 것이 더 그렇다.
안 읽히던 책이 읽히고, 안 되던 연주가 되면서부터 우리는 점점 흥미를 느낀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의 이면에는 지루한 반복이 많다.
그래서 내가 재미에 대해 가장 공감하는 말은 ‘원래 사는 건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번아웃된 환자들을 진료한 한 정신과 의사의 조언 중 기억에 남는 건, 소진되지 않고 일하려면 신나게 하지 말고 그냥 하라는 것이었다.

조회 수 경쟁이 벌어지면서 즉각적인 재미를 주는 도파민 중독이 최근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최고의 가속도를 추구하는 수퍼 카 제조 업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엔진이 아니라 ‘브레이크’라는 사실이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가 없다면 최고 속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도파민 과잉 시대일수록 우리는 스스로 멈추고 만족을 느끼는 능력이 필요하다.
삶을 여행에 비교하면 속도와 풍경 모두를 가지긴 힘들다.
빠른 속도는 여행의 밀도를 떨어뜨린다.
우리 뇌의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중추가 맞닿아 있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나는 이것이 재밌게 살기 위해서 재미없는 걸 견디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우리 몸의 충고처럼 느껴진다.

게임의 법칙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1988년 서울 올림픽 관련 다큐를 봤다.
서울이 아니라 ‘쎄울’이었다.
“아 라 빌 드 쎄울!(à la ville de Séoul)!” IOC 위원장 사마란치의 88올림픽 개최지 발표가 아직 귀에 선하다.
최신 드론으로 오륜기를 만드는 요즘, 하늘에서 다이빙하는 인간을 띄워 오륜기를 만든 장면을 보니 그 시절의 결기가 느껴졌다.
올림픽 하면 떠오르는 군가풍의 출정가 ‘이기자 대한건아’는 ‘이기자, 이겨야 한다!’는 가사를 무한 반복하며 ‘체력은 국력’이라는 표어가 유행하던 개발도상국 시절의 비장함을 풍겼다.

2024 파리 올림픽의 선전을 보며 떠오른 건 장미란 선수다.
경쟁자인 중국의 ‘무솽솽’ 선수와의 일화를 소개한 그녀는 금메달을 딴 2008년 베이징 올림픽보다, 2007년 세계 선수권이 자신의 역도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메달을 바라면 상대의 실수를 바라기 마련인데, 시합 전 준비 운동을 하는 무솽솽을 보며 문득 그녀는 모든 선수가 죽도록 노력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순간 경쟁자의 실패가 아니라 “너는 네 할 것을 해라. 나는 내가 준비한 것을 하겠다”는 새로운 다짐이 생겼다.
그러자 상대의 실수를 바라며 생겼던 긴장이 사라지고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도 가슴이 두근거린 건 단지 메달 때문이 아니었다.
성공처럼 보이는 실패도 있고 실패처럼 보이는 성공도 있다.
그녀가 선택한 것은 성공을 뛰어넘는 성장이었다.
어떤 경지에 오른 선수들은 ‘더 잘하겠다’가 아니라 ‘연습하던 대로 하겠다’라는 특유의 태도가 있다.
이번 양궁 대표팀 선수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게임은 승자와 패자를 나눈다.
과거에는 은메달을 따고도 죄 지은 표정을 짓던 선수를 여럿 봤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최선을 다한 멋진 패배에는 아낌없이 박수 치는 일이 많아졌다.
이기는 올림픽에서, 즐기는 올림픽으로 게임의 법칙이 바뀐 것이다.
서구에 비해 실력이 모자라 투혼과 헝그리 정신을 유독 강조하던 시대를 지나온 황금 세대의 발랄한 자신감, 이 또한 우리 모두의 성장이다.

초식동물과 아파트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얼룩말, 영양, 가젤 같은 초식동물은 군집 생활을 한다.
반면 호랑이나 사자 같은 맹수는 가족 단위거나 혼자 초원을 누빈다.
초식 동물들은 왜 집단 생활을 할까. 안전에 대한 본능 때문이다.
사자가 가젤을 공격해 무리에서 가장 느린 가젤 하나가 희생되면 무리의 생존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전쟁 같은 극한 상황이 닥치면 아이와 여성, 노약자들이 먼저 희생되는 것과 비슷하다.

‘스프링복의 비극’이라는 말이 있다.
스프링복(springbok)은 수천 마리가 무리를 이루며 시속 88km로 달릴 수 있는 아프리카 영양의 일종이다.
스프링복은 신선한 풀을 찾아 수시로 이동하는데 문제는 수천 마리가 무리 지어 사는 데서 발생한다.
선두 그룹은 신선한 풀을 먹을 수 있지만 뒤쪽은 더 이상 먹을 풀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기에는 풀이 많아 평화롭지만 풀이 부족한 건기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때부터 이들은 자신들의 장기인 달리기로 극한의 속도 경쟁을 벌인다.

누군가 선두를 위해 달리기 시작하면 모두 광란의 질주를 시작한다.
그 질주의 끝은 절벽에 이르러야 끝난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가속도가 붙은 질주는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이다.
스프링복의 비극은 신선한 풀을 먹기 위해서지만, 본래의 목적을 잊은 의미 없는 경쟁은 공멸로 다가온다.
축구 경기장의 앞 관중이 일어나면 뒤에 관중들도 일어나 모두가 불편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며칠 전, 공원에서 앞서가던 젊은 부부의 대화를 들었다.
사려던 아파트 가격이 전 고점을 넘었다며 대출을 받아야 한다고 옥신각신 중이었다.
누군가를 뒤따르며 돈을 버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어려운 길을 걷겠다고 서로 설전을 벌이는 건, 보통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초식동물처럼 대단지 아파트에 오순도순 모여 살고 싶은 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억해야 한다.
고삐 풀린 가계 대출 기사가 쏟아지는 지금이 스프링복의 교훈을 떠올려야 할 때라는 걸.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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