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그스름한 육즙이 쫙~ '레어 돼지구이'가 유행이네


[아무튼, 주말]

삼겹살 사랑하는 한국인
살짝 익혀 먹는 게 유행

지난 3일 서울 광화문 한 돈가스 전문점. 안심 돈가스 속에 붉은빛이 돌았다.
종업원에게 “고기가 빨갛다고 하자 “먹을 만큼 익은 것이라고 했다.
옆 테이블 돈가스는 생고기처럼 보일 만큼 빨갰다.
불그스름한 육즙이 흘러나왔다.

서울 광화문 한 돈가스 전문점의 안심 돈가스. 바싹 익히지 않아 속이 불그스름하게 보인다.<BR> /이미지 기자

서울 광화문 한 돈가스 전문점의 안심 돈가스. 바싹 익히지 않아 속이 불그스름하게 보인다.
/이미지 기자

돼지고기는 잘 익혀 먹어야 한다는 통념이 깨지고 있다.
돈가스와 삼겹살 등을 완전히 익혀 먹지 않는 게 유행이다.
2021년 외식 사업가 백종원 대표가 한 방송에서 “(과거와 달리) 지금은 돼지고기를 완전히 안 익혀 먹어도 된다며 “완전히 익기 직전이 제일 부드럽다고 한 뒤 이런 돈가스 가게가 늘고 있다.
제주 흑돼지 식당들도 “바짝 익히면 맛이 없다며 레어(rare)로 먹길 권한다.

그런데 최근 공개된 사진 한 장이 ‘덜 익혀 먹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덜 익은 고기를 먹고 기생충에 감염된 환자의 CT 사진이었다.
불안감이 확산하자 대한한돈협회가 “국내산 돼지고기는 덜 익혀도 안전하다는 반박 자료를 냈다.
대체 무슨 사진이길래?

◇삼겹살 사랑하는 한국인 놀랐다

지난 28일 미국 플로리다 대학교 샘 갈리 박사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대퇴골에서 무릎 아래까지 흰색 쌀알 같은 낭종이 퍼진 환자 사진이 올라왔다.
‘낭미충증’ 감염 환자의 CT 사진. 낭미충증은 갈고리촌충의 유충인 낭미촌충이 자라면서 근육이나 뇌 같은 조직에 침투해 낭종이나 병변을 형성하는 증상이다.
갈리 박사는 “낭미충증 예방을 위해 절대로 날고기나 덜 익힌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했다.

'낭미충증' 기생충에 감염된 환자의 다리 CT 사진. /X(옛 트위터)

'낭미충증' 기생충에 감염된 환자의 다리 CT 사진. /X(옛 트위터)

한국은 세계에서 삼겹살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가 조사한 외식 소비 패턴 데이터에 따르면 작년 한국에서 외식 메뉴로 가장 인기는 ‘돼지고기구이’였다.
‘밖에서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까’라는 말이 ‘외식할까’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쓰인다.

갈리 박사가 공개한 사진을 본 한국인들의 불안감이 높아졌다.
대한한돈협회는 “국내에서는 덜 익은 삼겹살 섭취로 인한 낭미촌충 감염 우려가 없다고 밝혔다.
인분을 먹여 ‘똥 돼지’ 키우던 시절은 과거일 뿐 돼지가 사료 먹고 크는 지금은 낭미촌충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9년 이후 국내산 돼지고기로 낭미촌충에 감염된 사례는 없었다.
1980년대부터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서 돼지 먹이를 사료로 바꿨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국내산 돼지고기를 통한 낭미촌충 감염 우려는 없다고 말한다.
기생충학 박사인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는 “중남미 쪽은 아직 인분을 먹여 돼지를 키우기도 하고, 호주에서 감염 사례가 나오긴 했지만 국내에서는 감염 사례가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돼지고기를 구태여 바싹 익혀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한국도, 독일도 날로 먹는다

익히냐 덜 익히냐의 문제와 상관없이 날로 먹기도 한다.
제주도나 전라도 등에서는 돼지고기를 생으로 먹던 문화가 있다.
개인이 도축하던 시절 이야기다.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은 “과거 제주도에선 잔치 때마다 돼지를 마련하는 ‘도감’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도감이 돼지를 도축할 때 갓 잡은 돼지에서 단단한 비계가 있는 목덜미 부위는 생으로 나눠 먹었다면서도 “돼지고기를 육회로 먹는 문화는 사라졌지만 다리살이나 등심 등은 덜 익혀야 식감이 부드럽다고 말했다.

지금도 맛볼 수 있다.
전남 무안의 장부식육식당은 ‘암퇘지 육회’를 판다.
1968년부터 돼지 육회를 판매한 이곳은 돼지 목덜미 부위를 야채와 함께 빨갛게 무쳐 낸다.
이 식당 김석종 사장은 “옛날엔 도축 직후 돼지고기를 생으로 썰어 소금에 찍어 먹기도 하고, 육회로 내기도 했다며 “요즘은 전날 도축한 돼지고기를 다음 날 새벽에 받아 육회를 만든다고 했다.
인근에서 도축한 국내산 돼지고기만 사용하고, 매달 한돈 협회에서 직접 심사를 받는다.
경기도 양평에도 특정 기간에만 돼지 육회를 파는 식당이 있다.

무안 장부식육식당의 돼지고기 육회. /업체 홈페이지

무안 장부식육식당의 돼지고기 육회. /업체 홈페이지

돼지고기를 생으로 먹는 국가가 한국만은 아니다.
독일에서는 메트 부어스트라는 돼지고기 육회와 이 육회에 양파 등을 꽂아 고슴도치 모양으로 만든 메티겔을 먹는다.
다진 생돼지고기와 양파를 빵에 끼우면 멧브로첸이라는 샌드위치가 된다.
생산 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하고, 지방이 35% 이상 되지 않아야 한다.
태국에서도 술을 마시며 돼지고기 육회를 먹는 ‘먹방’이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 돼지 호흡기에서 발견되는 연쇄상구균에 감염돼 목숨을 잃은 사람이 24명으로 늘어나자 태국 정부는 ‘익히지 않은 돼지고기 섭취를 자제하라’고 당부했다.

◇다국적 돼지는 생식 주의

모든 돼지고기가 생식에 적합한 것은 아니다.
작년 국내에 수입된 육류 중 가장 많은 것(30%)은 돼지고기로 54만7000t에 달한다.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 중 상당수가 물 건너온 다국적 돼지들이다.
수입량이 가장 많은 건 미국산. 이베리코로 유명한 스페인 돼지고기와 캐나다·칠레·네덜란드가 2~5위를 차지한다.
박경희 농축산식품부 검역정책과장은 “수입 돼지고기도 기생충과 질병이 없다는 검역 조건을 통과해야 수입된다면서도 “수입 돼지고기의 경우 유통 과정이 길고, ‘익혀 조리하는 것’을 전제로 세균 수 등의 기준을 정하기 때문에 생식엔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음의 묘약? 여행에서 '호기심'을 한 알씩 챙기시길

[아무튼, 주말]
[손관승의 영감의 길]
휴가와 여행의 계절
무뎌진 영감 되찾는 법

새벽의 서울역 대합실. 인생은 어쩌면 꿈과 현실이라는 선로를 평행선처럼 따라가는 기차 여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BR> /손관승 제공

새벽의 서울역 대합실. 인생은 어쩌면 꿈과 현실이라는 선로를 평행선처럼 따라가는 기차 여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손관승 제공

휴가 여행객으로 붐비는 서울역 플랫폼에 섰다.
출장이 잦다 보니 열차 여행 특유의 설렘과 낭만은 사라지고 속도와 기능만 떠올리게 되지만 새벽 기차역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은 여전히 좋아한다.
KTX 우수 회원으로 선정된 덕분에 좌석 업그레이드라는 작은 호사도 누린다.
인생은 어쩌면 꿈과 현실이라는 선로를 평행선처럼 따라가는 기차 여행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 두 선로 사이에서 씨름한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려 본다.
“내가 탄 기차는 브뤼셀에 월요일 오후 2시 7분 잠시 머문단다.
가능하다면 역으로 나와 주렴. 그렇다면 나에게 큰 기쁨이 될 거야.

애틋한 형제애가 녹아 있는 편지다.
고흐가 37년 인생을 사는 동안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고 20여 곳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 후반 급속하게 확장된 철도망 덕분이었다.
여행은 그에게 신선한 영감의 원천이었고 기차는 고흐의 그림뿐 아니라 편지도 쉼 없이 날라다 주었다.
1882년 7월 동생에게 보낸 고흐의 다른 편지를 읽어보자. “새벽 4시면 잠에서 깨어나 창가에 앉는다.
목초지와 목수의 작업장, 일터로 나서는 사람들, 들판에서 커피를 끓이려고 불을 피우는 농부들을 스케치하지.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니?

새벽 커피와 성실한 일터는 광기의 예술가 이미지에 가린 고흐의 또 다른 모습이며, 서간체 문학에도 탁월한 능력자임을 알려준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그림 색깔과 스타일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이 모두 시궁창에 처박혀 있을 때도 그중 몇 명은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처럼, 고흐는 아를에서 지내던 시절 ‘밤의 카페테라스’ 등 별이 빛나는 밤을 모티브로 잇따라 명작을 창조했다.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광기와 우연의 역사’에서 한 말에 동의한다.
“어떤 예술가도 매일 스물네 시간을 끊임없이 예술가일 수는 없다.
예술가가 이루어 낸 모든 본질적인 것과 모든 지속적인 것은 드물게 찾아오는 영감의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에서 지내던 시절에 화구를 들고 걸어가는 자신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에서 지내던 시절에 화구를 들고 걸어가는 자신을 그린 그림. /위키피디아

그 드물게 찾아오는 영감을 얻기 위해, 무디어진 감각을 되찾기 위해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산책, 음악회,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찾기도 하며, 운전 도중 번쩍 떠오른 아이디어가 신기루처럼 사라지지 않도록 운전석 옆에 항상 소형 녹음기를 놓아 둔다는 소설가도 있다.
‘글로생활자’의 삶 역시 지속적 영감이 필요하다.
낭만적 어감을 가진 ‘글’과 현실을 의미하는 ‘생활자’, 두 단어로 이뤄진 조어(造語)로 생활이라는 후자에 방점을 찍었지만 듣는 이에 따라서는 낭만에 더 의미를 두는 듯 강연장에서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저도 글이나 쓰고 강연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10년 이상 지속한 비법을 가르쳐주세요.

질문의 행간 속에 멋, 여유, 낭만 등의 느낌이 묻어나는데 실상은 막노동하는 육체 근로자 못지않게 고단한 삶이다.
때로는 장마와 무더위를 뚫고 왕복 7~8시간 운전을 감당해야 하고, 어머니가 입원 중인 병원 한 모퉁이에서도 신문 연재 글을 써야 한다.
그럼에도 이 길을 선택한 것은 딱 하나, 정신적으로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치지 않는 생산성이 관건이다.
100세 시대 지식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프로 세계의 무기를 가리켜 “서랍이 많다고 표현한다.
서랍의 원래 의미는 책상과 옷장에 달린 수납 공간이지만 여기서는 남 다른 기술, 승부수, 독특한 경험 등을 의미한다.

관건은 호기심이다.
나이 들면 자극에 무디어진다.
그 음식도 먹어 보았고 그곳도 가 보았으며, 그 음악도 들어 보았는데 별것 없다는 둥 매사 시큰둥하다.
하지만 호기심은 영원히 젊게 사는 묘약 같은 것, 혈압 약과 영양제를 챙길 때 호기심도 한 알씩 챙겨야 한다.
세상 변화를 감지할 수 있는 호기심의 피뢰침을 높이 세워야 빈 서랍을 채워 넣을 수 있다.
호기심 자극하는 데 여행만큼 좋은 것도 없다.
낯선 풍경, 익숙지 않은 잠자리, 미로, 의심 가득한 불안한 눈동자조차 훌륭한 공부다.
낯선 곳에 도착할 때마다 일본 민속학을 개척한 미야모토 쓰네이치(1907~1981)의 부친이 아들에게 들려주었다는 ‘여행 10조’를 되새긴다.

경부선 종착역 부산 /손관승 제공

경부선 종착역 부산 /손관승 제공

“역에 도착하면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을 주의해서 봐라. 어떤 복장을 하고 있는지 신경 써라. 그곳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열심히 일하는 곳인지 아닌지 잘 알 수 있으니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이 당부였다.
“다른 사람이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도록 하라. 소중한 것은 언제나 그 안에 있는 법이다.
조바심 내지 말아라. 자신이 선택한 길을 열심히 걸어가면 된다.

아들은 73년 인생 동안 일본 열도 16만 킬로미터를 구석구석 누비며 ‘잊혀진 일본인’ 60편의 방대한 시리즈를 남김으로써 일본 학문에 큰 공헌을 했다.
경제성장의 뒤편에서 묵묵히 생업을 꾸려나가던 보통 사람들과 지역의 스토리였다.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고 독립운동 방법으로 민담을 채집한 뒤 ‘그림 동화’를 펴냄으로써 독일 인문학의 기틀을 다진 그림 형제에 비견된다.

무엇이 콘텐츠인가? 드라마, 영화, 음악만 콘텐츠일까?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대단한 과업을 이룬 적이 없다 해도 남들과 다르게 사는 모습만으로도 훌륭한 콘텐츠가 되는 시대다.
보물은 멀리 있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우리 발밑에 숨어 있다.
발밑을 파자!

치매 장모님 유품 정리하다 '기억의 처절한 몸부림'을 보았다

[아무튼, 주말]
[손관승의 영감의 길]
세상을 떠날 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여행자의 뻥 뚫린 마음을 표현한 브루노 카탈라노의 조각 '여행자'. /위키피디아

여행자의 뻥 뚫린 마음을 표현한 브루노 카탈라노의 조각 '여행자'. /위키피디아

길을 떠날 때마다 우리는 고민한다.
무엇을 남겨두고 무엇을 챙겨 갈까? 모자, 운동화, 옷, 책을 비좁은 가방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한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필요성의 이유만이 아니라 몸에 휴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물건이 사람마다 따로 있기 때문이다.
전쟁 난민이나 불법 이민자가 고향을 떠날 때도 증명서, 면도기, 라이터, 상비약과 더불어 가족사진, 집 열쇠 같은 것들이 가방에 들어 있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추억이자 동반자다.
세계적인 조각가 브루노 카탈라노의 ‘여행자’ 시리즈처럼 가슴이 뻥 뚫린 채 가방을 들고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독일 작가 스벤 슈틸리히의 책 ‘존재의 박물관’에는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많은 사람이 직장을 떠나야 했을 때의 증언이 담겨 있다.
여직원들은 화분, 사진, 고객의 명함과 함께 대부분 책상 밑에 몇 켤레씩 두고 있던 구두를 챙겨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직장은 일터인 동시에 생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많은 중년들이 은퇴를 앞두고 정든 사무실을 비워야 할 때 그들의 심정은 상실감, 딱 그거다.
장소와 공간은 여전히 존재해도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된다는 무력감 말이다.
내가 앉던 정든 의자와 책상에 내일이면 다른 누군가가 앉는다는 상상이 유쾌할 리 없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을 때 상실감은 더 크다.
무더위가 절정이던 지난달 장모님이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다.
장가를 가겠다고 처가를 찾아가야 했던 젊은 시절 어느 날이 떠올랐다.
나는 봉천동 산동네 월세를 살고 있었던 반면, 처가는 압구정동의 아파트였다.
여러 가지로 선뜻 발걸음과 말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따뜻한 웃음으로 받아주셨다.
세월이 한참 지나 중년의 나이에 내가 직장 문을 나온 뒤 여러 제안을 거절하고 집에만 있는 상황이 계속되자 아내가 장모님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던 모양이다.
그때 딸에게 해준 장모님의 말씀, “네 남편 눈빛을 봐라. 부드러운 것 같지만 단단하다.
절대로 가족을 굶게 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부끄럽고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위안과 용기가 되었던지. 힘들 때 믿고 격려해 주면 평소 이상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의 신비함이다.
믿어주는 만큼 사람은 노력하는 법이다.
부모 자식, 직장의 상하 관계도 비슷하다.

민족과 종교에 따라 장례 문화가 다르기는 해도 애도 의식은 고인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보았던 사람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였다.
어쩔 수 없는 이별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것. 장례식장에서 내 가슴 리본에 새겨진 서(壻)라는 한자는 사위를 뜻함을 처음 알았다.
원래는 둘째 사위였지만, 나이가 비슷한 손위 동서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내가 유일한 사위 노릇을 해야 했다.
예정되었던 해외 출장을 부득이하게 취소했어도 징검다리 연휴라 빈소가 너무 텅 비어 있으면 떠나시는 장모님께 면목이 없을 것 같아 내심 걱정도 없지는 않았으나 주변의 도움으로 그리 흉하지 않게 마지막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
발인 때 맨 앞에서 영정과 위패를 들고 나가며 가난한 청년에게 주었던 믿음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기를 빌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찾으려는 흔적이 남아 있는 장모님의 수첩 두 권. /손관승 제공

사라져가는 기억을 찾으려는 흔적이 남아 있는 장모님의 수첩 두 권. /손관승 제공

유품 정리를 하던 아내는 장모님의 서랍을 열다가 그만 눈물이 터졌다.
서랍 속에 놓여있던 진녹색 가계부와 검은색 탁상 수첩 때문이었다.
제사상에 올릴 품목과 가격, 음식 요리법, 명절 때 자식들이 건넨 용돈 봉투 등을 정갈한 글씨로 적어두고 있었는데, 특이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수첩 여백에 마치 어린아이가 글자 연습하듯 장모님 이름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어느 날에는 두 글자로 끝나고, 어느 날은 성만 적혀 있거나 이름의 받침을 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불행하게도 찾아온 혈관성 치매의 결과였다.
가족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기 자신을 찾으려 애쓰던 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의 현장이었다.
고대인들이 동물 뼈나 청동으로 만든 뾰족한 필기구 스틸루스(Stilus)로 ‘나, 여기 세상에 왔었다’며 그림을 남겼던 장면이 연상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평론가 김현의 말이 옳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 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 정신적으로 죽는다.

이처럼 자신에게 닥친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장모님은 생전에 입던 옷과 이불, 별로 사용한 적이 없는 예쁜 그릇과 유리잔 같은 것을 따로 분류해 두었다.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주변을 정리한다는 ‘데스 클리닝(Death Cleaning)’, 스웨덴에서 시작되었다는 운동을 이미 조용하게 실천하고 있었다.
본인의 이름까지 상실하는 비극 앞에서도 주변을 깔끔히 정리하려는 노력이다.
아무리 소중한 물건이라도 주인을 떠나면 빛을 잃는다.
기부, 재활용,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으로 분류하다가 나는 작은 포도주잔 두 개를 챙겼다.
크리스털 잔을 살짝 튕겨 보았더니 ‘쨍’ 하고 명징한 소리가 장모님 목소리처럼 울린다.

무더운 여름이 지겹다고 투덜거렸는데, 어느새 9월이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다.
‘다음에 할게요’라고 하지만 다음이 항상 오리란 법도 없다.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
작별 의식은 고인을 기억에서 지워버린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중요한 질문을 되새기게 만든다.
“세상을 떠날 때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장모님의 유품 중 포도주잔 두 개를 챙겼다.<BR> /손관승 제공

장모님의 유품 중 포도주잔 두 개를 챙겼다.
/손관승 제공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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