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함에 대하여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비행기 비즈니스 좌석에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플라자 호텔, 입시를 마친 딸에게 청소년 시절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꿈꾸던 뉴욕 여행을 선물한 부모가 당연하다는 듯 고마워하지 않는 딸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는 지인의 말을 들었다.
이 오랜 고민의 레퍼토리를 가장 극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셰익스피어의 주인공 ‘리어왕’으로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뱀의 이빨보다 날카롭구나!”라는 말로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사랑과 미움이 얼마나 강력히 연결되어 있는지는 최근 부쩍 늘어난 이혼 예능의 법정 싸움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가장 맹렬한 안티 팬은 한때 그를 사랑했던 팬이다.
보너스를 받은 직원들의 입에서 “너무 적다!”란 불평이 아니라 “어차피 세금으로 나가는 건데 생색을 낸다!”는 말을 들은 후, 아예 보너스를 없앴다는 사장의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학비와 생활비를 후원한 아이가 고가 명품 패딩을 구입해 입고 다니는 걸 안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상했다는 기사를 읽으며 ‘기버’와 ‘테이커’의 당연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중년의 동창회에서 흰머리가 늘었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탈모인 친구의 심정은 어떨까. 분명 그는 남아 있는 친구의 흰 머리카락이 부러워 부아가 날 것이다.
왜 우리는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배려를 종종 자신의 당연한 권리인 듯 여길까. 데일 카네기는 ‘자기 관리론’에서 “감사는 교양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결실”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를 기대하지 않을 때 선물처럼 감사가 찾아오는 역설을 강조한다.
애타게 바라면 오히려 멀어지는 행복의 역설처럼 감사함 역시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기억할 때라야 찾아온다.
“나는 신발이 없어 우울했다.
거리에서 발이 없는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잃고 나서 후회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우리가 비범해지는 유일한 길은 매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매미와 귀뚜라미의 시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8월 말, 미루었던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전, 저녁 산책을 하던 공원에서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자지러지던 매미 소리가 무색하게 어느새 낭창낭창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문득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올랐다.
이 말은 본래 불교 용어로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뜻인데 최근에는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 더 많이 쓰인다.
인연에도 생로병사와 유효 기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살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게 ‘때’를 아는 것이다.
특히 시작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건 더 힘들다.
바다에는 밀물과 썰물이 몰아치는 ‘물때’가 있다.
노련한 어부는 물때를 잘 파악해, 물이 들어올 때 바다로 나가고, 빠지기 전에 돌아온다.
지혜로운 농부 역시 계절에 부는 바람의 밀도로 씨를 뿌리고 거둬야 할 때를 안다.
높은 산을 오르는 등반가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아가며 오를 때와, 물러서며 내려올 때를 알아차린다.
돌이켜보면 잘못된 결정으로 실패를 하는 경우보다 오히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해서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다.
삶은 이처럼 우리가 선택한 ‘찰나’의 총합이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살아내면 그뿐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주어진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더 나은 사람으로 깊어지는 것이다.
‘아이다 미쓰오’의 시 ‘생명의 뿌리’에는 “눈물을 참고 슬픔을 견뎠을 때/ 입으로 말하지 않고 고통을 견뎠을 때/ 변명을 하지 않고 잠자코 비판을 견뎠을 때/ 분노를 삭이고 굴욕을 견뎠을 때/ 당신의 눈빛은 깊어지고/ 생명의 뿌리는 깊어진다”는 문장이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김민기는 “고맙다, 할 만큼 다 했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박경리의 마지막 책 제목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이다.
홀가분한 고마움! 두 거장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을 새기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계속 배우고 싶다.

에세이의 맛

올여름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 근데 너는 ‘호호호’가 있는 것 같아!”라는 귀여운 문장에 꽂혀 영화감독 윤가은의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말에 “요즘 ‘아네스 바르다’랑 ‘켄 로치’ 영화를 다시 보고 있는데”라고 말하려다가 ‘뻥’이라며 “드라마 ‘펜트하우스’와 ‘결혼 작사 이혼 작곡’을 보는 재미로 에너지를 충전”한다는 말에선 빵 터졌다.
문득 ‘니체’와 ‘프루스트’를 다시 읽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주말이면 ‘반드시 끝내는 힘’ 같은 자기 계발서와 ‘나는 솔로’를 보며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 담는다고 말하는 내가 상상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못 봤겠지?” 하는 마음으로 빅맥에 콜라를 원샷하는 비만 클리닉 의사 같은 기분이랄까.전문가들의 사적인 에세이를 읽는 건 솔직함과 취향 때문이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재능. 그것은 바로 성실함이다”라는 문장에 꽂혀 읽은 김교석의 ‘아무튼 계속’에서 삶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생활 습관을 읽는 것도 흥미로웠다.
집안 살림 개념이 모든 게 정확한 위치에 반듯하게 정리된 막 ‘체크인 한 호텔방’이라니. 잘 닫히지 않는 창문은 열지 않고, 깜빡대는 전구는 꺼서 결국 어둠에 익숙해지는 나 같은 게으른 적응론자에게는 놀라운 일이다.
김영민 교수의 ‘가벼운 고백’을 읽다가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하는 것”이란 문장을 보고 8월 달력을 넘기려다 혼자 흠칫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산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산 그리고 산 넘어 산!”이란 말 앞에선, 대학만 가면, 취업만 하면 술술 풀릴 줄 알았던 청춘을 지나, 칠팔십이 돼도 살아보지 않은 나이는 영 모르겠다는 예감에 겸손을 떠올렸다.
“적성을 찾는다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종류의 괴로움을 찾는 것”이란 말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했다.
치킨에는 맥주, 햄버거에는 감자튀김처럼 여름은 에세이를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왜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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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하지현의 책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에서 정신과 진료실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근데 저 같은 환자는 처음이시죠?”라는 걸 보고 팩폭이라고 직감했다.
그의 전작 ‘그렇다면 정상입니다’ 역시 자신만 이상한 것 같다는 환자들의 말에 대한 세심한 답변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착하게 산 내게 왜! 왜 나만!’이란 비통함은 본인 얘기를 소설로 쓰면 책 한 권이라는 사람들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알고 보니 내 남친과 바람이 났다거나, 은퇴 후로 미뤘던 세계 일주를 계획하던 순간 병을 진단받거나, 대출받아 투자한 가게가 폭삭 망하는 불행 역시 안타깝지만 흔하다.
이런 불행은 내가 전생에 죄를 지어서도, 잘못을 해서도 아니다.
100만 유튜브는 눈에 띄어도, 구독자 100명 미만인 수십 만 유튜버가 자신의 채널을 접고 떠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실패담은 뉴스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정신 치료는 비극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 보편적 불행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말한 것 역시 그런 이유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면 편안해진다.
행복은 이처럼 나른하고 모호하다.
이에 비해 불행하면 온갖 생각이 머리를 두드리며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인간의 부정 편향은 바람에 흔들리는 풀숲에서도 맹수의 존재를 파악해야 생존할 수 있었던 우리 조상의 원시 뇌 때문인데, 99개의 선플 속에 달린 단 한 개의 악플이 우리를 불행으로 끌어당기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저자의 말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그냥’이란 대답이 헤어질 땐 구구절절 수많은 이유가 되어 나오는 것도 행복에 비해 또렷한 불행의 구체성 때문이다.
불행은 바다에 파도가 치듯 일어난다.
불행이 삶의 디폴트값이라 여기면 얻는 심리적 이득은 예상보다 크다.
자기 자신에게 지금 행복한가를 과도하게 묻는 사람은 오히려 행복 스트레스로 불행해지기 쉽다.
차가 망가졌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행복을 희귀하다고 믿으면 작은 행복에도 깊이 감사할 수 있다.

확신의 함정

나심 탈레브의 책 ‘블랙 스완’에는 칠면조 우화가 나온다.
아침이면 먹이를 받아먹는 칠면조가 있었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는 일상이었다.
아침에 모이를 준다는 칠면조의 생각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농장에서 1000일을 보낸 칠면조에게 1001일 되던 추수감사절 전날이 찾아왔다.
그날 농장주의 손에는 모이가 없었다.
대신 그는 칠면조의 모가지를 움켜잡았다.
칠면조의 운명을 결정한 건 평온했던 1000일이 아니라, 1001일이 되던 그 하루였다.
문학 포럼에서 음식이 상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습하고 더운 장소를 떠올리는데 시인의 입에서 냉장고라는 답이 바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내가 상한 음식을 가장 많이 꺼낸 곳이 냉장고라 내심 놀랐던 기억이 난다.
시인의 진짜 질문은 다음이었다.
왜 냉장고가 답이겠냐는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냉장고 안에선 음식이 썩지 않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냉장고 안이 안전할 거란 확신, 그것이 냉장고가 음식이 상하기 가장 쉬운 장소인 이유다.
1988년 옐로스톤의 궤멸적 화재는 확고한 기존 산불 방지 정책이 원인이었다.
번개에 의한 자연 발생적 산불까지 모두 진압한 탓에 산에 타기 쉬운 마른나무와 덤불이 너무 누적돼 오히려 불쏘시개가 된 것이다.
불은 무조건 꺼야 할까. 산에서 불길이 닥쳐 올 때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맞불을 놓으면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역설은 뭘 의미할까.‘심보르스카’는 노벨문학상 수락 연설문 ‘시인과 세계’에서 중요한 건 “나는 모르겠어!”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독재자, 광신자, 정치가의 특징이 당신이 모르는 걸 “나는 알고 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며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그 하나만으로 영원히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확신은 정치인과 선동가의 언어지 지성인의 언어가 아니다.
확신은 쉽게 부패한다.
우리가 기존 신념을 깨는 새로운 가설을 세우고, 끝없이 의심하고 실험하는 과학자와 시인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노잼 라이프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오래전 조카가 하는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 보여 다운받은 적이 있다.
시작하자마자 얻어터지고 게임이 바로 종료됐다.
게임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외워야 할 게 많았는데 이동, 공격, 방어, 아이템 사용 등 기본적 무기 사용 방법을 배워야 제대로 게임을 즐길 수 있었다.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게임에도 기초가 있어야 했다.

PT 수업을 받을 때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건 “웨이트 트레이닝처럼 재밌는 건 없다!”는 트레이너의 주장이었다.
공감이 전혀 안 되던 그 말이 이해된 건 지루한 근력 운동을 3개월 반복한 후, 두부 같던 팔뚝에 약간의 근육이 생긴 걸 느낀 다음부터다.
쾌락과 기쁨은 다르다.
재미의 기쁨은 즉각적일 때도 있지만 나중에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재미에도 진입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취미라고 말하는 독서나 음악, 미술 같은 것이 더 그렇다.
안 읽히던 책이 읽히고, 안 되던 연주가 되면서부터 우리는 점점 흥미를 느낀다.
재미있어 보이는 일의 이면에는 지루한 반복이 많다.
그래서 내가 재미에 대해 가장 공감하는 말은 ‘원래 사는 건 재미가 없다!’는 말이다.
번아웃된 환자들을 진료한 한 정신과 의사의 조언 중 기억에 남는 건, 소진되지 않고 일하려면 신나게 하지 말고 그냥 하라는 것이었다.
조회 수 경쟁이 벌어지면서 즉각적인 재미를 주는 도파민 중독이 최근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최고의 가속도를 추구하는 수퍼 카 제조 업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엔진이 아니라 ‘브레이크’라는 사실이다.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가 없다면 최고 속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도파민 과잉 시대일수록 우리는 스스로 멈추고 만족을 느끼는 능력이 필요하다.
삶을 여행에 비교하면 속도와 풍경 모두를 가지긴 힘들다.
빠른 속도는 여행의 밀도를 떨어뜨린다.
우리 뇌의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중추가 맞닿아 있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걸까. 나는 이것이 재밌게 살기 위해서 재미없는 걸 견디는 힘을 키워야 한다는 우리 몸의 충고처럼 느껴진다.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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