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일하는 책상이 혈전 등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AndreyPopov/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책상의 높이를 조정해 서서 일할 수 있는 책상이 있다.
서서 일하는 책상이 건강에 나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앉아있든 서 있는 장시간 부동의 자세를 취하는 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매튜 N. 아마디 호주 시드니대 찰스퍼킨스센터 연구원팀은 스탠딩 책상이 정맥류와 혈전 발생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논문을16일(현지시간) 국제학술지 ‘국제역학저널’에 발표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앉아서 보내는 좌식 생활은 현대인의 건강에 해가 되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의자에 오래 머무는 것도 질환이라는 의미로 ‘의자병’이라는 용어가 생겼을 정도다.
질병관리청의 2021년 자료 기준 한국인의 하루 평균 앉아있는 시간은 8.9시간이다.
이처럼 오랜 시간 앉아있으면 척추 주변 근육이 약해시면서 디스크질환이 발생할 수 있고 당뇨, 고혈압, 심혈관질환, 암 등 각종 질환의 유병률 또한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서서 일할 수 있는 책상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좌식 시간을 줄이기 위한 이 같은 방법이 ‘궁극적인 해독제’가 되지는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영국 바이오뱅크 건강기록 데이터베이스에 포함된 성인 8만3013명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스탠딩 책상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했다.
연구 대상자들은 전원 연구 시작 시점 심장병이 없었고, 연구 진행 과정에서는 손목에 웨어러블 장치를 착용해 움직임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연구팀은 2시간 이상 서 있는 상태에서 추가적으로 30분씩 더 서 있을 때마다 심부정맥 혈전증이나 정맥류와 같은 순환계 질환 발생 위험이 11% 증가한다는 점을 발견했다.
심부정맥 혈전증은 다리 안에 있는 정맥의 혈류 장애로 혈액이 정체되고 응고되면서 혈전(피떡)이 생기는 질환이고 정맥류는 정맥이 부풀어 올라 다리의 외관을 변형시키는 질환이다.
서서 일하는 책상이 뇌졸중, 심부전, 관상동맥 심장질환 등 심장질환의 발생 위험을 줄인다는 상관관계 또한확인되지 않았다.
연구팀은 “너무 오래 앉아있거나 반대로 오래 서 있어도 순환계 건강 측면에서 위험할 수 있다”며 “오래 서 있는다고 심혈관 건강이 개선되는 것도아니며 오히려 위험이 증가할 수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래 앉아있는 생활을 상쇄할만한 건강 전략은 무엇일까? 연구팀은 체계적인 운동과 수시로 움직이는 생활을 꼽았다.
연구팀은 “정기적으로 산책을 하고 계단을 이용하고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움직이라”며 “책상 앞에 앉아있든 서 있든 부동의 자세를 장시간 유지하는 것은 좋지 않으니 몸을 자주 움직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인생은 고통' 깨달음이 주는 것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몇 년 전부터 부쩍 많이 관심을 갖게 된 주제는 “인생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생노병사와 다양한 아픔과 상실의 고통을 겪고 그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어렸을 때에는 막연히 두렵고 우울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금씩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인생에는 다양한 고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생은 우울하고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닌지,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에게 행복과 따뜻함을 선물해주는 이들의 존재가 소중한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아프고 슬픈 일에 대해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되려 아픔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날들에 대해 더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묻게 되었다.
처음으로 고통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질병으로 인해 학업을 갑자기 중단해야 했던 때였다.
몸이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 때문에 계속 화가 나고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실재하는 괴로움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화가 안에서부터 나 자신을 소모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분노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까지 무탈하게 지낸 것이 더 기적에 가깝지만) 계속해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당연하고, (질병은 누구에게나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지만)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절대로 그런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믿음이 내 안에 있음을 발견했다.
“인생은 고통”, 삶에는 노력 여부와 상관 없이 찾아오는 다양한 고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애써 회피하고 있었거나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마치 나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그랬는데 새삼스럽게 “내가 사람이라니!!” 라고 하면서 충격을 받는 것이 이상하듯,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고통들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 되려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과 함께 나를 괴롭히던 분노가 사그라듦을 느꼈다.
삶에는 고통이 존재함을 알라고 말하던 많은 성현들의 가르침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의외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의 이로움에 대해 다루는 심리학 연구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몇 년 전부터 조금씩 관련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 그리고 일반적인 타인의 삶에서 고통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우울증, 재앙화 사고, 자기 자비 등 다양한 질문들을 함께 물었다.
그 결과 자신의 삶에 어느 정도 고통이 존재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우울증도 적고 재앙화 사고도 적게 하는 반면 자기 자신에게 따뜻할 줄 알고 현재에 더 집중하며 “감사”와 “기쁨”도 더 많이 느끼는 편임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일차적인 결과일 뿐이어서 전혀 확신할 수 없고 보완할 점도 많다.
그럼에도 생각할 여지를 많이 주는 결과임은 분명한 것 같다.
영화에서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대사가 나온다.
우리들의 작고 사소한 삶 따위, 실제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우리는 수 많은 우연과 의미 없음 속에서 작게 반짝이는 무언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은 꽃길이 아니고 영원히 중요한 것 또한 없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삶에서진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모두가 함께 울퉁불퉁한 길을 걷고 있기 때문에
더 곁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하고 서로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작은 기쁨에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짝이지 않는 삶이기에 더 작은 반짝임에도 우리 삶은 충분해질 수 있다.
거절은 언제나 아프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거절은 언제나 아프다.
특히 사회적 동물로 태어난 인간들의 경우 실험실 상에서 약 2분만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도 자존감이 뚝 떨어지고 행복감과 삶의 의미감 마저 떨어지는 등 사람으로부터 거절되는 경험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아픈 경험 중 하나이다.
그러서 그런지 사람 사이에서 겪는 슬픔과 좌절들에 대해 “상처 받았다”, “아프다” 같은 표현들을 흔히 쓰곤 한다.
이렇게 형태도 없는 거절이 아픈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 사랑과 인정은 행복과 건강에 있어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뼛속 깊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사랑과 인정의 수급이 불안정할지도 모른다는 신호들(사람들의 차가운 반응, 거절 등)은 마치 식량이 부족할 때와 같은 두려움, 또 배고픔과 같은 직접적인 고통을 불러오고 마는 것이다.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배고픔을 겪는 고통에 익숙해지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사랑과 인정에 대한 목마름 또한 익숙해지기 어려운 고통이다.
특히 내가 정말 중요하게 여겨서 잘 하고 싶은 일처럼, 나의 가치를 전부 걸고 있는 영역에서 거절당하고 무시하당하는 경험은 뼈아프다.
예컨대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참가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퍼포먼스를 보인 후 심사원으로부터 가차없는 비판을 들으면 보는 사람도 마음이 차갑게 식듯이, 대놓고 너는 별로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듯한 평가를 받으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자신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영역 뿐 아니라
실험실 상에서 시켜서 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가짜 테스트에서도 “네가 무능해 보여서 다른 참가자들이 너와 함께 과제를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피드백을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너지고 만다.
이렇게 타인으로부터의 차가운 평가란 언제나 무섭기 마련이다.
우리의 사회적 가치와 자존감은 상당부분 타인의 평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중요한만큼 좋은 평가를 받을 기회를 망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늘 과할 수 밖에 없다.
때로는 평가에 대한 과한 두려움이 새로운 도전을 막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은 경험들이 다들 한 두 가지 씩은 있을 것이다.
노래를 정말 좋아하지만
노래를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봐 노래 교실에 가지 못하는 어르신, 발레를 배워보고 싶지만 너무 못할까봐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지인 등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가상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꼼짝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연구자들의 경우 자신이 온 열정을 바쳐 한 연구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논문으로 내보이면서 평가받는 일이 일상이다.
지인 한 명은 학계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학생은 과제를 내주기 때문에 싫어하고 다른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비판하느라
바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미움 받는 것이 일상이라고 했다.
학계에 오래 계셨던 선생님께 이렇게 거절이나 비판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이 가능한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는지 질문한 적이 있다.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부정적 평가에 덜 흔들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선 점점 학자로서의 입지를 다지면서 다른 학자들의 부정적 평가가 영향력을 덜 발휘하게 되고 늘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덜해진다고 했다.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권력이란, 이렇게 타인의 평가에 ‘덜’ 영향 받을 수 있는 힘이다.
'지위가 올라가는 것=평가 받지 않을 힘=권력'인 셈이다.
또한 무엇보다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타인의 평가가 진짜 중요한 순간과 그렇지 않은 순간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예컨대 중요한 심사를 받는 순간에는 평가가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 예컨대 앞으로 볼 일 없는 사람이 안 좋은 얘기를 한 마디 했다고 하루 종일 기분이 나쁜 일은 덜 일어난다고 했다.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눈 앞의 상대방이 나를 좋게 봐줬으면, 내 가치를 높게 쳐줬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바람과 기대를 조금 내려놓고 정말 중요한 순간에만 노력하는 습관을 터득하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생각보다 어떤 사람의 평가가 내 삶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상황은 그렇게 많지 않다.
특히 흔한 쪽팔림들은 사실 내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미래가
바뀌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정말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좋은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평가의 상황이 그렇게 많지 않다면 늘상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할 필요 또한 없는 것이다.
어쩌면 두려움도 그냥 나의 습관일 뿐일지도 모른다.
가상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몸이 굳어 올 때, 이것이 진짜 두려워해야 할 상황인지 아니면 별 중요치 않은 상황인지 자문 것만으로도 우리는 불필요한 두려움으로부터 많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무기력함 이겨내는 것은 '작은 행동'
무기력과 자책의 늪에 빠지게 됐을 때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간단한 해법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생각도 걱정도 많지만 게으름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불안은 많지만 늘 언제나처럼 걱정만 할 뿐 딱히 변화를 위한 행동 같은 것은 하지 않아서 불안만 자꾸 쌓여가는 것이 문제였던 때가 있었다.
어차피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거라면 걱정도 하지 않으면 좋을텐데 우리의 마음이란 이상해서 잔뜩 지치고 무기력할 때에도, 어쩌면 그럴 때라서 더 "위험! 위험!" 이라는 경보를 울려대곤 한다.
실제로 불안과 무기력(낮은 통제감과 자기효능감, 낮은 에너지, 우울) 등은 함께 다니는 경향을 보인다.
원래대로라면 ①위험 지각 → ② 불안 → ③ 불안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위험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 시작 → ④ 위험 요소의 감소 → ⑤ 평온·불안 감소로 가는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마음이 힘들어서 어딘가 고장나 있을 때에는 평소처럼 위험은 지각하고 불안도 잔뜩 느끼지만 정작 가장 핵심적인 단계인 3)과 4)가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따라서 아무 것도 괜찮아지지 않곤 한다.
결과적으로 불안만 증폭되는 폭주기관차에 탄 셈이다.
그러면서 또 인간이라고 자기 인식 기능은 멀쩡해서 '불안하지만 무기력하기만 할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 너(나)는 이래서 안 되는 거라고, 역시 너(나)는 구제불능이라는 나쁜 말들만 내뱉는다.
그 과정에서 다시 내 힘으로 주변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통제감과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인 자기효능감만 더 낮아지고 우울감은 높아져서 더욱 무기력해지고 또 다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만 겪게 된다.
이렇게 불안과 무기력, 자책의 늪에 빠지게 되면 생각은 누구보다 열심히 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더 사는 게 괴로워지는 슬픔을 겪게 된다.
하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일수록 해법은 단순한 법이다.
이 끊이지 않는 불안과 무기력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 따져 보면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위험 요소와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은 항상 작은 것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아니면 인터넷 등에서 걱정의 내용과 관련된 정보들을 묻고 다닌다든가, 일단 몸 컨디션이라도 잘 챙겨두는 등의 작은 행동들이
그것들이다.
문제가 너무 크게 느껴져서 마음이 복잡하다면 당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행동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한다든가, 어지러운 방을 청소해본다든가, 친한 친구에게 상담해본다든가 하는 등의 작은 행동들도 문제 해결로 가는 첫 걸음이 되어 준다.
0.1 걸음이라도 0걸음보다는 훨씬 낫고, 시작은 항상 작은 법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자들이 추천하는 첫 걸음들도 자신의 생각에
대해 글로 써보기 같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결과적으로 게을러지는 데에는 첫 걸음을 너무 원대하게 딛으려 하는 것이 한 몫 한다.
예컨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그래서 남들보다 더 성과가 적은 완벽주의자들이 그런 경우다.
첫 걸음에 대해 엄격할수록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되고 헤어날 수 없는 불안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게 된다.
결국 아주 작아도 좋으니 0.001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실제로 위험 지각력이 뛰어나고, 그러다보니 평소 불안과 걱정이 많더라도(성격 특성 중 신경증이 높은 경우) 행동 조절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불안의 악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불안이 행복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적음) 연구 결과가 있었다.
불안과 걱정이 많더라도 즉각 행동할 수 있다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불안과 걱정의 영향력은 행동의 힘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다.
심호흡을 하거나 기지개를 켜는 것, 나는 오늘 무엇무엇을 해보고 싶다고 작게 기록해 보는 것 모두 작은 한 걸음들이 되어줄 것이다.
'셀프 도덕적 판단'의 위험성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요즘 심리학계에서 뜨거운 이슈라면 어떤 이슈에 '도덕/비도덕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현상이 그 중 하나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 인권, 임신중절 같은사실은 그냥 내가 낯설고 싫기 때문에 반대하는 이슈에 대해 성소수자 인권을 챙기기 시작하고, 임신중절을 허용하면 아이들이 동성애자가 되고, 여성들이 임신중절을 마구 하게 되면서 나라와 사회가 무너지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한편 이렇게 환경이 사람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과하게 인지하면서 동시에 '총기' 같은 무서운 물건이 아무 제약 없이 돌아다니는 데에 찬성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무엇이 도덕적이고 무엇이 비도덕적인지에 대한 기준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도 변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개인의 취향일 뿐 도덕/비도덕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들(예를 들어 흡연, 채식)이 현재에 와서는 비도덕적이거나 도덕적이라는 도덕 판단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도덕화 현상의 핵심은 시대와 지식 수준이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도덕법칙이 바뀌는 현상과 달리 자신의 주장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이 (또는 내집단이) 반대하는 무언가에 대해 '비도덕적'이라는 프레임을 열심히 씌우는 행위다.
조슈아 리 멜버른대의 심리학자 등에 의하면 어떤 이슈의 도덕화는 크게 두 가지 프로세스를 거쳐 나타난다.
하나는 감정, 특히 역겨움과 같은 강한 부적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해로움을 강조하는 것이다.
육식이나 임신중절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자극적이고 잔인한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한 가지 예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다양한 이슈에서 XX를 허용하면 학교와 가정이 무너지고 나아가 나라와 사회가 무너진다며 해로움을 강조하는 것도 흔히 나타난다.
연구 결과 이렇게 역겨움과 해로움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해당 이슈를 더 도덕 판단의 이슈로 여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이전에 별 생각 없던 이슈가 도덕의 옷을 입으면 '사실'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보이는 현상도 나타났다.
또한 도덕과 전혀 상관 없는 '자주', '시도하다' 같은 단어들에 역겨운 감정을 연결시키고 그 단어를 사용해서 어떤 인물의 행동을 묘사하면 그렇지 않았을 때에 비해 더 해당 인물을 비도덕적으로 여기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었다.
도덕판단의 대상이나 내용은 철저하게 이성의 영역이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감정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전쟁이나 학살이 일어나는 현장에서도 상대편을 '바퀴벌레' 라고 칭하는 등 비인간화 뿐 아니라 상대를 더럽고 해로운 존재로 프레이밍 하는 (비)도덕화 현상 또한 흔히 관찰할 수 있다.
또한 과거에 노예제 폐지에 관한 이야기가 오갈 때도노예제를 폐지하면 미개해서 도덕적 행동을 할 능력이 없는 유색인종들이 득세해서 백인 여성들을 강간할 것이고그래서 가정이 무너지고 나아가
나라와 사회가 무너질 것이라고 잔뜩 겁을 줬던 역사가 있다.
근래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COVID-19·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마스크 쓰기를 권장하면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고 마스크가 호흡곤란(?)을 유발하는 등의 이유로 마스크 쓰기를 권장하는 것은 비도덕적이라고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중 다수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병을 전파함으로써 노약자의 사망을 야기하는 것보다도 마스크 쓰기를 권하는 행동이 더 비도덕적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고 한다.
비슷하게 자동차 안전벨트를 법제화 할 때에도 안전벨트를 착용하게 하는 것은 자동차 사고로 다수가 사망하게 두는 것보다 비도덕적이라는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무엇이든지 도덕판단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자신(우리 편)은 상대방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고 정의롭다고 믿는 편이라는 발견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 2021년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사람들 또한 자신들이야 말로 정의의 편이라는 강한 신념을 보였다고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우리가 나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내리는 도덕판단은 자주 우리의 '감정'과 '동기'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꽤나 허술한 편이라는 것이겠다.
누군가를 조각조각 비판하기 전에 나의 행동 또한 세세히 따져본다면 조금이나마 오류를 줄일 수 있을까.
Rhee, J. J., Schein, C., & Bastian, B. (2019). The what, how, and why of moralization: A review of current definitions, methods, and evidence in moralization research. Social and Personality Psychology Compass, 13(12), e12511.
※필자소개
박진영.《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눈 앞에 보이는 괴롭힘을 방관하는 사람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나 성적 괴롭힘을 방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가 '제3자의 적극적개입'이다.
교실 한 구석에서 뻔히 잘못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으면서 본체만체 그냥 넘기는 것은 가해자에게 계속 폭력을 휘둘러도 된다고 용인하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반면 “그건 아니지. 선을 넘었네.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며 적극적으로 막거나교사나 경찰 등상황을 중재할 다른책임자에게 알리면 괴롭히는 상대에게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줄 수 있다.
성적 괴롭힘 또한 마찬가지다.
가정과학교, 직장, 혹은스포츠팀이나 화장실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희롱과 성추행뿐 아니라여성이 머리가 짧다거나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사상 검증을 하고 트롤링(인터넷상에서 고의적으로 공격적이거나 불쾌한 글을 올리는 행위)에 시달리게 하는 '성차별적 학대' 역시 사회에서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줘야만 근절할 수 있다.
그냥 "쟤네 왜 저러냐"며멀리서 구경하기보다 더욱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학대나 괴롭힘에 연루된가해자들은 가만히 놔두면 괜찮은 줄 알고 계속 하는 성향을 보인다.
가정폭력과성폭력도 이런 사건들이 일어날 때마다 '남자가 그럴 수도 있다'거나 오히려 피해자에게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라'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일수록 더 많이 일어난다.
만에 하나 괴롭힘이 나타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했더라면, 어떤 종류의 사회적 제지나 처벌이 가해졌다면 지금처럼 여성이나 특정 개인을 향한 묻지마식 폭력이 만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소견이다.
그만큼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폭력에 침묵하는 문화가 형성돼 작동하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기도 하다.
도둑질이나 살인 같은 강력범죄들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가해자를 제압하려 애쓰면서 성차별적 학대와 폭력에 왜 다같이 입을 다물게 된걸까.
최근 국제학술지 실험 사회심리학지에 소개된 미국의 심리학자 레이첼 굿윈의 연구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평소성희롱이나 성추행이 일어나는 상황을 봤을 때 반드시 가해자를 만류하고 신고하겠다고 응답하지만 실제 상황에선 가해자에 대적하거나 신고하는 비율이 훨씬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팀은 세 명이 대화를 나누는 상황을 만들고 미리 두 명의 참가자와 짜고 이 중 남성에게 상황을 아는 다른 여성 참가자에게성희롱 발언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예를 들어 여성 참가자가 자신의취미가 서핑이라고 말하면 남성 참가자가 "수영복 입은 섹시한 엉덩이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식이다.
이렇게 눈 앞에서 성희롱이 일어났을 때 상황을 모르는 나머지 한 명이가해
남성을 저지하고 연구진에게 성희롱이 발생했다고 알리는지가 연구팀의 관심사다.
사전 조사에서 64%에 이르는 사람들은누군가 성적 괴롭힘을 당하는 상황을 지켜본다면 적극적으로 가해자의 행동을 가로막고신고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실제 상황이 눈 앞에서 벌어지자 가해자의 행동을 문제삼거나 막아선 사람은 13%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이 자신만은다른 방관자들과는 다르며 자기만큼은 정의롭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상황이 닥치면 침묵을
선택한다는 씁쓸한 결과다.
실제로 이는 미국에서 학생 15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 드러난다.
이들 가운데 약 3만명은 학교에서 성적 괴롭힘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했지만 이 중 절반 이상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겨우 18%의 학생들만이 가해자를 막아섰다.
연구자들은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특히 침묵하거나 반대로 적극적으로 나서는지 살펴봤다.
목격자가 남성일 때보다 여성일 때 더 상황을 중재하고 신고할 확률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도덕적 용기'가 강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상황에 적극개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도덕적 용기는 위험성이큰 상황에서도 잘못된 일은 잘못된 것이라며 도덕적 행동을 관철하는 용기를 말한다.
가해자가 어른일 경우나 직장 상사인 경우처럼 불의와 맞서는 행위가 사회적 통념에 벗어나고 불이익이 돌아올 가능성이 큰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는 의지라고 보면 된다.
또다른 구성원들이 조직이미지가 나빠지니 문제를 조용히 덮고 넘어가자며 집단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에도 결연히 맞서는 용기도 포함한다.
성적 괴롭힘은 주로직장에서 ‘위계 질서’를 이용하기 쉽고수직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에서 많이 일어난다.
그래서 고발했을 때 불이익이나 집단 압력이 큰 편이다.
즉 성적 괴롭힘의 방조자가 되지 않으려면 단순히 성적 괴롭힘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에 더해투철한 용기와 강하고 구체적인 실천 의지가 뒷받침돼야 한다.
마음이 따듯하고 사람을 좋아하며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 흔히 착하고 원만한 사람들이 피해자를 위해 나설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평소 원만한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갈등을 피하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동기가 커서 피해자와의 관계뿐 아니라 가해자와의 관계까지 신경쓰는 경우가 많다.
평소 성격이 원만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성적
괴롭힘을 더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또 공정함이나 정의 같은 가치보다 ‘충성’, ‘의리’ 같은 가치를 더 중시하는 사람들 역시성적 괴롭힘을 막으려는 행동을 잘 보이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조직에서 '모난 돌' '내부 고발자'가 되는 일이 불의를 방조하는 것보다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여러 연구에서 성적 괴롭힘을 방관하는 행동과 관련을 보인 또 다른 특성은 ‘나르시시즘(자기애의 집착)’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등 자아가 비대한 편이다.
따라서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여기는 주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큰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다른 사람을 이용할 생각을 더 많이 한다.
이런 사람은 평소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착취하고 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데성희롱이나 성추행 역시 자기가할법 한, 그리나쁘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입장에 더 잘 이입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들은 여성을 바라볼 때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자기 만족을 위한 도구 정도로 보는 오만함 또한 장착하고
있는 편이다.
성범죄를 저질러도 원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도구를 내 마음대로 쓰는데 뭐가 잘못 됐냐는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인다.
그밖에도 무시를 당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상처를 입히고 심지어 살해까지 저지른 일부 범죄자들의 비대한자아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도덕성이란 올바른 말만 입에 담는 것보다 현실에서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도덕적행동을 관철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일어나는괴롭힘도 당하는 사람에게는 현실 속의 괴롭힘이며 심리적 피해도 현실이다.
당장은 사소해 보여도 가만히 두면 어느 순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점에서 작은 괴롭힘도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주변에 알리는 습관을 길러두자. 가해자의 변명에 함께
맞장구 치지 않아야 하는 태도도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도 "이런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며 단호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하자. “그게 바로폭력이야. 선을 넘었어. 하나도 재미있지 않아. 신고한다”를 기억하자.
자기 비하가 심하면 사랑도 멀어진다
어렸을 때 한 친구가 나에게 “너와 친해지고 싶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좋은 우정을 쌓아갔다면 좋았으련만 당시 나는 ‘왜 나랑 친해지려고 하지? 그냥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걸 거야’라며 먼저 내밀어진 손을 보지 못한 척 무시했다.
아마 그 때의 내 행동은 그 친구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용기를 내서 먼저 성큼 다가갔건만 본척만척했으니
말이다.
자신을 싫어한다는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사람들이 나랑 친해지고 싶어할 이유가 없으며 나는 그리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혼자 체념했던 것이었을뿐 그 친구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GIB 제공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 누군가 내게 호의를 보여오면 저게 진심일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많은 호의와 친절, 사랑을 받았음에도 저 사랑들은 진짜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고마움을 느끼거나 안정적인 관계로 발전해나가며 함께 성장하는 일들은 잘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이 있어도 그걸 보지 못한다면, 사랑을 사랑으로 받지
못한다면 사랑의 효과 또한 얻지 못하는 셈이다.
실제로 사랑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노력뿐 아니라 사랑을 받는 사람이 상대의 노력을 인식할 때,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할 때 비로소 효과를 보이게 된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일례로 자기 비하가 심하고 스스로에게 가혹한 편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의 연인이 얼마나 믿을만한 좋은 사람인지, 또 얼마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주는 지를 낮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Murray & Holmes, 1997). 따라서 비슷한 수준의 좋은 사람을 만났어도 사랑받고있다는 생각을 잘 하지 못하며 그 결과 관계만족도도 낮은 경향을 보인다.
또한 이들은 어떤 사람에게 깊이 빠졌다가 그 관계가 깨지게 되면 심하게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사람들을 쉽게 좋아하려하지 않으려 하는 편이다.
상대의 단점을 찾아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질 구실을 찾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어차피 처음부터 이건 사랑이 아니었다며, 그녀 또는 그는 자신을 사랑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이런 방어적인 행동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상대에게도 상처를 주어 실제로 관계를 악화시키는 등 자신의 예언을 현실로 만들곤 한다 (Murray et al., 2002).
반면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의 경우 능력이나 성격, 도덕성 등 중요한 부분에 있어 상대방을 실제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지각하는 긍정적 편향을 보인다.
따라서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다양한 관계에서 관계 만족도가 높은 경향을 보인다(Murray & Holmes, 1997).
상대방을 좋은 사람으로 높여주고 잘못이 있을 때 ‘너가 원래 그렇게 못되쳐먹은 사람일줄 알았다’며 날을 세우고 비판하기보다는 원래 좋은 사람이지만 지금 조금 힘든 거라며 응원하고 격려하기 때문에 실제로 상대가 더 좋은 사람이 될 가능성도 높다고 한다.
GIB 제공
또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은 방어적인 태도로 항상 헤어질 준비를 하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관계에 임하고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라고 한다.
본인이 온 마음을 다해 상대를 사랑하고 관계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만큼 상대방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이 관계를 중요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다 (Lemay & Clark, 2008). 반면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경우 본인이 방어적이고 관계에 적극적이지 않은만큼 상대 또한 별로 적극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라고 한다.
사랑은 실천하는만큼 보이는 셈이다.
결국 사랑을 주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을 받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인가보다.
실제로 나에게있어 너무나도 완벽한 사람을 만났어도 저런 사람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어진 사랑을 평가절하해 버리면 10이 주어져도 4밖에 못 받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못지 않게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의 최고를 끌어내고 받을 수
있는 ‘나의 태도’ 역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용기인 것 같다.
나중에 언젠가 상처받더라도 지금 최선을 다해 상대의 좋은 면을 바라보고 내밀어진 손을 덥썩 잡을 수 있는 용기, 적절한 때에 방패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면 우리는 조금 더 나은 관계들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 참고문헌Lemay, E. P., Jr., & Clark, M. S. (2008). How the head liberates the heart: Projection of communal responsiveness guides relationship promotion.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4, 647–671.Murray, S. L., & Holmes, J. G. (1997). A leap of faith? Positive illusions in romanticrelationships.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Bulletin, 23, 586–604.Murray, S. L., Rose, P., Bellavia, G. M., Holmes, J. G., & Kusche, A. G. (2002). When rejection stings: How self-esteem constrains relationship-enhancement processes.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83, 556–573.
※ 필자소개지뇽뇽.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적인 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지뇽뇽의 사회심리학 블로그’ (jinpark.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과학동아에 인기리 연재했던 심리학 이야기를 동아사이언스에 새롭게 연재할 계획이다.
최근 스스로를 돌보는 게 서툰 이들을 위해 <내 마음을 부탁해>를 썼다.
'유신론자 VS 무신론자', 누가 더 잔인할까
‘무신론자가 더 잔인하고 폭력적일까’라는 질문을 들었다고 하자. 최근 이슬람국가(IS)가 세계 각지에서벌이는 테러 뉴스를 떠올린 사람들은 ‘아니야, 유신론자가 더 잔인해’라며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슬람뿐만이 아니야. 과거 기독교인이 일으킨 십자군 전쟁을 떠올려봐’라며 쉴새 없이 근거를 나열할지도 모른다.
특정 시대나 조직, 개인을 예로 쉽게 답을 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역사를 뒤져보면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에 관계없이 부도덕한 행동을 한 사례를 무수히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부도덕한 행동을 저지른 사람을 직관적으로 ‘무신론자’로 생각한다는 연구가 제기됐다.
GIB 제공
미국 켄터키대와 영국 런던대, 뉴질랜드 웰링턴대 등 공동 연구팀은 종교 국가와 일반적인 세속 국가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연쇄살인, 소아납치 등 심각하게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을 무신론자로 판단하는 경향을 발견해 7일(현지시각) 학술지 ‘네이처 인간 행동’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무신론자에 대한 도덕적인 불신 정도를 13개국 총 3256명을 대상으로 측정했다.
미국과 네덜란드, 핀란드, 중국 등 동‧서양의 세속 국가는 물론 아랍에미리트나 인도 등 전통적인 종교 국가까지 나라별로 평균 162명이 실험에 참여했다.
연구팀은 먼저 ‘당신은 종교적으로 어디에 속합니까’, ‘당신은 종교를 얼마나 강하게 믿습니까. 0~100까지 숫자로 표현하세요’ 등의 설문을 통해 참가자 개개인의 종교 및 사회적 성향을 파악하고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 구분했다.
그런 다음 동물을 괴롭히는 아이 또는 살인이나, 강간 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어른의 사례를 묘사해 들려주고, 이들에게 종교가 있다고
보는지 물었다.
그 결과 핀란드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11개국에서 2배 이상의 많은 사람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무신론자로 판단했다.
연구팀은 심지어 설문을 통해 무신론자로 판별된 참가자 역시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무신론자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켄터키대 심리학과 윌 져바이스(논문 제1저자) 교수는 “종교 국가에 사는 강한 유신론자뿐만 아니라 일반국가에 사는 무신론자까지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며 “결국 사람들의 뇌리에는 종교가 없으면 더 폭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무신론자가 부도덕하다는 편견은 오랜 기간 종교의 영향이 축전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축의 시대 혹은 그 이전부터 동서양 모든 곳에서 끊임없이 주입된 종교관이 사람에게 각인된 결과라는 것이다.
※축의 시대 :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힌두교, 기독교등 종교와 철학이 태동한 시기를 말한다.
져바이스 교수는 “중국의 고대 사상가 묵자는 귀신에 대한 믿음이 도덕적 절제의 필수 요소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도 신 없이는 도덕을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며 “도덕성이 종교적 믿음에 좌우된다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통해 내려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종교와 도덕성을 연관 짓는 편견에 대해 그는 “무신론자를 무조건 나쁘다고 보는 시각은 경계해야 할 것”이라며 “인간의 도덕적 본능은 종교와 관계없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권력을 얻은 사람이 부도덕해지는 까닭은?
멀쩡하던 사람도 권력을 갖게 되면 공감능력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능력(조망수용능력) 등이 떨어지게 되며 ‘도덕성’ 또한 저하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실험실에서 잠깐 사람들에게 ‘리더’가 되었던 경험을 떠올려보라거나 또는 역할놀이를 통해서 상사-부하직원 관계를 만드는 것 만으로도 관찰되는 현상이다(Galinsky et al., 2006).
GIB 제공
그런데 ‘실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떨까? 특히 조직에서 불의가 벌어지고 있다면 이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간단히 생각해보면 조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을 가지고 있는 위치에 있는만큼 불의를 그냥 넘기지 않아야 할 거 같다.
그러지 않을 수 있는 ‘힘’도 있으니 하다못해 말단직원에 비해서는 조직에서 더 높은 도덕성을
보여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발견되는 것 같다.
아랫사람들이 고발해도 위에서 무마하는 경우들 말이다.
실제로는 어떨까?
●직급과 도덕성
최근 미국에서 정부 기관(NASA, 국방부, 법무부, 환경부 등)에서 일하는 약 1만1000명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1년 간 자기 조직 내부에서 벌어지는 불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행태에 대해 ‘고발’한 횟수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분석한 연구가 나왔다(Kennedy & Anderson, 2017).
그 결과 연구자들은 성별, 나이, 인종, 학력, 근무 기간 등과 상관 없이 ‘직위’가 높은 사람들(단순직에서 전문직, 매니저에 이르기까지 Level1에서 Level5까지 나누었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보고 횟수가 적은 경향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자들은 이번에는 실험을 통해서 팀에서 ‘리더’ 또는 ‘결정자’ 역할을 하게 된 사람들이 다른 구성원들이 비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때 이를 방관하는지 아니면 구성원들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낼지에 대해 살펴봤다.
이번에도 팀에서 결정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영향력이 적었던 사람들에 비해 조직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더 방관하는 경향을 보였다.
●조직은 곧 나이며 내가 곧 조직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까?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연구자들은 그 중 하나로 권력을 많이 갖게 될수록 ‘조직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 같이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날 가능성을 살펴보았다.
실제로 실험에서 결정자 역할을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자신이 조직에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이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기쁘다고 하는 등 정서적인 연결을 크게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조직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라고 느끼며 조직의 일을 자신의 일로 동일시하는 경향도 더 크게 보였다.
또한 이런 경향이 침묵하기로 한 이들의 결정을 일부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과 힘이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런만큼 조직의 잘잘못이 곧 자신의 잘잘못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더 쉬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직과 자신의 동일시가 조직에서 영향력이 큰 윗사람들보다 영향력이 작은 사람들이 더 불의를 많이 드러내고 고발하는 현상에 일부 기여한다는 것.
GIB 제공
●‘우리는 하나’가 불러오는 비도덕성
비슷하게 그룹에 ‘충성’을 맹세시키고 집단에의 소속이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가 되게 할수록, 즉 정체성 융합(identity fusion)이 일어날수록 집단이 '어떤 짓을 하든' 맹목적으로 지지하게 되며 때로는 ‘살인’ 같은 극단적인 행위도 예측한다는 발견들도 있었다(Swann et al., 2009).
한국 사회는 어떨까? 한국 사회의 많은 집단들이 ‘우리는 하나’라는 말 아래 무조건적 충성 등을 강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가족’같은 회사, 각종 연수, 수련회 등 프로페셔널 한 관계에서 굳이 ‘회식’, ‘술 먹고 망가지는 사적인 모습 노출’, ‘너도 결국 그렇고 그런 인간일뿐’ 등을 강요하는 것 또한 관계에 불필요한 감정을
개입시켜 이성적인 판단과 신념의 작동을 막는 장치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일례로 신고식 같은 ‘고통스러운 통과의례’가 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조직의 응집성을 더 높여준다는 연구들도 있었다(Xygalatas et al., 2013). 충성과 하나임을 강조하는 조직일수록 조직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대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일을 크게 벌이면 안된다며 함구하게 되지 않을까?
문화 관련 연구들에 의하면 한국사회는 심한 집단주의 사회로 구분된다(Diener, 2000). 개인 위에 집단이 군림하며 모두가 짜장면을 먹을 때 혼자 짬뽕을 주문하는 것이 눈총을 부를 일이 되는 사회다.
우리 가족, 친구 등 내집단 사람들에게는 잘 하지만 그렇지 않은 타인은 배척하거나 별로 신경쓰지 않는 정도가 큰 사회이다.
한국 사회의 도덕성 회복에는 '우리가 남이다', ‘집단 위에 사람있다’ 등 집단/주변의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문화, 개개인에게 힘을 싫어주는 개인주의와 개인성의 회복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리더의 도덕적 자질의 중요성
마지막으로, “도덕성이 밥 먹여주냐!”며 리더의 도덕적 자질을 간과하는 사고방식을 종종 보곤 한다.
또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알아서 책임감과 도덕성을 장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들도 종종 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갈린스키(Galinsky) 등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권력을 갖게 될수록 주변의 영향을 덜 받게 되고 ‘눈치’를 볼 필요성마저 줄어들어서 좀 더 자신의 ‘내면’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고 한다(Galinsky et al., 2008). 원래 관대했던 사람들은 더 관대해지지만 원래부터 이익을 중시했던 사람들은 더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게 되는 경향도 관찰된다고 한다.
거기에 높은 자리에 가게 될수록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조직의 불의를 무마하게 되는 등 잘못된 길에 빠지게 될 가능성들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리더의 인성 및 도덕성 같은 ‘내적 자질’이 더더욱 중요한 이유다.
※ 참고문헌Galinsky, A. D., Magee, J. C., Inesi, M. E., & Gruenfeld, D. H. (2006). Power and perspectivesnot taken. Psychological Science, 17, 1068-1074Kennedy, J. A., & Anderson, C. (2017). Hierarchical rank and principled dissent: How holding higher rank suppresses objection to unethical practices. Organizational Behavior and Human Decision Processes, 139, 30–49. doi: 10.1016/j.obhdp.2017.01.002Swann Jr, W. B., Gómez, Á., Seyle, D. C., Morales, J., & Huici, C. (2009). Identity fusion: the interplay of personal and social identities in extreme group behavior.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6, 995-1011.Xygalatas et al., (2013). Extreme rituals promote prosociality. Psychological Science, 0956797612472910.Diener, E. (2000). Subjective well-being: The science of happiness and a proposal for a national index. American Psychologist, 55, 34-43.Galinsky, A. D., Magee, J. C., Gruenfeld, D. H., Whitson, J. A., & Liljenquist, K. A. (2008). Power reduces the press of the situation: Implications for creativity, conformity, and dissonan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5, 1450-1466.
※ 필자소개지뇽뇽. 연세대에서 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적인 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고하는 ‘지뇽뇽의 사회심리학 블로그’ (jinpark.egloos.com)를 운영하고 있다.
과학동아에 인기리 연재했던 심리학 이야기를 동아사이언스에 새롭게 연재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한 주를 건강하게 보내는 심리학을 다룬 <심리학 일주일>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