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봉(國思峰)?동작구의 재발견!
산은 전통적으로 백성들의 일상생활이나 종교적 믿음까지 내포하고 있다.그래서인지 대체로 마을 뒷산이나 상징적 의미를 갖는 산에 대해
국사봉이란 지명이 붙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국사봉(國師峰),(國射峰),(國思峰),(國祠峰),(國士峰),(國司峯),(國寺峰),(國事峰),(國賜峰) 등 다양한 한자표기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 하거나,오랫동안 구전되어 내려오는 설화 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먼저
국사봉에서 스승 사(師)를 쓰는 경우 첫째-나라의 스승인 국사(國師)를 배출한 절이 있는 지역이나 고향, 국사(國師)와의
인연이 있는 산봉우리 등에 상징적으로 쓰는 경우, 둘째-민간신앙인 국사당신앙, 서낭당신앙 등에서 기원한 것으로 마을 주위에 있는 산봉우리나 사람들이 많이 넘나드는 고개마루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제사 등을 지내던 것에서 기원한 경우, 셋째-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의미로 선비 사(士) 혹은 스승 사(師)를 쓰는 경우 등으로 나타난다.
불교 국가였던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서는 나라의 스승으로 국사(國師)를 두었는데 이와 관련이 있는
국사봉(國師峰)으로는 충남 공주시 신 풍면 조평리에 있는
국사봉(國師峰),
경기 안성 보 개면과 삼죽면에 있는
국사봉(國師峰), 경북 의성군 에 있는
국사봉(國師峰)이 대표적이며, 인근 마을에서 많은 선비를 배출했다고 해서 붙여진 전북 김제에 있는
국사봉(國師峰)이나 순창군 쌍치 면의
국사봉(國師峰)등은 선비 사(士) 를 대신해서 쓰고 있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서낭당신이나 국사당신을 모시던 민간신앙에서 유래가 된
국사봉(國師峰)으로는 충북 진천,경북 영덕, 충남 예산 등에 있는
국사봉(國師峰)이 대표 적이며 전국적으로는 대부분의
국사봉(國師峰)은 민간신앙과
관련된 설화가 있슴을 볼수있다.
이 밖에도
국사봉(國師峰)으로 불리우는 봉우리들 중에는 왕자나 공주의 태를 묻은 곳 이라는 전설에 서 유래가 된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운학동에 있는
국사봉(國師峰)이나,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오자 영월에 살던 유씨 성을 가진 선비가 임금이 계신곳 을 바라보면 절한 곳이라는 전설에서 유래가 된 충 청북도 제천시에 있는
국사봉(國師峰) 등 다양한 전설을 가진
국사봉들이
국사봉(國師峰)으로 표기 되고 있다.
이런
국사봉들의 특징은 보통 스승 사(師)를 쓰는
국사봉(國師峰)
선비 사(士)를 쓰는
국사봉(國士峰) 사당 사(祠)를 쓰는
국사봉(國祠峰), 맡을 사(司)를 쓰는
국사봉(國司峯) 절 사(寺)를 쓰는
국사봉(國寺峰),지킬 수(守)를 쓰는 국수봉(國守峰)등 그 의미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한자를 표기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 처럼 지명으로 남아 있는
국사봉(國師峰)들은 나라의 스승에 임명되었던 국사(國師)를 기리거나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생각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민간신앙인 국사당이나 서낭당에서 그 유래가 시작 되고 있슴을 알 수 있다.
한편 생각
사(思)를 쓰는
국사봉(國思峰)의 경우엔 대부분이 나라를 생각한 선비들의 설화나 전설들을 담고 있다.
이러한 예로 성남시와 의왕시에 걸쳐 있는 청계산 자락에 있는
국사봉(國思峰)은 고려 말기에 청계산에 은거하던 조견(趙狷)이 조선의 개국공신이 된 형 조준(趙浚 )으로부터 새로운 나라의 조정에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이를 뿌리치고 날마다 이 봉우리에 올라가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였다는 데서 유래하고 있으며, 인천광역시 옹진군의 영흥면에 있는
국사봉(國思峰)의 경우에도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할
무렵 고려 왕족 일가가 영흥으로 피난을 와 멸망하 던 나라를 생각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에 존재하고 있는
국사봉에는 다양한 뜻이 담겨 있는데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던 산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강원도 춘천시에는 기록할 사(史)를 사용하는
국사봉(國史峰)이 있으며, 경기 도 동두천시에 있는
국사봉은 세조가 활을 쏜 곳이 라는 의미로 쏠 사(射)를 써서
국사봉(國射峰)이라 불리고 있고, 사령(使令)들이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가지고 넘었거나 혹은 나라에 대한 일을 의논한 곳 이라는 의미를 담은
일 사(事)를 쓴
국사봉(國事峰 ), 나라로 부터 하사를 받았다는 뜻으로
국사봉(國賜峰)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관악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국사봉은 과연
국사봉(國師峰)일까?
국사봉(國思峰)일까?정답은 모두 맞는 말이다.
그 이유로 관악구에 있는 삼성산의 유래와 삼막사의 유래를 찾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삼성산은 크게 고려말 불교계를 이끌던 지공.무학 .나옹 선사가 이곳 산에 올라가 각기 수도할 자리를 잡고 정진하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과, 신라때 원효,의상,윤필 등 세 고승이 수도하던 곳이라는 설이 존재 한다.
또한 통일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삼막사를 크게 지었 고,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한양천도에 즈음하여 이 절을 중수하고 한양땅이 복되기를 빌었다는 전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고려시대부터 이전 부터
국사봉(國師峰)이라 불렸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또한 관악산 줄기인 삼성산 일대에 남아 있는 무속 신앙 등을 살펴 볼 때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국사당(國師堂) 혹은 성황당[城隍堂]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국사봉(國師峰)이라고 불렀을 개연성 도 충분히 있다.
이 일대는 신점,신굿 등 오랫동안 무속신앙인들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서울시와 동작구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 처럼 양녕대군이 이 봉우리에 올라 나라를 생각하고 동생 인 세종을 걱정했다고 해서 붙여 졌다는
국사봉(國思峰)이라는 표현도 맞는 말이다.
비록 왕의 자리를 동생에게 물려준 뒤 대궐에서 쫓 겨났지만 세종이 형인 양녕대군을 위하는 마음과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종을 위하는 마음등이 조 선왕조 실록에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다만 무학대사가 사자암을 지었기 때문에 무학대사 를 국사로 보고
국사봉(國師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는 설은 쉽게 수긍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학대사는 왕의 스승이라는 왕사(王師 )의 역할을 했을 뿐 국사(國師)는 아니었기 때문에 국사로 보았다는 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위에 언급한것 처럼 삼성산의 기원이 되는 원효나 의상 혹은 삼막사를 지은 도선국사의 설화를 인용하는 것이 훨씬 개연성 있어 보인다.
그들은 이미 신라시대 국사(國師), 혹은 고려시대 국사(國師)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