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을 하고도 사과하기 꺼리는 성격 때문에 이혼 직전까지 간 독자 사연을 접한 적이 있다.
굳은 결심에도 변화가 어려워 고민이라는 그에게 수전 데이비스의 책 ‘감정이라는 무기’의 한 장면을 얘기했다.
남편과
심한 다툼 후, 화가 난 저자가 가출을 감행하는데, 결국 몇 시간 동안 자신에게 익숙한 집 근처만 맴돌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우울, 분노, 관계 때문에 힘들고 지칠 때,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이것을 ‘감정의 경직성’이라 부르는데, 사람은 믿으면 안 되고, 사람은 변하지 않고, 사과하면 상대가 나를 만만히 볼 것이란 생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습관이라는 익숙한 어제의 틀로 오늘의 낯선 곤란에 대처하는 것이다.
추상적인 결심만으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대신 구체적인 행동을 늘려야 한다.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 어렵다면, 하루 세 번 의식적으로 고맙다고 말하는 것부터 연습하는 식이다.
사실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사람은 고맙다는 말도 안 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무엇보다 고맙다는 말은 미안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역할도 한다.
책상 앞에 행동 강령을 직접 쓰고 매일 보는 ‘결심의 시각화’를 절대 유치하게 생각해선 곤란하다.
이는 우리의 삶이 관성적으로 빠지는 잘못된 행동을 제어하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신호 위반 때문에 경찰에게 잡힌 운전자가 다짜고짜 잘못 본 거라고 시치미를 떼며 화내는 것보다 나은 전략은 더위나 추위에 고생하는 경찰에게 일단 수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사과하고
앞으로 조심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실제 깔끔하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한 내 친구의 경우, 딱지 대신 주의 조치를 받으며 위기를 모면했다.
법원에서 잘못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 전략으로 예상보다 더 큰 형량을 받는 사례는 얼마나 흔한가. 제 아무리 화가 많은 사람도 타인이 자신의 입장을 헤아려주면 한결 말랑해진다.
상대의 진심 어린 사과 때문에 손해도 감수하는 게 인간 아닌가.
'비교지옥'을 끝내는 적당한 삶
이스털린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연봉이 늘어도 더 이상 행복감이 늘지 않는 현상으로 기준은 7만5000달러다.
그런데 최근 “행복의 한계 효용은 없고, 벌수록 행복하다”는 블룸버그 사설을 보니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일까. 갓 구운 케이크라도 첫입 이후 만족은 줄기 마련 아닌가. 집이나 연봉 등 익숙해지면 상한의 기준이 느는 게 사람 마음 아닌가. 그런 이유로 심리학자들은 쾌락 적응을 인간
행복의 장애물로 규정했다.
자료들을 읽다가 이스털린이 주목한 게 7만5000달러라는 절대적 소득이 아니라 상대적 가치라는 걸 깨달았다.
연봉 20만달러를 받아도 주위 모든 사람이 같은 돈을 벌면 행복감이 더 올라가진 않는단 뜻이다.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버는 게 행복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우리는 과거와 달리 학교 친구뿐 아니라 유명인이나 부자가 뭘 먹고, 입고, 타는지 알 수 있다.
경탄이 곧 상실로 이어지는 24시간 비교지옥에 갇힌 셈이다.
특히 한국처럼 유독 ‘포모(Fear Of Missing Out·고립공포증)’가 심한 곳에선 더 그렇다.
그래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덕목이 많지도 부족하지도 않음을 뜻하는 ‘적당과 적정’이다.
주식 투자자들의 시장 심리를 측정하는 ‘공포와 탐욕지수’라는 말이 있다.
꾸준히 수익률이 좋은 한 지인은 폭락장에도 꽤 초연하다.
떨어지는 공포와 올라가는 탐욕 모두를 견디는 힘은 공부로 채워진 중용과 자신만의
투자 철학이다.
예측 불가능한 주식 시장에서 최고의 매매법은 바닥에 사서 꼭지에 파는 게 아니다.
고수는 적정한 가격에 들어가 적당한 이익을 내고 나온다.
삶도 그렇다.
포만과 과식의 기준이 모두 다르듯 적당함은 오직 나만 알 수 있다.
혼자만의 자기 성찰이 중요한 이유다.
연결이 디폴트가 되면 단절이 더 중요해진다.
타인과의 비교가 바람 불 듯 일상인 세계에서
우리는 계속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나만의 적당과 적정을 익히면 휠지언정 꺾이진 않을 것이다.
비바람 속 갈대의 적정함이 중용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생은 매번 흔들리면서도 나만의 중심을 찾는 과정이다.
고통을 누르는 다른 고통
김연수의 단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는 실연의 상처가 너무 커서 치과 의사에게 통증이 있다고 거짓말한 후, 멀쩡한 생니를 뽑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생니를 뽑아내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운다.
그는 온 몸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가 떠난 뒤 남은 고통이 너무 컸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만성적 이명으로 고통 받던 선배가 흥미로운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명 때문에 늘 굶주린 모기와 함께 동거하는 음울한 기분이었는데 그만 대상포진에 걸렸다는 것이다.
몇 주를 지독히 아프고 난 후 생각하니, 몇
년간 자신을 괴롭히던 이명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곧장 이비인후과에 달려가 다시 검사를 한 선배는 의사에게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상포진의 부작용으로 이명이 나은 걸까?” 그가 한 말이 여전히 기억난다.
문득 고통이란 더 큰 고통으로만 잊히는 감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질적인 견비통은 찌르는 치통 때문에, 오랜 이명은 후벼 파는 편두통 때문에 묻히는 식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심한 복통을 느끼면서 두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고통이란 복수가 아닌 철저히 단수이며 가장 강한 것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중 어느 것이 더 아플까. 명확한 건 1기에서 4기까지 분류하는 암에 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이별이나 배신의 상처는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니를 뽑은 남자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치과 의사는 마취 없이 이를 뽑았는데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느냐고 반문한다.
사실 남자의 이는 멀쩡하지 않았다.
실연의 고통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뿌리부터 썩은 치아라 뽑아도 전혀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정신적인 고통에는 오로지 육체적 고통이라는 한 해독제만 있다”고 말했다.
마음이 복잡하고 우울할 때, 집 밖을 달리거나 집 안을 청소하는 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달리기는 숨이 찰수록, 집 안은 더러울수록 효과는 확실하다.
미루기의 심리
아침 일찍 일어날 방법이 없겠냐며 법륜 스님의 지혜를 구하는 불자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스님이 “그냥 일어나라”고 말하자, 불자의 “백약이 무효”라는 답이 돌아왔다.
스님이 다시 말하길, 자고 있는데 밖에서 “불이야!”라고 사이렌이 돌아가면 안 일어나겠냐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면 매일 수천만 원씩 준다고 하면 피곤해도 일어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즉 입으로는 일어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는 일어나기 싫어서 안 일어나는 게 문제의 본질이라고 했다.
하기 싫은 근력 운동을 한 지 두 달째 되던 날 “언제쯤 근력 운동이 좋아져요?”라고 묻는 내게 트레이너가 “회원님은 글 쓰는 게 좋으세요?”라고 반문해 놀랐다.
고개를 저으며 “20년 동안 한결같이 쓰기 싫은 마음으로
오늘도 쓰고 왔다”고 답했더니 그가 운동도 똑같다고 말했다.
하기 싫은 머리가 아니라 그냥 몸이 움직일 때까지 반복해 습관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술 끊어야 하는데, 운동해야 하는데, 공부해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익숙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며 미루기 일쑤다.
근력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의사에게 걷기 운동은 계속한다고 주장하거나, 동기
부여 영상을 보며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사람들의 이런 미루기 심리에 힘입어 자기 계발 시장은 점점 커진다.
어떤 분야든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동기가 아니라 기계적 반복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어 잘하는 비결로 ‘생활 문장 1000가지’를 암기하라고 말하던 내 친구처럼 말이다.
암기가 어떻게 이해냐고 반문하던 내게
계속 반복하면 영어의 구조가 몸에 새겨진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더위만 지나가면 하겠다고 말하지만 ‘할 수 있는 것’과 ‘실제 하는 것’은 다르다.
미루기 중독자를 위한 처방책을 쓴 작가 스콧 앨런은 자꾸 미루는 사람들에게 “힘든 일을 먼저 하라”고 충고한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 미루는 건 인생을 잔잔히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적당한 때란 영원히 오지 않는 법이다.
지금이 그때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