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간병인’ 찾으면서 머릿속엔 ‘가성비’가…



‘가족 같은 간병인’ 찾으면서 머릿속엔 ‘가성비’가…

[한겨레S] 소소의 간병일기
돌봄과 돈

엄마 병실 환자 돌보던 ‘사촌 언니’
간병인에서 ‘언니’로 발전한 관계
준무균실 회복 24시간 간병 필요
‘돌봄노동 값’ 숨 막히는 비용으로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병원의 아침은 오전 6시 반께부터 시작됐다.
누군가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이 깰락 말락 하면,
소리의 주인공은 여지없이 엄마 옆 침대를 사용하는 50대 초반 영미(가명)씨였다.
영미씨는 함께 병실을 사용하는 환자 네명 중 가장 에너지가 넘쳤다.
아니,
어쩌면 폐쇄병동의 ‘활력왕’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미씨가 침대에 누워 있는 경우는 거의 본 적 없다.
그는 대체로 병실과 복도를 왔다 갔다 하거나 ‘환자 순회’를 하며 수다를 떨고,
스트레칭을 했다.
림프종 말기인 영미씨는 지역에서 치료를 받다 더 이상 도리가 없다는 얘기에 서울행을 택했다.

유일한 혈육 간병…으쓱해진 엄마

영미씨는 함께 있는 보호자를 ‘사촌 언니’라고 했다.
부모,
배우자,
자식,
형제도 아닌 사촌 언니라니.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사연 없는 가족 없는 법,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영미씨의 사촌 언니는 영미씨를 살뜰히 살폈다.
그가 가는 곳엔 언제든 함께였다.
보호자용 식비가 아깝다며 편의점에서 햇반을 사와 자신이 집에서 만들어 온 반찬과 영미씨의 환자식으로 나온 반찬을 영미씨와 함께 나눠 먹었다.
영미씨의 사촌 언니가 나눠준 된장깻잎무침을 맛본 엄마가,
내게 레시피를 알아 오라고 할 정도였다.

잔소리도,
독려도 사촌 언니 몫이었다.
“영미야,
오늘 얼굴이 아주 좋다.
하나도 안 아파 보인다”,
“그래도 밥 먹어야지. 좀 더 먹어” 같은. 영미씨도 사촌 언니를 굉장히 의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언니,
우리 ○○이가 오늘 시험 봤는데,
잘 본 것 같대”,
“우리 딸 이쁘지?” 하며 신이 나 자랑했다.

영미씨가 아들과 잠깐 통화하러 자리를 비운 사이,
사촌 언니는 “사실 나는 간병인”이라고 털어놨다.
지역 병원에서부터 영미씨를 돌보다 퇴원 뒤에는 서로 집을 오가며 언니-동생으로 지냈고,
영미씨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울로 병원을 옮겼을 때 언니는 주저 없이 영미씨를 따라나섰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 300㎞ 이상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면서까지 영미씨와 함께한 이유에 대해 언니는 “정이 들었고,
짠해서”라고 했다.
왜 사촌 언니라고 했냐는 질문엔 “가족이 보호자로 있는 환자와 간병인이 보호자로 있는 환자를 의료진이 달리 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설마 의료진이 보호자 여부에 따라 환자를 다르게 대할까 싶었지만,
의료진의 부족함 없는 진료를 받고자 하는 환자의 마음을 병실에 있는 누구도 모를 리 없었다.

엄마가 지내는 병실의 환자 네명 중 간병인이나 보호자가 있는 이는 엄마와 영미씨,
두명이었다.
비슷한 병을 앓고 있기에 환자도 보호자도 쉬이 친해졌다.
나와 영미씨의 언니는 때때로 폐쇄병동 밖 출입이 금지된 환자들의 요청을 받아,
병원 내 편의점에서 음료수·햇반·라면 같은 물품을 ‘구매 대행’하기도 했다.
물론,
주문이 많은 어떤 날은 ‘내가 모두의 간병인도 아닌데,
왜 자꾸 시키나’ 하는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했다.

혼자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속이 상했던 건지,
보호자가 없는 환자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이려 했다.
아들만 둘인 ㄱ씨는 아들의 안부 전화에 “어유,
뭘 또 전화해”라며 혼잣말을 크게 했다.
ㄴ씨는 “아들이 반찬을 만들어 왔어요. 아들이 반찬을 잘 만들어”라고 하기도 했다.
병실엔 혼자 있지만 실은 혼자가 아니라는 자기 암시일 수도,
아니면 외로움을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발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유일하게 혈육으로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는 내게로 시선이 향했다.
“역시 딸이 있어야 해.” 아들만 둘인 ㄱ씨가 말하자 엄마는 “우리 딸들이 착해요”라며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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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없는 나,
늙으면 누가 돌봐주지?

엄마의 조혈모세포는 쉽게 채집되지 않았다.
보통 다발골수종은 재발이 잦기에 추가로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을 것에 대비해 넉넉하게 채집한다.
채집 기간이 길어지면서 엄마가 무균실에 들어가는 시점도 미뤄졌다.
그 말은,
내가 병동 밖으로 나오는 것도 연기된다는 뜻이었다.

그제를 어제로,
어제를 오늘로 ‘복사+붙여넣기’ 한 것 같은 병실 생활에서,
내 낙은 걸그룹 블랙핑크의 노래 ‘핑크 베놈’ 뮤직비디오를 보는 것이었다.
강렬한 영상과 사운드 뒤로 전사처럼 단단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하루에도 수십 차례 돌려 봤다.
그러다 어떤 날은 블랙핑크 멤버 제니에게 빠져서 한참 동안 제니에 대해서 탐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배우 배용준을 제외하고 스타 ‘덕질’을 해본 경험이 없는 내가 나이 마흔에 아이돌에 빠지다니,
신선했다.

‘덕질’하는 아이돌이 하나둘 늘어갈 때쯤,
세포 채집량이 채워졌다.
그 뒤 내 임무는 엄마가 무균실에서 나와 준무균실에서 회복할 때,
엄마를 돌볼 간병인을 구하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환자를 맡기는 일이니,
영미씨의 ‘사촌 언니’처럼 엄마를 ‘가족같이’ 돌봐줄 간병인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내 고민을 들은 한 간호사가 무균실에서 이제 막 나온 한 간병인을 두곤 괜찮은 분이라며 뜻을 물어보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그 간병인은 힘든 무균실 생활 탓에 당분간 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누군가를 24시간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갖기 어렵고,
최소한의 통잠도 자기 힘들다.
환자의 어두운 기운을 온몸으로 떠안으며 감정노동도 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가족 같은 간병인’이라는 바람 앞에 ‘가성비’라는 단어를 자동으로 떠올렸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돌봄노동 값’이 환자 보호자가 되니 숨 막히는 비용처럼 다가온 것이다.
돌봄과 가성비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웠다.

우리의 경우 아픈 엄마를 돌보는 건 주로 자식이고 간병인의 도움은 잠깐인데,
자식이 없는 나는 늙으면 누가 돌봐줄까. 병원 진료에 동행해주는 대행 서비스나 간병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테다.
모든 돌봄을 비용으로 처리할 내 미래가 눈앞에 그려져 문득 쓸쓸해졌다.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요즘 거의 매주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며 우스개로 조카들에게 세뇌를 시킨다.
“이모 늙어도 이모랑 놀아줘야 돼”,
“이모 늙으면 1년에 한번은 찾아와줘”라고. 조카들이 지금은 “나중에 이모한테 효도하겠다”며 어버이날에 내 카네이션도 만들지만 그 마음이 지속되기 어렵다는 걸 안다.
그래도 그 마음이 예뻐서 나중에 느낄 쓸쓸함은 조금 미뤄두기로 했다.

소소


힘내고 있는 엄마에게 힘내라고...나는 아차 싶었다

[한겨레S] 소소의 간병일기
극한 상황 말 한마디

3주간 ‘혼자 감금’ 무균실 치료 전
엄마와 나,
준무균실에서 2주
홀로 견디는 씩씩한 환자 보고
엄마 발끈하게 한 “힘 좀 내”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병원의 밤은 잠잠하면서도 분주하다.
밤 9시,
병실 불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환자와 보호자는 자리를 찾아가듯 자그마한 침대에 몸을 누인다.
낮에도 활동성이 거의 없는 병실은 불이 꺼지면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정물화 같다.
불 꺼진 병실과 환한 복도,
누워 있는 환자와 바쁜 의료진.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사는 듯했다.

낯선 환경에서 2주 동안 간병을 맡은 나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간호사는 약 3시간 간격으로 엄마의 상태를 점검했다.
혹여나 의미 있는 이야기가 나오진 않을까.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나는,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의료 카트가 다가오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흩어진 정신을 부여잡았다.
간이침대 벽면 쪽으로 엄마가 5주 동안 마실 생수 100통과 영양음료 60통,
옷가지 등을 놓았다.
어디 가서 짧은 걸로는 지지 않을 내 다리도 여기선 제대로 펼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2주 동안 지내야 했다.

밤새 2시간마다 소변량 체크

특히 약물 투여 등으로 몸에 이상 반응은 없는지 물을 포함한 식사량과 배변량을 체크해야 했는데,
팔에 주렁주렁 수액 등을 달고 있는 엄마는 혼자 화장실을 가기 어려워해 매번 “소소야,
엄마 화장실”을 나지막이 말했다.
밤 11시 소변량 350㎖,
새벽 2시 300㎖,
새벽 4시45분 200㎖,
아침 7시30분 350㎖…. 엄마가 화장실 가는 횟수만큼 나의 밤도 분주했다.
두 시간 이상 자기 어려워,
영아를 양육 중인 엄마들이 통잠을 자지 못하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변통에 엄마의 소변을 처음 받았을 때,
나는 꽤 당황스러웠다.
다리 사이로 소변통을 제대로 갖다 대지 못하거나,
엄마가 다리에 힘을 세게 주면 고무 패킹은 여지없이 소변통과 분리돼 화장실 바닥에 떨어졌다.
엄마가 멈추지 못한 소변은 내 손과 엄마 환자복,
속옷을 금세 적셨다.
“괜찮아. 얼른 환자복이랑 새 속옷 가지고 올게” 하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수액 탓인지 음수 탓인지,
엄마는 하루에 많게는 서너 차례 환자복을 갈아입어야 했다.
2~3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을 찾는 엄마의 부름이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엄마는 2인용 준무균실로 입원했다.
무균실에 들어가기 전,
조혈모세포 채집 단계에서 머무는 병실이었다.
맞은편에 성인 여성 환자 4인,
성인 남성 환자 4인,
소아·청소년 환자 다인이 쓸 수 있는 준무균실이 모두 4개 있었지만,
이미 병실이 다 차 2인실로 배정받았다.
일반 병실과 달리 각각의 침대에는 천 커튼 앞쪽으로 비닐 커튼이 한겹 더 쳐져 있었다.
면역력 떨어진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맨송맨송한 머리가 낯설 법도 한데,
엄마는 암 환자가 쓰는 두건이 거추장스러운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벗어버렸다.
비슷한 병명을 가진 환자 대부분 민머리여서,
용기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민머리를 과감히 드러낸 채,
20~30m밖에 안 되는 병실 복도를 하루에도 여러 차례 왕복했다.
병실 복도를 걸으며 마주하는 다른 환자와 간병인들과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척추 골절로 작은 키가 더 줄어들었지만,
비슷한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엄마의 뒷모습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엄마와 함께 병실 복도를 걷다 보면,
복도 양쪽으로 문이 꼭 닫힌 병실이 4개 있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 환자들이 머무는 ‘무균실’이다.
병실 문이 열리는 건 식사 때,
의료진이 진료를 볼 때뿐이었다.
물론 문이 열린다고 해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문밖으로 나올 수 있는 건 아니다.
직원이 식판을 병실 문 앞에 두면,
문을 빼꼼히 연 보호자가 식판을 가지고 들어갔다가 식사를 마친 뒤 문 앞에 내놓는 게 전부다.

복도를 걸으며 지나치는 찰나에,
병실 문 작은 창으로 들여다본 무균실 안 풍경은 불 꺼진 병실보다 더 미동이 없었다.
약 3주 동안 꼼짝없이 병실 안에서 ‘감금’ 생활을 해야 하는 이들의 숨구멍이 무엇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암 진단 뒤 처음 화낸 엄마

엄마가 입원한 지 하루 뒤 맞은편 침대에 40대 여성 환자 한명이 이사 왔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마치고 회복을 위해 준무균실로 옮겨 온 환자였다.
림프종 환자였던 그는 식사를 전혀 하지 못했고,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침대 옆 간이 용변기에 용변을 봐야 할 정도로 거동도 하지 못했다.
그를 보곤,
엄마는 무균실에 홀로 들어가는 것을 걱정했다.

“어휴… 혼자 못해요,
못해. 무균실에서 얼마나 힘든데. 보호자도 힘들어! 나도 원래 무균실엔 힘들어서 못 들어간다고 했는데,
워낙 환자 상태가 안 좋고 간병할 가족도 없다고 부탁해서 어쩔 수 없이 들어갔어. 무균실은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 이웃 환자가 검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간병인이 호들갑을 떨며 엄마에게 무균실 상황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엄마의 미간 주름이 더 진해졌다.

“엄마가 무균실에 보호자 없이 들어가는 걸 너무 걱정하는데,
혼자 들어가도 잘 치료받고 나올 수 있다고 얘기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이때 믿을 건 간호사밖에 없었다.
간호사의 말을 듣고서야 엄마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이틀 뒤 또다른 환자의 2인실 입원으로 엄마는 준무균 4인실로 옮겼다.
4인실엔 엄마처럼 다발골수종 환자 2명과,
림프종 환자 1명이 있었다.
다발골수종 환자는 조혈모세포 이식을 마친 목사님과 이식을 앞둔 식당 사장님이었고,
림프종 환자는 지역 대학병원으로부터 더는 할 수 있는 치료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희망을 좇아 서울로 온 이였다.

“나는 4기 진단받았어요. 병원에서 여명이 3개월이라고 했는데,
이미 3개월이 지났어요. 무당이 광복절만 잘 버티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니,
진짜 광복절 지나니까 밥도 잘 먹게 되고 그렇더라고요. 난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난 안 죽을 것 같아요.” 림프종 환자가 말했다.

너무 씩씩해서 전혀 아픈 사람 같지 않은 그와 무균실에 홀로 들어갔다가 또 홀로 회복하고 있는 목사님을 보니,
상태가 훨씬 양호하고 딸과 함께 있는데도 더 인상을 펴지 못하는 엄마가 비교됐다.

“엄마,
저분들도 저렇게 씩씩하게 지내고 있잖아. 엄마도 힘 좀 내”라고 한마디 했는데,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뒤 처음으로 화를 냈다.
“나도 힘내고 있어!!”라고. 아차! 싶었다.


항암·무균·고립…엄마와 폐쇄병동 문턱을 넘었다

[한겨레S] 소소의 간병일기
골수이식
골수 뽑아내 치료한 뒤 다시 주입
병실 크기 따라 보호자 동반 가능
엄마는 ‘환자 1인 무균실’ 배정
전단계 ‘준무균실’에서 2주 간병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일러스트레이션 장선환

드디어 엄마의 입원 날짜가 결정됐다.
10일 뒤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볶은 것처럼 결정돼도 되나. “네? 10일 뒤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이달 말께 엄마가 입원할 수도 있겠다는 말을 미리 듣긴 했지만,
적어도 2주 이상의 준비 시간은 있을 줄 알았다.

그마저도 입원 ‘예정’이지,
‘확정’은 아니었다.
담당 간호사는 입원 당일 2~3일 전에야 정확한 입원 날짜와 시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엄마는 무균실에서 자가 조혈모세포(골수)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현재 무균실에서 치료받고 있는 환자의 상태에 따라 입원 날짜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른 환자의 상태가 좋아서 빨리 퇴원하면 엄마의 입원이 당겨지고,
그렇지 않으면 미뤄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입원 예정일에 마감해야 할 회사 업무가 있던 터라,
상사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그나마 입원 가능성을 미리 말해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몸이 가벼운’ 내가 간병

입원 전 마지막 골수 검사에서 엄마의 상태를 추정하는 암세포 수치는 0.3%로 나왔다.
골수에서 골수종 세포가 차지하는 비율이 0.3%라는 뜻이다.
다발골수종은 면역세포가 어떤 이유로 변형돼 종양(암)으로 자라는 병인데,
이 변형된 암세포는 엠(M)단백이라는 비정상 항체를 만들어내 신장·골수 등을 공격한다.

담당 주치의는 항암치료 뒤 골수종 세포 수치가 5% 미만이면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을 할 수 있고,
10% 미만이라도 때에 따라서 이식하기도 한다고 했다.
엄마의 경우엔 초기 골수 검사에서 이 수치가 90%를 넘었는데,
4차 항암 만에 0%대라니,
“할렐루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알라”,
온갖 종교의 감사 언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혈액·소변에서 엠단백 수치도 낮아 기대했는데 예상 밖으로 훨씬 좋네요.”

“예상보다 더 좋다”는 주치의의 말은 엄마의 어깨를 토닥였다.

앞으로 엄마는 5주가량 폐쇄병동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 된다.
치료 전반부엔 준무균실에서 10여일 동안 조혈모세포를 채집한다.
중반부는 무균실에서 2주 동안 강력한 항암제를 투입한 다음 몸속의 암세포를 최대한 없애고,
채집한 골수를 다시 혈액에 주입한다.
후반부는 다시 준무균실로 나와 10여일간 회복하는 과정이다.

준무균실은 보호자나 간병인이 함께 들어갈 수 있고,
무균실은 병실 크기에 따라 환자 혼자 입실하거나 보호자·간병인과 함께 한다.
준무균실 입원 시 병실 밖 복도까지 오갈 수 있지만,
무균실은 치료 기간 동안 환자·보호자 모두 병실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무균실 치료 과정 동안 환자의 면역력이 0에 가깝게 떨어지기 때문에 의료진도 대면 진료를 최소화한다.
환자는 동료 환자도 없이 혼자 혹은 보호자와 함께 고립된 시간을 버텨야 한다.
물론,
준무균실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출입할 수 있는 복도라고 해봐야 일직선으로 20~3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간병할 수 있는 사람은 몸이 가벼운 나밖에 없었다.
여동생들은 어린 자녀가 있었고,
남동생은 휴가 내기 쉽지 않은 일을 할뿐더러 엄마 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일을 맡기는 게 껄끄러웠다.
내가 여름휴가와 연차를 더해 2주 휴가를 내기로 했다.
입원 예정 기간 5주 중 엄마가 원하는 기간에 내가 함께 병원에 들어가고,
나머지 기간엔 간병인을 고용할 계획이었다.
2주 휴가를 낼 수 있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엄마는 더 긴 시간 간병인과 함께하거나,
보호자 중 누군가는 회사를 그만둬야 할 수도 있었다.

여동생은 내게,
나는 남편에게 “미안해”

“준무균실 입원 기간엔 환자 체력이 상대적으로 좋지만,
보호자가 환자를 도울 일이 많을 거예요. 무균실 입원 기간엔 보호자가 환자를 도울 일은 적지만,
이식으로 환자의 몸 상태가 일시적으로 나빠지는데다 고립감 때문에 환자가 힘들어할 수도 있어요.”

보호자 입실 기간을 고민하는 내게 간호사가 입원 시 마주할 상황을 설명했다.
엄마는 고민 끝에 무균실에 내가 함께 들어가길 원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확정된 건 아니었다.
먼저 치료를 받고 있는 무균실 입원 환자의 상태에 따라 엄마가 입원할 수 있는 무균실 크기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환자 혼자 입실하는 1인 무균실에 배정되면 나는 무균실 입실 전인 전반부를 함께하고,
보호자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2인 무균실에 배정되면 입원 중반부를 함께하기로 했다.
당장 간병하러 들어가야 하는 나로서는 휴가를 언제부터 내야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답답했다.
병원은 입원 5일 정도를 남기고서 1인 무균실에 배정됐다고 알려왔다.
무균실에서 혼자 싸워야 한다는 얘기에 엄마가 불안해했다.
그렇다고 2인 무균실 자리가 날 때까지 치료를 미룰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드디어 입원 당일,
입원 시 필요한 물품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골수 이식 환자는 면역력이 떨어지고,
피부가 예민해지기 때문에 준비 물품이 까다롭다.
음료도 착즙 음료는 안 되고 멸균 음료만 가능했다.
생수도 여러차례 나눠 마시지 않도록 200~300㎖ 저용량으로 대량 구입해야 했다.
부드러운 칫솔,
멸균 장갑,
뽑아 쓰는 키친타월,
칫솔 소독기구,
상표를 제거한 면 손수건,
일회용 멸균 팬티 등을 캐리어에 담았다.
간병 기간 마음을 넉넉하게 먹으려,
몸을 이완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옷으로 골랐다.
엄마 짐과 내 짐을 합쳤더니 캐리어 2개,
큰 쇼핑 가방 하나가 나왔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
이상하게 두렵거나 무섭진 않았다.
엄마의 파르스름한 두상도 자꾸 보니 낯설지 않고 예뻤다.
엄마의 머리를 쓸어내리면서 “나는 뒤통수가 납작한데,
엄마는 동그랗네. 서양인 두상이네”라고 마음을 달랬다.
엄마가 “그래?” 하고 조금 안도하며,
모자를 썼다.

이윽고 오후 4시,
입원 시각이 다가왔다.
폐쇄병동이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 10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두걸음 앞에 유리문이 있었다.
무균,
고립,
폐쇄…. 그동안 막연히 생각해왔던 낱말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호출벨을 눌러 엄마 이름을 말하자 유리문이 열렸다.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적외선 소독기에서 보호자용 가운과 실내화를 꺼내 착용했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남편과 여동생,
조카와 인사를 나눴다.
여동생이 내게 “언니,
고맙고 미안해”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에게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했다.
서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인사를 나누고,
주먹을 쥔 채 파이팅 자세를 했다.
엄마와 함께할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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