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은 父가 했는데” 눈가린채 화형대에 선 딸…그녀는 끝까지 울음 참았다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이원율 기자 

[139 신화편. 트로이 전쟁③]

출정 전 바람은 좀처럼 불지 않고

‘거만’ 아가멤논에게 원인 있었다

“딸 바쳐야 문제 풀린다” 예언까지

끝끝내…그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일부 장면),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일부 장면),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편집자 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후암동 미술관〉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보듯 감상하세요. 처음부터 정주행하셔도 좋고, 시즌별로 봐도 좋고, 각 이야기를 단편처럼 읽으셔도 좋습니다.
엄선한 예술가의 풍부한 예술 작품으로 몰입을 돕겠습니다.
각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이번 글은 원고지 49매 가량입니다.
 일반 신문지의 두 면 정도 분량입니다.
읽기에 보통 15~20분 정도가 걸릴 수 있다고 합니다.
구독, 저장, 댓글을 활용한 스크랩 등으로 두고두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독자분들께는 늘 경의와 감사의 마음뿐입니다.

지난 이야기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데리고 본국으로 야반도주한다.
갑작스럽게 아내를 잃은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트로이를 치기 위한 그리스 연합군을 꾸린다.
총사령관은 당시 가장 국력이 센 국가 중 하나였던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이 맡는다.
인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아킬레우스, 가장 꾀가 많은 오디세우스, 이 밖에도 다양한 영웅과 10만~12만명에 이르는 병사가 합류한다.
이제 배에 올라 출정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바람이 좀처럼 불지 않았다.
순풍은커녕 미풍조차 스치지 않으니 배가 움직이질 않았다.
초조해진 아가멤논은 예언자 칼카스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러자 그가 하는 말이….

<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트로이 전쟁②편 > 요약

딸은 화형을 당했다

아놀드 호우브라켄(Arnold Houbraken),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710~1719, 코퍼에 유채 등, 47.5x59.5cm, Rijksmuseum Twenthe

아놀드 호우브라켄(Arnold Houbraken),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710~1719, 코퍼에 유채 등, 47.5x59.5cm, Rijksmuseum Twenthe

“아버지. 그럼…. 트로이와의 전쟁에서 꼭 승리하시기를 바랄게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딸 이피게네이아의 말을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차마 보지 못했다.
두 팔 묶인 그녀가 장작 위 화염에 휩싸여 죽어가는 것을.

아가멤논, 그리고 그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네 자녀 중 맏이인 이피게네이아를 가장 사랑했다.
 그녀는 예쁜 눈웃음만큼 마음씨도 고왔다.
국사(國事)를 챙기는 부모를 알게 모르게 뒷바라지하고, 그 사이 두 여동생과 어린 남동생도 정성껏 보살필 줄 알았다.
그렇기에 아가멤논도 아가멤논이지만,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 또한 이피게네이아를 딸 이상 존재로 보고 있었다.
삶의 이유이자, 인생에서 잃어선 안 될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이피게네이아가 지금, 부모 앞에서 화형을 당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턱을 떨군 채.

그녀는 고작 흰 옷 한 벌만 걸치고 있었다.
얇은 천은 조금씩 잿가루가 돼 하늘 위, 바다 밑으로 흩날렸다.
긴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깔끔하게 묶은 그녀는 그 자체로 성녀 같았다.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눈이 가려진 이피게네이아가 신을 위한 제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BR> 그녀는 죽음 앞에서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린다.<BR>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근육질의 남성은 장작에 불을 붙이기에 여념 없다.<BR>
빨간색 천을 두른 남성은 아버지 아가멤논, 주저앉은 채 기도하는 여성은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일 것으로 보인다.<BR> 구름 위에선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사슴과 함께 이를 내려다보고 있다.<BR>

<프랑수아 페리에,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32~1633, 캔버스에 유채, 213x154cm, 디종 미술관> 눈이 가려진 이피게네이아가 신을 위한 제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녀는 죽음 앞에서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린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근육질의 남성은 장작에 불을 붙이기에 여념 없다.
빨간색 천을 두른 남성은 아버지 아가멤논, 주저앉은 채 기도하는 여성은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일 것으로 보인다.
구름 위에선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가 사슴과 함께 이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안녕히….”

이피게네이아가 고개를 들어 부모를 봤다.
아가멤논도 더는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그 틈으로 물기가 가득 맺혔다.

“당신이 잘못을 했으면 당신이 벌을 받아야지요!”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남편 아가멤논의 옷깃을 잡고 매달렸다.
 “왜 당신 때문에 우리 딸이 죽어야 해요? 대체 왜?” 그녀는 끝없이 절규하다 못해 혼절할 것으로 보였다.
“나도 알지만… 신께서 이걸 바란다고 하지 않소. 이렇게 해야만 바람을 다시 보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소.” 아가멤논이 말했다.
단호한 투였지만, 그 안에는 슬픔이 잔뜩 묻어있었다.
이피게네이아는 이제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레오나에르트 브라머르,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23년경, 코퍼에 유채, 28x38cm, 프린슨호프

레오나에르트 브라머르,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623년경, 코퍼에 유채, 28x38cm, 프린슨호프

그리스 연합군의 모든 장수도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들 또한 한숨만 거듭 내쉬었다.

알고 보니 문제는 아가멤논에게 있었다.
 트로이 정벌을 위해 나선 그리스 연합군이 항구에 하세월 발이 묶인 이유는 오직 그의 실수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뭘 잘못했기에 신이 앞길을 막았던 것일까. 얼마나 잘못했기에 가장 사랑하는 딸을 제물로 바쳐야 했을까.

섬뜩한 예언의 이유

폼페오 바토니, 다이애나(아르테미스)와 큐피드(에로스), 1761, 캔버스에 유채, 124.5x172.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폼페오 바토니, 다이애나(아르테미스)와 큐피드(에로스), 1761, 캔버스에 유채, 124.5x172.7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의식이 있기 얼마 전.

아가멤논은 아르고스 출신의 유명한 예언자 칼카스와 마주했다.
 
트로이를 치기 위해 출항해야 하는 지금, 갑자기 바람이 멈춘 데 대한 이유를 알기 위한 행보였다.

“짚이는 게 있으면 어서 말해보시게.”

아가멤논이 칼카스에게 따지듯 물었다.
흰머리의 칼카스는 당시 제우스 신전에 있었다.
그리스 연합군이 출정에 앞서 제사를 지냈던 그곳이었다.
칼카스는 벽 틈으로 기어 나온 뱀 한 마리를 보고 있었다.
바깥세상을 본 녀석은 꿀렁거리며 눈앞 나무를 휘감았다.
곧장 위로 올라갔다.
가지 위 걸린 새 둥지 앞에서 멈추더니, 이내 아가리를 벌렸다.
아기 새를 한 마리, 두 마리… 그렇게 아홉 마리를 먹어 치운 후에야 어미 새를 집어삼켰다.

“그리스 연합군이 이기기는 하겠지만, 아홉 해가 지난 후에야 트로이를 겨우 점령하겠소이다.

“아니, 그보다도… 지금 당장 왜 바람 한 줄기 불지 않는지, 점령은커녕 나설 수조차 없게 된 이유가 궁금하오. 바다의 신 포세이돈, 아니면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의 몽니인가?”

아가멤논은 칼카스를 거듭 보챘다.
칼카스는 그제야 하늘을 길게 올려다봤다.
그는 끝없이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들었다.
“두 분 다 아니오. 이건,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분노라오.

가스통 카지미르 생 피에르, 다이애나(아르테미스) 더 헌트리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96.2x129cm, 개인소장

가스통 카지미르 생 피에르, 다이애나(아르테미스) 더 헌트리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96.2x129cm, 개인소장

아. 아가멤논은 칼카스의 말을 듣자마자 탄식했다.
짚이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을 무렵에 행한 사냥 중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날 아가멤논은 큰 사슴 한 마리를 봤다.

녀석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빠르게 도망쳤다.
아가멤논이 올라탄 근육질 말조차 뒤쫓기 버거워할 지경이었다.
아가멤논은 오기가 생겼다.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끝내 사슴 목덜미에 화살촉을 꽂을 수 있었다.
암사슴은 가쁜 숨을 내쉬며 죽어갔다.
녀석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아르테미스도 이렇게까지 활을 잘 쏘지는 못할 테요!” 그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때 그 일이…

아가멤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와 관련해선 아가멤논이 죽인 사슴이 아르테미스가 각별하게 아낀 동물이었다는 전승, 아가멤논이 사냥터로 누빈 숲 자체가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선 전혀 다른 이유가 나오기도 한다.
한참 전 과거, 이피게네이아가 태어난 해. 기쁨에 겨운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에게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바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하지만 말만 던진 후 이행을 차일피일 미뤘고,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아르테미스가 열매가 없다면 이피게네이아라도 바치라고 요구했다는 설이다.

작자미상(School of Fontainebleau), 다이애나(아르테미스) 더 헌트리스, 15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91x132cm, 루브르 박물관

작자미상(School of Fontainebleau), 다이애나(아르테미스) 더 헌트리스, 15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91x132cm, 루브르 박물관

“…우리의 총사령관께서 무언가 잘못한 게 있는가 봅니다.”

칼카스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아르테미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소?” 아가멤논의 말에 칼카스는 다시 얼굴을 위로 젖혔다.
그런 뒤 문장을 곱씹듯 천천히 말했다.
 “그대가 가장 아끼는 딸, 이피게네이아를 산 제물로 바칠 것을 명하고 있소이다.”

‘아킬레우스’ 이름을 팔다

작자미상,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세기경, 프레스코화, 140x138cm,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작자미상,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세기경, 프레스코화, 140x138cm,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인간 중 가장 강력한 전사, 아킬레우스가 우리 딸 이피게네이아에게 큰 관심이 있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본격적으로 전쟁터에 임하기 전 결혼식까지 올렸으면 좋겠다고 하오. 경사스러운 일 아니겠소. 그러니 내가 있는 곳으로 이피게네이아를 보내시오.”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이 편지를 받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유명한 아킬레우스를 사위로 맞을 수 있다는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피게네이아의 얼굴도 편지 앞에서 빨갛게 물들었다.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이피게네이아는 바로 짐을 챙겼다.
그리스 연합군이 모여있는 곳(정확히는 출정을 하지 못한 채 발이 묶여있는 곳), 항구 도시 아울리스에 곧장 들어섰다.
아가멤논이 거짓말을 했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먼저 만난 이는 아킬레우스였다.
“아킬레우스여. 우리 집안과 딸을 좋게 봐주셔 고맙습니다.
”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다짜고짜 아킬레우스의 손부터 잡았다.
하지만, 전말을 모르는 아킬레우스는 당황하는 모습만 보였다.
 
아킬레우스는 들뜬 클뤼타임네스트라의 이야기를 듣고도 인상을 펼 수 없었다.
모든 게 금시초문이었다.

“부인. 저와 아가멤논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도 오간 적이 없습니다.
” 아킬레우스의 단호한 말에, 모녀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안젤름 포이어바흐, 이피게네이아 I, 1862, 캔버스에 유채, 250x175cm,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
아버지의 술책에 넘어갔던 이피게네이아가 전말을 알아차린 직후 모습처럼 보인다.<BR> 그녀는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다.<BR> 뻣뻣한 목,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오른손 등 자세는 경직돼 있다.<BR> 짙게 깔린 구름은 속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BR>
그녀는 올리브 나뭇가지만은 꼭 쥐고 있다.<BR>  이는 억울한 이가 자기 뜻을 전하고자 할 때 함께 챙겼던 일종의 상징물이다.<BR>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을 의미하리라.

<안젤름 포이어바흐, 이피게네이아 I, 1862, 캔버스에 유채, 250x175cm, 다름슈타트 헤센 주립 박물관> 아버지의 술책에 넘어갔던 이피게네이아가 전말을 알아차린 직후 모습처럼 보인다.
그녀는 탁 트인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뻣뻣한 목,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오른손 등 자세는 경직돼 있다.
짙게 깔린 구름은 속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녀는 올리브 나뭇가지만은 꼭 쥐고 있다.
이는 억울한 이가 자기 뜻을 전하고자 할 때 함께 챙겼던 일종의 상징물이다.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않았음을 의미하리라.


<안젤름 포이어바흐, 이피게네이아 II, 1871, 캔버스에 유채, 200x132cm, 슈투트가르트 주립 미술관>
이피게네이아가 바위벽에 기대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BR> 손으로 턱을 괴는 등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모습이다.<BR> 이제 그녀는 뜻을 굳힌 것일까.

<안젤름 포이어바흐, 이피게네이아 II, 1871, 캔버스에 유채, 200x132cm, 슈투트가르트 주립 미술관> 이피게네이아가 바위벽에 기대 생각을 이어가고 있다.
손으로 턱을 괴는 등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모습이다.
이제 그녀는 뜻을 굳힌 것일까.

그동안 아가멤논은 아르테미스를 위한 제단을 세우고 있었다.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이피게네이아가 아가멤논과 마주했을 때는, 이미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뒤늦게 내막을 안 모녀는 절망했다.
특히 산 채로 불구덩이에서 죽어야 할 이피게네이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원래도 창백했던 얼굴은 곧 증발할 것처럼 흐릿하게 변했다.

하지만, 이피게네이아는 역시나 속이 깊었다.

아버지 아가멤논이 지금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놓여있는지를 생각했다.
자기가 제물이 되지 않으면 더욱 큰 곤경에 빠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목숨을 내놓기로. 하늘에 바쳐지기로. “울지 않을게요. 영웅으로 죽겠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해졌다.

불길이 치솟은 그 순간


<자크 루이 다비드, 아킬레우스의 분노, 1819, 캔버스에 유채, 10.5x14.5cm, 킴벨 미술관>
왼쪽에 있는 아킬레우스가 칼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고 있다.<BR>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딸 이피게네이아가 두 남성 사이에 섰다.<BR> 아킬레우스는 자기 이름이 함부로 쓰인 데 대해 분노했다.<BR>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생각이었다.<BR> 그래서 이피게네이아가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나름 수를 써봤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BR>
눈가가 잔뜩 부어오른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당장이라도 아킬레우스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릴 듯하다.<BR> 그녀가 어깨를 잡고 있는 이피게네이아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BR> 그녀는 여기에서도 올리브 나뭇가지를 쥐고 있다.<BR>  이 또한 시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 일각에선 이 여인이 이피게네이아가 아니라 브리세이스라는 말도 나온다.<BR>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④편에서 다룬다.<BR>

<자크 루이 다비드, 아킬레우스의 분노, 1819, 캔버스에 유채, 10.5x14.5cm, 킴벨 미술관> 왼쪽에 있는 아킬레우스가 칼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딸 이피게네이아가 두 남성 사이에 섰다.
아킬레우스는 자기 이름이 함부로 쓰인 데 대해 분노했다.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피게네이아가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나름 수를 써봤지만,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눈가가 잔뜩 부어오른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당장이라도 아킬레우스에게 “도와달라”고 매달릴 듯하다.
그녀가 어깨를 잡고 있는 이피게네이아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그녀는 여기에서도 올리브 나뭇가지를 쥐고 있다.
이 또한 시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 일각에선 이 여인이 이피게네이아가 아니라 브리세이스라는 말도 나온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④편에서 다룬다.

이런 가운데, 뜻하지 않게 이번 일에 휘말린 아킬레우스는 찝찝함을 떨칠 수 없었다.

아킬레우스는 난데없이 희생양이 된 이피게네이아가 딱했다.
못난 아버지 아가멤논에게 속아 먼 땅까지 오고, 결국은 그런 아버지 탓에 고통스럽게 죽어야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도 치밀었다.

그 인간의 책략에 이용된 일 자체가 모욕적이었다.
아킬레우스는 이피게네이아를 빼내기 위한 계획도 짜봤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모든 이의 반대(심지어 제물이 된 이피게네이아까지도!)에 가로막혀 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이피게네이아는 장작 위에 섰다.
병사가 횃불을 장작 끄트머리에 갖다 댔다.
화르르 붙은 불은 이피게네이아를 집어삼킬 기세로 맹렬하게 타올랐다.

“아버지, 어머니. 이제 안녕히….”

이제 모두가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바람은 다시 불어오지만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760년경, 캔버스에 유채, 53x41cm, 바이마르 성>
이피게네이아가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하늘에서 아르테미스가 내려온다.<BR>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BR> 흐릿하게 그려진 윤곽선이 외려 상황의 다급함을 부각하는 듯하다.<BR>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데려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사슴 한 마리를 둘 것이다.<BR> 그렇게 의식도 끝나고, 아르테미스가 가로막고 있던 바람 또한 불어올 것이다.<BR>

<조반니 도메니코 티에폴로,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760년경, 캔버스에 유채, 53x41cm, 바이마르 성> 이피게네이아가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하늘에서 아르테미스가 내려온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를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흐릿하게 그려진 윤곽선이 외려 상황의 다급함을 부각하는 듯하다.
아르테미스는 이피게네이아를 데려가고, 그녀가 있던 자리에 사슴 한 마리를 둘 것이다.
그렇게 의식도 끝나고, 아르테미스가 가로막고 있던 바람 또한 불어올 것이다.

푸른색 빛이 갑자기 하늘 위에서 쏟아졌다.
그것은 분명 이피게네이아가 있던 곳을 비추고 있었다.

“이제 불을 꺼야 합니다.
그러면 아르테미스의 메시지를 볼 수 있을 겁니다.
” 아가멤논은 장수들의 권유에 서둘러 진화 명령을 내렸다.
불은 금방 잡혔다.
 이피게네이아가 묶여있던 곳에는… 그녀는 없고 웬 사슴 한 마리만 앉아 있었다.
 
이피게네이아는 뼈 하나, 옷 한 조각 없이 완전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알고 보니 아르테미스가 직접 이피게네이아를 구출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피게네이아를 죽이라고 한 신이 외려 그녀의 생명을 구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아르테미스도 이피게네이아의 고결함에 감동하고 있었다.
이대로 저승에 보내기는 아깝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불구덩이에서 꺼낸 후, 자기 신전의 사제로 앉혀 새로운 삶을 살게끔 이끌었다.


가브리엘 프랑수아 두아이앙,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749, 캔버스에 유채, 156x190cm, 벰베르그 재단

가브리엘 프랑수아 두아이앙, 이피게네이아의 희생, 1749, 캔버스에 유채, 156x190cm, 벰베르그 재단

“이제야 바람이 부는군.”

아가멤논이 혼잣말을 했다.
날씨는 거짓말처럼 바뀌었다.
그의 망토가 나풀대고, 망연자실한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수천장에 이르는 군단의 깃발이 일제히 나부끼고 있었다.
 “이제…. 진격합시다.
트로이로.”
 나팔수가 다시 길게 나팔을 불었다.
배가 트로이를 향해 하나 둘 움직였다.
어느덧 홀로 육지에 남겨진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멀어져가는 아가멤논만을 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일을 절대 잊지 않을 터였다.

판이 커지기 시작했다


라파엘로 산치오, 신들의 의회, 1517~1518, 프레스코화, 빌라 파르네시나

라파엘로 산치오, 신들의 의회, 1517~1518, 프레스코화, 빌라 파르네시나

올림포스 신들도 이러한 흐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더는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군 사이 물리적 충돌을 막을 수 없다는 데 뜻을 모았다.
신들은 갈라지기로 했다.
 한쪽은 그리스 연합군 편, 또 다른 한쪽은 트로이군 편으로. 이제 각각의 신은 자기가 지지하는 진영만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리스 편 :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


엔리케 시모네, 파리스의 심판, 1904, 캔버스에 유채, 215x331cm, 말라가 박물관

엔리케 시모네, 파리스의 심판, 1904, 캔버스에 유채, 215x331cm, 말라가 박물관

“저는 그리스 연합군과 함께 할 거예요.”

가정의 여신 헤라가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모습이었다.
“앞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의 행태를 보셨지요? 유부녀 헬레네를 납치하듯 데려갔잖아요. 가정을 수호해야 하는 입장에서 묵과할 수 없는 행태이지요.” “저도 그리스 연합군 쪽에 설게요.” 이번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인간 중 가장 지혜롭다는 평의 오디세우스가 그리스 연합군에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지혜를 관장하는 제가 도와야지요.”

함께 있는 신 중 상당수가 두 여신의 말에 몰래 코웃음을 쳤다.

이들은 알고 있었다.
헤라와 아테나가 그리스 연합군을 돕기로 한 진짜 이유를.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가리는 파리스의 심판 당시 황금 사과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둘 다 나름의 근거(파리스의 행실, 오디세우스에 대한 애정)를 댔지만, 이는 핑계일 뿐이었다.


안젤로 브론지노, 포세이돈(넵튠) 역의 안드레아 도리아 초상화, 1530~1540, 캔버스에 유채, 199.5x149cm, 피나코테카 디 브레라

안젤로 브론지노, 포세이돈(넵튠) 역의 안드레아 도리아 초상화, 1530~1540, 캔버스에 유채, 199.5x149cm, 피나코테카 디 브레라

“나도 그리스 연합군에게 힘을 보태겠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걸걸한 목소리로 헤라와 아테나 사이에 섰다.
 포세이돈은 나름의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트로이의 옛 왕 라오메돈에게 크게 속은 굴욕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한참 전, 포세이돈과 태양의 신 아폴론은 제우스에게 반항한 죄로 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인간 세계에서 1년간 잡일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시절, 라오메돈이 두 신에게 일거리를 줬다.
트로이 성벽을 높이 쌓는 일이었다.
“엄청난 중노동이지만, 다 마치시면 제가 엄청난 선물도 드리겠습니다.
” 라오메돈은 그렇게 두 신을 구슬렸다.
포세이돈과 아폴론 모두 열심히 돌을 쌓았다.
선물을 기대하며 밤낮 없이 쌓고 또 쌓았다.

1년이 흘렀다.

포세이돈은 드디어 마지막 작업을 끝낸 후 쾌재를 불렀다.
“라오메돈! 우리는 이제 올림포스로 다시 올라갈 수 있소. 그전에 약속했던 보상을 주시오.” “네? 무슨… 보상이요?” 포세이돈의 말에 라오메돈은 모른 척을 했다.
 
라오메돈은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다.
실컷 부려먹은 후 오리발을 내밀 마음이었다.
결국, 두 신은 라오메돈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꼴이었다.

포세이돈은 그때부터 트로이라는 나라 자체를 싫어했다.
물론 그사이 트로이로 바다 괴물도 몇 마리 보내긴 했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트로이 편 :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자크 루이 다비드, 비너스(아프로디테)와 세 여신에게 무장해제되는 마르스(아레스), 1824, 캔버스에 유채, 308x262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자크 루이 다비드, 비너스(아프로디테)와 세 여신에게 무장해제되는 마르스(아레스), 1824, 캔버스에 유채, 308x262cm, 벨기에 왕립 미술관

“저는 트로이…. 무조건 트로이 쪽이지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저에게 황금 사과를 준 파리스를 저 또한 책임져야지요. 또…. 인간 세계에 있는 제 아들 아이네이아스가 트로이군 편으로 참전한다는 소식도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리스를 도울 생각이었지만, 저들은 앞으로도 교활한 행보를 이어갈 것 같군요. 저도 트로이군과 함께 있을 겁니다.
” 이것은 전쟁의 신 아레스의 입장이었다.
 연인 아프로디테의 행보 또한 그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터였다.

샤를 멜랭, 아폴론, 1649, 캔버스에 유채, 400x269cm, 벰베르그 재단

샤를 멜랭, 아폴론, 1649, 캔버스에 유채, 400x269cm, 벰베르그 재단

“저는 가장 고귀한 인간, 트로이의 총사령관 헥토르를 좋아합니다.”

아폴론도 이렇게 자기 생각을 전했다.
 “저 또한 포세이돈과 함께 트로이 성벽을 쌓으며 고생했지만…. 그건 흘러간 옛일이지요.”

“…제가 왜 트로이군을 지지하는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아폴론의 남매 아르테미스까지 뜻을 전했다.
 그렇게 신들 사이에도 큼직한 판이 짜였다.
올림포스를 대표하는 12신 중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 편이었다.
 아프로디테, 아레스, 아폴론, 아르테미스가 트로이 편이었다.

가장 강한 신 제우스, 그런 그가 전령처럼 부리는 헤르메스는 중립을 선언했다.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 화로의 여신 헤스티아는 전쟁 따위 관심 밖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는 선한 성격 탓에 누구의 편도 들지 못했다.
이밖에 지하 세계의 신 하데스는 어느 쪽이 이기든 사망자만 많이 나오면 된다는 마음이었다.

또 한 번의 변수

윌리엄 페이지,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싸움, 1832, 패널에 유채, 25.2x38.1cm,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윌리엄 페이지,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싸움, 1832, 패널에 유채, 25.2x38.1cm,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한편,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을 향한 악감정을 그대로 안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는 대의를 위해 마음을 억눌렀지만, 결국 한 사건을 계기로 이를 폭발시키고 만다.
이 때문에 트로이 전쟁의 흐름 또한 크게 요동친다.
둘 사이에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연재될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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