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공간'이 필요해


백영옥 소설가

돈이 없는 사람은 왜 계속 돈이 없을까? 시간이 부족한 사람은 왜 매일 시간 부족에 시달릴까? 행동경제학자 센딜 멀레이너선(Sendhil Mullainathan)과 엘다 샤퍼(Eldar Shafir)는 우리에게 돈, 시간 등등이 결핍됐을 때 인간의 행동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관찰했다.
그들은 결핍이 우리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어놓고, 마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핍의 악순환은 짐 싸기에 비유할 수 있다.
큰 가방으로 짐을 싸는 사람은 운동화나 우산을 넣을 때 그저 운동화가 필요한지, 우산이 필요한지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작은 가방으로 짐을 싸는 사람은 여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의 선택을 쉽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우산을 넣지 않았다가 혹시 비가 오면? 운동화를 넣지 않았는데 산에 올라가게 되면?이란 가정 속에서 계속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결핍의 악순환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주말이면 사람들은 일정을 비워두고,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사치를 누린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을 여유를 주는 것이다.
유대교의 안식일 역시 결핍의 트레이드오프(trade off·어느 것을 얻기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를 막는 인류의 발명품이다.
뉴욕 맨해튼 중심의 센트럴 파크를 구글 맵에서 보면 텅 비어 있는 사각형의 녹색 공간으로 보인다.
맨해튼의 도시설계자였던 로버트 모지스는 설계 도중 자신이 들었던 귀중한 조언을 이렇게 증언한다.
만약 맨해튼의 중심부에 큰 공원을 설계하지 않으면, 5년 후에 똑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다.
바쁠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빈 공간'인지도 모른다.
여유가 있을 때, 우리는 같은 일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유는 동료의 실수를 무능함이 아닌 피곤함으로, 짜증을 연민으로 바꾼다.
만약 인생이 하나의 긴 문장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쉼표가 필요하다.

스트레스 면역

백영옥 소설가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외래어 1위는 스트레스(stress)라고 한다.
스트레스 테스트라는 말은 원래 심장 기능 체크 등 의학과 심리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환율처럼 급격한 경제적 충격을 받았을 경우,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대비하는 가상 시나리오, IT나 게임의 트래픽 안정성, 자동차와 공학 분야의 내구성 테스트에도 많이 쓰인다.
보통의 사람들은 만원 버스와 지하철 출근 전쟁 스트레스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때 사람들의 공유 면적은 놀랍게도 정부가 보장하는 동물보호법의 동물 운송 규정(각각의 동물이 방해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이 제공되어야 한다)보다 좁다.
사람은 살아 있는 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트레스의 힘'이라는 책에는 3만명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스트레스 연구 사례가 나온다.
질문은 두 가지였다.
한 해 동안 경험한 스트레스가 많은가?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롭다고 믿는가? 8년 뒤 참가자들의 사망자 숫자를 조사해보니 스트레스 수치가 높은 사람들의 사망 위험이 43%나 높았다고 한다.
특히 스트레스가 건강에 해롭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사망 위험이 증가했다.
흥미로운 건 높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스트레스가 나쁘지 않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사망 위험률이다.
이들의 사망률이 가장 낮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않은 그룹보다도 더 낮았다.
스트레스가 정말 스트레스로 작용하려면 일단 스트레스가 해롭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인과론이 성립한다.
우주비행사, 응급구조사, 운동선수들은 스스로를 스트레스 상황에 가두고 훈련한다.
이것을 스트레스 접종 또는 스트레스 면역이라 부르는데, 가상의 스트레스 상황에 도전해서 해결책을 찾아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다.
사람은 고통을 느끼면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우리가 무엇인가 이루어 기쁨을 원한다면 과정이 주는 고통도 함께 원해야 한다.

걷기의 인문학

백영옥 소설가여름 더위가 절정이다.
나는 산책을 즐기는 사람인데 요즘 공원은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열대야 때문에 걸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안은 대형 쇼핑몰 걷기, 즉 '몰링(Malling)'이다.
하지만 쇼핑몰은 걷는 거리가 크게 길지 않은데도 쉽게 피곤을 느꼈다.
이유가 있다.
걷는 동안 시각과 청각이 쉬지 않고 수많은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한정된 시간에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비교하고 사기 위해선 눈도 귀도 손도 바쁘게 움직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걸어 다니며 제자를 가르쳤다.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逍遙學派)라 부르는 이유다.
이 학파의 공부 비결은 느리게 걷기였을 것이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 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건 불가능하지만,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산책은 마음의 여행, 느긋한 관광이라 불러볼 만하다.
속도와 효율성은 시대 정신이 된 지 오래다.
손 편지는 이메일로 다시 문자메시지로 대체되었다.
더 빠른 매체로 속도를 줄여왔지만, 오히려 여유와 시간은 점점 줄어든 느낌이다.

테드(TED) 강연자 '데릭 시버스'는 매사 전력투구하며 살았다.
해변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늘 기록 단축을 위해 페달을 밟았다.
앞만 보고 헉헉거리며 달려도 늘 기록은 43분. 어느 우연한 날, 그는 하늘을 본다.
그제야 자신이 달리던 해변가의 바다가 보였다.
그는 그날 운 좋게 돌고래와 펠리컨도 본다.
느긋한 마음으로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즐긴 그날의 레이싱 기록은 45분.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을 때보다 고작 2분이 더 걸렸다.
속도를 선택하면 풍경은 사라지고 삶의 밀도는 낮아진다.
만약 인생이라는 마라톤에서 완주를 원한다면 당신의 속도로 가야 한다.
누구나 최고의 속도로 빠르게 달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최고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는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여행하지 않을 자유

백영옥 소설가피코 아이어의 에세이 '여행하지 않을 자유'는 휴가를 위해 인천공항의 출국자 대열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책이다.
떠나고 싶지 않은 사람, 떠나지 못해 속상한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책을 다섯 권쯤 냈을 때, 내게 생긴 증상이 하나 있는데, 책에서 '무엇 무엇 하지 않을'이란 말이 보이면 당장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이유가 뭘까 마음을 헤아리니 살면서 '무엇 무엇 하느라' 지불한 기회비용과 실망감 때문이었다.
물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자유에 대한 기준이 변한 것이다.
이제 나는 '해야 할'이 아니라 '하지 않을' 쪽의 자유가 한결 마음에 와 닿는다.
만나지 않을 자유, 듣지 않을 자유, 보지 않거나 선택하지 않을 자유 같은 것 말이다.
돈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
우리는 종종 보기 싫은 상사나 선배 얼굴에 사표를 던지며 망할!이라 외치며 당당히 걸어 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속 시원한 이 행동을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망할) 돈 때문이다.
그래서 이걸 미국에서는 '퍽 유 머니(fuck you money)'라 부른다.
원할 때 직장을 그만둘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뜻한다.
돈을 어떻게 쓸지는 스스로 정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살면서 힘들게 깨달은 건, 돈은 가고 싶고 사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쓸 때가 아니라, 나의 자아가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쓸 때 더 큰 가치를 발휘한다는 거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SNS 봐도, 경쟁적으로 펼쳐지는 이국 풍경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여행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 방 여행하는 법' 같은 책을 쓴 사람이 있을 정도다.
먼 곳으로 떠나야만 비로소 나를 알게 되는 것도 아니다.
끝없이 움직여야 하는 시대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큼 시급한 일이 또 있을까. '아임 유어 맨'으로 알려진 가수 레너드 코언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바깥의 모든 장소를 이해할 수 있는 원대한 모험이다.

'의지력'의 재발견

백영옥 소설가탐험가 헨리 스탠리는 아프리카에서 생사(生死)를 넘나들며 사람들을 구했다.
그는 더위와 동물들의 공격 속에서도 생존했다.
그는 악조건 속에서도 늘 주변을 정리했고 면도를 했고 일기를 썼다.
그것은 그의 의지적 습관이었다.
혹독한 정글을 통과한 지 50일 만에 900쪽의 책을 써낼 수 있었던 의지력은 어디서 나온 걸까.'의지력의 재발견'의 저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의지력은 근육처럼 훈련함으로써 강화할 수 있지만, 자주 쓰면 사라진다는 걸 발견했다.
따라서 의지력을 아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의지력 없음을 성격적 결함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의지력은 쓰면 쓸수록 피로를 느끼는 근육과 같다.
배고픔을 참는 데 많은 의지력을 쓰면 밤에 폭식하게 되는 건 그런 이유다.
컬럼비아대학교의 조너선 레바브 교수팀은 10개월간 판사들이 결정한 1000건 이상의 사건을 살폈다.
그들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아침 일찍 심사를 받은 죄수 중 65% 정도가 가석방이 허락된 반면 오후 늦게 심사받은 죄수의 10% 미만만 가석방이 허락된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간식을 먹기 바로 전 심의를 받은 죄수의 가석방 확률이 15%인 데 반해 간식을 먹은 후에는 죄수 3명 중 2명, 즉 65% 정도가 가석방을 허락받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판단은 엄청난 포도당이 소모되는 힘든 정신적 작업이라 말한다.
판단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지속되면 판사 개인의 철학과 상관없이 에너지가 고갈된다.
그 결과 판사는 덜 위험한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
죄수에게는 부당하지만 이런 편견을 의외의 현상이라고만 볼 수 없다는 게 연구 결과다.
의지력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소모된다.
한정된 자원인 것이다.
많은 결정을 내리다가 피곤해진 두뇌는 결국 에너지를 덜 사용하는 익숙한 결정을 내리는데, 그 결정은 최악일 때가 많다.
만약 지금 더위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시라.

 '나'를 알려면

백영옥 소설가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은 과거다라고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은 말했다.
진짜 빛을 보고 느끼기 위해선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그는 과거의 역사를 호출해 우리가 어떻게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책 '인생의 발견'에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28가지의 질문이 들어 있다.
우리는 언제 생각하게 되는가? 그것은 당연히 질문을 받았을 때이다.
에디슨의 실험실 앞에 이런 경고문이 있었다.
'인간은 생각하는 수고를 피하기 위해 모든 편법을 동원한다.
' 인간은 왜? 라는 질문을 멈출 때 비로소 성장이 멈춘다.
책에는 '옥스퍼드 뮤즈'재단에서 보급하고 있는 대화 프로그램을 이용한 실험이 등장한다.
실험에서는 배경이 다른 낯선 사람이나 안면만 있는 사람을 무작위로 마주 앉게 한다.
그리고 레스토랑 메뉴처럼 20여 가지 주제로 분류된 대화 메뉴를 제시한다.
그중에는 '당신의 동정심은 어디까지인가?' '지난 몇 년 동안 삶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달라졌는가?' 같은 질문이 있다.
주최 측에선 참가자들에게 경험을 나누고 대화하며 그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가치 있을지 생각해보라고 주문한다.
우리는 두 종류의 유리를 통해 세상을 본다.
하나는 거울이고, 또 하나는 창문이다.
거울이 자아를 직접 바라보는 것이라면, 창문은 타인을 통해 나를 보는 통로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선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친구나 낯선 타인과 대화하며 자신에 대해 설명하다가 스스로에 대해 명확히 깨닫는 경우가 더 많다.
젤딘의 말처럼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접하기 전에는 그 나름의 가치를 모른다.
이 세상에는 객관적으로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가 누구인지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그러다가 자화상을 스케치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나'를 강조하는 사회지만 '나'를 알기 위해 '너'라는 거울이 필요한 것이다.

잃어버린 밤하늘

백영옥 소설가내 기억 속 가장 아름다웠던 밤은 인도 아잔타 석굴 근처의 마을에서 본 여름 밤하늘이었다.
머물던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치과에 갈 수 없어 자주 통증을 겪던 마을 할머니는 진통제를 선물한 나에게 멋진 걸 보여주겠다고 했다.
할머니와 걷는 내내 흰 눈을 맞는 기분이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눈보라가 몰아쳤다.
일평생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그것은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눈보라가 은하수라는 건 훗날 알았다.
별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선 최소 450개 이상의 별을 한꺼번에 봐야 한다.
하지만 도시의 인공적인 빛은 별을 가린다.
다행히 지구에는 밤하늘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The International Dark-Sky Association)'가 그것이다.
한국에선 최초로 2009년에 전남 신안군의 섬 증도가 이 단체에 가입했다.
아름다운 에세이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에는 천문가 존 보틀이 밤하늘을 9개의 등급으로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가장 밝은 수준이 9이고, 가장 어두운 수준이 1이다.
서울이나 라스베이거스 같은 도시들은 등급 9이다.
그에 의하면 젊은 층은 등급 3(지평선에 빛 공해가 약간 있는 시골)이나 등급 2(정말 어두운 곳)의 어두운 밤을 경험한 적이 없다.
미국 국립공원에는 '밤하늘 팀'도 있다.
그들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다.
다음 세대의 큰 문제는 하늘의 장대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을 다시 요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라면서 은하수라든가 티 없이 맑은 하늘이라든가 개기일식을 보지 못하지요. 지상의 멋진 풍경도 좋지만 정말로 그런 것들을 보아야 합니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혀 주는 것들이니까요.오래전 인도의 한 시골 마을의 밤하늘에서 내가 느낀 것도 그런 장대함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저 먼 은하계의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한국인도, 세계인도 아닌 지구인으로서의 새로운 인식이었다.

'ET 할아버지'

백영옥 소설가이 몸이 말입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만든 걸작품입니다.
아주 비싼 작품이지요라는 말을 한 사람은 고(故) 채규철 선생이다.
그는 사회 운동가로 평생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살았고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설립에도 참여했다.
유독 아이들을 사랑했던 그의 생전 별명은 'ET 할아버지'였다.
ET라는 별명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1967년 어느 날, 고아원을 칠해주려고 차 안에 실었던 페인트와 시너가 교통사고로 화마(火魔)가 되어 그의 몸으로 흘러내렸다.
사고 후 그는 귀와 한쪽 눈을 잃었다.
입과 손은 화마로 들러붙었고 울 수조차 없었다.
화마가 그의 눈물샘마저 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성스레 간호하던 아내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는 차분히 수면제를 모았다.
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남겨진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며 마음을 고쳐먹어야 했다.
그가 경기도 가평에 '두밀리자연학교'를 열어 대안 생태 학교를 시작한 건 1986년. 공부와 입시에 지친 아이들에게 바람과 별, 흙의 소중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누구보다도 불행할 수 있는 조건을 가졌지만, 자신의 불행을 타인의 행복을 위해 선물한 셈이다.
그는 2006년 어느 날, 두밀리자연학교의 교장을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곁을 떠났다.
그는 평소 우리가 사는 데 두 개의 'F'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나는 'Forget(잊어버려라)'이고, 다른 하나는 'Forgive(용서해라)'라고. 그는 사고 후, 고통을 잊지 않았으면 자신은 지금처럼 살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지나간 일은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고, 내가 용서해야 나도 용서받는다고 말이다.
누구나 평생 품어봤을 자신만의 가정법(假定法)이 있다.
그때 그 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마지막이었을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드렸다면, 나를 끝없이 괴롭히는 가정법 말이다.
하지만 가장 먼저 용서해야 할 건 나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으로부터, 삶으로부터도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내가 있잖아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
일본을 처음 여행했을 때, 가장 놀랐던 건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1인용 식탁뿐 아니라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있어서 옆 사람을 볼 일 없이 혼자 밥 먹는 식당을 본 후, 외롭고 쓸쓸한 도시 사람들의 뒷모습이 더 눈에 띄었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혼자 밥 먹는 사람들이 자주 보인다.
특히 카페에 가면 커피나 샌드위치를 시키고 혼자 공부하는 학생들이 부지기수다.
최근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자발적인 아웃사이더가 된다는 기사를 보았다.
관태기(관계 권태기의 약자)란 신조어도 들었다.
타인과 시간과 취향을 맞추느니 혼자가 편하다는 거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종종 받는 사연 중 하나는 '혼자이고 싶은데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라는 고민이다.
혼자이고 싶지만 외롭고 싶진 않다는 것이다.
이 모호한 말을 가장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곳이 식당과 카페다.
혼자 밥을 먹으며 셀카로 자신의 혼밥 장면을 찍어 SNS에 올리고, 밥을 먹는 내내 친구들의 '좋아요'를 기다리는 사람들 말이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 있기 싫은 상태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은 없다.
톤 텔레헨의 '고슴도치의 소원'은 이런 현대인의 모습이 잘 드러난 동화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기가 특기인 고슴도치가 동물 친구들을 초대하고 아무도 오지 않을까 봐 밤잠을 설치는 얘기다.
걱정이 가득한 채 고슴도치는 이런 말을 반복한다.
여기가 제일 안전해, 외롭지만 안전해. 괜찮아! 나에겐 내가 있잖아?가까이하면 아프고 멀리하면 외로운 고슴도치의 딜레마. 어느 정도의 온도가, 어느 정도의 거리가 우리에게 적당한 걸까. 무더웠던 여름이 가고 선선한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다가가기에는 거절이 두렵고, 홀로 있기에는 너무 외로운 우리. 관계에 지쳐서 혼밥을 먹으면서도, 기어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 '좋아요'를 기다리는 그 마음들이 유독 눈에 자주 들어오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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