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도심에 뱀이 출현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나 역시 천변 도로를 산책하다 축대 벽을 타고 이동하는 뱀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시골은 말할 필요도 없이 뱀 물림 사고 건수도 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분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뱀 수요가 크게 줄어든 것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한 세대 전만 해도 뱀탕은 원기나 정력을 보충하는 스태미나식을 상징하는 메뉴였다.
큰 소주병에 뱀을 통째로 집어넣고 수년 묵힌 뱀술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1998년 실데나필이 나오면서 특식으로 정력을 높이려는 건 미개해 보이기까지 하는 비과학적인 풍습으로 여겨지며 급속히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 수년 사이
비만 치료제 분야에서 실데나필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약물들이 화제다.
원래 2형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된 약물이 임상시험에서 살이 빠지는 ‘
부작용’이 관찰되면서
비만 치료제로 변신했고 기존 치료제에 비해 뛰어난 약효로 주목을 받고 있다.
심지어 2021년 나온, 일주일에 한 번만 주사해도 되는 약물은 공급이 폭발적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광고를 중단했을 정도다.
게다가 이보다 더 뛰어난 약물을 대상으로 최종 단계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
이 계열 약물의 등장을 두고 “
비만의 긴 터널 끝에 빛이 보인다”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이를 계기로
비만의 생리학과
비만 치료제의 역사를 살펴본다.
동물도
비만이 되는 구조
오늘날 지구촌 80
비만이고 해마다 빠르게 늘어 2035년에는 20억 명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세계보건기구(WHO)가 21세기 인류의 건강을 위협할 질병으로 우울증과 함께
비만을 든 배경이다.
다른 많은 특성도 그렇지만
비만 역시 ‘유전 대 환경’ 또는 ‘본성 대 양육’ 논쟁의 대상이었고 후자의 영향력이 큰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환경과 양육은 뉘앙스가 좀 다르다.
맛있고 영양 밀도가 높은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게 이유라면 환경 탓이지만 그럼에도 절제하지 못하고 많이 먹어
비만이 되는 건 양육, 즉 의지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환경에서 다 살이 찌는 건 아니므로 결국
비만은 의지의 문제라는 인식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몸의 생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특히 진화생물학의 영향이 커지면서
비만에서 의지의 책임은 크지 않다는 게 밝혀졌다.
정제된 탄수화물과 지방이 잔뜩 들어있는, 소위 ‘서구식 식단’을 즐기고 정적인 생활을 하다 보면 시기의 문제일 뿐 살이 찌기 마련이다.
서구식 식단의 원조인 미국은 이미 인구의 3분의 1이 과체중, 3분의 1이
비만인 사회다.
우리나라 역시 서구식 식단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에 비례해 과체중과
비만 비율이 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도
비만이나 과체중이 아닌 사람이 오히려 의지력이 강하거나 아니면 살이 찌기 어려운 특이 체질이라고 봐야 한다.
사람만 이런 건 아니다.
반려동물도 마음이 약해 먹이 통제를 잘 못하는 주인을 만나면
비만이 되기 쉽다.
연구실의 실험동물도 고지방처럼 영양 밀도가 높은 먹이를 마음껏 먹게 하면 십중팔구
비만이 된다.
이처럼 먹을 게 많을 때 살이 찌는 건 동물의 생리로, 왜 이렇게 진화했는가는 자연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자연에서는 먹이를 두고 경쟁하기 마련이라 지속적으로 먹이가 넘쳐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오히려 굶주리는 게 일상이다.
따라서 먹을 게 있을 때 양껏 먹고 쓰고 남은 영양분은 몸에 저장하게 만들어졌다(주로 지방 형태로).
물론 무작정 먹으면 탈이 나므로 미각과 후각 등 감각기관과 호르몬, 신경전달물질 등 복합한 생리 메커니즘이 진화해 섭식 행동을 조절한다.
많이 먹으면 음식 풍미가 떨어지고 배가 불러 수저를 놓는 이유다.
식품회사와 제약회사의 전쟁, 승자는?
비만의 만연은 농업의 녹색혁명으로 식량이 넘쳐나게 된 것뿐 아니라 기가 막힌 식감과 풍미로 식욕을 왜곡해 더 많이 먹게 하는 식품회사의 각종 노하우가 축적된 덕분이다.
식단에서 가공식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비만이 될 가능성도 크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규제할 수도 없는 일이라 식품업계의 공세는 앞으로도 점점 더 강해질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의지만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현실에서 결국 제약회사가 나섰다(물론 돈을 버는 게 또 다른 목적이지만).
식품회사가 식욕을 부추기는 비법을 개발했다면 이들은 거꾸로 식욕을 억제하거나 몸의 대사활성을 높이거나 심지어 섭취한 영양분의 흡수를 막아 살을 빼는
비만 치료제를 만들었다.
먼저 1999년 장기간 쓸 수 있는
비만 치료제로 처음 미국 식품의약국(FDA)
오르리스타트는 지방분해효소의 작용을 억제해 장에서 지방의 흡수율을 30%가량 줄인다.
따라서 지방 섭취가 많아
비만이 된 사람들에게 효과가 크다.
그러나 흡수되지 않은 기름이 변에 섞여 변실금 같은 곤란한 상황이 생길 수 있고 지용성 비타민이 결핍될 가능성도 크다.
체중 감량 효과도 1년 복용 뒤 평균 2.9%에 불과해 다소 실망스럽다.
2012년 FDA의 승인을 받은 '펜터민/토피라메이트'는 최초의 복합제제 장기간 복용
비만 치료제다.
펜터민은 교감신경을 자극해 대사율을 높이는 약물이고 토피라메이트는 원래 뇌전증(간질)이나 편두통 치료제로 개발됐지만 임상 과정에서 체중 감소 효과가 발견됐다.
불면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아침에 복용한다.
다만 펜터민은 의존성이 생길 수 있고 토피라메이트는 인지 기능을 손상시킬 위험성이 있어 유럽에서는 승인을 받지 못했다.
펜터민/토피라메이트의 체중 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6.8%다.
2014년 FDA 승인을 받은 두 번째 복합제제 '날트렉손/부프로피온‘은 특이한 조합이다.
날트렉손은 약물중독이나 알코올의존증 치료제이고 부프로피온은 항우울제로 금연을 돕는 약물인데 둘을 적절히 조합하자 식욕을 억제해 체중을 줄이는 효과가 유의미하게 나타난 것이다.
식탐도 일종의 중독이기 때문이다.
날트렉손/부프로피온의 체중 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4%로 그리 크지는 않다.
역시 2014년 FDA 승인을 받은 리라글루타이드는 몇 년 만에 세계
비만 치료제 시장을 평정했다(2019년 점유율 56%).
그리고 2021년 같은 계열이면서 효과와 사용성이 크게 나아진 세마글루타이드가 나오면서
비만 치료제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두 약물이 기존
비만 치료제와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걸까.
매일 주사에서 일주일에 한 번으로
원래 리라글루타이드는 2
그런데 체중 감소 효과도 나타나 용량을 1.7배로 늘린 추가 임상을 거쳐
비만 치료제로 승인이 난 것이다.
리라글루타이드의 체중 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5.4%로 펜터민/토피라메이트보다는 작지만 대신
부작용이 덜하다.
리라글루타이드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호르몬과 구조가 비슷해 GLP-1 수용체에 달라붙어 신호를 보낸다. GLP-1은 비교적 늦게 실체가 드러난 호르몬이다.
같은 양이라도 포도당 주사를 맞을 때보다 포도당을 먹을 때 혈당조절이 잘 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했고 마침내 음식을 먹을 때 장에서 분비되는 GLP-1을 찾았다.
GLP-1은 췌장 베타세포의 인슐린 분비를 늘리고 췌장 알파세포 글루카곤 분비를 줄여 혈당조절을 돕는다.
인슐린은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합성하게 유도하는 호르몬이고 글루카곤은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분해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호르몬이다(서로 반대 역할).
혈당을 낮추는 걸 부추기고 높이는 걸 억제하니 일석이조다.
다만 인슐린과는 달리 GLP-1 자체를 외부에서 투입할 수는 없다는 게 문제다.
혈액에는 GLP-1을 분해하는 효소인 DPP-4가 있어 GLP-1의 반감기(농도가 절반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가 1~2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러 제약회사가 차세대 당뇨병 치료제로 GLP-1처럼 작용하면서도 DPP-4에 버티는 약물을 개발하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2005년 최초의 GLP-1 모방 당뇨병 치료제인 엑세나타이드가 FDA 승인을 받았다.
엑세나타이드의 반감기는 2.5시간으로 여전히 짧은 편이라 하루 두 번 주사해야 한다. 5년 뒤 출시된 리라글루타이드는 반감기가 12시간에 이르러 하루에 한 번만 주사하면 된다.
그럼에도 메트포르민 같은 기존의 먹는 당뇨병 치료제가 있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런데 리라글루타이드를 투여한 당뇨병 환자들의 체중 감소 효과가 보고되자 회사는 용량을 늘려 본격적인 임상에 들어갔고 2014년
비만 치료제로 승인을 받은 것이다.
모든 약이 그렇듯이 리라글루타이드 역시
부작용이 있다.
주로 소화계
부작용으로 메스꺼움과 설사가 가장 흔하다.
다만 대부분 일시적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잦아든다.
다른
비만 치료제에 비해
부작용이 적다는 것도 리라글루타이드가 출시 5년 만에 점유율 56%에 이르는 데 한몫했다.
그럼에도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하는 건 아쉬운 점이다.
만일 주사 맞는 간격을 늘릴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찾을 것이다.
이 목표로 리라글루타이드 분자를 개선해 나온 게 바로 세마글루타이드로 반감기가 160시간으로 크게 늘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주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임상시험 결과 세마글루타이드는 68주 뒤 몸무게가 평균 14.8%나 줄었고
부작용은 리라글루타이드보다 적었다.
참고로 기존
비만 치료제 가운데는 10% 감량에 이른 것도 없다.
세마글루타이드는 약효와
부작용 모두에서 차원이 다른
비만 치료제라는 말이다.
평생 먹어야 하는 약?
앞서 언급했듯이 GLP-1
따라서 5년 전부터 심혈관질환 위험군을 대상으로 세마클루타이드 임상시험이 진행됐고 최근 그 결과가 일부 발표됐다.
이에 따르면 투여군은 심각한 심혈관질환 발생률이 20% 낮았다.
바꿔 말하면
비만 치료제로 쓰더라도 당뇨병과 심혈관질환 예방 효과를 덤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결과 기대수명도 꽤 늘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세마클루타이드보다 체중 감량 효과가 더 뛰어난 약물들도 출시를 앞두고 있다.
이들은 GLP-1뿐 아니라 식욕 억제나 대사 활성화에 관여하는 다른 호르몬의 작용도 동시에 모방하는 약물이다.
지난해 2형당뇨병 치료제로 FDA 승인을 받은 티르제파타이드는
비만 치료제 임상시험 결과 72주 뒤 투여량에 따라 15~20%의 체중 감량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티르제파타이드는 GLP-1뿐 아니라 비슷한 작용을 하는 GIP 호르몬도 모방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주사제가 아니라 먹는 약도 개발되고 있다.
지난 6월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는 GLP-1 모방 약물이면서 경구투여제인 오르포글리포론의 임상시험 결과가 실렸다.
펩타이드 구조인 앞서 약물들과는 달리 합성 약물로 위와 장에서 상대적으로 흡수가 잘 된다.
하루 한 알 먹는 오르포글리포론은 36주 후에 투여량에 따라 9.4~14.7%의 체중 감량 효과를 보였다.
그럼에도 모든 게 장밋빛인 건 아니다.
기존
비만 치료제에 비해
부작용이 적다지만 체질적으로 약이 안 받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약을 투여할 때만 식욕 억제 효과가 유지된다는 것도 문제다.
뇌 식욕중추가 약물을 호르몬으로 착각해 속는 것일 뿐 회로 자체가 재설정되는 게 아니므로 약을 끊으면 대부분은 식욕이 돌아와 다시 살이 찐다.
당뇨약이나 혈압약처럼 평생 달고 사는 약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리는데
부작용 면에서는 장기 복용이 별문제가 없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다만 약 값이 꽤 비싼 편이라 ‘
비만의 불평등’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현재 세마글루타이드의 한 달 치료비는 1000달러(약 130만 원)가 넘는다.
약을 살 돈이 없는 사람은 주변에서 효과를 본 사람을 지켜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릴 것이다.
이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문제이기는 하다.
현재 많은 제약회사가
비만 치료제 개발에 뛰어든 상태라 머지않아 신약이 쏟아져 나오면 경쟁이 치열해져 약 값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오르포글리포론만 해도 만들기가 덜 까다로워 시장에 나올 때 가격이 꽤 낮게 책정될 가능성이 크다.
아마 2050년 무렵이면 지금의 당뇨약이나 혈압약처럼 부담 없이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때쯤은 먹는 약이 주류일 것이고 주사제도 투약 간격이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벌어질 것이다.
새로운 개념의
비만 치료제 등장으로 식욕을 둘러싼 줄다리기에서 촉진하려는 식품회사로 쏠린 밧줄이 억제하려는 제약회사 쪽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식품업계에는 좀 미안한 얘기이지만 인류 건강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방향 전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