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자기 그릇 만큼밖엔 담지 못하지

 


사랑이란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사후에 더 유명해진 미국 여성 시인입니다.

어릴 때는 들판에서 활발하게 뛰놀고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린 소녀였지요. 그러다 사춘기 때 여학교의 경직된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중퇴한 뒤로는 바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25세 때 아버지를 만나러 워싱턴을 방문한 게 거의 유일한 여행이었죠. 돌아오는 길에 필라델피아의 친구 집에 머무르면서 찰스 워즈워스 목사의 설교를 듣고 푹 빠졌는데다.
목사는 하필 기혼자였습니다.
혼자 콩닥거리는 짝사랑이었으므로 별 사건은 없었지만 이별할 때 그녀의 마음은 미어지는 듯했지요.
고향에 온 뒤에도 그와 영혼의 문제를 다룬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꿈꿨으나 결국 ‘저는 당신과 함께 살 수 없어요’라는 시로 슬픔을 혼자 삭여야 했습니다.
30세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은둔한 그녀는 흰옷만 입는다고 해서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그의 대인기피 증세는 종교적 갈등과 병약한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딸의 책임감다.
아버지와의 생각 차이 등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요. 짝사랑했던 목사와의 이별뿐만 아니라 자신을 ‘북극성처럼 빛나는 존재’라고 호평해준 로드 판사의 죽음 때문에 절망했다고 해요.
로드는 그녀가 48세쯤 사모했던 판사로 아버지의 친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로드에게 쓴 편지에 온화하고 성숙한 사랑을 담아 보냈고다.
그도 그녀의 사랑에 호응했지만 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지요.
5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남긴 작품은 방대했습니다.
시가 1775편에 이르렀고 산문 124편다.
편지 1049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생전에는 익명으로 시 7편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서랍 속에 넣어두었죠.
시에는 제목 대신 번호만 붙어 있습니다.
1540번 시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라는 시도 이별을 다루고 있네요. 여름이 슬픔처럼 살며시 사라져서 배신 같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라고 했습니다.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너무나 살며시 사라져
배신 같지도 않았네-
고요가 증류되어 떨어졌네.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처럼다.

아니면다.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자연처럼-
땅거미가 조금 더 일찍 내렸고-
낯선 아침은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다.
애타는 마음으로
햇살을 내밀었네-
그리하여다.
새처럼다.

혹은 배처럼다.

우리의 여름은 그녀의 빛을
미의 세계로 도피시켰다네.

그건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이나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자연’이기도 하고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다.
애타는 마음으로’ 햇살을 밀어내는 쓸쓸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처연하기 짝이 없는 계절·세월과의 결별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삶인 ‘여름’이 그녀의 빛을 미지의 세계로 도피시켰기 때문이지요. 응축된 단어와 구다.
시형 등은 오랜 은둔 생활에서 체득한 것이죠. 가장 평범한 것과 초월적인 것을 대비시키며 허무와 죽음다.
상실과 이별을 노래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온몸이 싸늘해져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게 될 때다.
그것이 바로 시다.
머리끝이 곤두서면 그것이 바로 시다.
나는 오직 그런 방법으로 시를 본다.

그 시의 정신은 싸늘하고 차가워서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었지만다.
그의 삶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의 명징한 의식으로 벼려져 있습니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랑의 ‘그릇’을 새삼 발견하지요.


사랑은 자기 그릇 만큼밖엔 담지 못하지 [고두현의 아침 시편]

 


사랑이란
에밀리 디킨슨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

에밀리 디킨슨(1830~1886)은 사후에 더 유명해진 미국 여성 시인입니다.
어릴 때는 들판에서 활발하게 뛰놀고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린 소녀였지요. 그러다 사춘기 때 여학교의 경직된 분위기에 염증을 느껴 중퇴한 뒤로는 바깥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25세 때 아버지를 만나러 워싱턴을 방문한 게 거의 유일한 여행이었죠. 돌아오는 길에 필라델피아의 친구 집에 머무르면서 찰스 워즈워스 목사의 설교를 듣고 푹 빠졌는데다.
목사는 하필 기혼자였습니다.
혼자 콩닥거리는 짝사랑이었으므로 별 사건은 없었지만 이별할 때 그녀의 마음은 미어지는 듯했지요.
고향에 온 뒤에도 그와 영혼의 문제를 다룬 편지를 주고받으며 ‘지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를 꿈꿨으나 결국 ‘저는 당신과 함께 살 수 없어요’라는 시로 슬픔을 혼자 삭여야 했습니다.
30세 이후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은둔한 그녀는 흰옷만 입는다고 해서 ‘뉴잉글랜드의 수녀’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그의 대인기피 증세는 종교적 갈등과 병약한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딸의 책임감다.
아버지와의 생각 차이 등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요. 짝사랑했던 목사와의 이별뿐만 아니라 자신을 ‘북극성처럼 빛나는 존재’라고 호평해준 로드 판사의 죽음 때문에 절망했다고 해요.
로드는 그녀가 48세쯤 사모했던 판사로 아버지의 친구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로드에게 쓴 편지에 온화하고 성숙한 사랑을 담아 보냈고다.
그도 그녀의 사랑에 호응했지만 둘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지요.
56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남긴 작품은 방대했습니다.
시가 1775편에 이르렀고 산문 124편다.
편지 1049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생전에는 익명으로 시 7편만 발표하고 나머지는 서랍 속에 넣어두었죠.
시에는 제목 대신 번호만 붙어 있습니다.
1540번 시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라는 시도 이별을 다루고 있네요. 여름이 슬픔처럼 살며시 사라져서 배신 같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라고 했습니다.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슬픔처럼 살며시
여름이 사라졌네-
너무나 살며시 사라져
배신 같지도 않았네-
고요가 증류되어 떨어졌네.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처럼다.

아니면다.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자연처럼-
땅거미가 조금 더 일찍 내렸고-
낯선 아침은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다.
애타는 마음으로
햇살을 내밀었네-
그리하여다.
새처럼다.

혹은 배처럼다.

우리의 여름은 그녀의 빛을
미의 세계로 도피시켰다네.

그건 ‘오래전에 시작된 석양’이나 ‘늦은 오후를 홀로 보내는 자연’이기도 하고 ‘떠나야 하는 손님처럼/ 정중하지만다.
애타는 마음으로’ 햇살을 밀어내는 쓸쓸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처연하기 짝이 없는 계절·세월과의 결별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삶인 ‘여름’이 그녀의 빛을 미지의 세계로 도피시켰기 때문이지요. 응축된 단어와 구다.
시형 등은 오랜 은둔 생활에서 체득한 것이죠. 가장 평범한 것과 초월적인 것을 대비시키며 허무와 죽음다.
상실과 이별을 노래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온몸이 싸늘해져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게 될 때다.
그것이 바로 시다.
머리끝이 곤두서면 그것이 바로 시다.
나는 오직 그런 방법으로 시를 본다.


그 시의 정신은 싸늘하고 차가워서 어떤 불덩이로도 녹일 수 없었지만다.
그의 삶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의 명징한 의식으로 벼려져 있습니다.
그런 삶에서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랑의 ‘그릇’을 새삼 발견하지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다.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다.
김만중문학상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긴 수업 시간” [고두현의 인생명언]

고두현2023.08.28

 


“인생은 겸손을 배우는 긴 수업 시간이다.

소설 <피터 팬>의 작가 제임스 매슈 배리가 한 말이다.
그의 문학적 성취도 겸손에서 나왔다.
그는 낮은 자세로 겸손을 체득한 사람만이 인생의 토양에서 성공의 싹을 틔울 수 있다는 것을 삶과 작품으로 보여줬다.



겸손은 사람됨의 근본이다.
한자로 겸손할 겸(謙)은 말씀 언(言)과 겸할 겸(兼)을 결합한 글자다.
겸(兼)은 벼 다발을 손에 쥐고 있는 형상으로 ‘아우르다’ ‘포용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인격과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은 자신을 낮추고 말을 공손하게 하는 법이다.
겸손할 손(遜)은 ‘후손에 전하다’의 뜻을 함께 지녔으니 대를 잇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영어 단어 겸손(humility)의 어원은 흙을 뜻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다.
흙 중에서도 영양분과 유기질이 많은 부식토다.
사람(human)이라는 단어도 흙에서 유래했다.
겸손은 흙에서 나온 사람을 성장시키는 토양이다.

겸손의 반대어인 교만(驕慢)은 잘난 체하고 뽐내며 건방지다는 말이다.
교만할 교(驕)는 말 마(馬)와 높을 교(喬)로 이뤄져 있다.
말을 높이 타고 아래를 얕잡아본다는 의미다.
병법에서도 교병필패(驕兵必敗)라고 해서 교만한 병사는 적에게 반드시 패한다.

거만할 만(慢)은 마음 심(心)과 ‘손으로 눈을 벌려 치켜뜬’ 모습의 끌 만(曼)을 합친 것으로다.
눈을 부라리는 태도를 가리킨다.
영어 거만(haughtiness)이 프랑스어 ‘높은(haut)’에서 왔고다.
라틴어 어원도 ‘높은(altus)’이니 겸손과 상반된다.

그러고 보니 성공(success)이란 말도 ‘흙을 뚫고 나온다’는 뜻의 라틴어 수케데레(succedere)에서 왔다.
흙에서 씨앗이 뚫고 나오는 것이 곧 성공이다.
겸손의 땅에 뿌린 씨앗이 더 잘 자란다.

조선 명재상 황희(黃喜·1363~1452)는 세종 때 영의정 18년다.
좌의정 5년다.
우의정 1년을 합쳐 24년간 정승을 지냈다.
장수 비결은 뛰어난 능력과 겸손의 덕이었다.
그는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몸을 낮췄다.
관노였던 장영실을 과학자로 관직에 올리고다.
노비의 아이가 수염을 잡아당겨도 마음 좋게 웃어 ‘허허 정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딱 한 사람다.
6진 개척과 여진족 정벌에 앞장선 김종서에게만 예외였다.
북방에서 복귀한 김종서가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는 걸 보고는 “저놈 의자 다리가 한쪽 망가진 모양이니 고쳐줘라”고 따끔하게 혼냈다.
자기 뒤를 이을 재목으로 점찍은 김종서에게 겸손을 가르치려고 일부러 엄하게 대한 것이다.


황희와 함께 조선 명재상 ‘투톱’으로 꼽히는 맹사성(孟思誠·1360~1438)도 겸손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그는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공복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가 맞아들이고 돌아갈 때도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이런 자세는 젊은 시절 한 고승에게 배운 것이다.

그는 고승에게 목민관의 도리를 물었다가 “나쁜 일 말고 착한 일만 하라”는 말을 듣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에 고승은 찻잔 가득 넘치도록 차를 따랐다.
그가 놀라 잔이 넘친다고 하자 “찻잔이 넘쳐 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라고 했다.

당황한 그가 황급히 일어서다 문틀에 부딪혔다.
그러자 고승이 “고개를 숙이면 부딪히는 법이 없지요”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의 덕목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 겸손이다.
미국 경영학자 짐 콜린스도 “위대한 정치가와 최고경영자(CEO)들은 아주 겸손하다”고 말했다.

고두현 시인 kdh@hankyung.com



오른손 못 쓰자 왼손으로 서예·피아노까지 [고두현의 문화살롱]

 

■ 거장들의 '왼손 투혼'
'左手 명필' 김응현 유희강 황욱
절망 딛고 악전고투 '神筆' 경지
한 팔 잃고 '왼손 피아니스트' 재기
양손 연주보다 더 감동 준 대가들

고두현 시인

1차 대전 때 오른팔을 잃고 포로수용소에서 나무판자로 연습한 '왼손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


처음 보는 필체였다.
신필(神筆)의 경지에 오른 거장이 천진한 아이처럼 놀린 붓인가 싶었다.
‘좌수서전(左手書展)’이라는 안내판을 보고서야 왼손으로 쓴 글씨인 줄 알았다.
강원 인제 만해마을 인근에 있는 여초서예관. 만해축전 행사의 하나로 ‘님의 침묵 서예대전 수상작 전시회’를 연 이곳에서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 1927~2007)의 왼손 글씨를 발견하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그는 1999년 교통사고로 오른손이 골절되는 사고를 당한 뒤 왼손으로 글씨 쓰는 연습에 매진했다.
그냥 연습만 열심히 한 게 아니라 본격적인 서법을 개발했다.
그 덕분에 2000년과 2001년 한·중 양국에서 왼손 글씨만 모은 ‘좌수서전’을 연달아 열었다.

왼쪽 손바닥으로 붓 잡고 쓰기도

뇌졸중으로 한참을 누워 지냈고 양쪽 눈과 신장다.
발바닥 등의 수술을 몇 차례나 하는 동안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신께서 쉬라는 뜻으로 글 쓰던 손을 못 쓰게 했건만 결국 천성을 누르지 못하고 쌍수(雙手) 서예가가 돼 우리 시대의 축복이 됐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는 여섯 살 위인 형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과 함께 한국 서예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보다 먼저 왼손 글씨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은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다.
그는 오른손이 떨리는 수전증을 겪자 붓을 손바닥으로 잡고 글씨를 쓰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했고다.
1980년대 중반 왼손만 사용하는 좌수악필(左手握筆) 서체를 완성했다.
꿈틀거리는 모양의 장엄한 글씨체를 구사했던 그가 65세에 수전증을 손바닥으로 극복한 뒤 왼손만으로 작품을 이어 나간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 같다.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도 왼손 글씨로 이름난 서예 대가다.
그는 칼같이 날카롭고 견고한 필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호를 ‘칼날 같다’는 의미의 검여(劍如)로 정했다.
50대 후반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몸이 마비됐을 때 그는 불편한 몸을 일으켜 왼손 글씨 연습에 매진했고다.
격조 높은 좌수서의 새 지평을 열었다.
좌수 전시회에 이어 왼손 글씨만 엮은 좌수 서예집도 출간했다.
그가 생애 마지막 8년간 보여준 불굴의 투혼과 각고의 노력은 인간 승리의 대표 사례가 됐고다.
‘인간 만세’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강원 인제 여초서예관에 전시된 여초 김응현의 좌수서(左手書). 오른팔을 다쳤을 때 쓴 글씨다.

서예 쪽에만 이런 사례가 있는 건 아니다.
피아니스트 중에서도 오른손을 잃고 왼손으로 재기한 ‘부활’의 주인공이 많다.
오스트리아의 왼손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1887~1961)이 대표적이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이기도 한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총상으로 오른쪽 팔을 잃는 비운을 겪었다.
피아니스트에겐 생명이나 다름없는 오른팔을 잃었으니 앞이 캄캄했다.
포로수용소로 끌려간 그는 분노나 좌절 대신 불굴의 도전을 택했다.
수용소에 굴러다니는 나무판자를 주워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왼팔과 왼손의 감각을 익혔다.

이듬해 풀려난 뒤에는 본격적인 왼손 훈련에 힘을 쏟았다.
1년 뒤인 1916년에는 왼손 피아니스트로 첫 연주회를 여는 데 성공했다.
그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한 손으로 연주한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밀도 높은 감동을 선사했다.
이로써 그는 ‘왼손의 비르투오소(거장)’라는 칭호를 받았다.


오른손이 마비돼 한동안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연주했던 미국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

미국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1928~2020)도 멋진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데뷔 때부터 ‘젊은 라흐마니노프’로 불린 그는 최전성기인 37세에 근육긴장이상증으로 오른쪽 손가락을 쓸 수 없게 됐다.
이후 피나는 노력으로 불운을 극복한 그는 35년 동안 ‘왼손 협주곡’의 신기원을 열었다.
생전에 그는 “두 손을 모두 써서 연주했을 때만큼 한 손으로도 음악과 내가 연결된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와 동갑내기인 게리 그래프먼(95) 또한 왼손 피아니스트다.
그도 오른손이 마비되는 시련을 극복하고 왼손 피아니스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50대에 오른손 넷째다.
다섯째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그는 작곡가 윌리엄 볼컴에게 왼손을 위한 곡을 부탁했다.
그것도 왼손 하나가 아니라 두 왼손을 위한 곡이었다.
이 곡을 초연한 1996년 그는 왼손 피아니스트 플라이셔와 함께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왼손뼈 27개다.
팔뼈 5개로 '협주'

우리나라에도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재기한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가 있다.
그는 2012년 미국 신시내티 음대 박사 과정 때 쓰러져 뇌수술을 받았으나 왼쪽 뇌의 60%가 손상되는 바람에 오른쪽 반신 마비에 언어 장애를 겪었다.
오른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혹독한 훈련을 이어가며 감동적인 연주로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우리는 왼손 연주만으로도 얼마나 뛰어난 음악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다.
이들의 성취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더욱이 왼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면 우뇌와 좌뇌가 함께 발달해 전뇌적(全腦的) 역량이 커진다.

서예 대가들의 왼손 글씨나 피아니스트들의 왼손 연주는 오른손 연습보다 훨씬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더욱 숭고하다.
왼손에 있는 뼈 27개와 팔뼈대 5개 등 32개의 뼈가 협주곡처럼 어우러져야 제대로 된 선율이 나온다.
다산 정약용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느라 복사뼈(骨)에 세 번이나 구멍이 났던 ‘과골삼천(骨三穿)’의 지난한 여정과도 닮았다.

이들은 육체적 훈련뿐 아니라 정신적 성찰을 통해 ‘신필의 경지’와 ‘왼손의 기적’을 일궈냈다.
비운에 낙담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아가는 삶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플라이셔의 생전 조언이 귀에 쟁쟁하다.
“낙담하고 어둠에 싸이고 희망을 잃기는 아주 쉬워요. 그러나다.
다음 날 아침다.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가지고 잠을 깰 수 있어요. 그 가능성을 절대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 가능성에 마음을 열어 놓고 항상 찾으십시오.”



거친 바다가 유능한 뱃사람을 만든다 [고두현의 아침 시편]

 


실패할 수 있는 용기
유안진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도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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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한 모든 일에서 나는 실패와다.
실패와다.
실패를 경험했다.
세일즈맨이 됐을 때 수백 번의 실패를 경험했고다.
경영진이 되어서도 끝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성공하기 전에 내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성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라이언 트레이시가 털어놓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실패학’을 ‘성공학’의 지렛대로 활용한 사람이지요. 그가 거친 직업만 22개. 쓰라린 생의 변곡점마다 그는 실패의 눈물 속에서 성공의 꽃망울을 피워 올렸습니다.

캐나다 동부의 한 섬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곧바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했죠. 접시닦이부터 시작해서 벌목공·주유소 점원·화물선 잡역부 등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중고차에서 새우잠을 잤습니다.

그러다 세일즈맨이 돼 일선 판매에 나섰는데다.
애송이의 영업 실적은 형편없었지요. 생활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래다.
내 인생을 바꾸자!” 그리고 종이 한 장을 펼쳐 자신의 목표를 하나씩 썼습니다.
‘방문 판매를 통해 한 달에 1000달러씩 번다.

딱 한 달 후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판매 실적은 놀라울 정도로 급상승했고요. 마침내 그는 매달 1000달러의 월급을 받으면서 판매사원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 후로도 그는 실패할 때마다 종이를 펼쳐놓고 새로운 목표들을 적은 다음 구체적인 방법을 찾곤 했지요. 이것이 바로 세계적인 ‘브라이언 트레이시 목표 설정 기법’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용기마저 비켜 간다고 하죠? 지식생태학자로 유명한 유영만 한양대 교수도 브라이언 트레이시 못지않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공업고등학교에 다녀야 했고 대학도 고학으로 마쳤죠.
졸업 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접시닦이와 잡역부로 일하며 박사 학위를 받았고다.
삼성인력개발원에서 현장 경험을 쌓은 뒤 모교의 교수가 됐습니다.
그는 “생(生)은 소(牛)가 외나무다리(一) 위를 건너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용기 있게 다리 위에 올라서서 참된 삶(生)을 향해 도전할 것인가다.
머뭇거리다 그냥 주저앉고 말 것인가.”
그는 용기야말로 미래를 잃은 사람이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희망 에너지라고 강조합니다.
그의 책 <용기>에 이런 대목이 나오지요.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실수할까 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거라네.”
실패만 거듭하는 소심형 샐러리맨에게 스승이 들려준 얘기입니다.
주인공은 위기에 몰린 혁신 프로젝트팀의 말단 사원. 스승은 그에게 생(生)이라는 한자 얘기와 함께 인생의 위기는 건너야 할 ‘외나무다리’를 회피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용기’를 내 당당히 건너가라고 가르칩니다.


유영만 교수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용기란 마지막 1%의 힘”이라고 역설합니다.

“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때는 정말 뜨겁고 대단해 보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뜨거운 열정과 파워 넘치는 삶을 원하지만다.
정작 1%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용기란 거창한 게 아니지요. 일상에서 작은 도전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갈 때 ‘1%의 용기’는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오늘 여러분은 용기 있는 삶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마크 트웨인도 그랬죠. “용기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며 극복”이라고 말입니다.
평온한 바다는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 수 없지요. 그래서 오늘다.
유안진 시인의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오래도록 음미해 봅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다.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다.
김만중문학상다.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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