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1
서울경찰청이 운영하는 ‘오늘의 집회/시위’라는 홈페이지가 있다.
서울경찰청에 신고된 집회 내용을 장소와 인원 그리고 관할서를 일자별로 정리해서 올려놓고 있다.
9월 16일 토요일의 집회를 살펴보면 다양한 집회
신고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한강대로, 전통적인 서울의 중심지인 세종대로와 종로, 그리고 국회가 있는 여의도에 수만명이 참석하는 집회가 차로를 막고 진행되었다.
수만명이 거의 매 주말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원인이라고 많은 이가 생각하지만 OECD가 최근 발표한 ‘정부 한눈에 보기 2023, Government at a Glance’를
보면 정작 시위의 원인은 정부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단체적인 의사 표시를 통해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심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을 기준으로 정부
신뢰도가 높거나 보통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우리나라의 경우 48.8%로 OECD 평균 41.4%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노르웨이(63.8%), 핀란드(61.5%) 등 북유럽 국가에 비하면
낮지만 일본(24%), 프랑스(28.1%), 영국(34.8%)보다는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이며 캐나다(44.7%), 네덜란드(49.1%)와 비슷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 국민은 기본적으로
중앙정부의 효율성과 문제 해결 능력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공공 서비스가 있을 경우 많은 사람이 불만을 제기하면 개선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대한민국은 OECD 평균 40.1%를 훌쩍 뛰어넘는 57.6%를 기록했다.
관련 조사가 이루어진 22국 가운데 최고 수준을
보여주었다.
일본(25.8%)은 물론 프랑스(38.1%), 영국(34.4%), 스웨덴(40.6%)을 한참 앞서는 이와 같은 응답은 우리 국민이 지난 수십년간 ‘민원’을 통해 더 높은 공공 서비스를 받아온 경험에 따른 것이다.
집단적 의사 표시가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는 것이다.
공청회 등 공개적 의견 수렴(public consultation) 과정을 통해 제시된 의견이 채택되거나 반영될 가능성이 높다고 응답한 비율의 경우도 대한민국은 48.5%에 이르는데 이는 OECD 평균 32%를 한참 앞지르는 수치이다.
일본(16.8%)은
물론 의견 수렴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영국(29%), 스웨덴(32%), 호주(35%)보다도 훨씬 높게 나타나고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이 의견을 표현하면 어떤 형태로든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다고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다.
중앙정부에 대한 이러한 높은
신뢰 수준에 비해 지자체에 대한 인식은 다르다.
지자체 차원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44%로 OECD 평균 41%와 유사하다.
영국(50%),
멕시코(51%), 아일랜드(52%), 네덜란드(53%)에 비하면 많이 낮은 수준이다.
이런 결과는 우리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즉
중앙정부에 대한
신뢰는 상대적으로 높으며 많은 사람이 집단적으로 의사 표시를 하고 요구를 하면 그것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지자체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더 어렵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 구조에 따라 우리 사회는 어떤 이슈든 광화문, 용산 그리고 여의도라는 중앙 행정과 중앙 정치 무대에 일단 올리는 것을 원한다.
무대에 올리는 방법 가운데 대규모 인원이 동원되는 집회와 시위가 가장 효과적이고
분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효율적이고 문제 해결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중앙정부, 그리고 여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회를 어떻게든 당사자로 만들어야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문제 해결 방식인 것이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우리의 DNA에 깊이 새겨져 있는 본능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7년 동안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핸더슨이 1968년에 펴낸 ‘소용돌이의 한국정치’에서 분석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은 55년이 지난 현재도 유효하다.
핸더슨이 묘사한 한국은 모든 문제를 중앙 권력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며, 모두가 중앙의 이슈에 매달리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모습이다.
촌락과 왕권 사이에 제도적 기구나 자발적 결사체 등 중간 매개 집단이 형성되지 못하면서 모두가 서울의 권력을 갈구하거나 비판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는 그의 분석은 매서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중앙정치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관심을 표하지만 정작 자신이 거주하고 생활하는 지역의 정치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모순을 설명하는 데 핸더슨의 분석은 여전히
가장 유효하다.
모두가
중앙정부와 정치권을 바라보면서 정작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정치권과
중앙정부를 통해 한 번에 예산을 따오고 제도를 변화시켜 조직과 인력을 배정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데
굳이 스스로 힘과 노력을 들여 무엇인가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 역시 무엇인가를 하려면 반드시 예산과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가 뉴욕시가 아닌 민간에 의해 구성된 관리위원회에 의해 일상적인 관리가 이루어지며, 전체 예산의 80% 이상을 기부 등을 통해 조달하는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우리는 ‘우리의 일은 스스로 한다’는 자조의 정신을 잃어버렸기에 미국 대통령 책상에 주기적으로 올라가는 가뭄 지도가 연방기구가 아닌 네브래스카
대학이 자원봉사자와 기관의 협조를 통해 만들고 있다는 것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효율적이고 능력 있는 정부라도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스스로의 문제를 당사자들이 풀어가고자 하는 인식의 전환이 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인한 불편을 최소화하는 가장 빠른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