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익은 상처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이전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썼다.
“인생이 서글픈 건,
승자도 결국은 얻어맞기 때문이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상처 없는 얼굴로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복서 따윈 없다.
단지 덜 맞고,
더 맞고의 차이가 있을 뿐.” 살다 보면 누구나 상처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느끼고 살고,
어떤 이는 잊으려 노력하며 산다.
하지만 우리는 ‘내 안의 어린아이’와 살며,
어른이 돼도 상처 입은 마음속 아이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폭력,
어떤 이에겐 냉정함이나 가난이 어린 시절 상처로 남는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양철통에 들어있는 ‘데니시 버터쿠키’만 보면 사는데,
어릴 적 짝꿍이 혼자 먹던 그 쿠키가 자신에게는 상처였다고 한다.
오래전,
배우 최진실 사후 TV 추모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쓰던 옷장에서 나온 공책과 연필을 보았다.
모친은 어릴 적 형편이 나빴던 그녀가 커서도 학용품을 사 모았다고 했다.
상처받은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 속의 충족되지 않은 뭔가를 찾아 헤맨다.
데니시 쿠키와 학용품은 그녀들이 어른이 되어 ‘내 안의 아이’에게 주는 치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상처가 적은 인생이 좋지만 더 좋은 건 상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를 극복해야 좋은 인생은 아니다.
현재의 고통이 모두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고 믿고,
굳이 과거로 돌아가 상처를 헤집을 필요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스스로 주워 자꾸 자신의 몸에 꽂으며 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이미 생긴 상처를 잘 받아들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가수 임영웅이 어릴 적 사고로 생긴 얼굴의 상처를 “내 얼굴에는 나이키가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어떤가.
축복을 뜻하는 ‘bless’는 상처를 뜻하는 프랑스어 ‘blessure’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우리 몸의 근육도 상처 받고 찢어지며 더 단단한 근육으로 성장한다.
비를 맞은 사람은 무지개를 볼 수 있고,
어둠 속의 사람은 별을 볼 수 있다.
복효근의 시 ‘상처에 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말과 대화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말하기와 글쓰기 중 한 가지 능력을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고를까. 대부분 말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은 생각이 깊고 창의적이다.
내가 만나본 말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곰곰이 답해본 후,
오래 그것을 성찰해온 점이다.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해 본 사람이 타인과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짝짓기 예능을 종종 본다.
인간 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이런 프로그램에는 유독 ‘말’이 넘치는데,
남녀 간 대화 양상을 관찰하며 커플로 성사될 만한 남녀를 예측하는 게 꽤 흥미롭다.
이들의 대화는 대개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차 있는데,
경험상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많이 이야기할수록 연인이나 부부가 되는 비율이 높았다.
이혼이나 파경을 앞둔 커플이 더 이상 미래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살다 보면 말을 잘하는 사람도,
못하는 사람도 만난다.
그들 중에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매스컴에 자주 나오는 유명인을 만난 적이 있다.
1분에 한 번 웃음이 터질 정도로 달변가였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대화 끝에 오는 피곤함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말을 잘했지만 대화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나’였는데 테이블에 오르는 모든 주제를 ‘나’로 전환하는 습관 때문인지,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에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는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구절이 있다.
침묵은 신뢰할 수 있는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대화 형식이다.
이런 침묵에는 ‘어색한’이란 형용사가 침범할 틈이 없다.
이때의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끝나는 곳에서 서서히 시작된다.
서로가 던진 말을 배드민턴의 셔틀콕처럼 부드러운 포물선으로 정확히 주고받는 것,
나는 그것이 최고의 대화가 아닐까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아기는 언어가 아닌 울음과 표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어른으로 성장하며 언어로 자기 감정과 의견을 표현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언어는 그 사람의 인품은 물론 종종 계급까지 드러낸다.
그것이 꼭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속한 나라와 단체가 쓰는 언어를 보면 그 집단의 품격과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 위정자들이 쓰는 언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는 우리 사회의 의식과 수준을 반영한다.
그런데 언어가 부적절하게 쓰이는 예는 많다.
가령 다양한 매체에서 폭력 학생을 뜻하는 ‘일진’이라는 용어는 뭔가 앞에서 잘나가는 느낌을 준다.
전세 사기범을 칭하며 쓴 ‘빌라 왕’은 어떤가. 그 지역의 가장 비싼 아파트를 ‘대장 아파트’라고 부르는 것 역시 그렇다.
대장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졸병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식시장에는 ‘정치 테마주’가 있는데,
정치인의 정책과는 무관한 학연,
지연 등에 투자하는 것이다.
‘정치 테마주’가 아니라 ‘부정부패 관련주’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

한국어로 ‘그 집 못산다’는 가난한 사람을,
‘그 집 잘산다’는 부자를 뜻한다.
김찬호의 책 ‘모멸감’에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것이라고 지적한다.
‘잘사는 것=well being’인데 왜 한국에서는 부자를 잘산다고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난해도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차별하고 비하하는 맘충,
틀딱,
지잡대 같은 말이 폭증하고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별생각 없이 말하다보면 그것이 우리의 인성이 되고,
인성이 모여 다시 인생이 된다.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이 된다.
성격은 (당신의) 모든 것이다.
” 마거릿 대처의 말이다.

애정 없는 좋은 말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대학생 때,
친구들과 광고 공모전을 준비한 적이 있다.
나는 카피라이터로 참여했는데 그때 팀의 회의 방식이 독특했다.
한 친구의 제안으로 아이디어 회의 때마다 누군가 한 사람은 계속 의견에 반대하는 역할을 맡았다.
회의 중 자기 의견에 딴지를 걸거나 비판하면 그 사람을 미워하기 마련인데,
이를 방지하고,
우리 아이디어를 과대평가하다가 정작 본선에서 탈락하는 과오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우리 회의 방식이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 전략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악마의 대변인’은 가톨릭에서 성인(聖人)을 추대할 때 후보의 결점이나 의심스러운 점을 지적하는 선의의 비판자를 말한다.
모두가 찬성할 때 합리적 반대 의견을 내고 비판적 대안을 제시해 집단 사고의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는 장치다.

영화 ‘넘버3′에는 송강호가 이끄는 작은 조폭 집단이 나온다.
어느 날 그가 조직원들에게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며 ‘라면만 먹고 금메달 딴 현정화’ 이야기를 한다.
그때 부하가 현정화가 아니라 ‘임춘애’라고 이름을 정정하자 격분한 그가 “내가 하늘이 빨간색이라고 하면 빨간색이야!”라고 소리 지르며 부하를 폭행한다.
이런 장면은 3류 조직에 특히 빈번하다.
다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는 집단은 영화 제목처럼 넘버3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세계적 투자가 ‘레이 달리오’는 반대 의견을 “애사심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까지 정의한다.
애사심이 없으면 반대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 신작을 출간하며 편집자에게 “듣기 좋은 소리 말고 뼈 때리는 직언”을 해달라고 몇 번이고 말한 이유는,
좋은 책을 만드는 게 칭찬을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 책을 내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뜻한 위로를 건네줄 친구는 가까이 두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내 옆에 두어야 할 친구는 진심으로 애정 있는 쓴소리를 해 줄 수 있는 친구다.
애정 없는 좋은 말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다.

공감이 힘든 이유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독서광으로 알려진 빌 게이츠가 평생 읽은 책 중 가장 중요하다고 꼽은 것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다.
1400페이지가 넘는 이 벽돌 책은 학문을 통섭하는 방대한 자료를 통해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의 폭력이 얼마나 감소했는지 추적 관찰한다.
‘팩트풀니스’의 저자 한스 로슬링은 더 나아가 다양한 통계를 통해 과거보다 지금이 훨씬 덜 폭력적이라는 증거를 제시한다.

내 의문은 이 많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폭력이 ‘전혀’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늘고 있다고 생각할까 하는 점이다.
학교 폭력 뉴스가 뜰 때마다 “우리 때는 저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라고 사람들은 되묻는다.
과거의 기억이 연한 아메리카노라면 현재의 기억은 진한 에스프레소에 가깝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팩트가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제 스마트폰과 SNS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정확히 말해,
알고리즘이 우리를 인도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짜 뉴스는 진짜 뉴스보다 6배 빨리 이동한다는 연구도 있다.
거짓이 진실보다 빠르게 퍼지는 것은 인류가 ‘혐오,
전쟁,
살인,
성범죄’ 같은 단어에 더 빨리 반응하기 때문이다.
주식 폭등보다는 폭락이,
스타의 결혼보다 이혼 기사에 먼저 반응한다는 뜻이다.
수많은 선플 속에 단 하나 악플만 있어도 그것은 우리를 무너뜨린다.
불행히 인류에겐 선천적 ‘부정 편향’이 있다.

위대한 석학들은 이런 편향을 바로잡으려 수많은 시도를 했다.
다만 이 시도는 번번이 우리의 편향성을 증폭하는 다양한 알고리즘에 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위험을 알아차리고 피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고 행복하게 하는 건 폭력과 혐오가 아닌,
긍정과 공감임을 깨달아야 한다.
잡초는 제거하지 않으면 무성히 자라 우리를 살리는 곡물을 결국 초토화한다.
잡초는 물을 주지 않아도 쑥쑥 자란다.
폭력과 혐오 역시 그렇다.
공감이 힘든 건,
물을 주고 거름을 줘야 자라나기 때문이다.

사실로 사람을 설득하기 어려운 이유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대화 중에 상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색해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증명하는 사람이 있다.
재밌는 건 그 사람 말이 사실로 확인돼도 상대가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는 점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이 틀린다는 사실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탈리 샤롯’ 같은 심리학자에 의하면 자기 신념과 다른 사실을 발견하면 사람은 원래 생각을 더 강화할 반론을 지어내기도 한다.
이른바 ‘탈진실의 탄생’이다.

팩트는 사람을 쉽게 설득하지 못한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에게 교주는 우리를 구하기 위해 온 메시아다.
담배의 유해함에 대해 100가지 사실을 열거해도 골초로 100세까지 산 할아버지를 둔 누군가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오히려 사람들이 끌리는 건 ‘감정’이다.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유창한 팩트 폭격을 펼칠 수 있겠지만 상대를 변화시키기 어렵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남의 생각을 바꾸는 게 왜 어려운지 알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서사’ 안에 살고,
그 안경으로 세상을 본다.
그러므로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길은 그의 ‘개인적 서사’에 공감하고,
대리 체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신념을 흔드는 것이다.
자밀 자키는 ‘공감은 지능이다’에서 “공감은 힘이 센 다른 영장류보다 빈약한 육체를 가진 인류가 장착한 진화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다른 영장류에 비해 훨씬 큰 흰자위와 얼굴 근육을 통해 서로의 눈빛과 표정을 보며 마음을 읽는다.

학교 폭력에 관한 뉴스보다 ‘더 글로리’ 같은 드라마를 보는 게 ‘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더 높이는 이유가 뭘까. 사실에 기반한 뉴스가 사람 마음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건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뇌의 확증 편향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간접 체험’을 통해 주인공의 아픔에 가 닿고,
고통에 공감하게 한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공감하면 반응하고 반응하면 변화한다.
이야기가 사실보다 힘이 더 센 이유다.

나를 사랑하는 법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내가 투자의 현인(賢人) 워런 버핏의 그림자에 가려져 2인자로 살았던 찰리 멍거에게 열광하게 된 건,
그의 특별한 사고체계 때문이었다.
그는 기업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고 싶을 때 그 기업이 파산하거나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부터 생각했다.
행복해지려면 불행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데 더 몰입했다.
이것이 그가 구축한 ‘거꾸로 사고법’이었다.
저녁형 인간이던 내가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아침 5시 기상’이 아니라 ‘밤 10시 취침’ 챌린지에 성공한 덕분이었다.

변화의 속도로 불안이 디폴트 값이 된 시대에 귀중한 삶의 기 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
가령 나를 ‘의도적으로’ 손님처럼 대접하고,
일 년에 몇 번 꺼내 쓰지 않는 가장 좋은 손님용 찻잔을 꺼내 나를 위해 일상적으로 쓰는 것이다.
혹여 깨질까 봐 쓰지 못하는 걱정은 ‘나 자신’을 귀한 손님으로 환대하는 마음으로 덮는 것이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건강,
미모,
명석함도 언젠가는 손님처럼 내 몸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박은옥의 노래 ‘양단 몇 마름’에는 “옷장 속 깊이 모셔 두고서/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보고/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라는 가사가 나온다.
예전 우리 할머니 세대들은 대체로 이런 삶을 사셨다.
보공(補空)은 관 속의 망인이 움직이지 않도록 채워 넣는 것을 말하는데 결국 가장 아끼던 좋은 옷은 보공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의 형편껏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중요하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
대청소를 하고 이불과 베개를 깨끗이 빨아둔다.
그러면 여행에서 돌아가는 아쉬운 마음도 집에 들어선 순간 누그러든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두 팔을 벌려 집이 나를 환대하는 것 같은 기분 때문이다.
빳빳한 침구와 반듯한 책상 역시 이리저리 삶에서 구겨진 내 자존감을 다독이는 든든한 친구처럼 느껴진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이토록 다양하다.

‘좋은’ 사람을 구분하는 법

midjourney·조선디자인랩


결혼 생활의 힘듦을 가장 유머러스하게 말한 사람은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다.
“결혼은 힘든 거야.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다고! 27년간 감옥에서 고문과 강제노역에 시달렸던 그도 출소 후 6개월 만에 아내와 이혼했다고!” 알랭 드 보통은 ‘독신에는 외로움’이 ‘결혼에는 괴로움’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처럼 인생은 외로움과 괴로움 사이 어느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남녀가 만나 한평생을 해로한다면 천국에 갈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내가 산책하는 공원에서 청춘 남녀들보다 아름다운 건 두 손을 잡고 느리게 걷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해질 녘 그 모습을 보면 사람도 좋은 풍경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언젠가 북 콘서트에서 어떤 사람과 결혼하면 좋을지를 묻는 분을 만났다.
참 어려운 질문이다.
사람마다 ‘좋음’의 기준이 다르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들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나는 거창한 말보다 그 사람의 작은 행동을 본다고 말한다.

운전할 때 양보해 주는 사람,
문을 열 때 뒷사람이 오는지 확인하는 사람,
식당에서 일어설 때 의자를 밀어 넣는 사람,
비 오는 날 상대에게 우산을 더 기울여 주는 사람,
약속 시간에 5분 먼저 오는 사람,
헤어질 때 한 번쯤 뒤돌아봐 주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잘하는 사람. 그러나 나에게만 잘해주는 사람이라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세상에 나에게만 잘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몇 가지 팁을 더하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을 때는 ‘음소거’ 버튼을 누르고 오직 그 사람의 ‘행동’만 보라고 충고한다.
나쁜 행동에 대한 기준이 명확해질 때라야 좋은 사람에 대한 안목이 생긴다.

오래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라는 제목의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에 정말 중요한 건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배웠던 것 같다.
나는 이제 거대 담론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작고 사소한 것들의 합이 우리의 인생임을 알기 때문이다.

적당한 침묵과 최고의 대화

대화만 하면 피곤한 사람이 있다.
우리는 대화에서 공감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자신의 얘기를 하느라 상대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전환반응’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대화를 ‘나’로 전환시켜 자신의 얘기만 하는 것이다.
가령 “요즘 몸이 좀 안 좋아”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나도 안 좋은데!”라고 말하는 식이다.
끊임없이 상대의 이야기를 자신의 스토리로 바꿔 버리는 이런 식의 대화는 우리를 지치게 한다.
좋은 대화는 “어디가 안 좋아?”라고 물으며 상대의 마음속으로 한걸음 더 들어가는 것이다.

정신과 문턱이 높을 때,
유독 사람들이 점집을 많이 찾던 이유 역시 꼭 그럴 듯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점쟁이야말로 내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이미 위로를 받는다.
그러니 대화 중 잘못된 정보가 있다고 해도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끝까지 들어야 한다.

늘 징징거리는 사람은 정작 타인의 울음은 듣지 못한다.
자신의 내부가 너무 시끄러우면 타인의 목소리가 묻히기 때문이다.
이때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한 건 적당한 양의 침묵이다.
대화에서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건 상대가 나의 어떤 말을 ‘기억’하느냐다.
말없이 친구의 말을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 대화가 끝날 무렵 친구에게 “오늘 조언 고마워. 정말 도움이 됐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저 친구의 눈을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친구가 울 때 손을 잡은 게 전부였는데도 말이다.
이런 대화에서 침묵은 제3의 청자다.

“내가 이야기꾼이라면 그건 내가 듣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꾼은 전달자라고 생각돼요.” 소설이 써지지 않을 때,
나는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John Berger)의 말을 떠올린다.
대개 좋은 이야기꾼들은 잘 듣는 사람이다.
듣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면 결국 상대도 침묵에 깃든 내 마음을 듣게 된다.
잘 듣는 것이 잘 말하는 것이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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