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의한 재조명, 다시 발코니

 

아파트 발코니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고, 노을을 벗 삼아 와인을 마신다.
무기질 가득한 빗물과 햇살을 흠뻑 받은 식물을 가꾸는 가드닝도 가능하다.
이것이 마당을 품은 전원생활의 단면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도심 아파트 발코니의 무한한 매력을 미처 몰라서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를 겪으며 미국과 유럽에서는 역세권 대신 ‘발코니 유무’가 주거지를 결정하는 새로운 잣대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를 겪으며 미국과 유럽에서는 역세권 대신 ‘발코니 유무’가 주거지를 결정하는 새로운 잣대로 떠오르고 있다.

(위 사진 모두) 60년 된 노후한 아파트에 발코니를 확장해 2019년 비스 반데어로에 건축상을 수상한 아파트와 내부 발코니 모습. / ©Philippe Ruault, Design: Lacaton & Vassal architectes; Frédéric Druot Architecture and Christophe Hutin Architecture

코로나19 시대의 장기화로 집의 역할이 거대한 변화를 맞은 지금, 발코니는 유일하게 안과 밖을 이어주는 무한대의 공간이다.
내 집에 속하면서 밖과 연결된 이 열린 공간은 타인과 가까이 마주하지 않고도 일광욕, 독서, 식사, 가드닝이 가능하고 이웃과 마음껏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완벽한 안전지대로 자리 잡았다.
최근의 이 현상을 영국 BBC 트래블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발코니는 자가 격리 시대에 사람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발코니는 지난 몇 달간의 팬데믹 장기화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더없는 힐링 공간이 되었다.
전 세계의 동향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유튜브 내에서는 발코니에 관한 다양한 삶의 풍경이 펼쳐진다.
두 쪽짜리 프렌치 도어를 열고 이웃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는 ‘발코니 콘서트’, 건물 외벽에 빔 프로젝터를 작동시켜 격리 중인 이들을 위로하는 ‘발코니 영화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연인들에게 대안인 ‘발코니 결혼식’, 가족과 함께 기도를 드리는 이슬람인 등 전 세계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그들 각각의 발코니에서 펼쳐졌다.

뉴욕에서는 최근 몇 달 사이 우선순위로 꼽는 집에 발코니 딸린 아파트가 올랐다.
대부분의 아파트 창문이 이웃 빌딩을 향해 난, 빌딩 간의 밀집도가 높은 이 도시에서 발코니가 공원이나 정원을 향해 돌출된 주택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위 사진 모두) 도서관과 44채의 시니어 룸으로 구성된 시카고 북부의 더 인디펜던스 라이브러리 앤드 아파트먼츠. / ©James Florio

발코니는 단순한 집의 부수적 공간을 넘어선다.
천편일률적인 펜스 형태의 테라스에서 벗어나 다양한 구조로 변형된 아파트 발코니는 그 지역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가늠할 수 있는 창이자 분위기를 좌우하는 디자인 요소로 기능한다.

미국 시카고 북부에 자리한 아파트 더 인디펜던스 라이브러리 앤드 아파트먼츠The Independence Library and Apartments는 거실 창 너머 작은 발코니에 무지개색 프레임을 더해 건물 전체에 생동감을 준다.
1층은 도서관, 2층은 62세 이상 시니어를 위한 44채의 방으로 구성한 이 독특한 건물은 ‘발코니는 네모반듯한 형태’라는 고정관념에 물음표를 던진다.
완벽한 수평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주변 아파트에 비해 견고한 느낌을 준다.
“발코니 색상과 크기에 변화를 주어 각 호마다 개성을 달리했고, 먼 거리에서도 자기 집을 식별할 수 있도록 생활 속의 재미를 유도했다.
존 로넌 건축 사무소John Ronan Architects의 설명은 발코니가 집의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로 자리 잡았음을 응축한다.

지난해 유럽연합에서 우수한 현대건축 작품에 수여하는 미스 반데어로에 건축상을 수상한 프랑스 보르도의 대형 아파트 역시 발코니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Transformation of 530 Dwellings – Grand Parc Bordeaux’라는 다소 긴 이름의 이 아파트는 1960년대에 지은 60년 된 건물로 내부 디자인을 손보는 대신 3개 동 전면에 발코니를 설치했다.
채광을 늘려 집을 밝게 연출하고 각 호별 야외 공간을 확보해 다양한 생활이 가능하도록 하는 데 발코니만큼 효율적인 것은 없다고 판단해서다.

(위 사진 모두) 포르투갈 리스본의 BA 아파트먼트. / ©Richard John Saymour, Atelier DATA / BA Apartment, Portugal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펜트 하우스 형태의 주거 공간에도 외부와 연결된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포르투갈 리스본의 
BA 아파트먼트는 주택과 아파트 최상위 층에 자리한 루프톱 구조로 발코니를 차단하지 않고 채양을 덧대어 레노베이션했다.
디자인 전문 매거진 <디자인붐Desginboom>, <디진Dezeen> 등에 소개되며 좋은 발코니 리모델링 사례로 꼽히는 이 공간은 도심 속 정원이 없는 많은 빌라가 밖과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을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사람들이 집을 선택할 때 ‘발코니’로 통용되는 테라스, 루프톱, 프렌치 도어 유무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맑은 공기를 마시고 야외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에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준비가 된 셈이다.

- 건축가 앨리슨 브룩스Alison Brooks, <디진>과의 인터뷰 중 -

한국에도 발코니 생활이 일상이던 때가 있었다.
1960년대 처음 발코니가 선보인 이래 2000년대 초반까지 아파트의 폭발적인 수요만큼이나 발코니도 보편적인 주거의 한 단면이 되었다.
하지만 2005년 발코니 확장 합법화 이후 ‘섀시’라는 신기술이 모든 아파트를 천편일률적으로 도배하며, 밖으로 난 유일한 공동주택의 외부 공간이 개성을 잃고 실내로 편입됐다.

발코니는 앞으로 한국에서도 아파트의 다양성을 가늠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실제로 최근 신축하는 브랜드 아파트에서 이 같은 변화가 감지된다.
다수의 브랜드 아파트가 각 동에 루프톱 형식의 2층 복층 구조와 그에 딸린 야외 테라스를 선보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안방에 딸린 베란다를 야외로 돌출시켜 과거 아파트의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새로운 시도다.
당장 창을 열고 한 걸음만 내딛으면 맑은 공기를 마시고 동네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한 평 남짓한 베란다가 새삼 특별한 시대다.
지금 발코니에 들이고 싶은, 당신이 바라는 라이프스타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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