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5층 계단 오르면 심혈관질환 위험 20% 낮아진다

12년 추적 결과

매일 5개층을 계단으로 오르기만 해도 심혈관 질환 위험을 20% 줄일 수 있다.<BR> Unsplash/Bruno Nascimento

매일 5개층을 계단으로 오르기만 해도 심혈관 질환 위험을 20% 줄일 수 있다.
Unsplash/Bruno Nascime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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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은 걷기다.
그마저도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면 자신이 거주하거나 일하고 있는 건물에서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된다.

많은 전문가들이 효율 좋은 생활운동법으로 계단 오르기를 추천한다.
걷기와 마찬가지로 돈이 들지 않고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으며, 날씨에 상관없이 할 수 있다.
사실 계단 오르기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미 생활의 일부다.

계단 오르기는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중국 베이징대와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툴레인대 공동연구진이 매일 5개층을 계단으로 오르기만 해도 심혈관 질환 위험을 20%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저널 ‘죽상동맥경화증’(Atherosclerosis)에 발표했다.
5개층이란 수치는 1개층 10계단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번 연구는 영국 바이오뱅크(Biobank)에 등록된 성인 45만886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기반으로 했으며 가족력, 유전적 위험, 고혈압 등의 요인도 분석에 포함됐다.

분석 결과 계단 오르기는 모든 조사 대상자의 죽상동맥경화성 심혈관 질환(ASCVD) 위험을 감소시켰다.
특히 아직 심장질환 위험이 높지 않은 사람들의 경우 더욱 효과가 컸다.
죽상동맥경화성 심혈관 질환은 동맥의 내벽에 지방, 콜레스테롤 등이 축적돼 혈관이 좁아지고 딱딱해지는 질환을 말한다.
심혈관 질환은 전 세계적으로 사망 원인 1위에 올라 있는 질환이다.

연구를 이끈 미국 툴레인대 루 키 교수(전염병학)는 “단시간에 계단 오르기를 하는 고강도 운동은 심폐 건강과 콜레스테롤 수치를 개선해주는 효율적인 방법이며, 특히 운동 지침을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의 경우엔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는 중강도 운동을 할 경우엔 매주 150~300분, 고강도 운동을 할 경우엔 75~150분을 적정 운동 시간으로 권고한다.
보건기구가 정의하는 중간 강도 운동은 심박수가 높아지고 호흡이 가빠지지만 운동하면서 말을 할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보건기구는 빠르게 걷기, 춤추기, 낙엽 쓸기를 예로 들었다.
고강도 운동은 심장 박동과 호흡이 매우 빨라지는 운동을 말한다.
예컨대 자전거 타기, 달리기(조깅), 수영, 무거운 물체 운반, 계단 오르기, 정원 손질, 테니스 하기 등이다.

이번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추적 기간(평균 12.5년)에 계단 오르기를 중단한 사람들은 계단 오르기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들보다 심혈관 질환 위험이 32% 더 높았다는 것이다.

두계단씩 오르면 효과가 더 좋을까?

계단 오르기는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한꺼번에 하는 것과 같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영국 티사이드대의 스포츠 및 운동 선임강사 니콜라스 버거 박사는 ‘인디펜던트’에 “계단을 오르려면 더 많은 근육을 사용할 뿐 아니라 균형 감각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많은 이점이 있다”며 “짧은 시간에 심혈관계가 많은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계단을 오르는 동안 종종 숨이 차는 걸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심박수와 산소 섭취량을 크게 증가시키고 둔근, 햄스트링, 종아리 등과 코어 근육을 강화해 건강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계단 오르기는 또 걷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칼로리를 태울 수 있다.

한 걸음에 두계단씩 오르면 칼로리를 더 많이 태울 수 있을까? 2017년 공개학술지 ‘플로스 원’에 발표된 영국 로햄튼대 연구에 따르면 두계단씩 오르면 그 자체로는 에너지 소비율이 더 높아지지만, 전체적으로 소비되는 에너지는 한 계단씩 오를 때가 더 많다.
연구진은 따라서 계단을 오를 때 칼로리를 최대로 소비하려면 한 계단씩 오를 것을 권했다.

운동은 심혈관 질환 위험을 줄이는 효과적인 예방법이지만, 이번 연구는 그 중에서도 일상 생활의 일부이기도 한 계단 오르기와 심혈관 질환 위험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봤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물론 계단 오르기와 심혈관 질환 위험 사이의 상관관계를 확인한 것이지 인과관계를 밝혀낸 건 아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하루 25분 천천히 걷기, 고령 입원환자에겐 ‘생명줄’

장기 병원침대 생활은 ‘퇴원후 증후군’ 불러
하루 최소 25분 권장…50분 하면 최대 효과

하루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퇴원 후 약해진 몸은 더 쉽게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BR> 하버드대 건강 블로그

하루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퇴원 후 약해진 몸은 더 쉽게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
하버드대 건강 블로그

질병으로 입원한 노인들은 대개 하루 종일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경우가 많다.

몸도 아프고 기력도 떨어져 있다 보니 일어나 움직이려는 생각 자체를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병원 생활을 하면 입원하기 전보다 몸이 더 쇠약해져 퇴원할 수 있다.
퇴원 후 약해진 몸은 더 쉽게 사고를 당하거나 재입원이 필요한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인다.
요양병원 신세를 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는 결국 사망 위험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한다.
이런 현상을 ‘퇴원후 증후군’(post-hospital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대개 퇴원 후 최대 7주까지를 이 기간으로 본다.

스페인 세비야대 과학자들이 중심이 된 국제연구진이 ‘퇴원후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해 고령의 환자들이 병원 생활 중에 어느 정도 운동을 하는 것이 좋은지 살펴본 연구 결과를 ‘영국스포츠의학저널’에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환자는 병원 입원 중에라도 최소한 25분은 느린 속도로 걷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구진은 중증 질환으로 입원한 55~87살의 환자 3783명(55%는 여성)이 참여한 19건의 운동 처방 임상시험 결과를 대조군 환자들과 비교해 분석했다.
환자들은 모두 혼자서 거동이 가능한 상태였다.
이들은 평균 7일 동안 병원에 입원했으며 퇴원 후 68일 동안 추적 관찰을 받았다.

퇴원 후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한 위한 최소한의 운동량은 하루 25분 걷는 것이다.<BR> 퍼블릭 도메인

퇴원 후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한 위한 최소한의 운동량은 하루 25분 걷는 것이다.
퍼블릭 도메인

탄력밴드 운동과 함께하면 더 좋은 효과

이들에 대한 운동 처방 효과를 분석한 결과, 퇴원 후 증후군을 예방하기 위한 위한 최소한의 운동량은 걷기와 같은 중강도의 운동을 하루 25분 하는 것이었다.
빠르게 걸을 필요 없이 느리게 걷는 것으로도 좋은 효과를 보였다.
이보다 가벼운 운동의 경우엔 40분 정도는 해야 가시적 효과가 나타났다.

가장 좋은 효과를 보인 최적의 운동량은 느리게 걷기 50분 또는 복합 운동 40분(탄력밴드 20분, 유산소운동 20분), 가벼운 저강도 운동 70분이었다.

연구진은 이보다 더 길게 하루 90분 저강도 운동이나 60분 중강도 운동을 한다고 해서 더 뚜렷한 이점은 없었다고 밝혔다.

가장 효과적인 유형은 매일 한 번의 신체 활동과 느리게 걷기를 혼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걷기 운동만 해도 80% 이상의 효과는 나타났다.
운동 효과는 입원에서부터 퇴원 때까지 계속 증가했으며 퇴원 19일 후에 효과가 정점을 찍었다.

퇴원 후 가장 많이 발생하는 낙상 비율은 임상시험 참가자들과 대조군 환자들이 서로 비슷했다.
그러나 운동 처방을 받아 실천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일반 치료를 받은 대조군 환자들보다 부상이 적었다.

*논문 정보

http://dx.doi.org/10.1136/bjsports-2022-106409

Optimal dose and type of physical activity to improve functional capacity and minimise adverse events in acutely hospitalised older adults: a systematic review with dose-response network meta-analysis of randomised controlled trials.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인간 존엄’이란 포장 속에 숨은 편견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79)
‘헌치백’, 장애와 인간의 존엄

프리다 칼로의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출처: fridakahlo.org

프리다 칼로의 ‘비바 라 비다’(Viva La Vida). 출처: fridakahlo.org

의료윤리라는 분야에서 가장 많이 마주하는 단어 중 하나는 존엄이다.

생명의료윤리 분야에서 등장한 여러 장치와 제도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과 존엄이라는 단어를 놓고 고민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존엄을 신체적 젊음의 구현이나 불쾌함의 부재로 이해하는 상황에선 더 그렇다.
이를테면 “존엄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수준 이하의 돌봄이 주어지는 상황, 의사결정을 내릴 수 없는 주체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밥도, 세면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와중에 고통만 남은 채로 사망하는 광경인 듯싶다.
여러 문헌에서 존엄을 자유의 대치어로 이해하거나, 삶의 질이 특정 수준 이하로 하락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그래서 존엄한 삶이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삶이라고 이해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존엄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존엄을 자율과 독립의 동의어로 읽는다면 우리 주변엔 그 자체로 존엄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애초에 자유가 제한되어 있으며 삶의 질이 타인에 비해 낮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 예컨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나 인지 능력에 손상이 있는 이는 존엄할 수 없다.
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 와중에 ‘헌치백’을 읽었다.
일본의 가장 큰 문학 신인상인 아쿠타가와상 2023년 수상작인 이 소설은 중증 장애를 가진 작가 이치카와 사오의 작품이다.
작가와 작품의 화자는 모두 근세관성 근병증(Myotubular Myopathy), 근육 세포 구조의 이상으로 전체적인 근육 기능이 약화하는 유전 질환을 가지고 있다.
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소설의 고백이 작가 자신의 것은 아닐 테지만, 다른 이로선 쉽게 알 수 없는 장애 경험, 질환의 세부를 소설은 채용한다.
그리고 소설은 묻는다.
이런 장애를 가진 ‘나’도 임신하고, 그 태아를 중절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임신중절을 선택하려 한다는 질문 자체가 큰 문제이자 충격으로 다가오는 만큼, 이 소설을 탐구하는 다른 지면에서도 많이 다루어질 것이라서 굳이 여기에서까지 다루고 싶지는 않다.
내가 살펴보고 싶은 것은 행위 자체의 선악 판단 다음의 것이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 임신과 중절을 욕망하는 사태가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소설에서 찾은 답변을 정리해 놓자. 이런 욕망은 인간의 경계와 존엄의 실천에 대한 탐구다.
소설을 빌어 이치카와는 묻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어떤 행위가 그를 존엄한 존재로, 즉 ‘인간’으로 만드는가. 소설의 두 장면을 통해 더 탐구해 보자.

소설 헌치백 표지. 도발적인 사유를 담은 짧은 작품은 에둘러가지 않고 삶의 의미를 묻는 핵심으로 질주한다.<BR> 출처: 알라딘

소설 헌치백 표지. 도발적인 사유를 담은 짧은 작품은 에둘러가지 않고 삶의 의미를 묻는 핵심으로 질주한다.
출처: 알라딘

인간은 파괴를 통해 만들어진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유전질환으로 인하여 다른 이들의 일상을 따라가는 것도 힘겨워진 샤카는 부모님이 만든 그룹홈(특정한 필요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돌봄을 받으며 생활하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의 유산과 전문적인 활동보조사가 있어 샤카의 삶은 지속되고, 사이버대학을 다니고 조회수 낚시용 기사를 써서 송고하며 살아간다.
여러 트위터 계정을 만들어 생각의 편린들을 공유하는 것도 빼놓지 말자.

샤카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 ‘중절을 해보고 싶다’를 쫓는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애정을 나누고 임신을 하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임신한다고 해도, 자기 몸은 뱃속에서 커가는 아기를 견딜 수 없으리라는 사실도 샤카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임신과 중절을 욕망한다.
왜 그런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심적인 고뇌를 ‘모나리자’ 그림에 던졌던 요네즈 도모코의 심정 그 자체와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나름대로 ‘모나리자’를 더럽히고 싶어지는 이유는 있다.
박물관이든 도서관이든 보존되는 역사적 건조물이 나는 싫다.
완성된 모습으로 그곳에 계속 존재하는 오래된 것이 싫다.
파괴되지 않고 남아서 낡아가는 데 가치가 있는 것들이 싫은 것이다.
살아갈수록 내 몸은 비뚤어지고 파괴되어 간다.
죽음을 향해 파괴되어 가는 게 아니다.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
그런 점이 비장애인이 걸리는 위중한 불치병과는 결정적으로 다르고, 다소의 시간 차가 있을 뿐 모두가 동일한 방식으로 파괴되어 가는 비장애인의 노화와도 다르다.
(60~61쪽)

샤카는 1974년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레오나르도 다빈치 특별전시회가 혼잡하다는 이유로 장애인과 유아 동반자의 입장을 거부하자, 개최 첫날 ‘모나리자’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테러를 한 요네즈 도모코를 호명한다.
그것은 장애인과 부모를 차별하는 박물관에 대한 저항이었지만, 샤카는 이 행위를 장애를 가진 신체의 표상으로 읽는다.
‘정상’이라서 늙고 병듦이라는 파괴가 그들의 생을 꺾는 일이 되는 비장애인의 삶과 달리, 적어도 샤카에게 장애의 생이란 파괴이자, 파괴의 흔적이 남긴 결과들로 정의된다.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장애인은 파괴되면 자신의 ‘정상성’을 상실하는 것이므로, 그는 파괴를 거쳐 죽어간다.
장애인은 어떤 정상성도 가정하지 않기에, 그에게 파괴는(또는, 장애는, 질병은)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흔적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명백히 다른 인간에 대한 두 정의다.
하나는 특정한 삶이나 조건을 ‘인간’으로 정해놓고, 그 범주와 실천 안에 들어가는 삶만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때 질병, 장애, 노화는 인간의 조건을 빼앗아 가는 것으로 이해되며 환자, 장애인, 노인은 인간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존재가 된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와 환경이 빚어낸 흔적들을 모아 인간으로 부르는 것이다.
이때 질병, 장애, 노화는 개인을 다른 사람과 구별 짓는 기록이 된다.

아쿠타가와상 시상식 기자회견에서 이치카와 사오의 모습. 그는 중증 장애인 작가가 이 상을 수상한 것이 처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BR> 출처: 허블

아쿠타가와상 시상식 기자회견에서 이치카와 사오의 모습. 그는 중증 장애인 작가가 이 상을 수상한 것이 처음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출처: 허블

존엄은 견디는 것이다

후자의 정의를 선택할 때 우리는 인간의 존엄에 관해 다른 사유에 도달한다.
예컨대, 다음의 진술을 참고해 보자.

벽 너머 옆방 입주자가 메마른 소리로 손뼉을 쳤다.
나와 비슷한 근 질환으로 자리보전 중인 옆방 여성은 침대 위 이동식 변기에 볼일을 보면 주방 근처에서 대기 중인 간병인에게 손뼉으로 신호를 보내 뒤처리를 부탁한다.
세상 사람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며 말할 것이다.
“나라면 절대 못 견뎌. 나라면 죽음을 선택할 거야”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것이다.
옆방의 그녀처럼 살아가는 것, 그것에야말로 인간의 존엄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된 열반이 거기에 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93~94쪽)

자기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어 용변 처리도 남에게 부탁해야 하는 삶을 우리는 보통 존엄하지 못한 삶으로, 살 가치가 없는 삶으로 이해한다.
그가 더는 존엄을 빼앗겨선 안 되므로, 우리는 그가 존엄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주지하는 것처럼, 이것은 죽을 권리를 요청하는 존엄사/안락사의 핵심 주장 중 하나다.

샤카는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존엄은 살아가는 것, 아니 살아남는 것이다.
그에게 존엄은 견디는 것이다.
일견 상식에 벗어나는 이런 존엄에 관한 정의는 앞에서 내린 인간의 정의에서 나온다.
인간이 이런 것이라고 미리 정의해 놓는다면, 그 밖으로 벗어난 삶은 존엄하지 못하다.
그러나 어떤 삶이든 인간적인 것이며 인간다운 것이라면, 아니 샤카의 말처럼 우리의 파괴가 우리를 규정한다면, 그 모든 파괴를 감내하고 견디는 것이야말로 존엄하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할 조건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는 ‘옆방 여성의 삶’은 존엄하다.

아픔을 견디는 생

이치카와가 도달한 인간과 존엄의 정의는 소설의 중심 줄거리보다 더 도발적이다.
그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자기 파괴를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준 이하의 삶도 존엄하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그러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오히려 그것은 특정한 인간을 정상으로 규정해 놓은 우리의 오류가 만들어 낸 허상은 아닌가.

물론 우리는 악과 부정의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치카와는 묻는다.
파괴는 악인가. 나쁜 삶의 질은 부정의인가. 오히려 그것들을 참을 수 없다고 치부하는 일이 악일 수 있다.
어떤 삶만이 긍정되고 어떤 삶들은 부정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부정의하다.

우리의 삶에는 분명 고통과 괴로움, 파괴와 혼란, 슬픔과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분명 우리는 그런 고통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편, 그 아픔을 견디는 이들의 생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후자는 잊혀졌으며 우리의 삶은 쾌락과 이익만을 절대가치로 돌아간다.
‘헌치백’은 그 삶을 내리쳐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강제하는 채찍이다.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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