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욕타임즈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기관이나 온라인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간편’ 심리 상담 또는 정신 질환에 관한 정보들이 사람들을더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현상이 관찰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을 보다 쉽게 돕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들이 되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서던캘리포니아대의 심리학자인 다비 삭스베는 특히 요즘 십대들 사이에서 정신질환과 관련 없는 일상적인 우울감이나 불안감,
스트레스 등을 정신 질환인 것처럼 성급하게 판단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음을 지적했다.
예컨대 ‘시험이 다가오니까 불안한 마음이 들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을 ‘나는 시험에 대한 불안증이 심해’라고 하는 등 일반적인 상태도 정신 질환으로 진단내리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10대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하시는 전문가 선생님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렸을 때 가정이나 학교에서 힘들었던 경험을 한 아이들의 경우 자신이 이런저런 힘들었던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자신은 무슨무슨 ‘트라우마’가 있다고 구체적인 진단명을 이야기하는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물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볼 줄 알고 그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간혹 어떤 아이들의 경우 스스로 내린 진단명을 곧 자신의 정체성이자 존재론적 한계로 설정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예를 들어 내면의 불안을 직면해 보는 등 다소 불편함을 동반할 수 있는 치료적인 개입을 할 때, 과거의 상처 때문에 긴장되고 힘이 든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나처럼 ㅁㅁ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강하게 믿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라는 사람을 정의할 때 자신의 진단명을 결코 바뀔 수 없는 자신을 정의하는 핵심적 요소로 여기는 아이들의 경우 과거의 경험에 의해 현재의 선택을 지배당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으며 따라서 치료의 목적 또한 더 나은 삶을 사는 것보다는 스스로 내린 진단명을 재확인받고 위로받는 데 그치는 편이라고 했다.
이러한 아이들을 어떻게 도우면 좋을지 고민이라는 이야기였다.
관련해서 트라우마 이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서도 잘 회복하고 되려 이를 통해 더 ‘성장’했다고 하는 사람들의특징에 대한 연구를 본 적이 있다.
다양한 연구들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요인은 끔찍한 경험에서도 어떤 ‘의미’를 발견하는 것,
삶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
또 이 사건 하나만 가지고 자신을 정의하지 않는 것이었다.
예컨대 자연 재해나 범죄,
질병으로 인한 피해를 입었을 때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규정하기보다 ‘생존자’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더 적응적인 모습을 보이는 편이다.
또한 자신에게는 특정 사건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모습들이 있지만 이것이 자신의 전부는 아님을 아는 사람들이 더 일상생활을 잘 이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관련해서 암 생존자이지만 암을 이겨낸 사건으로 자신을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고 이야기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암이 큰 사건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은 암 투병보다 더 다양한 경험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암과 관련된 기억들은 자신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에는 자기예언적 효과가 따른다.
스스로 만든 자기개념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필터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고 단단한 것보다는 크고 말랑말랑한 자기개념을 갖는 것이 더 적응적일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수많은 경험들 중에서 어떤 하나에 지나치게 많은 가중치를 두고 있다면 혹시 그 때문에 새로운 나를 만날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소금꽃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택시에서 가수 진성의
‘소금꽃’을 들었다.
“눈물도 말라버린/ 가시밭 땀방울/ 서러움에 꽃이 된/ 아버지 등 뒤에 핀 하얀 소금꽃….” 문득 설악산을 오르며 본 한 남자가 떠올랐다.
체력이 약한 나는 작은 배낭을 하나 메고 헉헉대며 모퉁이에 앉아서 쉬고 있었는데 그때 앞을 가로지르는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보였다.
커다란 지게에 짊어진 음료수가 한가득인 그의 어깨에는 소금꽃이 눈처럼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다.
윤성학의 ‘소금 시’에는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 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거친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는 구절이 있다.
로마 시대 군인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샐러리맨(salaryman)의 어원은 소금을 뜻하는 ‘sal’에서 왔는데 노동의 대가인 급여를 의미하는 라틴어 ‘salarium’에서 유래했다.
흥미로운 건 옛 고려와 조선 병사들이 ‘sal’이 아니라 ‘쌀’을 급료로 받았다는 것이다.
‘sal’과 ‘쌀’에서는 다른 듯 비슷한 ‘땀’ 냄새가 난다.
어쩌면 삶은 소금을 얻기 위한 투쟁 기록일지 모르겠다.
언어를 살피면 기이할 정도로 닮아 있는 것이 보인다.
길을 뜻하는 ‘road’와 짐을 뜻하는 ‘load’의 발음과 철자가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
흔히 인생의 여정을 길로
표현하는데,
짐 없이 갈 수 있는 길은 가벼운 산책길뿐,
어떤 짐도 없이 갈 수 있는 여행길은 없다.
그러므로 길을 떠난다는 건 그 무게를 감당하겠다는 뜻이다.
“서울의 야경이 아름다운 건 당신들의 야근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낮에도 밤에도 소금땀을 흘리는 직장인과 자영업자를 표현한 말이다.
우리는 오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출근이라는 여정을 떠난다.
거기에는 이고 지어야 할 오늘의 짐이 있다.
오늘도 우리는 나의 소금을 내어주고 타인의 소금을 받는다.
편집자주우리는 손쉽게 갈등을 회피하거나,
때로는 섣불리 관계를 단절하기도 한다.
'손절'이라는 말이 인간관계에까지 두루 쓰이는 시절이지만,
소중한 관계에서 과감한 단절이 과연 정답일까? 문요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본질적으로 관계를 떠나 살아갈 수 없는 우리 개개인은 물론 갈수록 갈등과 분쟁,
혐오로 들끓는 우리 사회의 마음 헤아리기 역량이 높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관계의 언어>를 썼다고 한다.
관계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우리의 문제는 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충분히 연습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임을 다시 한번 자각하면,
관계 안에서 자아가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도 커지고 '우리'도 커가는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계를 정리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관계를 정리하기 전에 생각해보자. 과연 상대와의 관계에서 내가 느끼는 스트레스와 피해가 과연 상대방의 일방적 잘못에서 비롯된 것일까? 교통사고에 100퍼센트 일방과실이 드문 것처럼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역시 대부분은 쌍방과실이다.
내가 운전을 조심한다면 모든 교통사고를 예방하지는 못해도 꽤 많은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손절은 우리가 할 수 노력을 다해본 다음에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다.
자신을 계속 이용하고 조종하는 해로운 관계를 끊어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반대로 갈등이나 불편함이 있으면 관계를 끊어버려서 오랜 관계가 없는 것 또한 문제다.
모든 관계에는 기울기가 있다.
이상적으로는 서로를 똑같이 위하는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가 좋지만,
현실적으로는 양방 중 어느 한쪽으로 관계가 기울어 있다.
어느 한쪽이 상대를 더 좋아하고 위해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관계의 기울기를 감수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한계 안에서 관계 기울기의 불균형을 감지하고 이를 조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참고 또 참다가 결국 폭발하거나 단절하기 쉽다.
그렇다면 불균형 신호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표적인 불균형 신호는 '피해의식' '보상심리' '만성적 분노'다.
나만 혼자 애쓰고 있다는 피해의식,
내가 베푼 것의 일부라도 돌려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
그리고 이들로 인해 생겨나는 만성적 분노(단지 섭섭함이나 서운함이 아니라)야말로 본인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관계가 기울었음을 말해준다.
관계의 기울기가 한계를
넘어선 것을 알아차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들 거리두기를 택한다.
적당한 거리가 답일 수 있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자칫 '매번 나만 연락하고 너는 나한테 연락 안 해? 좋아,
그럼 나도 안 해!'가 되어버려 또 다른 방식의 손절이 되고 만다.
거리두기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헤아리기다.
이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불만이나 감정 뒤에 감추어진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것을
원하는지,
그럴 때 어떻게 느끼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정부가 간병비 부담 완화 대책을 내놨다.
간호인력이 간호·간병을 책임지는 통합 병동을 늘리고 요양병원의 간병비를 급여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퇴원 환자의 집으로 찾아가 의료·간호·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계획도 들어있다.
가족의 피눈물을 조금이라도 닦아주려는 첫 시도여서 반갑기 그지없다.
서울대 김진현 교수 연구에 따르면 지난해 간병비 부담은 10조원으로 추정된다.
최근 5년
새 연평균 6.3%씩 가파르게 올랐다.
간병의 96%는 가족이 떠안는다(나머지는 간병인 고용). 하루 생산성 손실액이 11만4830원이다.
게다가 간병 책임을 두고 동기간에 등을 돌리는 일이 다반사다.
몸과 마음이 골병든다.
유급 간병인을 쓰면 월 60만~365만원이 든다.
요양병원 평균 입원기간이 5.3개월이다.
1년 넘는 환자도 수두룩하다.
간병비에 녹아날 수밖에 없다.
‘간병 지옥’임이 분명하다.
이럴진대 한국 의료가 세계 최고이면 뭐 하나.
선진국은
병원의 간호진이 간병을 책임진다.
대신 입원료가 비싸다.
우리는 자원이 부족해 싸게 입원하는 대신 가족에게 간병을 떠안겼다.
의료인이 아닌 이가 병실을 마구 드나드는 기묘한 상황이 됐다.
감염에도 매우 취약하다.
간병 해법을 찾기 위해 20년 간 갖가지 꾀를 냈지만 묘안을 찾지 못했다.
2015년 시행한 간호·간병 통합서비스가 그나마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이 병동에 입원하면 간호·간병료가 2만원(상급종합병원 기준)도 안 된다.
하지만 병원들이 경증환자를 여기에 넣고 중증은 가족 간병으로
돌린다.
대신 높은 수가를 챙긴다.
이번에 75개 대형병원에 치매 등의 중증환자를 전담하는 통합병실을 만들고,
중증이 많을수록 수가 보상을 확대하며,
내년부터 종합병원의 통합병동 통째 전환을 유도한다.
환자 가려받기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다.
2026년 비수도권 상급종합병원이 원하면 통째로 통합병동으로 전환한다.
향후 4년 170만 명이 혜택을 보게 된다.
다만 숙련된 간호 인력 구하기가 여의치 않기 때문에 상황을 보며 진행해야 한다.
요양병원 간병비 부담에 손대는 점은 더 평가할
만하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중국동포 간병인이 병실 한켠에 간이침대에서 숙식하며 6~7인 공동 간병을 하는 데가 많다.
월 간병비가 60만원 넘는다.
2인 간병을 하면 180만원이 든다.
질도 떨어진다.
정부는 2년 반 시범사업 후에 2027년 모든 요양병원 간병비 부담 완화에 나선다.
건강보험을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
중환자로 분류되는 5.3%(약 2만5000명)가 적용 대상이다.
병원이 집인양 사는 ‘사회적 환자’ 줄이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이참에 반드시 요양병원 구조조정이 같이 가야 한다.
65세 이상 인구 1000명당 요양병원 병상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11배에 달한다.
중환자나 치매전문 등으로 재편하고 요양시설이나 회복기병원으로 바꿔야 한다.
안 그러면 건보 재정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 간병비 부담이 낮아지면 입원을 부를 수도 있으니 퇴원환자·재택환자 서비스를 더욱 다양화해야 한다.
간호·간병 인력 전문화를 위해 전문대가 양성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외국인 돌봄인력을 도입한다는데,
속도전이 중요하다.
간병 문제는 더는 방치할 수 없다.
필요하면 건보료 좀더 내자고 설득해야 한다.
간병비 해결은 윤석열 정부 국정과제이자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1호 총선 공약이다.
모처럼 ‘정책 궁합’이 맞다.
정부도 야당에 충분히 설명해서 빈틈없이 실행 전략을 짜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