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은 조각가입니다.
동시에 그는 여성 혐오증 환자기도 하죠. 그는 자신의 이상적 여성상 때문에 현실의 여성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상에 따라 조각상을 만들죠. 나르키소스도 공유했던 여성 혐오증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타자 배척의 상징입니다.
어떤 여성도 사랑할
수 없는 남자이지만,
피그말리온 역시 사랑만은 갈구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이상형의 여자를 조각합니다.
“눈처럼 흰 상아”를 조금씩 깍아내며 살아 있는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운 이상형의 여인을 완성시키죠. 그는 ‘놀라운 솜씨’와 ‘기술’을 겸비한 조각가였기에 아름다운 조각품을 창작할 수 있었고,
자신이 만든 상아소녀에 단번에 매료되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형상을 마음속으로 뜨겁게 열망한 나머지,
자신이 제작한 인공물이 상아라는 것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물신숭배자’처럼 그것에 입맞추고 애무하고 온갖 귀금속으로 장식하며,
심지어 그것과 함께 동침하기도 하죠.
하지만 조각된 소녀는
말이 없고 반응을 모릅니다.
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해도,
한갓 상아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피그말리온은 현실에서
자기 이상형을 완벽하게 구현했지만,
그녀와 사랑을 나눌 수는 없었습니다.
상아소녀는 살아 있는 타자가 아니라 죽은 자기복제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피그말리온은 미의 여신 베누스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의 조각품에 생명을 넣어 달라고 말이죠. 간절한 그의 기도는 신에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리하여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피조물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얻습니다.
나르키소스와 피그말리온은
둘 모두 ‘광기어린 열망’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 다른 삶을 영유합니다.
나르키소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열망했으니,
칭찬하면서 스스로 칭찬받고,
바라면서 바람의 대상이고,
태우면서 동시에 타고 있었던” 자로서 파국적인 자기 사랑에 빠져,
이렇게 한탄하며 죽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내게 있는데,
풍요가 나를 가난하게 만든 거야. 아아,
내가 내 몸에서 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천병희 옮김(도서출판 숲,
2011),
158-161쪽.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형상”을 뜨겁게 열망했고 이것 역시 이룰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우 신의 도움으로 자신이 제작한 인공물과 사랑을 나누는 데 성공합니다.
나르키소스가 자기 외모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혔다면,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꿈꾼 아름다움과 그것을 현실화할 수 있는 놀라운 기술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전자가 급격하게
멜랑콜리커로 추락했다면,
후자는 당장에는 멜랑콜리와 무관해 보입니다.
피그말리온 신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의 상투적인 클로징멘트이니까요. 그렇다면 자기의 기술과 능력을 사랑했던 피그말리온은 진정 멜랑콜리와 무관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