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독립운동은 과연 테러리즘이었나?

유석재의 돌발史전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타이틀 이미지 테스트

유석재 기자

백범 김구와 오사마 빈 라덴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공통점을 찾아보라'는 문제를 냈던 2022년 12월 1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일부. 답은 '현상금이 많다'는 것이었고,
방송 이후 많은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았다.
/SBS

한국 독립운동은 과연 테러리즘이었나?

도대체 언제 침략과 무관한 일본 민간인을 살상했단 말인가

팔레스타인이 또 다시 화약고가 되기 시작했던 얼마 전,
광교 영풍문고 근처에서 일군의 외국인이 피킷을 들고 시위를 하며 지나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마스 측이 정당하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민간인을 해치는 일을 대놓고 버젓이 벌이고도 명분이 선다는 것인가? ‘너희들이 그토록 증오하는 이스라엘보다 너희들이 나은 것이 무엇이냐’고 꾸짖으려다 혹 너튜브에 출연하게 될까봐 그만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혹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 우리 독립운동도 결국 테러 아니었나?

이것은 사실 대단히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정규 과정에서 테러리즘을 옹호하는 교육을 받는다’며 이상하다는 일본인도 있습니다.
‘너희는 극우 교과서를 통해 전체주의를 가르치지 않느냐’고 하기 전에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방송에서도 가끔 이 문제를 헷갈리기도 합니다.
지난해(2022년) 12월 15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김구와 오사마 빈 라덴의 사진을 걸고 ‘공통점을 찾으라’는 문제를 냈다가 뭇매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현상금이 많다’는 게 정답이었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죠.

2022년 12월 15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이 밖에도 탈옥수 신창원,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사진을 김구,
빈 라덴과 함께 놓고 문제를 냈다.
출연자 중 한 명인 가수 손동운이 '한 분은 결이 다른데...'라며 당혹해하는 모습도 나왔다.
/SBS

이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죠.
‘테러의 주체들은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이 아닐까? 독립과 외세배격과 저항을 위한 나름대로의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은 혹시 어디서,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의 지난 20세기 전반의 역사에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니었을까?’

상당히 드문 경우지만 국내 학계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2004년 3월 20일 서울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역사연구회 기획발표회 ‘테러,
피압박민족의 저항수단인가?’에서였습니다.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 독립운동사에서 두드러졌던 이른바 ‘테러 전술’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여기서 나온 의견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1>테러는 강대국의 물리력에 맞서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추구한 수단이었고,
이는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2>그렇지 않다.
독립운동에서 나타난 무장투쟁은 일반적인 의미의 ‘테러’와는 구분해야 한다.
역사적 맥락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정당한 행위였다.
당시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는 발표문 ‘테러와 3·1운동’을 통해 “1923년 의열단은 테러 전술을 공공연하게 표방,
암살·파괴·폭동 등과 같은 폭력투쟁을 전개했는데,
한국인들은 이를 ‘의열투쟁’으로 본다며 의열단과 이라크 저항세력들의 행위를 상반되게 평가하는 한국인이 테러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임 교수는 ‘테러와 핵무기는 약자인 비서구 세계의 무기’라고 지적한 새뮤얼 헌팅턴의 지적처럼 3·1운동기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 선상에 등장한 테러리즘은 그 전형적인 보기라고 말했죠.

의거 이틀 전 폭탄을 손에 들고 태극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윤봉길 의사.

테러 전술은 평화적인 만세시위 운동이 현실적 효용을 가질 수 없었을 때 출현했으며 1922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이 전술을 폐기한 이후 민족주의와 무정부주의자만의 전술이 됐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 토론자로 나선 장석흥 국민대 교수는 할 말이 많아 보였습니다.

“우리의 의열투쟁은 일반적인 의미의 ‘테러’와는 확연히 구분되며,
서구적 인식으로 독립운동을 규정해선 안 된다.

무슨 얘길까요. “테러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양민을 희생시키는 일을 그 수단으로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선 침략과 무관한 일본 민간인들을 인질로 삼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장 교수의 말을 더 들어보죠.

“무장투쟁의 대상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무고한 민간인’이 아니라 침략의 상징적 존재였음을 주목해야 한다.
테러는 자신들의 존재를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의열투쟁에선 ‘우리가 했다’는 것을 당당히 밝혔다.
당시 김영범 대구대 교수는 발표문 ‘독립운동·테러리즘·의열투쟁’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존의 개념 규정으로는 의열단의 암살·파괴 운동도 형태적으로는 테러리즘이지만,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의 독립·해방이라는 목적에서 나온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의열투쟁은 인류 보편의 양심과 정의감에 입각해 구체적 표적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폭력을 행한 것으로,
일반적인 테러와 동일시할 수 없기 때문에 ‘정당한 테러리즘’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남아 있는 안중근 의사 사진. 왼쪽부터 순서대로 하얼빈 의거 직후 체포됐을 때 모습,
뤼순 감옥에서의 모습,
순국 직전 모습. /안중근의사기념관·위키피디아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죠.

독립운동은 과연 테러리즘의 일종이었을까요? 윤봉길,
이봉창,
나석주,
김상옥과 같은 무장투쟁의 주역이었던 의사(義士)들에 대해 ‘테러리스트’라 부른 자들은 바로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언젠가 이 ‘돌발史전’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었지만,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은 200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 순국 의거 70주년 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의사의 의거는 당시 아시아 민족운동에서도 유일하게 일왕을 직접 저격한 쾌거였으며,
해외 항일독립운동을 재집결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 같은 의거는 정의와 헌신이 사라진 이 시대에 커다란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진 것에선 우리의 독립운동은 지금 ‘저들’의 테러와 일견 닮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목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바로 수단입니다.
우리의 지사(志士)들은 결코 불특정다수의 민간인을 위협하거나 납치하거나 폭사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분명한 ‘민족의 독립’이었습니다.
의사능력 부족한 미성년자를 유혹하거나 출근하는 민간인을 공격하는 식의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얼치기 저항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주체가 좌(左)였는지 우(右)였는지 따지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항복하고,
공식적인 항복은 1945년 9월 2일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진행되었다.
사진은 일왕과 정부를 대신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도쿄만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 호에 승선한 시게미쓰 마모루 일본 외무대신과 우메츠 요시지로 일본 육군참모총장을 대표로 하는 일본 항복대표단 일행이다.
시게마쓰가 지팡이를 짚고 있는 까닭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한쪽 다리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 모습은 많은 한국인에게 '우리의 독립운동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안중근이 하얼빈역 플랫폼에서 총을 쏜 대상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와 그를 수행하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었습니다.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대상은 단상 위의 침략자들이었습니다.
그 중 부상당한 한 명은 1945년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 위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일본 외무대신 자격으로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일장기를 흔들며 환호하던 일본 민간인에게 해코지를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도쿄 왕궁(김지섭)이나 침략의 수행 기관 동양척식주식회사(나석주)에 폭탄을 던졌을지언정,
제국호텔이나 긴자 거리에서 그런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도쿄 한복판에 폭탄을 들고 나타나 ‘윤봉길을 석방하지 않으면 이걸 터뜨리겠다’는 따위의 행동을 벌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의롭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스스로의 인생을 헌신하며 한 가지 숭고한 목표를 위해 자신을 불살랐으면서도 불의를 저지르지 않았던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이처럼 번영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너무나 분명한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곧잘 망각합니다.
임정도 의열단도 광복군도 다른 모든 독립운동가들도,
결코 알 카에다나 하마스가 아니었습니다.


엽기토끼야 울지마

다시 읽어보는 순자의 性惡說

'엽기토끼'라 불렸던 한국 캐릭터 마시마로.

사회의 미묘한 현상을 놓치지 않고 짚어내는 게 특기이자 취미인 학교 선배가 있습니다.
그가 오래 전 지하철에서 목격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2000년 무렵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묵직한 가방을 든 한 남자가 지하철에 올라타더니 차량 가운데에 우뚝 선 뒤 가방 지퍼를 열었습니다.
요즘은 더러 “이번 역에서 즉시 내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는 대상인 친숙한 직업을 가진 사람임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정도로 보이는 그 남자는 가방에서 인형 하나를 꺼내들었습니다.
‘마시마로’라고도 하고 ‘엽기토끼’라고도 하는 토끼인형. 재치있는 플래시 애니메이션을 통해 널리 알려진 캐릭터였습니다.
물론 모조품이 분명한 그 인형을 높이 치켜든 남자는 자신이 팔려고 하는 물건에 대해 무척 큰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자,
차안에 계신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잠깐만요,
잠깐만요.(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바로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거기까진 그저 대충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워,키,토,키입니다.
워키토키…!

승객들의 시선이 잠시 그 남자에게로 집중되더니,
이내 젊은 사람들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며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을 지으려 무척 애쓰더라는 얘깁니다.
그 선배는 아예 이를 악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냥 우스갯소리로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어딘가 상당히 찜찜한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건 단순히 찜찜한 정도를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단순히 문화적 코드의 유무(有無)로 구별되는 세대간의 단절?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다음의 두 가지 때문이었습니다.

1) 아무리 어려운 세상이고,
곤란을 극복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라고 해도,
그래 최소한 자기가 파는 물건에 대한 기본적인 사전지식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 정도는 상도(商道)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가? 어쩌면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서 지독하고 맹목적인 배금주의(拜金主義)라는 서출(庶出)을 낳았고,
그 회오리바람 속에서 우리는 모든 기본과 상식을 잊어버리고 사는 건 아닐까?

2) 엽기토끼’? 엽기(獵奇)라니! 저렇게 귀여운 인형의 이름에 ‘엽기’라는 말이 들어가다니! 기괴한 것[奇]만을 골라 일부러 사냥하듯이 찾아다닌다[獵]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하는 사회가 도대체 정상적인 사회란 말인가? 이 도착적이고 변태적인 언어가,
영화 ‘사이코’에서의 앤서니 퍼킨스나 ‘양들의 침묵’에서의 앤서니 홉킨스 같은 캐릭터에게나 어울릴 말이,
예전같으면 신문지상에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끔찍한 사건을 표현할만한 단어가,
‘재미있다’ ‘개성있다’ ‘독특하다’ ‘섹시하다’ 정도의 의미로 아무렇지도 않게 남용되는 이 사회는 과연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일까?(물론 ‘엽기토끼’는 원래 그 캐릭터의 이름도 아닐뿐더러,
그 캐릭터 자체에 어떤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 캐릭터를 ‘엽기’라 지칭하는 사회에 병통이 있는 것일 뿐)

그 ‘엽기토끼’란 캐릭터는 2000년대 초 한 시대를 풍미했던 캐릭터이자 요즘도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가 운영될 정도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여전히 잊히지 않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2005년에 발생한 양천구 신정동의 미제 살인사건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들에게 납치됐다가 탈출에 성공했던 다른 피해자가 그 다세대주택 2층 신발장 옆에 숨어있었는데 그 신발장에 이 캐릭터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엽기토끼 사건’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어쨌든.

2023년 7월 현대백화점 판교점 5층에 마련된 KCC-마시마로 팝업스토어 전경 /뉴스1

그냥 넘어가도 될 법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엽기적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 의문은 결국 한 가지 회의로 합쳐졌죠.

“도대체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모든 논의는 몇 천년 전 씌어진 유가(儒家) 방계의 한 고서(古書)로부터 출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人之性惡.

(인지성악).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인간이란 원래 나쁜 놈들이라고? 보이지 않는 주자학적 도그마가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부지불식간에 미세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양으로 정신적 바탕 속에 선험적으로 내포돼 있는 우리로서는 이런 ‘선언’에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선천적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단(四端)을 잘 키워야 한다는 맹자적인 ‘착한’ 인성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 네 글자는 매우 급진적이고,
좌파적이며,
외전(外傳)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미 짐작하셨겠만,
이 글의 출처는 ‘순자(荀子)’. 애시당초 유학의 경전(經傳)에서 밀려나버린 책이었습니다.
‘맹자’의 거울 반대편에서 그림자요 타자(他者)로서 존재했던 책. 몰래 돌려읽는 행위만으로도 석고대죄의 사유를 삼았을만한 시대가 있었음직한 책. 그 중에서도 제23편 ‘성악(性惡)’. 혹자는 순자 자신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후학들의 첨가로 의심하는 장(章). 허나,
누가 썼든 어떻겠습니까. 밑바닥 온갖 가식들을 남김없이 긁어내는 그 문장을 맛보는 거야 누구도 방해할 수 없겠죠.

其善者僞也.

(기선자위야)

(인간의) 선(善)이라는 것은 모두 (후천적인) 작위(作爲)에 기인한다.

프로이트식으로 얘기하면 선천적인 본성이란 이드(id)로 놓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일방향성 욕망의 총체인 이드. 그것의 완급강약을 조절하는 자아(自我:ego)도,
그것에 양심과 도덕성의 주사약을 투입하는 초자아(超自我:superego)도,
결국은 모두 다 후천적인 ‘작위’의 소산이 아닐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
프로이트는 매우 순자적이기도 합니다.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금인지성,
생이유호리언)

이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 보면,
타고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함이 있다.

이(利)! 이! 일찍이 맹자로 하여금 “노인장께서 불원천리하고 저희 나라에 오셨으니,
장차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 묻던 양혜왕(梁惠王·실제로는 위나라 혜왕)에게,
“그대는 어찌 이(利)를 말하는가? 오직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다!라는 일갈을 하게 했으며,
훗날 이를 읽던 사마천으로 하여금 책장을 덮고 탄식하게 했던 이(利)!

허나,
순자는 망설임 없이 말합니다.
“그래,
그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습니다.
이제 자본주의의 승리가 이해가 갈 만도 합니다.

順是,
故爭奪生,
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
順是,
故殘賊生,
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
有好聲色焉,
順是,
故淫亂生,
而禮儀文理亡焉.

(순시,
고쟁탈생,
이사양망언; 생이유질오언,
순시,
고잔적생,
이충신망언; 생이유이목지욕,
유호성색언,
순시,
고음란생,
이예의문리망언)

이 본성을 따른다면,
서로 다투고 빼앗음이 생기게 되고,
양보란 없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성질이 있어,
이를 따른다면 남을 해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며,
충실함과 믿음이란 없어진다.
태어나면서부터 귀와 눈의 욕망을 따라 아름다운 소리와 색채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어,
이를 따른다면 음란함이 일어나게 되고,
예의(禮儀)와 문리(文理)는 없어진다.

순자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니었을까요? 마치 2020년대의 이 땅에서 직접 살아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연줄과 지연을 앞세워 주가조작과 금융비리와 뇌물수수를 총체적으로 횡행하는 이 땅 위에 도대체 무슨 사양(辭讓)이 있을 것이며,
나와 생각이 다른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배척하며 기껏 영화 한 편 보고 나와 ‘저쪽이 승리하면 계엄령 선포’ 운운하는 행태에 무슨 충신(忠信)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여기서의 ‘忠’이란 공자의 ‘오도(吾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말에 증자가 ‘충서(忠恕)’라는 해석을 붙였을 때의 그 ‘충’입니다]. 그야말로 엽기토끼가 울고 갈 세상.

“귀와 눈의 욕망을 따라 아름다운 소리와 색채를 좋아하는 경향…이란 말에서는 OTT에 푹 빠진 사람들의 행태를 적확히 표현한 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허나,
음란(淫亂)을 가져오는 성색(聲色)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짚어 말하는지는 자명한 일이겠죠.

然則,
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
而歸於暴.

(연즉,
종인지성,
순인지정,
필출어쟁탈,
합어범분난리,
이귀어폭)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을 방임하고 인간의 본래 감정을 따른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분별을 해치고 이치를 어지럽힘에 합치하게 되며,
폭(暴)으로 귀착된다.

쟁탈(爭奪)… 범분난리(犯分亂理)… 그리고 폭(暴)! 과연 무슨 첨언이 필요하겠습니까. 본성을 방임하고 본래 감정을 따른 결과는 과연,
조폭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법인카드로 꼬박꼬박 배달 식사를 먹던 사람이 비리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당당한 듯 처신하고 총선과 차기 대선까지 승리를 점치는 꿈처럼 황당무계한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보입니다.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 동안 그토록 고생을 해 왔더란 말인가요? 순자의 이 문장에서 마지막 글자,
폭(暴)은 지금의 이곳에서 칼날같은 여운을 길게 뽑아내고 있습니다.

故,
必將有師法之化·禮義之道,
然後,
出於辭讓,
合於文理,
而歸於治. 用次觀之,
然則,
人之性惡明矣. 其善者僞也.

(고,
필장유사법지화·예의지도,
연후,
출어사양,
합어문리,
이귀어치. 용차관지,
연즉,
인지성악명의. 기선자위야)

그러므로,
반드시 장차 스승의 가르침에 의한 교화와 예의(禮義)의 도(道)가 있어야,
연후에 양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문리에 합치하고 치(治)로 귀착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따라서 인간의 본성이 사악함은 분명하다.
선(善)이란 작위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후천적 교육이 중요하다.
이것의 순자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었습니다.
반드시 사법(師法)의 교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 참 답답한 일입니다.
벤처정신으로 똘똘 뭉친 ‘신지식인’이 우대받는 사회,
자본을 향한 실용적인 지식을 통해 재화를 창출하는 지식인이 대접받는 사회라면 과연 ‘교화’의 주체가 될 사(師)들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그렇죠,
적어도 올바른 금융지식의 전수는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한 국문학과 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신지식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작명소를 차릴까….

그렇다면,
악(惡)은 무지(無知)에서 나오는 것이니,
지식의 전수야말로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9·11 이전 빈 라덴의 전수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두꺼운 교범(敎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요? 수년에 걸친 연구와 학습이 낳은 결과가 거대한 메트로폴리스의 테러였던 것이지 않았습니까. 나름대로의 호고적 취미가 섞였을 것이 분명한 중국 동북지역 학자들의 면밀한 고고학적 지식과 탐구가 낳은 결과는 정치적으로 ‘중화민족’’통일적 다민족국가’라는 허상을 만들기 위해 감행한 고구려사와 발해사의 전면적인 강탈이 아니었습니까.

권력과 시장을 농락한 기업인에게서 나온 변명은 “첨단 금융기법을 썼다라는 항변이었고,
고위 교육 관료라는 사람은 ‘대학입학에서 지역적 특색을 배제하기 위해 진짜 성적 따위는 무시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을 공공연히 발언하고 다닌 적도 있습니다.
판세가 멀찌감치 기울어진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대충 K팝 스타 몇 명 내세우고 홍보하면 다들 우릴 찍어 주겠지’란 생각에 국가적 역량과 관심을 어처구니없이 엑스포 유치에 올인하는 짓거리는 행정고시를 패스했을 엘리트 관료들에게서 나왔을 게 분명합니다,
지금 첨단과학이 그 실용성을 시험하는 곳은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의 전장이 아닙니까. 국호에 ‘민주주의’와 ‘인민’ ‘공화국’이란 거창한 이름을 단 자들이 핵과 미사일과 군사정찰위성으로 세계를 어지럽히는 건 또 어떻습니까.

지식은 악(惡)의 소멸에 기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식은 언제나 또 다른 악(惡)을 낳고 확대재생산해 왔습니다.
더 커다란 악(惡)의 길로 가기 위한 교량이기도 했습니다다.
그렇다면 순자가 말한 화(化)나 도(道)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식’과는 다른 좌표에 놓여있는 개념일 것입니다.
취업 못해 쩔쩔매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 끝에 자장면을 배달한 지 몇 년만에 유명강사가 됐다는 식의 아리송한 ‘신지식’ 개념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라블레(Francois Rabelais·1494~1553)는 그의 작품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양심이 없는 지식은 인간의 혼을 멸망케 한다.

원칙과 기본이 무너진 사회,
기괴한 ‘엽기’가 횡행하는 사회. 그것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미궁(迷宮)과도 같은 세계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믿고 싶습니다.
고속도로에서 갓길주행을 일삼는 무도한 사람들이 눈에 잘 띄는 것은,
묵묵히 원칙을 지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이 가득찬 출퇴근길 지하철 9호선 안 임산부석 근처에서 일부러 서 있는 그 많은 공중(公衆)의 모습에서,
오늘도 또다시 희망을 봅니다.

‘K상상력’의 정수는 조선의 요괴였다고?


고전소설 ‘황장군전’에 등장하는 ‘은수자’ 요괴를 그린 일러스트. 은행나무가 변신한 이 요괴는 키 15m에 눈이 네 개로,

여섯 손에 창칼을 들고 전장을 뒤흔든다.
/눌와

일본에서 독도와 가장 가까운 오키 섬을 취재하러 출장갔을 때,
내린 공항은 요나고(米子) 공항이었습니다.
그런데 공항 이름이 희한했습니다.
‘요나고 기타로 공항’. 기타로? 아,
그것은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1922~2015)의 요괴 만화 ‘게게게의 기타로’에 나오는 주인공이었습니다.
만화 주인공이 공항 이름이 되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요나고 시내 곳곳에는 이 만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요괴들의 조형물이 설치돼 있었고,
요괴 모양의 과자를 파는 상점들도 있었습니다.

‘기타로’나 ‘포켓몬스터’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 참으로 일본은 요괴 문화를 통해 방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게 일본에 한정되는 일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지난해 조선일보 BOOKS 지면에서 ‘올해의 필자’로 선정된 젊은 학자가 있습니다.
보아·송가인과 동갑인 한국고전소설 연구자 이후남 한국연구재단 학술교수입니다.
그는 ‘K콘텐 의 바다’라고 할 수 있는 방대한 분량의 한국 고전소설을 탐색했습니다.
그리고 77편의 작품에서 모두 158종의 요괴를 찾아냈습니다.

‘전우치전’처럼 일반에 친숙한 책도 있습니다만,
대부분은 ‘옥란기연’ ‘삼강명행록’ ‘윤하정삼문취록’처럼 생소한 소설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지 못했다뿐이지 우리 고전소설이 맞습니다

아,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배척하던 성리학의 나라 조선의 문학 작품에서도 요괴가 존재했구나.

그는 단행본 ‘요망하고 고얀 것들’(눌와)에서 이들 중 20여 종을 소개했고,
박사학위 논문을 보완한 연구서 ‘한국 고전소설의 요괴’(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도 냈습니다.


이후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 /김지호 기자

어떤 요괴들이 그 속에 등장했던 것일까요? 사람을 속이며 변신하는 여우,
원숭이,
호랑이 요괴 정도는 우리에게 친숙한 편이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며 미인을 납치하는 ‘금돼지 요괴’,
여섯 팔로 창칼을 휘젓는 키 15m의 ‘은행나무 요괴’,
물속에서 독을 내뿜는 집채만한 ‘털뭉치 요괴’에 이르면 “우리나라 옛날 얘기에 그런 게 다 있었어?란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일본 요괴가 선악 개념이 없는 존재인데 비해 ‘K요괴’는 선악 개념에서 명백한 악(惡)의 화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 뭔 소리야,
그거 다 말짱 허황된 얘기 아냐?

……결코,
그저 이렇게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요괴를 그냥 못되고 허무맹랑한 존재라고만 여길 수는 없단 얘깁니다.
이후남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대 사람들의 욕망과 상상력이 표현된 대상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현실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가 바로 요괴였다는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담긴 허황돼 보이는 얘기가 고대인의 사고와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와 통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유교 이념의 통제 속에서 살아가던 현실의 사람들이라면 감히 꿈꾸지도 못했을 행동을,
소설 속 요괴와 요괴가 쓰는 약물을 통해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죠.

(1)구미호: 사대부 여인으로 둔갑해 미운 본처를 제거하고 온갖 남자들을 유혹함.

(2)올출비채: 인육으로 음식을 만드는 여장부. 화가 나면 남편과 시동생을 마구 구타함.

(3)개용단(改容丹): 성형의 꿈을 이뤄주는 약. 요괴가 먹으면 외모가 바뀜.

여기서 욕망의 단계가 더 높아지면 ‘금전’ ‘권력’ ‘인정 욕구’로 올라가게 됩니다.
여우 도사 ‘신묘랑’은 흥신소를 차려 재물을 모읍니다.
월나라 세 요괴는 국정에 참여해 요직을 맡고,
‘적룡’이라는 요괴는 사람들에게 제사를 받고 싶어 합니다.

‘이수문전’에 나오는 금돼지. 날아다니며 미인을 납치해 소굴에 가둬둔다.

/눌와

그런데 또 한 가지. 한국 요괴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다시 이후남 박사의 말을 들어보죠.

“인간과 거리 두기를 하며 소굴에 은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뒤떨어진 사회성’과 ‘공감 능력 부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때론 가부장제에 반발하고 질투심을 숨기지 않는 등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수시로 ‘히어로보다 매력적인 빌런’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작 주인공은 사회 규범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생이’인 경우가 많아 재미없다는 것이죠.
‘수호전’에서 노지심이나 이규는 무척 기억에 남지만 송강 좋다는 사람 못 봤고,
DC 히어로물에선 보통 배트맨보다 조커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지 않나요? 물론 ‘포청천’처럼 공명정대한 주인공이 엄청난 개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도 없진 않습니다만.

이후남 교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2018년 박사 논문 ‘고전소설의 요괴 서사 연구’를 썼습니다.
기존 연구가 거의 없어 애를 먹었고 주변에서도 처음엔 ‘왜 그런 주제를 잡았느냐’고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요괴가 ‘콘텐츠 트렌드’로 자리잡은 뒤엔 다들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했습니다.
인터뷰 중 인상깊었던 말은 “(정)교수가 되는 것엔 큰 관심이 없다.
오직 내가 하고 있는 연구를 하는 게 재미있을 뿐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저희 세대로선 상상이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즐거운 이유는 “판타지가 글쓰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라고도 했습니다.
“선조들이 재미있게 여긴 판타지를 생각만 해도 신이 나요. 현대인과 소통하며 새로운 콘텐츠로 되살아날 수 있는,
살아있는 고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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