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선생님과 시의 힘
‘시의 힘’은 언어로 세상 그리는 일
“시인은 절대 침묵해선 안되는 이”
동인지 중단에 유언처럼 다가와
며칠 전 서경식 선생님의 별세 소식을 들었다.
재일조선인이었던 그는 평생 디아스포라 문제는 물론이고 식민주의와 전쟁,
동아시아의 평화,
원전 문제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온 이 시대의 살아있는 지식인이었다.
또한 탁월한 비평가로서 문학은 물론 미술,
음악 등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보여준 책들을 무수히 남겼다.
가족사를 비롯한 자전적 기록이나 인문 기행을 통해 역사와 문화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식견을 들려준 에세이스트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서경식 선생님을 그 어떤 면모보다 ‘시인’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사실 그가 문학에 대해 남긴 책은 ‘시의 힘’이 유일하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을 “시인이 되다 만 인간”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모든 글을 시인의 마음으로 쓴 사람”이라고 이 말을 바꾸어 말하고 싶다.
‘시의 힘’ 2장 ‘나는 왜 ‘글쟁이’가 되었는가’에는 중학교 2학년 때 교내 잡지에 투고했던 단편소설부터 시작해 그의 문학적 여정이 소상하게 그려져 있다.
시인을 꿈꾸던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8월’이라는 시집을 자비 출판했다.
여기에 담긴 11편의 시들은 1966년 ‘재일교포 학생 모국 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처음 방문한 정신적 충격과 자각을 기록한 것이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이 뜨겁고 미숙한 시들에는 조국에 대한 ‘방관자’가 아니라 ‘목격자’가 됨으로써 ‘증언자’나 ‘실천자’로 나아가기 위한 고뇌가 깃들어 있다.
그러니 ‘8월’ 이후로 시를 쓰지는 않았다 해도 그가 평생에 걸쳐 수행한 증언과 실천의 뿌리에는 ‘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시 쓰기를 포기한 것은 “나에겐 일본어로 ‘고향’을 쓴다는
것의 한계가 보이고,
모국어로 쓰기엔 난 너무 ‘일본인’”이라는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루쉰이나 일본의 나카노 시게하루,
한국의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
김수영,
김지하 등 다양한 시인들에게서 읽어낸 ‘시의 힘’은 그의 사유의 근간이 되었다.
그가 말한 ‘시의 힘’이란 무엇일까. ‘시의 힘’이란 ‘시적 상상력’과 동의어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고 언어로 그려내는 일을 말한다.
저자는 루쉰이 말한 ‘길’의 비유를 빌려 시의 존재론을 설명하기도 한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걷는 이가 많아지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라는 말처럼,
희망 없이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시인이라는 것이다.
루쉰에 대한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자면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루쉰의 문학이 나카노 시게하루와 서경식을 사로잡은 이유이기도 했다.
이처럼 ‘시의 힘’은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움직이게 하고,
함께 걸어가게 하는 데서 나온다.
물론 시인으로 살아가면서 ‘시의 힘’을 확인할 때보다는 시가 세상을 아무것도
바꿀 수도
없는데 왜 계속 시를 써야 하는 것일까 막막하게 질문할 때가 훨씬 많다.
그때마다 서경식 선생님의 이 말을 떠올리곤 한다.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컨대 이것은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효율적인지 아닌지,
유효한지 어떤지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다는 말이다.
” 그러면서 고통받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시인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재촉한다.
다섯 명의 한국 시인이 모여 일본과 중국의 시인들과 함께 아시아 국제시동인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언어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세계를 읽어내며 ‘몬순’이라는 동인지를 한·중·일에서 동시 출간했다.
동아시아의 외교적 갈등 관계를 시의 우정으로 극복하고 평화의 길을 찾아보자는 뜻에서 어렵게 시작한 일이었다.
시인들의 연대와 우정에서 희망의 가느다란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몬순’은 결국 현실적 어려움으로 2호로 끝이 났다.
서경식 선생님의 부음을 들으니,
걷다가 포기한 그 길이 문득 떠오른다.
“시인이란 어떤 경우에도 침묵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그분의 말씀이 내게는 어떤 유언처럼
느껴진다.
나희덕 시인·서울과학기술대 교수
시간을 느리게 사는 법
사건 축적으로 인식
에피소드 많을수록 길게 느껴져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 확률도 높아
1년에 5분의 1가량은 엄마가 있는 제주도에서 보낸다.
제주에서의 시간은 서울에서보다 0.8배 정도 느리게 흐른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시간을 조금 더 다양하게 쓰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글쓰기)-일-일로 채워 넣은 서울에서와 달리,
제주에선 글 쓰는 시간을 낮으로 몰아넣고 저녁엔 바다를 보든,
엄마와 맛집을 가든 조촐하게나마 기록할 만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덕분에 매일매일에 다른 바람이 분다.
일할 때의 시간이 하나의 이미지로 ‘퉁’ 쳐진다면,
새로운 경험을 할 땐 이미지들이 각각의 서사로 힘을 발휘하면서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정재승 뇌과학박사는 ‘알쓸신잡’에서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사건’의 축적으로 인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새로운 사건이 많았다면 같은 시간도 길게 느껴지지만,
새로운 사건이 없으면 시간이 굉장히 짧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흐르는 것처럼 자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롭게 인지하는 정보량이 줄어들고 비슷한 삶의 루틴이 반복하면서,
에피소드로 기억될 만한 삶의 스냅샷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그렇다면 흐르는 시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일인가. 제주에서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똑같은 시간을 조금 더 길게 살아내는 법’에 대해 고민해 본다.
여기서 말하는 똑같은 시간은 알다시피 1년 365일,
1일 24시간,
1시간 60분으로 흐르는 물리적 시간이다.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은 그러나 공평하게 흐르진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왜 그렇게 쏜살로 가버리는지. 반대로 하기 싫을 일을 할 때 시간은 왜 그리 게으름을 피우는지. 이처럼 주관적으로 인지하는 시간 감각을 ‘카이로스(kairos)’라고 한다.
‘크로노스(chronos)’가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를 부여해 주는 나만의 시간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카이로스는 ‘기회의 신’으로 불린다.
앞머리는 길고 풍성한 데 반해 뒤쪽은 민머리이고,
등과 두 발목에 날개가 달린 카이로스의
외양에 힌트가 있다.
카이로스를 잡으려면 방법은 하나. 마주하고 있을 때 머리채를 붙잡아야 한다.
뒤돌아 날아가려 할 때 잡으려 하면? 어이쿠,
민머리라 잡을 수가 없네. 기회는 왔을 때 잡지 않으면 달아난다는 의미다.
로마인들은 이 신을 오카시오(Occasio)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기회(occasion)의 어원이 여기서 왔다.
그러고 보면,
사람 인생의 변화를 이끄는 변곡점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그것이 뜻하지 않게 다른 길을 열어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당시엔 그 시간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깨닫게 된다.
그것이 ‘기회’였음을. 흥미롭게도 장동선 뇌과학자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크로노스의 시간에도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다.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 더 건강하고 오래 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게 동기부여의 메커니즘이기도 하고,
즐겁게 산 시간이 몸의 대사에도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죠. 행복할 수 있는 경험을 놓치고 틀에
박힌
삶만 살아간다면 크로노스의 시간도 다 살지 못할 수 있어요.”
다가올 2024년 달력 앞에서 시간을 느리게 보낼 법을 강구하고 있는 내게 친구가 한마디 툭 던진다.
“플랭크를 해봐. 1분이 5분 같을 거야.” 처음엔 웃고 넘겼는데 나쁘지 않다.
그 시간이 쌓여 탄탄한 근육이 생긴다면? 의미 있게 보낸 시간의 흔적을 눈으로 만날 수 있을 테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삶은 변화 없이 그저 흘러버린다.
무의미한 일상이 반복되면 기억할 것이 남지 않는다.
이 얼마나 허무한가. 내년엔 삶에 조금 더 많은 마디를 만들어
보자는 다짐을 해 본다.
1년은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그 시간의 결과는 결코 같지 않으니까.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곡
음과 음 사이 긴 여백 채우기 위해
오랜 시간 가꾸어진 감수성 필요
老거장들의 고고한 연주 더욱 귀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피아노곡이 뭐야?” 종종 듣는 질문이다.
우선 ‘어렵다’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연주하기에 기술적으로 굉장히 까다롭고 템포가 빠른 음악을 어려운 음악이라고 한다면,
대표적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있다.
밀리 발라키레프(1837∼1910)의 ‘이슬라메이’가 있고,
모리스 라벨(1875∼1937)이 작곡한 ‘밤의 가스파르’가 있다.
작품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을 보면 고난도 묘기에 가까워 보일 지경이다.
그만큼 피아니스트들에게도 매 순간 긴장되는 작품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꼽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올해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어떤 곡일까? 우선 라흐마니노프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피아노 협주곡 역사상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협주곡으로 꼽히며,
라흐마니노프가 미국 데뷔를 앞두고 작곡한 야심 찬 작품이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곡 전체에 걸쳐,
3만 개가 넘는 음표가 등장한다.
정말 굉장한 숫자다.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3만 번의 건반 터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빠른 속도로 연주해야 하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음표의 숫자도 숫자인데,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올 수 있는 초인적인 힘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가장 대중적인 피아노 협주곡으로 알려져 있다면,
이후 작곡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은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피아노 협주곡으로 불린다.
이 작품이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게 된 건,
스콧 힉스의 영화 ‘샤인’ 덕분이다.
‘샤인’의 주인공 데이비드 헬프갓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를 끝마치고,
정신 분열 증세를 보이며 연주활동을 중단한다.
그만큼 악명 높은 피아노 협주곡이다.
실제로 작품을 헌정 받은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은 ‘나를 위한 곡이 아니다’라며 작품을 거절했다.
그는 이 작품을
연주할
만큼 큰 손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콩쿠르에 도전하는 피아니스트들의 단골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당연한 선택이다.
작년에 열린 미국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고른 작품도 바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다.
그는 결선에서 완벽 이상의 연주를 들려주며,
모두가 납득할 만한 우승을 차지했다.
쏟아지는 음표들을 놓치지 않고 연주하는 것을 넘어,
음악이 가진 드라마도 강렬하게 부각했다.
결국 이 음악은 피아니스트가 가진 뛰어난 능력을 40분 안에 요약해
줄 수 있는 음악인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연주하기 어려운 곡들은 따로 있다.
역설적이게도 한없이 느린 템포를 가진 음악들이다.
그럼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빠른 음악이 아니라 느린 음악이 연주하기 더 어렵다고?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학생들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 음악인데,
왜 연주하기 어려운 걸까?
말 그대로 느린 음악이라 그렇다.
빠른 음악에 비해 느린 음악은 음과 음 사이를 잇는 노력이 배가 된다.
음과 음 사이의 간격이 늘어나서 그사이의 여백도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아니스트는 이 여백을 채우기 위해 아주 섬세한 접근을 시도한다.
음과 음을 잇는다는 건 단순히 음을 연이어 연주하는 차원이 아니라,
음과 음 사이의 관계를 부여해야 하는 일이다.
음과 음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고,
색깔을 맞춰 주는 고도의 작업이 필요하다.
물리적인 힘이나,
근육이 아니라,
오랜 시간 가꾸어진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서로 다른 두 음에 인연을 부여하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 작업이다.
노 거장들의 연주가 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로 인한 신체노화 때문에 젊은 연주자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연주를 할 순 없지만,
그보다 귀한 연주를 보여준다.
짱짱하고 화려한 연주는 아닐지언정,
고고한 조선백자 같은 연주를 보여주는 것이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다만 이야기만 남았네
오빠가 들려주던 이야기 귓가에
따뜻한 온도를 가진 이야기들
계속 번지고 남아 삶의 용기 줘
비가 내려서 감잎이 무겁게 떨어지는 아침이었다.
전화기 속 아이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레미콘 차량이 들락거리는 공사 현장의 여성 신호수가,
통행을 제지하는 것이 미안했는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
이거 말고는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뭉클해진 아이가 이 감동을 함께 나누겠다며 전화한 것이다.
오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던 아이에게 이 말이 큰 격려가 된 모양이다.
따뜻한 온도를 가진 이야기는 이렇게 번지고 또 남는다.
철학자인 고(故) 김진영 선생은 참 다정한 이야기꾼이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매체를 통해 들었던 그분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돈다.
그가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대화 모임을 했는데,
유년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유년에 대한 글쓰기를 ‘마음의 원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유서 쓰기’로 여겼다.
임종의 침상은 미래가 없으므로 시간이 역류하여 유년으로 가기 때문이라는데,
그의 유년에는 세 아이가 있었다.
그것은 잠 못 드는 아이,
부르는 아이,
이야기꾼 아이였다.
천수호 시인
어린 진영은 잠 못 드는 밤이면 베개를 안고 할아버지 방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빨리 잠재울 요량으로 부르는 아이 이야기를 한다.
“네가 빨리 잠들지 않으면 어떤 아이가 대문 밖에서 너를 부를 거야. 세 번 부를 때까지 자지 않으면 너는 너도 모르게 그 애를 따라가서,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 거야.” 공포에 휩싸인 어린 진영은 어른이 되어서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 애가 부르기 전에 잠이 들었는지,
두 번 부를 때 아슬아슬하게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때 불려 나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나그네 삶을 살았는지.
김 선생이 떠난 지 벌써 5년이 지났고 다만 이야기만 남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유년에도 잠 못 드는 아이가 있었다.
딸 많은 집의 넷째 딸로 태어난 나는 희미한 존재감 때문에 잠 못 드는 밤을 혼자 견디는 아이였다.
그러나 예외의 밤이 있었다.
그건 세 살 위의 이종사촌 오빠가 오는 날이었다.
이 오빠는 이야기꾼의 면모를 타고났고 내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빠의 경주 지방어는 옛이야기를 더욱 맛깔스럽게
전해 주었지만 아쉽게도 그때의 이야기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빠가 졸음에 겨워서 더듬더듬해 주던 미완성 이야기 하나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아마 내가 일곱이나 여덟 살쯤이 아니었던가 싶다.
여러 개의 이야기를 하고 지친 오빠가 졸음과 사투를 벌일 시간쯤이었다.
그런 오빠와 달리 모처럼 이야기꾼을 만난 어린 나는 더욱 초롱해져서 그다음 이야기를 종용했다.
착한 오빠는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그마한 생쥐 한 마리가 큰 강을 건너고 있었어. 긴 꼬리를 강물에
담그고 퐁당퐁당,
강을 건너고 있었지….” 그러고는 오빠는 졸기 시작했다.
나는 큰 강을 머릿속에 그려 놓고 그 강물 한가운데 작은 쥐 한 마리가 긴 꼬리를 적시며 강물을 건너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 쥐는 그쯤에서 동작을 딱 멈추었고 나는 아주 소심하게 오빠를 흔들었다.
오빠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아직 퐁당퐁당 건너고 있어….” 그러고는 또 눈을 스르르 감았다.
내가 건드릴 때마다 오빠는 “아직도 퐁당퐁당….”
나의 생쥐는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고,
그의 강은 점점 더 넓어졌다.
생쥐는 어쩌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강을 다 건너지 못하고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다 건너지 못한들 어떠랴. 생각해 보면 생쥐인 내가 삶이라는 큰 강 앞에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앞에 큰 강 이야기를 풀어 준 그 오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유년의 이야기는 언젠가 내게 시간이 역류할 때 다시 쓰게 될 마음의 원전이겠다.
이렇듯 나에게도 다만 이야기만 남았다.
“주인도 노예도 다 죽었고,
죽은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책 속에,
영화 속에,
머릿속에.”
(김상혁 시인의 ‘인간의 유산’ 중에서)
천수호 시인
서경식 "희망을 말하는 자를 의심하라"
서경식 도쿄 경제대학 교수(65)의 어린 시절 주된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였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재일조선인으로서 위태로움·불안을 일상적으로 경험했다. 영어수업 시간에 ‘I am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우다가, 한 명씩 따라 하라는 선생님의 말에 긴장이 고조되어 입을 열지 못하다 겨우 '하지만 저는 일본인이 아니라…' 하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그에게 ‘국민’이라는 존재의 명징함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그는 서승(리쓰메이칸 대학 교수), 서준식(인권운동가) 형제의 아우다. 두 형은 박정희 시대에 고국에 유학 왔다가 1971년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9년 동안 감옥에서 청춘을 보냈다. 그는 첫 책 <나의 서양미술 순례>(1992, 창비)를 출간하며 ‘형들의 구호 활동을 하다가 부모님을 잃고 암담한 기분이 되어 훌쩍 유럽행을 감행했다. 동서고금의 예술작품과 작가를 만나면서 차별과 박해에 짓눌린 증거, 이것에 저항하다 죽어간 증언을 마주했다’라고 말했다. 형들이 감옥에서 보낸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타자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한 것이다.
서 교수는 다수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에 저항하고 그것의 본질을 끝까지 추궁했다. 사회적 소외와 고통에 대한 연대 또한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기록한 책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경계에서 만나다> <언어의 감옥에서> <디아스포라 기행>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등 30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시가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지 사유한 책 <시의 힘>은 지난해 ‘작가들이 사랑한 2015년 올해의 책(한국작가회의)’으로 선정되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살고 외국어인 일본어로 글 쓰는 사람을 국내 작가가 동료로 인정해줬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라는 그의 소감에서도 ‘경계인’을 느낄 수 있다.
서 교수는 3·11 원전 참사 5주년을 앞두고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을 출간했다. 방한한 서 교수를 3월4일 만났다. 민감한 질문부터 꺼냈다.
지난 2월 말, 일본 외무성이 서울에서 후쿠시마 피해 지역 생산물을 홍보하고 판매하려다 시민의 저항에 부딪혀 취소했다. ‘후쿠시마는 안전하다’는 선전이 경계를 넘는다.
인도적 차원에서 현지인을 돕자는 선의를 비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방사능은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이 땅에 태어나는 아기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지금, 여기’ 이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미래 세대는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이유로 병을 앓을 수 있다. 한국·중국·북한·러시아·동아시아 다 외면하고 방치하면 안 된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넘어서야 한다. ‘현지인을 지원하자’와 ‘안전하다’는 전혀 별개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다.
재앙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방사능의 위험성은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후쿠시마 현 내 어린이의 갑상샘암 수치는 늘고 있는데, 정부는 원전 사고와의 관계성을 입증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일본 웹사이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진실과 방사능 건강 피해’는 후쿠시마 현 내 어린이 갑상샘암 발생 수가 2015년 9월30일 현재 18세 이하 남녀 합계 152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때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을 중심으로 판단해야 한다. 내가 괜찮지 않으면 안 괜찮은 거다. 그런데도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심리적 알레르기 반응’이라고 비난하는 건 정치적 의도를 의심해야 한다. 국가와 기업은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는 ‘후쿠시마는 정부의 제어하에 있다’고 말한다. 도쿄 올림픽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기억할 것’을 강조해왔다.
국가나 기업 권력은 ‘망각증’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는 걸 잘 안다. 후쿠시마 참사뿐 아니라 세월호, 홀로코스트,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기억의 투쟁이 권력투쟁의 핵심이다. 무관심과 망각을 넘어서 기억하고 증언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무기다. 지식인과 문인, 언론이 맡은 역할이 크다.
기억하는 사람은 소수다. 결국 질 수밖에 없다는 뜻인가?
공감하는데, 동감했다고 하면 안 되겠지?(웃음) 사회적 책임을 목격하지 못하니, 허무함에 빠지기 쉽다. 그게 참 문제다. 이주노동자, 재일조선인 등 소수자는 자신의 힘든 상황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어서 외면하려고 한다. 일부 후쿠시마 현 시민은 불안을 외면하려는 기제가 있다. 나약한 인간은 공포나 불안을 마주하기 싫으니까 외면하고 근거 없는 낙관으로 살려고 한다. 뉴스를 보는 대신 예능 프로그램만 보고, 우리는 안전하다든지, 후쿠시마의 일일 뿐이라든지, 한국과는 관계없다는 식으로 거리를 두기 때문에 희생자가 소외된다. 결국 소수자는 외면에 지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절망감에 자살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게 우리의 역사다.
역사는 비극적이다?
그렇다. 그 부분에 대해서 낙관적일 수 없다. 정직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근거 없이 ‘희망적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건 죄스러운 일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경기가 좋았던 과거에 기득권을 얻고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희망은 믿을 게 못 된다. 오히려 우리의 공허함을 직시하는 게 건강하다. 젊은 세대에게 ‘희망적이다’라는 구호야말로 허무하다. 다만 세월호 참사 같은 기억은 널리, 깊게, 오래 공유되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고서 다른 국면에서 또 마주볼 일이 생긴다. 그렇게 기억하고 믿고 버틴다.
1966년 고등학생 때 이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1970∼80년대 한국은 군사독재 정권이 집권했다. 암울한 시대였다. 나의 두 형은 감옥에서 지냈다. 나는 일본에서 구명운동을 하면서 어두운 밤을 보내며 새벽을 기다리고, 또 절망했다. 하지만 고난 중에도 희망이나 희망의 가능성은 있었다. 현해탄 건너편 잘 알지도 못하는 고국에서 버티고 저항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형은 전태일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감격스럽게 했다. 서울대 학생이라면 당시 지식인 기득권층인데, 이들이 평화시장에 가서 노동운동을 한다고도 했다. 기꺼이 감옥에 가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고국에 대한 존경심이 생겼다.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 역시 어느 한 부분이라도 이 사람들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희망’을 온몸으로 말해주던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그때가 희망적이었다고 해도 그런 시대를 다시 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그 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이 느낀다. 독재정권의 피해자가 여전히 살아 있는데, 안타깝다.
한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뭐라고 생각하나?
한국은 세계적으로 드물고 귀중한 위치에 놓여 있다. 소위 식민지 지배를 받아온 나라는 지금도 가난하고 문제투성이고 민주주의를 거론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한국은 OECD 가입국이고 세계적으로도 발언권이 있다. 현재 한국은 옛 식민지의 지배국 편으로 아슬아슬하게 붙어갈지, 아니면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의 선두에서 기득권과 맞서 싸울지 기로에 서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지난 ‘12·28 위안부 합의’도 1965년 한일협정 때처럼 박근혜 정권이 가해국과 타협했고, 기득권에 저항하는 위치를 지키지는 못했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담론을 민족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정확히는 민족주의이자 인터내셔널이다. 피해의 경험은 경계를 넘어 지속되었고 이들을 대표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표해달라고 누가 위탁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상 그렇다.
‘12·28 위안부 합의’와 박유하 교수에 대한 논란을 어떻게 지켜봤나.
‘화해’라는 미명 아래 피해자에게 타협과 굴복을 강요한다. 이런 ‘폭력’은 세계적 현상이다. 노예제도, 식민지 지배, 침략전쟁 등의 피해자들이 진실 해명, 책임자 처벌, 보상,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세계 각지에서 거세지니까 선진국(옛 식민지 종주국)들이 반발하면서다. 특히 리버럴한 선진국 주류가 입으로는 ‘도의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결코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고압적으로 피해자의 요구가 비현실적이라고 하면서 피해자가 화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부나 박유하 교수의 입장이 그렇다. 이런 담론은 선진국 국민으로서 기득권을 지키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욕망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피해자 입장이 아니라는 거다. ‘화해’라는 폭력에 철저히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1년 8월 말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열린 유엔 반차별회의(인종주의·인종차별·외국인 혐오·불관용에 반대하는 세계회의)는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이 참여한 회의였다. 노예제와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고 법적 청산을 처음으로 요구하는 자리였지만, 이른바 선진국이 완고히 저항해서 ‘법적인 책임은 없다’고 못 박았다. 이스라엘과 미국 대표단은 ‘시오니즘은 인종차별이다’라는 결의안에 반발해 퇴장하는 지경이었다. 회의 자체가 무시되는 거였다. 결국 한국이라는, 국가에 갇힌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이 아니라 전 세계 피해자들과의 연대를 통한 반식민주의라는 원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도의적 책임은 있는데 법적 책임이 없다는 말은, 법이 상위에 있고 도의가 하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원래 그 반대여야 한다. 도의적인 책임이 있는데 법이 없으면 법을 만들고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한 일이다. 세계적으로도 많은 제3세계 시민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다.
후쿠시마, 세월호, ‘위안부’ 문제의 공통점이 있나?
가장 중요한 건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주체는 국가다. 국가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레토릭이 동원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 점이다. 성폭력과 인신매매는 언제나 있어왔지만 ‘위안부’의 경우, 국가가 등장한 점이 다르다. ‘전쟁 때 일본이 여성의 인권을 집단적으로 침해한 사건’이다. 사실 이 수준으로 해석하면 아주 한정된 거다. 이마저 해결하지 못하면 더 넓은 범위인 ‘일본이라는 국가가 다른 국가를 침략한 국가 범죄’까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나?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은 민족주의나 국가에 구애받는 것에 비판하지만 국가의 관여는 사실이다.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세월호, 후쿠시마 다 마찬가지다.
비주류의 삶에서는, 주류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보인다고 했다.
국가 비판의 시각을 견지하면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다. 오히려 국가와 나 자신을 동일화하고 일치시켜 ‘국가가 있어야 나도 살 수 있다’는 식으로 사고하면 문제가 생긴다.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되니까 괴로워서 변명하게 된다. '너도 대한민국 국민이지? 대한민국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어?' 이런 식이다.
소수자를 인식하는 일은 불안을 마주하는 일일 테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소수자지만,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다수자와 일치해서 아슬아슬하게 사는 사람이 대다수다. 일본에서 조선 이름조차 사용하지 못하는 현실만 봐도 그렇다. 하지만 불안을 마주하고서도 직접 싸우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도 있다. 이들이 흑인해방 운동,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 등을 이끌었고 또 ‘성공’했다. 아무리 망각하고 지더라도 언젠가는 소수자의 언어가 이해되리라는 걸 믿고 싶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들 게 아니라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보편성을 사회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나는 비관적이지만(웃음),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끌어안고 싶다. 소수자로서 인간 그 자체의 존엄성을 믿기 때문이다.
소수자로서 경계해야 할 일이 있나?
다수자 처지에서 소수자의 목소리 가운데 ‘재미있는 것만’ 골라서 문학이나 영화 등의 소비물로 만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물론 자신을 소비물로 상품화해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도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니다. 전 세계 소수자가 이런 방식으로 생존전략을 취하는 게 드문 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가 낼 수 없는 목소리를 내가 대신 낼 수 있는 발언권을, 나 자신도 모르게 지니게 됐다. 앞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지만, 이 점을 잊어버리지 않고 일해야 한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서 교수는 ‘성공’한 재일조선인인가? 본인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는지 궁금하다.
재일조선인은 한 사회의 소수자이고 전체적으로 보면 고립돼 있으며, 주변에서도 멸시와 차별을 당한다. 대다수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표면적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다. 이중 삼중의 생활을 강요당한다. 그에 비하면 나는 재일조선인 서경식으로서 글도 쓰고 교단에서 가르칠 수도 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뤘다. 특히 고국의 땅에서 독자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꿨다. 이 지점에서 ‘성공’이라면 ‘성공’이다. 어린 시절 부유하지 않았지만 가난하지 않았고('가난했다면 경우에 따라 이북으로 귀향했을지 모른다'), 군사독재 시절에 (훌륭한) 정치범 가족을 통해 조국을 만났다. 지금까지 나의 ‘성공’은 아주 미묘한 틈새에서 이어져온 사건이었다.
송지혜 기자 / song@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