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내가 하는 생각이 진정 내 생각인지 확신하시나요? 아무 생각 없이 남의 생각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살면서 나를 성찰한다면 남의 생각을 내 것으로 품고 있다고 깨닫게 될지 모릅니다.
자기 성찰 능력을 지닌 사람이 늘어날수록 세상이 평안해지겠지만,
돌아가는 형세는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에 혁신적인 관점을 꾸준히 추가한 분석가로 영국의 윌프레드 비온이 있는데,
그 이론에 제 생각을 더해서 세상 이야기를 풀어 보려 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숙성되지 않은 생각을 연속해서 쏟아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이 혼탁해집니다.
스스로를 지키고 이롭게 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존중하나,
성숙한 사회는 숙성된 생각들이 모여야 이루어집니다.
원초적인 욕망을 걸러지지 않은 거친 언어로 표현해서 공격적 본능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킬 수는 있겠으나 듣는 사람들의 평정심을 흔들어 댄다면 폭력입니다.
욕망의 분출을 스스로 통제하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려 살기 힘듭니다.
언어의 탈을 쓰고 분출된 욕망은 폭탄처럼 터져서 해를 끼칩니다.
분석가 비온은 솟구쳐서 뿜어져 나오는 아기의 욕망을 엄마가 자기의 마음에 잘 받아들여 소화시켜서 돌려줘야 아기의 마음이 건강하게 자란다고 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엄마들이 들으면 크게 놀랄 일이지만 이유식이 마땅찮던 시절의 아기들은 할머니가 입안에서 직접 씹어서 부드럽게 반쯤 소화시킨 음식을 받아먹고 자랐습니다.
개인이 아닌,
사람들이 모여 만든 집단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들려오면 누구의 어떤 생각인지를 판단하기가 혼란스럽습니다.
집단에서 나타나는 심리 현상은 훨씬 더 역동적입니다.
개인이라면 발휘할 자제력을 집단에서는 쉽게 잃을 수 있어서 집단의 말과 행동은 럭비공같이 어디로 튈지,
예측이 어렵습니다.
소속된 개인이 마음을 놓고 있으면 집단이 주입한 생각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 믿어 버리는 늪에 빠집니다.
자신이 군인으로 싸운 경험과 전쟁에서 상처받은 집단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비온의 이론을 빌리면 어떤 합리적인,
과제 지향의 집단도 시간이 지나면서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도 모르게 일보다는 왜곡된 욕망과 사람 간의 관계에 집중하는 집단으로 변질됩니다.
집단의 변질은 세 가지 방식으로 서서히 은밀하게 진행됩니다.
우선,
지도자에게 어린아이처럼,
지나치게 의존하게 됩니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기보다는 기대어서 성장하고 보호받으며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경우는 세상을 바꾸고 자신들을 구원해 줄 지도자가 안에서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추앙하는 방향으로 집단이 움직입니다.
또 다른 경우는 외부에 공격할 적을 내세우고,
공격과 후퇴를 말과 행동으로 반복하면서,
거칠게 흔듭니다.
원래는 해야 할 일을 합리적으로 하려고 의도했던 집단도 구성원들의 무의식적 욕망이 침투하면 변질됩니다.
집단적 마음 상태를 공유해서 확신으로 포장하면 힘 있게 분출되면서 파괴력을 과시합니다.
세 가지 마음 상태를 집단이 오가면서 움직이지만 경험에서 배우지는 못합니다.
‘확신’은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 공유될수록 굳어지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믿음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을 다 바꿔줄 것으로 믿고 의지해 온 지도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도 눈을 감습니다.
여전히 그 사람이 집단 내의 갈등을 처리하고 집단이 해체되는 위기를 막으리라고 믿습니다.
지도자가 후퇴하는 모습을 보여서 자신이 결국 그 사람을 떠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이 들어도 고개를 저으며 회피합니다.
변질된 집단은 가치관이 이미 왜곡되어 있어서 위기가 닥쳐도 지도자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의존과 추앙의 대상으로 유지합니다.
오히려 악마화할 바깥 상대를 만들어서 공격의 에너지를 외부로 돌립니다.
자발적인 선택들로 보이나 무의식에 휘둘리는 겁니다.
집단의 흐름에 사로잡히면 현실 판단이 작동을 멈추어서 깨닫지 못합니다.
살아 있는 누구도 생각을 멈추지 않습니다.
생각의 틀을 내 생각으로 채우는지,
아니면 남의 생각을 그냥 주워 담고 있는지는 전혀 다릅니다.
숙성된 내 생각으로 채우면 의견이 되고,
성급하게 남의 생각으로 채우면 선입견이나 편견일 확률이 높습니다.
생각을 성급하게 말이나 행동으로 옮기면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롭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생각을 숙성시키는 기능을 마음에 만들어서 유지 관리해야 합니다.
생각의 출발점은 익지 않은 열매와 같아서 숙성시키려면 천천히 필요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말로 표현되는 폭력은 숙성되지 않은 생각의 부작용입니다.
애초에 배설이 목적이고,
소통이 아닙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거친 생각을 받아들여 성숙한 생각으로 되돌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윌프레드 비온은 어린 나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탱크를 몰며 싸웠습니다.
전쟁 이후에는 남의 생각을 명령으로 받아 수행해야 하는 집단을 떠나 내 생각,
혼자의 힘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 읽기[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시어머니가 며느리와 관계가 힘들다고 호소합니다.
며느리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임원들은 직원들이 자신들을 잘 따르지 않는다고 불만입니다.
직원들은 임원들이 고압적이고 개인 생활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세상은 ‘세대 간의 갈등’이라고 부르면서 대책을 요구합니다.
집단과 집단 간의 갈등을 지칭하는 용어이나,
정신분석가의 관점에서 보면 해결책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문화를 바꾸고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은 그럴듯하나 실효성이 있으려면 세월이 오래 걸릴 겁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크게 보면 볼수록 세부적이고 고유한 사항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은 거시적인 사회 현상보다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고장이 났다는 미시적인 관점(觀點)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관점’은 ‘보고 생각하는 태도나 방향’입니다.
때로는 관점을 바꿔야 제대로 이해하게 됩니다.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같이 살고 있다고 해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반드시 같은 ‘종족’은 아닙니다.
성별,
연령이 같아도 관점이 다르면 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보다 더 크게 다른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물론 세대가 다르면 이 사람의 개인사와 저 사람의 개인사가 다르니 관점이 다를 확률이 높습니다.
경험의 시점(時點)이 다르면 관점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시점’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어느 한 순간’입니다.
세대 간의 갈등을 푸는 방법은 시점이 서로 멀어도 관점을 가깝게 하는 데 숨어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관점 조정을 방해하는 요소는 전이(轉移)입니다.
‘전이’는 분석 용어로 ‘어떤 대상에 향하였던 감정이 다른 대상으로 옮아가는 현상’입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겁니다.
시어머니는 혹독했던 시집살이를 떠올리며 스스로 인자한 시어머니임을 자부할 겁니다.
며느리는 친정어머니의 경험이 귀에 박혀 마음을 굳게 다질 겁니다.
그러니 전이 감정들끼리의 충돌입니다.
시점에 맞지 않는 관점을 바꿔야 문제가 풀립니다.
자신의 며느리 시절 관점이 옳아도 지금 도움이 안 되면 고쳐야 합니다.
며느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익숙한 관점이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관점도 순리에 맞게 바꿔야 합니다.
분석가로서 보면 직장도 가족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직장에서 벌어지는 갈등이지만 가족 관계가 겹쳐 어른거립니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옮겨오면서 아이를 키우는 방식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핵가족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가족의 중심이 됩니다.
아이는 대가족에서 이미 겪었을 좌절,
실망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자라서 가족이 아닌 남들과 일하게 됩니다.
쉽게 갈등 구조에 노출되고 가족 간에나 하던 행동을 직장에서 생각 없이 하기도 합니다.
남들이 자신의 경계를 침범하는 것에 예민한 성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직장 상사가 설령 대가족에서 자란 경험이 있어도 핵가족에서 자란 직원의 입장을 고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두 사람의 개인사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양측 모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전이 현상의 관점에서도 보아야 합니다.
직장 상사에게 서로 사이가 나쁜 자식이 있다면? 직원에게는 상사와 같이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부모가 있다면? 그렇다면 문제의 본질은 겉보기와 달리 이 가족의 갈등이 저 가족의 갈등과 충돌하는 겁니다.
아들,
며느리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이해가 됩니다.
애써 키운 아들이 결혼하면서 멀어졌다면 외롭고 배제된 느낌이 들어도 해결책은 막막할 겁니다.
가족 간에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이미 품 안의 아이가 아니니 서로 입장이 다르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방법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이제는 아들에게 의존하는 삶이 아닌 자신만의 삶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출생부터 사망까지 사람은 누구나 발달 단계를 거치고,
각 발달 단계에는 성취해야 할 고유 과제가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는 발달 단계와 과제가 아주 다릅니다.
임원과 직원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발달 단계와 과제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하면 부작용만 생깁니다.
어떤 관계이든지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진심인 척하는 관계는 내리막길을 걷습니다.
공감하기 어려우면 솔직하게 말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더 들어야 합니다.
입으로는 변화를 외쳐도 마음은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일을 주저하고 저항하고 방어합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 반,
익숙한 것을 지키려는 마음 반이 맞섭니다.
변화는 낯설고 두렵습니다.
망설임은 거리 두기 아니면 다툼으로 이어집니다.
견디기 어려워도 감정적으로 대처하고 행동해서는 후회하게 됩니다.
인연을 끊겠다고 통보한다면 깨진 접시처럼 되돌릴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표를 던져도 새 직장에서 적응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감정을 조절하며 세밀하게 살피고 고민할 일은 고민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가는 단순화를 경계합니다.
단순화시키면 복잡성이 왜곡되어 해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오로지 깊게 다루어야 할 뿐입니다.


생각의 깊이,
세상의 이치[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국제정신분석협회는 프로이트의 주도로 창립해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정신분석가들의 모임입니다.
두 해마다 총회 및 학술대회를 여는데 북미,
유럽,
남미를 옮겨 다닙니다.
모임에 가면 제 나이는 젊은 편에 속합니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가이자 정신과 교수인 전임 회장 중 한 분은 지금 100세에 가깝지만 학술,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10년 전쯤 직접 만나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아들뻘인 저보다 두뇌 활동이 더 명석하다고 느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우리나라도 현대의학의 발전과 생활 환경의 개선 등에 힘입어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인 초고령사회를 향해 급하게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가피하게 세대 간의 갈등이 교육,
경제,
정치 등 영역에서 사회적 문제로 이미 떠올랐습니다.
노인과 젊은이가,
젊은이와 노인이 삶의 경험과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나 달라서 서로 소통하기 어려워합니다.
농담으로,
형제자매가 많은 집은 첫째와 막내 사이에도 의사소통 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살날이 많이 남은 젊은이는 주로 지식의 영역에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지식의 영역을 이미 경험해 본 노인은 지혜의 영역이 근본적으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 피할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합니다.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나이가 든 분석가들이 젊은 분석가들을 가르치고,
젊은 분석가들은 나이 든 세대의 학술적,
분석적 능력을 존중하고 배우려 합니다.
서양 문화에 뿌리를 두고 시작한 정신분석이 동양의 유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아서 그리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론적,
임상적 경험이 축적되면서 분석의 지혜가 깊어지기 때문일 겁니다.
분석을 떠나 생각해도 판단력,
통찰력,
해석하고 대처하는 능력은 젊은 나이에 성취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정신분석의 본질은 세상을 사는 개인의 방식을 다루는 것이니,
분석가가 지닌 삶의 지혜가 분석에 중요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지혜는 쉽게 얻어지지 않으며,
시간의 단련과 검증을 받으면서 ‘늙은 나무’로 자라는 겁니다.
설령 늙은 나무에는 어린나무에서 느껴지는 싱그러움이 없다고 해도 주변에 그늘을 제공하는 묵직함은 어린나무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닙니다.
그러니 분석가가 되는 수련 과정은 지식의 영역에 치우쳐 있어도,
분석가를 지도하는 교육분석가가 되려면 지혜의 영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야 합니다.
물론 기억력과 연관된 지식의 영역은 나이가 들수록 줄어들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이가 들수록 늘어나는 지혜가 지식을 제대로 해석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제시한 지식 기반 답안을 최종적으로 지혜롭게 해석할 주체는 사람입니다.
지혜가 생기면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새로운 지식이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세상이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거나 줄이고 순리를 따르려면 지식의 영역과 지혜의 영역이 적대적으로 간섭하지 않고 오히려 협업해야 합니다.
지식의 영역이 지혜의 영역을 통제하고 지배하려고 하면 세상은 시끄럽고 어수선해집니다.
지혜의 영역이 지식의 영역을 열등하게만 본다면 그 역시 잘못입니다.
지식은 지식의 길로,
지혜는 지혜의 길로 가면서 궁극적으로는 지식이 숙성되어 지혜가 되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며 사회 시스템으로 도와야 합니다.
태어나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철이 든다’고 합니다.
특정 분야의 지식을 높게 쌓는다고 해서 반드시 철이 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으로 쌓아 올린 전문성은 다른 관점에서는 다른 분야는 모른다는 고백일 뿐입니다.
그런 전문가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는 자신이 믿는 부분적 진실이 전체를 대변한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전문가라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 헤집고 다니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국한된 지식의 틀에서만 보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없기에 그리하는 겁니다.
초보 분석가는 주로 지식의 영역에서 분석을 하려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많은 분석가는 지혜의 영역에서 분석을 합니다.
지식보다는 지혜가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깊이가 얕을수록,
생각의 길이가 짧을수록 말실수하기 딱 좋습니다.
생각의 품질은 학력이나 사회적 지위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짧고 얕은 생각에서 말하면 깊은 생각이 아닌 입속의 침을 뱉은 것과 같습니다.
당연히 듣는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상처를 줍니다.
앞으로는 말을 조심한다고 입술을 깨물어도 근본 해법은 아닙니다.
소리는 입안에서 나오지만 말에 담긴 내용은 생각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깊이와 길이에 관심을 가져야만 변합니다.
남은 시간이 길고 짧은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문제가 아닙니다.
기대수명이 길어도 과거에 매여서 스스로 현재를 낭비하고 있다면 쓸 수 있는 미래가 줄어듭니다.
나이가 들었어도 과거에 매이지 않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고 있다면 미래는 상대적으로 늘어납니다


인내심―제대로 기다리는 방법 찾기[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세상살이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맛이 단맛보다는 쓴맛이라는 말에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그러니 산다는 것은 버티는 일입니다.
버티는 힘은 인내심에서 나오는데 사전에 의하면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마음’입니다.
미국 정신분석가인 살만 악타르는 인내심이 네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외부의 현실과 내부의 마음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
분노와 억울함을 버리는 것,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지키는 것,
그리고 초조함과 조급함 없이 좋은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깊게 보려는 것은 인내심이 피분석자와 분석가 사이의 상호작용에도 아주 의미 있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한번 생각해 봅니다.
나 자신이 과연 그들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일까. 여기서 그들이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나오는 두 인물입니다.
그들은 그냥 계속 기다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피분석자와 분석가의 관계는 이런저런 기법적인 과정을 떠나 홀로 기다리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같이 기다려준다는 것이 바탕입니다.
분석 과정에서 다른 사람 탓만 하던 사람이 자신의 책임도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삶을 소모하지 않게 되며,
절망감에서 벗어나고,
여유 있게 기다릴 수 있다면 큰 변화가 생기는 겁니다.
그러니 피분석자도,
분석가도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뎌야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 현재를 지배하면 우울감에 빠집니다.
지난 일에 매여서 현재를 생산적으로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울감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예를 들어 잃어버린 것에 대한 반응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계속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물건이나 돈은 물론이고 관심,
사랑,
성공도 상실의 대상입니다.
지나간 길을 쳐다보며 힘들어하는 우울감과 달리,
불안은 갈 길에서 마주할 아직 모르는 것에 관한 막연한 느낌입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를 현재의 시점에서 근심하면서 삶의 조각을 버리는 겁니다.
정신분석의 중심에는 감정이 자리합니다.
프로이트는 초기에 카타르시스를 강조하면서 피분석자를 지배하고 있는 억압된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는 행위를 치료에 활용했습니다.
몸에 생기는 이런저런 질병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만 마음에 파도처럼 몰려오는 다양한 감정도 만만하지 않습니다.
감정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단어들에는 감각의 요소,
움직임의 요소,
표출의 요소가 단어에 따라 골고루 포함돼 있습니다.
순서를 굳이 정해본다면 느낌,
감정,
정서,
정동일 겁니다.
느낌이나 감정은 일반적인 표현이고,
정서와 비슷하지만 가장 힘이 있는 표현인 정동(情動)은 ‘희로애락과 같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일어나는 감정,
진행 중인 사고 과정이 멎게 되거나 신체 변화가 뒤따르는 강렬한 감정 상태’라고 길게 정의되며 ‘충격’ ‘유발’ 같은 움직임이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하고 억울하다는 원통(冤痛)에는 폭발적 에너지가 충전되어 있습니다.
비슷해 보여도 원통한 사람과 우울한 사람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울하면 자신의 탓을 하며 혼자 있으려 하지만 원통하면 남을 탓합니다.
자신이 불공정한 속임수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울한 사람은 자신을 해치려 하지만 원통한 사람은 남을 해치려 합니다.
원통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분노를 타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길러냅니다.
원통함이 지나치면 자아의 왜곡이 일어나서 용서할 여유가 없어집니다.
인내심은 성숙함에서 비롯됩니다.
비록 인생이 쓴맛이라고 해도 쓴맛을 두려워하면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경험도 인내해야 축적됩니다.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재능보다는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관계를 맺고 지속하는 것도 인내의 결과입니다.
낯선 상대를 참고 기다려줘야 관계가 맺어지고 이어집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기다리려면 믿음이 선행되어야 하고,
과거에 믿음이 깨어졌던 쓰라린 경험을 했다면 어렵습니다.
인내심은 믿음이 기반인 관계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낙관과 비관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성향이 기울지가 결정되는 겁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고도’를 기다리겠지만 조급하게 기다리는 것도,
맹목적으로 기다리는 것도 모두 허망할 겁니다.
정신분석으로 읽으면,
덮어놓고 기다린다면 만성적으로 미루는 것을 되풀이하는 일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학대합니다.
반면에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해한다면 자기중심적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려 하지만 성과는 미미합니다.
제대로 기다리는 방법을 현명하게 찾아야 합니다.
분석가 역시 피분석자가 이렇게 저렇게 하는 이유를 탐색하고 이해해서 나눕니다.
기다림은 늘 피분석자의 무의식적 환상에 뿌리가 닿아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되어야 합니다.
미래에 내게 다가올 삶을 헤아려 내다보는 과정에서 인내심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 삶의 계획이나 노력이 실종된 근거 없는 낙관주의도,
삶 자체를 두려워하는 무조건적인 비관주의도 제대로 기다리는 방법이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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