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7일 국회에서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7일 더불어민주당은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대의원제도를 축소하는 내용의 당헌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당 대표를 선출하는 전당대회 투표에서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의 비중이 60대 1 정도였던 것을 20대 1 미만으로 줄이는 내용의 개정이었다.
이로써 대의원 표의 가치는 상당히 낮아졌고,
대의원 제도는 대폭 축소되었다.
주요한 개정의 이유는 표의 등가성 문제였다.
대의원도 1표,
권리당원도 1표인데 왜 그 가치가 달라야 하느냐는 얘기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표의 등가성만을 따진다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국민 여론조사인데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더불어민주당 전체 대의원은 1만 명 내외이다.
그런데
국민 여론조사는 일반적으로 2천 샘플 내외로 조사가 이루어진다.
즉,
2000여 명의 국민 여론조사 응답자와 100만 명의 권리당원이 거의 동등하게 취급된다는 얘기다.
굳이 표의 등가성을 따지자면 여론조사 응답자 1명의 가치는 권리당원 1명보다 500배나 많은 셈이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의미할까? 더불어민주당의 권리당원들,
특히 대의원 표의 가치를 축소하도록 집요하게 요구했던 권리당원들은 사실상 '조직'으로서의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직 내의 규정에 따라 대의기관의 구성원으로 임명된
사람들(대의원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해서는 안 되고,
조직 외부에 있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러한 권한을 줘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이들의 정체성은 정당의 당원이라기보다는 정당 그 자체를 부정하는 정치 팬덤층에 가깝다.
정치 팬덤의 행위 기준은 단 하나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에게 도움이 되느냐가 유일한 판단기준이다.
따라서 정치 팬덤층이 당 안으로 들어와 있다고 해서 당의 룰을 지키거나 당의 비전에 따라 행동할 것으로 기대하면 오산이다.
그들이 당에 들어온 이유,
당 활동에 개입하는 이유는 오로지 팬덤 리더가 당권,
대권을 거머쥘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신들의 리더가 그러한 권력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정당의 공식 조직이나 오랜 전통도 간단히 무시하며,
당내의 경쟁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는다.
맹목적인 추종세력과 리더의 권력욕이 추동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전략공천관리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남소연 따라서 팬덤정치는 팬덤 리더를 중심으로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단단하게 뭉쳐 오로지 리더의 최고권력 쟁취를
목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정치행태를 일컫는다.
그러나 팬덤정치를 추동하는 동력은 리더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세력뿐만 아니라 팬덤 리더의 권력욕 또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말하자면 팬덤정치는 쌍방향적인 속성을 지니며,
리더가 추종세력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욕을 실현하려는 열망도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제21대 총선 당시 선거법 개정과 비례용 위성정당 창당이라는 모순된 행태를 통해 팬덤정치의 작동 원리를 명확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군소 야당들은
제1야당의 거친 반대 속에서 힘겹게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법을 개정했지만,
이내 곧 비례용 위성정당을 만들면서 선거법 개정의 취지를 스스로 허물고 말았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비례연합정당'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자유한국당이 만든 '미래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중심이 된 '더불어시민당' 사이에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어렵게 선거법을 개정한 후 스스로 그 선거법의 작동 원리를 허무는 발상이 실제로 어떻게 실현 가능했을까?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선거 승리를 이유로 '비례연합정당'의 불가피성을
설파했고,
권리당원의 옷을 입고 있던 정치 팬덤층은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당 지도부의 결정을 사후 승인해줬다.
선거제도의 원리,
정당의 명분 등은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지 못했다.
지지하는 누군가를 지켜줘야 한다는 팬덤정치의 원리만이 선거정치를 관통하는 전략적 판단의 원천이었다.
이로써 2020년의 '비례용 위성정당' 사건은 한국의 선거와 정당을 더 없이 희화화시키는 저질 정치 드라마를 양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2024년 총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팬덤 리더에게 유리한 방향이라면
병립형으로 회귀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팬덤 리더의 이해관계를 지킬 수 있는 방안이 도출될 때에만 준연동형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의 사후 정당화 역시 당원의 옷을 입고 있는 팬덤층을 통해 이뤄지게 될 것이다.
이제 팬덤 리더는 전 당원투표라는 전가의 보도를 언제든지 꺼내들 수 있다.
당권을 접수한 팬덤정치가 정당정치에 절대적으로 해로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 당비 납부 당원수 변동 추이. 2022년도 정당의 활동개황(2023.11.28,
단위 : 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다시 서두의 논의로 돌아가서,
대의원에 비해 권리당원의 표의 가치가 떨어진 것은 권리당원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데 그 원인이 있다.
권리당원이
6만 명 수준이었던 2008년이라면 대의원과 권리당원의 표의 등가성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2022년 기준으로 권리당원이 30배 가량 늘어난 140만 명에 이르게 돼서 권리당원 표의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대의원 숫자를 적절한 규모로 확대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에 대처할 수도 있다.
이는 마치 국가의 인구가 늘어나면 국민의 대표자들인 국회의원의 숫자를 확대하여 대표성의 문제를 풀어 나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이 선택한 방법은 대의원들의 표의 가치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인구가 늘어났는데도 대표자들은 늘리지 않고 대신 국회의 권한을 줄임으로써 국민의 대표자인 국회의원과 국민 개개인의 권한을 보다 더 비슷하게 맞추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직접민주주의 원리에 더 가깝게 다가가려는 것이며,
정당 내에서는 '당원 직접민주주의'의 추구로 나타난다.
'비호감 대선' 이어 '비호감 총선' 우려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입장 발표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주지하다시피 정당은 근대 민주주의 체제에서 직접민주주의의 대용물이다.
직접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적용한 체제를 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당이라는 대용물을 만들어 민주주의 체제의 지속 가능성과 건강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당의 기능을 점점 더 줄이고,
정당조직을 형해화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추동해 간다면 이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정당을 우회하거나 정당을 없앤다고 유권자들의 직접민주주의적 요구가 수용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의 가능성이 높아질 뿐이다.
팬덤정치가 더 심화되기 때문이다.
정당 내외를 막론하고
'팬덤 리더'와 '지지자' 간의 직접적 관계만 남게 된다면 숙의와 교정,
건전한 공론장의 긴 호흡은 점점 사라지고 포퓰리즘이 융성하는 환경으로 변해갈 수밖에 없다.
정당이 아니라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팬덤정치를 더 가속화시킨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평균적인 일반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충분히 확장되거나 제도화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정치 참여는 그야말로 특정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 열정으로 똘똘 뭉친 정치 팬덤층들로만 국한돼 버린다.
당연히 팬덤정치는 이분법적인 특성을
갖는다.
특정인에 대한 지지 여부는 양자 택일과도 같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의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두 집단 즉,
특정인을 지지하는 집단과 반대하는 집단 사이에는 대화를 통한 의견 교환이 어렵다는 사실이다.
팬덤정치 하에서 정치는 적군과 아군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
상대를 섬멸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전투 행위가 되고 만다.
불행하게도 이미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다.
한국 사회가 팬덤정치의 한가운데로 빠져 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국민의힘이 보여준 모습도 팬덤정치의 틀 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인요한 혁신위원회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한 일은 정당의 구조적 혁신과는 관계없는 물갈이 요구가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인적 쇄신에 대한 요구는 결국 당대표 사퇴와 한동훈 비대위의 출범으로 귀결되었다.
아무런 제도적 변화 없이 한동훈이라는 인물을 불러내어 새로운 팬덤층을 형성하고,
그 팬덤을 동력으로 총선을 돌파하려는 것이다.
이제 내년 총선은 팬덤정치의 재대결 양상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팬덤정치에 거리를
두는 일반 시민들의 입장에서는 '비호감 대선'에 이은 '비호감 총선'이라는 악순환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팬덤정치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팬덤정치와 정당정치는 대척점에 서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팬덤정치에 대한 처방은 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구조적 환경을 만드는 데서 찾을 수밖에 없다.
즉,
정당이 특정 정치인 지지를 위한 플랫폼의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정책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의미한 정치조직'으로 기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당은 당원들로 하여금 정책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정책 중심의 논의가 활발해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특정 정치 지도자가 주도하는 이슈 중심의 논의가 아니라 당원들이 공감하는 실생활 중심의 정책적 관심이 자연스럽게 정당활동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팬덤 활동의 유인을 줄이고,
당의 정책 활동에 대한 참여와 관여를 강화해 나가기 위함이다.
당원들이 특정한 정책 분야에 대해 스스로 대안을 만들어 가면서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해나간다면
정당은 팬덤들로만 국한된 제한적 공간이 아니라 좀 더 다원적인 정책 논의가 가능한 공간으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 중심 정당이 해결 출발점
▲ 21일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2024년도 예산안이 통과되고 있다.
ⓒ 연합뉴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정당은 입당시부터 당원의 관심 분야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여러 정책 분야 중에서 주로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입당원서에 표기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당에서는 향후 정책 분야별로 당원들을 범주화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정당은 당원들의 정책적 관심에 맞춰 당의 새로운 정책이나 현안 사항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교육,
복지,
일자리,
의료,
문화,
경제,
부동산,
국방,
외교 등 해당 분야의 정책에 대해 누구보다 먼저 당의 입장과 비전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면 당원들이 정당과 더 강한 유대를 형성할 것으로 기대된다.
뿐만 아니라 당은 정책 정보의 제공이라는 1차적 역할에
그치지 말고,
당원들이 자발적인 정책모임을 만들 경우 이를 지원하는 적극적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정책' 중심의 정당은 팬덤정치 극복의 출발점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경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동원될 때 사람들은 혐오와 적대의 감정을 발전시키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 정당에서 당원들은 그동안 주로 선거 '경쟁'에 필요한 동원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오랫동안 활용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에는 공천 과정의 민주화로 인해 당내 경선이라는
새로운 '경쟁의 장'이 추가됨으로써 지지 후보의 경선 승리를 위해서도 대거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특정 '인물'에 대한 전적인 추종과 반대 '인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강화시키는 기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
결국,
한국 정치에서 정책은 설 자리를 잃고 극단적 대립과 양극화가 점점 확대돼 나갔으며,
그것의 가시적 종착점이 바로 팬덤정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당의 지도자는 그 정당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팬덤정치 또한
마찬가지다.
참여의 열기를 이끌어 내는데 유용한 면이 있다면 그것은 팬덤정치의 장점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장점이 곧 궁극적 선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팬덤 리더에 대한 열광이 정당이라는 제도화된 투입장치와 조화롭게 조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정당정치가 팬덤정치를 품어 안고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해져야 한다는 얘기이다.
▲ 윤왕희 /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
ⓒ 윤왕희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윤왕희는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관심 분야는 한국 정당의 공천 문제이며,
최근에는 주민자치와 지역정당의 결합에 대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정당학회 기획이사,
한국지방의회학회 연구이사를 역임했고,
주요 논저로 '비호감 대선과 정당의 후보경선에 관한 연구: 경선 방식과 당원구조 변화를 중심으로',
<공천과 정당정치>(공역)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