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전을 잘 살려면

사진/픽사베이한 방송국 특집 기획으로 국어 과목 수능시험을 치르게 됐다.
학력고사를 본 지 40년이 넘어 치른 시험이었다.
무척 어려웠다.
이래 봬도 학력고사 국어는 만점을 받았는데, 이번 시험에서는 절반 약간 넘는 점수를 받았다.
한 번만의 경험으로 속단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수능 국어시험의 문제점은 평가 대상이 치우쳐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기, 쓰기 능력은 제쳐두고 읽기 능력만 평가하고 있고, 읽기도 속독 능력만 시험하는 듯했다.
속독보다는 정독을 해야 글을 읽으면서 자기 생각과 감정을 길어 올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나에게 인생은 세 시기로 나뉜다.
태어나서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가 첫 번째이고, 직장생활이 두 번째, 직장생활 이후 지금까지가 세 번째 시기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학교와 직장이라는 무대만 다를 뿐, 그 시기를 잘 지내는 데 필요한 역량은 다를 바 없었다.
이 시기는 이해력, 요약력, 유추력, 분석력, 기억력, 적용력이란 여섯 가지 힘을 요구한다.
이 여섯 가지 능력을 갖추면 남의 말과 글을 잘 알아먹고, 핵심을 추려내고, 배경과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분석하고 기억해뒀다가 시험을 치거나 일할 때 활용한다.
한마디로 잘 읽고 잘 들으면 된다.
말하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읽고 듣는 역량만 갖추면 학교생활, 직장생활 모두 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역량은 어느 정도 갖췄다.
어릴 적부터 남의 눈치를 심하게 봤고, 어떻게든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사람은 남의 말과 글을 허투루 대하지 않는다.
유심히 듣고 읽어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해 더 큰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은 앞서 말한 여섯 가지 역량을 키우게 되고, 이렇게 갖춰진 역량으로 학교와 직장생활을 잘하게 된다.
하지만 세 번째 시기는 다르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고 남이 시키는 일을 요령껏 잘하는 과정이었다면, 세 번째 시기는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에는 남의 제품을 만들어줬다면, 세 번째는 내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남에 의해 내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내 가치를 입증해 보여야 한다.
누군가가 빛을 비춰줘야 모습을 드러내는 반사체가 아니라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발광체로 살아가려면 말하고 써야 한다.
말하고 쓰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과 의견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 번째 시기에는 앞서 말한 여섯 가지에 덧붙여 세 가지 역량이 더 필요하다.
그것은 질문력, 비판력, 공감력이다.
내 생각과 의견을 만드는 첫 출발점은 질문이다.
남의 말에 대해 의문을 갖고 반문해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남의 생각과 의견을 평가하고 그것에 자기의 생각을 덧대거나, 그것과 자기 생각을 연결하고 결합해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내는 비판력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사람들의 처지와 심정, 입장을 헤아려 그들을 도우려는 공감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아픈 데를 치유해줄 수 있고, 그것으로 먹고살 수 있다.
쉰한 살부터 세 번째 시기를 살고 있는 요즈음, 나는 질문과 비판, 공감이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지 실감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를 추동하는 힘이 승부욕과 인정욕구라면, 세 번째 시기는 성취욕과 생존욕구가 필요하다.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보다는 스스로 자기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하고 있는 일에서 충만감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갖추고 이를 나누며 살아야 한다.
그것은 콘텐츠, 스토리, 캐릭터다.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만의 콘텐츠다.
그 사람 하면 떠오르는, 그 사람만의 테마나 주제 같은 것이다.
나는 무엇에 관심이 있고, 무엇을 잘하는가. 이때 무엇에 해당하는 게 그 사람의 콘텐츠다.
나의 콘텐츠는 글쓰기와 말하기다.
글쓰기와 말하기에 관해 사람들에게 말하고 글을 쓰는 게 쉰한 살 이후의 나이고 나의 삶이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
학창 시절과 직장생활 때와는 전혀 다른, 홀로서기 위한 공부를 해야 한다.
본시 공부하는 목적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생존확률을 높이는 게 공부하는 이유다.
학창 시절에는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더 나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다.
직장에서도 자리를 보전하고 높이 올라가기 위해 공부했다.
이 모두가 생존확률을 높이는 공부다.
세 번째 시기에 공부의 중요성은 한층 커진다.
공부를 통해 나만의 콘텐츠를 확보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요구되는 건 스토리다.
콘텐츠는 그 자체만으로는 팔리지 않는다.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양질의 무료 콘텐츠가 널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토리를 입혀야만 자신만의 콘텐츠가 되고, 그런 콘텐츠라야 재미가 있고 진정성이 느껴져 사람들의 구미를 당길 수 있다.
자기 스토리는 두 방향에서 찾고 모아가야 한다.
우선 살아온 과거의 기억 속에서 스토리를 발굴하고,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아울러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일에 도전함으로써 새로운 일화, 에피소드 등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끝으로, 캐릭터다.
이제 사람들은 이미지를 산다.
누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야 하고, 그 이미지가 호감 가고 매력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요즘 어떤 기준으로 카페를 찾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커피 맛과 가격, 위치 등 카페의 콘텐츠를 보는가? 어느 유명 커피전문점처럼 스토리에 끌리는가. 그런 점도 감안하겠지만 느낌이 좋아서, 분위기가 편해서 카페를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감성’을 좇는 것이다.
100세 시대다.
세 번째 시기가 인생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시기에는 늘 만나는 가족, 직장 동료와 함께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면, 세 번째 시기는 대상을 확장해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만들어가야 한다.
다행히 사회관계망 서비스 등 온라인 가상공간이 활짝 열려 있다.
이를 통해 얼마든지 많은 사람과 소통하며 좋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나는 직장을 그만둔 후 지난 10년 동안 네이버 블로그,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티스토리, 카카오톡채널, 스레드, 개인 누리집 등에 2만 개 가까운 글을 쓰며 사람들과 소통해왔다.
앞으로 워드프레스, 링크드인 등에도 도전해볼 요량이다.
수능 국어시험 결과가 좋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나는 그런 경험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그 결과 나름의 교훈도 얻었고, 새로운 이야기와 콘텐츠도 생겼다.
글쓰기와 말하기 관련 콘텐츠도 독서와 공부를 통해 꾸준히 보완해 나갈 예정이다.
문제는 캐릭터인데, 앞으로 나는 귀여움으로 승부하려고 한다.
완벽하고 출중한 사람에게서는 귀여움을 찾기 어렵다.
나같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손길이 많이 가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귀여움을 느낀다.
수능 국어 문제를 절반밖에 못 맞추고도 당당한 내 모습이 어찌 귀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불편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한국에서 절대적 명령처럼 작동하는 규칙이 있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적 분쟁과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첫 번째로 소환되는 것이 이 규칙이다.
그런데 불편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불편의 모호함

불편의 의미는 극도로 넓다.
‘불편을 끼치지 말라’는 규칙에는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면 안 된다’, ‘타인에게 괴로움을 주면 안 된다’, ‘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 따위가 모두 혼재돼 있다.
말 그대로 ‘편안하지 않은 상태’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모호함에서 여러 혼란이 발생한다.

성차별적 농담을 한 직장 상사가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불편이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휘발시켜 버린다.
그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것인지, 단순한 손해를 입힌 것인지, 싫어하는 행위를 한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국민 여러분께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는 식의 사과를 자주 하는데, 이 역시 불편이란 말의 모호함을 악용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누군가 잘못된 말을 했을 때 그게 차별적 발언인지, 사실 왜곡인지, 타인을 모욕한 것인지 등을 구별하지 않고 “난 불편하다”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례도 많다.
이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문제를 모두 감정적 호불호나 취향의 문제로 환원한다.
자기 맘에 든다, 혹은 들지 않는다를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어떤 공적 대화도 불가능해진다.

불편의 종류

한국에서는 자기 영역을 보호하려는 강박적 경향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 불편이라는 말의 모호함이 결합하면, 사회적 관계 자체를 파괴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남에게 불편을 끼치면 안 된다’는 규칙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다.
이 규칙을 자신의 도덕적 행위를 위한 준거로 삼는 경우보다 ‘타인이 나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기 보호 장치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때 나에게 안 좋은 것은 모두 불편이라 불린다.

내가 타인과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는 다양한 불이익이 동반된다.
그중에는 명백한 권리 침해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할 손해나 괴로움도 있다.
모두가 서로의 권리를 완벽히 존중하고, 친절함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도 불가피한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어떻게 관리할지가 사회적 관계의 핵심 문제 중 하나다.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보자.

도심 집회는 교통 체증을 유발한다.
누군가는 시위대를 향해 “불편을 초래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화를 내는데, 이는 부당한 요구다.
시위에 대한 권리는 시민의 기본적 권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정치적 활동이 혼잡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정도를 줄일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기계 조작이 익숙지 않은 노인이 무인 키오스크 앞에 서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로 인해 뒤쪽의 다른 사람들은 더 오랫동안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가 불편을 끼친다고 짜증 내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노인이 잘못한 것은 전혀 없다.
사람마다 도구를 다루는 능력이 다르고, 이러한 능력 차이는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
이 두 가지 상황을 불편의 언어로 접근하면, 시위대와 노인은 주변에 불편을 끼치는 나쁜 존재라는 결론만 남는다.
이는 명백한 오류이고, 현실의 문제 해결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정신 장애인도 주변인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불이익의 종류를 세밀하게 구별하고, 그를 사회적 관계에서 배제하지 않으려면 어떤 종류의 불이익을 어느 정도로 감수해야 할지 정하는 일이다.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이런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장애인을 주변 공간에서 배제하는 것만을 유일한 해법으로 남긴다.

내 것에 대한 강박

‘타인이 나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나에게 좋지 않은 것이 완전히 사라진 나만의 청정구역을 만들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결벽증적 태도의 일반화는 단순히 세상 각박해졌다는 정도로 묘사할 것이 아니다.
괴로움을 동반하지 않는 사회적 관계는 없으므로,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곧 관계 자체를 거부하겠다는 의미다.
요즘 많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불편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관계의 다양한 요소를 구별하고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한 채, 그 어떤 불편도 거부하려는 태도만 강화되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는 이런 태도의 원인을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람의 존재에서 찾으려 할지 모른다.
‘갑질’이나 ‘진상’이 너무 많다 보니,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강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태도를 깊이 체화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불편의 피해자로, 타인을 가해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결국 내 무례는 무례가 아니라 타인이 나에게 끼치는 불편을 제거하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갑질과 진상의 가해자가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하며 억울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여기 있다.

지금 교육현장을 보라. ‘교사와 다른 아이가 내 자식에게 끼치는 불편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은 몇몇 ‘진상 학부모’만의 태도가 아니다.
이는 ‘내 자식만이 중요하다’는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니라 외부의 나쁜 것으로부터 내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다.
이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자기주장의 객관적 정당성을 묻지 않고, 자기 행동은 원래 자기 것이었던 걸 지키기 위한 정당한 싸움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착각은 당연히 권력관계의 영향을 받는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질수록 ‘원래 내 것’의 범위가 커지고, 불편이라는 말의 외연도 넓어진다.
자신에게 불편을 끼치지 말라는 요구는 자기 영역에 속한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다.

관계 맺음은 항상 불이익이나 괴로움을 동반한다.
그것의 정도를 줄일 순 있지만, 완전히 없앨 순 없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불편이다.
중요한 것은 불편의 종류를 구별하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를 불편이라는 말로 흐리지 않아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불이익은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구별 없이 불편 일반을 강박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내가 싫은 것과는 손절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그 손절의 대상은 사회적 관계 그 자체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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