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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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용기란 해를 입을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나서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언어적 물리적 폭력 또는 차별, 성추행 등을 당하는 상황 같이 불의한 상황에서 직접 또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형태 등으로 나서겠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답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 행동에 나선다.
왜 어떤 사람들은 나서고 어떤 사람들은 나서지 않는지에 대해 설명할 때 흔히 다음의 프로세스를 이야기 한다.
① 도덕적으로 그릇된
행위가 나타나고 있다는 상황 인식
② 불의를 지켜본 사람으로서 나라도 나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것
③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 선택하기(직접 개입 또는 신고하기 등
④ 개입했을 때의 리스크에 대한 인식이 중 하나 또는 여러 개가 어긋나는 경우 도덕적 용기가 나타날 확률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것부터 실패하는 경우 개입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지만 나랑 상관 없는 일이라거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경우에도 행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상황 인식도 제대로 되었고 책임감도 느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지만 불이익이 닥칠 위험성이 크다고 인식하는 경우에도 쉽게 도덕적 용기를 발휘하지 못할 수 있다.
실제 이런 프로세스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나 바우메르트 독일 부퍼탈대 연구팀은 일상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불의를 접했을 때 어떤 사람들이 나서고 나서지 않게 되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조사했다.
1108의 참가자들에게 7일 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일을 목격했는지,
화나 두려움을 느꼈는지, 상황을 중재해야 한다는 책임감, 자신이 효과적으로 중재할 수 있다고 믿는 효능감, 나섰을 때의 리스크, 문제 상황의 심각성, 불확실성 등에 대해 물었다.
그 결과 감정 중 '화'가 불의를 참지 않고 나서게 만드는 반면 '두려움'은 나서지 않게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섰을 때 감수해야 하는 불이익이 크다는 판단 또한 개입할 확률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 반면 자신이 나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는 것과 자신이 나서서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자신감(효능감)이
도덕적 용기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평소 도덕적 민감성이 낮은 것("이게 뭐가 나빠? 이 정도는 괜찮아")과 불안이 높은 성향은 도덕적 용기와 부적 상관을 보였다.
도덕적 해리(moral disengagement) 또한 불의에 맞설 확률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도덕적 해리란 흔히 도덕적 정당화(예를 들어 "이 정도의 거짓말은 되려 유익할 수 있어"), 완곡어법 사용(예를 들어 훔치는 게 아니라 빌리는
거다), 피해 축소(예를 들어 별로 해롭지 않은 일), 책임 전가(예를 들어 착하게 살기에 각박한 세상), 책임 회피(예를 들어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그랬다") 등의 과정을 통해서 나타난다.
최근 대통령의 담화와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논리에서 위의 요소를 그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그래도 분노와 나라도 나서야 한다는 책임감, 연대할수록 더 강해진다는 효능감을 느끼고 있는 시민들도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불의와 싸운다는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부디 보답할 수 있길 바란다.
Baumert, A., Mentrup, F. E., Klümper, L., & Sasse, J. (2024). Personality processes of everyday moral courage. Journal of Personality, 92(3), 764-783.
※필자소개박진영.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조금 못 자더라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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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을 겪는 사람 중 다수가 많이 보고하는 문제 중 하나가 '잠에 대한 불안'이다.
조금 피곤하고 졸린 기분도 들어서 오늘은 잘 잘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어도 곧 막상 누우니까 졸음이 달아나는 것 같고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시계 소리는 점점 커지는 것만 같고 어쩌면 오늘도 다 잔 것이 아닐까, 이대로 내일도 피로에 쩔어서 해야 할 일도 쉬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날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며 불안감에 젖는다.
그러다 시계를
확인해 보면 벌써 새벽 한 시, 조금 후면 두 시, 세 시… 시간에 쫓기는 불안에 시달리다 네 시가 되어 겨우 잠을 자게 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시간에 쫓기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쌓인다.
각성 수준이 낮아지고 몸에 힘이 빠져야 겨우 잘 수 있을까 말까한 상황에서 잠을 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이 올라오면 편히 잠들기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비슷하게 낮에 힘든 일이 많았던 경우, 자면서도 일에 대한 걱정이 많을 때, 또 그냥 기본적으로 완벽주의 정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더 밤에도 쓸데없이 각성수준이 높아져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편이라는 연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잠을 자는 것 자체에 불안감이 있는 경우는 조금 달라서 낮에 아무 일 없었어도 '잠을 최소한 몇 시간은 자야 한다'는 잠에 대한 강박이 심한 탓에 침대에 눕고 시간이 조금씩 지나갈수록 불안이 쌓여 간다.
나 역시 한동안 잠에 대한 강박이 있어서 최소한 몇 시간은 자야 한다거나 푹 자고 일어나서 상쾌한 아침을 맞이해야만 멀쩡하게 기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잠을 잘 자는 것은 실제로도 중요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못 잔다고 해서 며칠을 내리 한 숨도 자지 못하는 게 아닌 이상 또 다음날 중요한 일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조금 피곤하게 보낸다는게 그렇게 두려움에 떨 일인지 생각해 보면 또 별 일 아닌거 같기도 한 것이다.
많은 만성질환자 및 우울증, 불안증 환자들이 가지고 있는 부적응적인 사고방식 중 하나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더 안 좋은 일(더 아프고 우울하고 끔찍하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라고 하는 "재앙화" 사고이다.
아예 생기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생각하기에 따라
크게 나쁘지 않을 수 있는 일의 결과를 크게 과장해서 두려워하다보니 실제로 작은 일에도 육체적,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심리적 고통을 겪게 되고 그러다 보니 더 두려움이 쌓이는 악순환이다.
우리 몸은 마음이 아픈 만큼 실제로 갖은 신체화 증상을 겪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스트레스는 줄이는 것이 좋다.
따라서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이 어떤 일의 결과를 실제보다 부풀려서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잠이 되었든 다른 무엇이 되었든) 아니면 사실 '내가 걱정하는 것보다는' 괜찮을 것이지만 나의 마음이
자꾸 내 안의 원초적인 생존 본능과 불안을 자극하는 오경보를 울려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창 불면증이 심할 때 인지행동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의외로 가장 도움이 되었던 조언이 "조금 못 자도 살 수 있다"는 얘기였다.
너무 단순화해서 이야기하긴 했지만 잠을 잘 자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는 것이 정상이며 그렇지 못했다고 해서 뭔가 큰 일이 날 것처럼 생각하지는 말라는 것이었다.
아예 하루를 꼬박 새고 언젠가 졸음이 올 때 푹 자는 것이 더 생체리듬을 돌리는
데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얘기와 함께 하루의 상쾌함을 결정하는 데에는 다양한 요소가 있으며 '잠'이 물론 중요하지만 단 하나의 절대반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면 업무상 낮과 밤이 항상 바뀌는 사람들도 있고 여행이 잦아서 시차적응을 자주 겪어야 하는 사람들도 다 살아가는데 (물론 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날은 낮에 쪽잠이라도 조금 자면 되는 것이지 불면증으로 (아직까지는) 삶이 크게 위협을 받지는 않는 것 같다.
잠에 대한 미련과 강박을 내려놓으니 실제로 더 잘 자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평소 불면증을 심하게 앓고 있는 편이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도록 하자. 수면 클리닉이나 수면인지행동 치료를 하는 센터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혼자 이겨내는 고난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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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이겨낼 수 있는 고난이 존재할까. 불평등, 차별, 가난, 극심한 경쟁과 물질주의, 질병 등 삶에서 큼지막한 고통을 차지하는 문제의 다수가 쉽게 바꿀 수 없는 요소들, 예를 들어 태어난 가정 환경, 양육자의 소득 및 교육 수준, 사회적 구조, 타고난 건강함 등에 의해 큰 영향을 받고 있음을 고려해보면 여러 사람들이 함께 노력하지 않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 동물인 우리들의 건강과 행복에는 '사회적 지지',
주변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사람들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 예를 들어 다양한 질병이나 우울증 같은 경우에도 사회적 지지의 존재 여부에 따라 기존 건강상태와 상관 없이 예후가 다르게 나타난다.
한 메타분석 결과에 따르면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관상동맥 심장질환 위험을 29% 증가시키고 뇌졸중 위험을 32% 증가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우울증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인간관계에서 다수의 거절과 갈등을 경험하는 것이다.
수십년 간의 행복 연구가 내린 결론
또한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좋은 인간관계'의 여부이다.
이렇게 겉으로는 간단해 보이는 문제도 속에는 항상 다양한 사회적, 관계적 층계의 문제들이 엮여 있어서 실제로는 절대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고 나니 사람이 스스로 온전히 이겨낼 수 있는 문제가 과연 존재할까 싶은 의문이 든다.
다소 극단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순전히 환상이라고 보는 시각들도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우리가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굵직한 문제들은 내 손 안에서 굴리기에는 이미 너무 크고
복잡하다.
자수성가하여 가난을 이겨냈다고 하는 흔한 스토리들도 사실은 가난 자체를 해결했다기보다 혼자 '탈출'한 것에 불과하고 여기에서도 좋은 운과 좋은 사람들의 도움이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결과가 좋지 않았던 일은 외적 귀인(운이 나빴음)을 하는 반면 좋았던 일은 내적 귀인(자신의 능력과 노력 덕분)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게 스스로는 지각하지 못할지언정 분명히 존재했을 주변의 도움을 무시한 채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른 사람을 돕기는
커녕 "나는 혼자 해냈는데 너는 왜 못하냐"고 비난을 던지고 만다.
정말 주변의 도움 없이 혼자 해낸 것이든 아니면 도움이 있었는데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이든 고난을 혼자 이겨내는 데에도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고 하는 큰 부작용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비교적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 예를 들어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는 것에 있어서도 집에 에너지 넘치는 아이가 있다거나 혹은 우울증이 심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고 하면 방이 지저분하다는 문제는 표면에 드러난 증상일 뿐이고 그 이면에 훨씬 큰 진짜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최근 노숙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그 인식들이 도움 행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접했다.
여기에서도 노숙인들이 그 상황에 처하게 된 이유가 단순히 '게으름' 같은 개인적이고 내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원인이 이보다 더 복잡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에 비해 노숙인들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도움 행동에 참여할 의향이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인들이 특히 사랑한다는 소설 '데미안'을 보면 초반부에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고 있는 주인공 싱클레어가
그렇지 않은 환경에 처한 다른 소년들을 바라보며 동일한 시공간에 서로 완전히 다른, 빛과 어둠의 세계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함을 잘 보여준다.
조금 다르지만 나 역시 청소년기에 가출의 유혹에 잠시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더 운이 나빴거나 주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종이 한 장 차이 같은 작은 요소들이 모여서 커다란 나비효과를 만드는 법이다.
공감하고 말고의 여부를 떠나서 노숙인들 역시 '게으름'보다는 분명 더
복잡하고 다양한 각자의 사정에 인해 그런 상황에 처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사정이 복잡한 만큼 다른 사람들의 사정도 비슷하게 또는 더 많이 복잡한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