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옆의 사람과 대화하면서 가는 것과 조용히 혼자 가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떤 걸 선택할까. 나는 혼자를 택할 것이다.
혼자를 선호하기보다 혼란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긴 행복 탐구 보고서’의 저자 ‘로버트 윌딩거’는 인간은 혼란을 과대평가하고 인간관계의 유익함을 과소평가한다고 말한다.
오랜 연구로 무엇이 좋은 삶인가에 대한 답을 얻었는데 그 핵심이 친밀한 인간관계의 빈도와 질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인간의 품격’에서 이력서와 추도사의 차이를 “이력서에 언급되는 일은 세속적 성공이 지향하는 덕목으로 타인과 비교가 불가피하지만 추도사는 그렇지 않다”고 말이다.
고인이 인정이 많고 상냥한 사람이었다는 말은 유튜브 팔로 숫자나 연봉처럼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가 없다.
80대에 자신이 어떻게 늙어갈지 예측할 수 있는 대표 지표가 중년기 혈압이나 당 수치가 아니라 50세 때 자신의 인간관계에 가장 만족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는 뭘 의미할까. 마흔을 넘어보니 맞지 않는 친구 때문에 쓴 시간을 자기 계발에 썼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50을 넘어 60대, 70대에 이르면 사람은 시간이 한정적이라는 명확한 사실을 깨닫는다.
비로소 내 옆에 있는 사람들로 시야가 좁아지며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며 작은 것에 감사하는 능력이 강화된다.
예상 외로 70대의 행복 지수가 높은 이유다.
호구와 손절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 관계 복원을 말하는 건 시대착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하버드 졸업생과 그들의 후손까지 90년에 걸친 인류 최대의 행복 보고서는 우리에게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게 뭔지 잘
모른다”는 진실을 말하며 “좋은 삶은 오직 좋은 관계”라고 말한다.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하는 건 여러 사람과 사랑에 자주 빠지는 게 아니다.
그 사랑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가 아닌 저기, 이곳이 아닌 저곳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바로 이 사람과 함께 말이다.
백영옥 소설가
이유 없이 처지고 열이 나는 날이 있다.
그런 날 해열제를 먹듯 보는 드라마가 ‘심야 식당’이다.
좁은 골목 안 식당 주인은 재료만 있으면 손님이 원하는 음식은 뭐든 다 만들어 준다.
어느 날 ‘비프 스트로가노프’라는 이름도 이상한 음식을 만들어달라는 손님이 나타난다.
볶은 쇠고기에 러시아식 사워(sour)크림을 넣은 요리인데, 맛을 묻는 주인에게 손님은 “그냥 그렇네요!”라고 답한다.
흥미로운 건 이 얘기를 들은 주인의
답변이다.
“다음에 혹시 그냥 그런 비프 스트로가노프가 먹고 싶어지면 미리 연락 줘요.” 작가 입장에서 이런 캐릭터는 줄거리에 지장을 준다.
갈등이 일어나지 않아 이야기가 밋밋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식과 ‘먹방’ 시대에 가끔 된장찌개 속의 두부나 고기를 감싼 상추 한 장처럼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흩어진 것을 조용히 감싸는 것들을 생각한다.
젊었을 때는 ‘단짠’의 강렬한 맛에 이끌린다.
하지만 점점 함흥냉면보다 심심한 평양냉면이 그리워지는 날이 온다.
요리사 박찬일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평양냉면의 맛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전 국민이 다이어트 중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는 먹방이다.
자극적인 먹방에 열광했다가 요즘 토끼나 거북이가 야금야금 딸기를 먹는 영상을 보며 스트레스를 푼다고 말한 후배가 있다.
고작 밤톨만 한 딸기 하나를 씹고, 씹는 존재를 보면 자신도 고민도 잘게 부서지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술 퍼마시고, 고래고래 노래 부르고, 울면서 친구에게 하소연하지 않아도 가능한 무해한 처방들. 나는 이것을 ‘두부적인 삶’이라 부른다.
두부적이란 건 일종의
태도다.
반찬 국물이 여기저기 튄 밥을 감싸는 잘 구운 김처럼 말이다.
도파민 범벅의 자극적인 것들의 시대에 내가 원하는 건 밥 옆에 가지런히 놓인 소금이나 김 가루 통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싱거우면 치고, 부족하면 넣으라는 태도. 맛이 그저 그런 음식을 내놓아도 심야 식당이 롱런한 이유를 알겠다.
때로 중요한 건 맛 이전의 이런 무심한 상냥함이다.
기고용 / 백영옥 소설가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노예의 삶을 이야기하는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청중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데 몇 년 동안 자신에게 아낌없이 기술을 전수해주던 사장이 암에 걸려 치료 중이라 이직을 고민 중이라는 사연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직하면 직원이 몇 없는 회사가 망하진 않을까 괴롭다고 했다.
놀라운 건 강사의 호통이었다.
노예가 왜 주인 걱정을 하냐는 것이다.
세상을 갑과 을로만 보는 그의 시각에 놀라 아직까지 잔상에 남는다.
술에 취해 귀가하는 후배의 안전을 걱정해 택시 번호판을 휴대폰으로 찍은 선배가 있다.
또 한 선배는 회식 자리의 신입에게 외모 품평에 술 따르기를
강요한 상사를 제지하며 미투를 경고했다.
대부분은 이들의 행동에서 선의를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 당했다.
택시 번호판을 찍은 건 성희롱이고, 회식 자리에서 미투를 말한 건 피해자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을의 가면’의 저자 서유정은 “을의 탈을 썼을 뿐 상대에게 누명을 씌워 괴롭히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
근무시간에 연예인 얘기를 안 들어줬다고, 고양이 중성화 수술 얘기가 성희롱이라고 신고한 실제 사례도 있다.
진짜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합의금을 제시해도 거부하거나 가해자의 이름이 찍히는 통장을 보는 것조차 불편해 다른 곳에 기부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반면 거짓 신고인은 배상을 먼저 요구하는 비율이 압도적이고 반복 신고를 일삼는다.
실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어 지쳐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거짓 신고가 횡행하는 건 신고인에게 70~80달러의 접수비를 받는 호주나 최소한의 입증 책임을 묻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는 신고해서 성공하면 보상받고 실패해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보상만 있는 행동이 강화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예전에는 갑질이 주로 문제였다.
요즘은 을질도 상당하다.
갑은 늘 강하고 을은 약할까. 갑질하던 사람이 을이 되면 을질을 하고, 을에 있던 사람이 갑이 되면 갑질을 일삼는다.
결국 갑과 을을 넘어선 인성이 문제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어린이 축구 교실에 갔다가 다친 아이를 보고 놀란 엄마가
코치를 추궁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멀리 있던 나도 들을 수 있었는데, 핏대 높이는 엄마 앞에서 정작 아이는 남 일 보듯 무기력해 보였다.
이 얘길 심리 상담사인 친구에게 말했더니 요즘 열 살 전후의 아이들도 무기력증으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서 맞은 쪽 아이 편만 들어줘 자신의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기면 책임지라며 괴롭히는 학부모 때문에 고민인 교사 내담자 얘기도 들었다.
때린 아이에게도 사정이 있는데 마음을 읽어주지 않아 자신의 아이도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남들은
적반하장이라 읽고 본인은 정당방위라 쓰는 경우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
축구를 잘하기 위해선 몸싸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상대 선수의 태클과 반칙도 극복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갈등을 겪으며 삶에서 중요한 자산이 될 인내, 타협, 설득의 기술을 배운다.
싸운 친구와 갈등을 봉합하며 다툼이 실패가 아닌 성장의 과정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하지만 언제부터 우리는 자라면서 겪는 성장통마저 트라우마로 읽기 시작했다.
이제 아이 싸움에 부모의 개입은 디폴트 값이 됐다.
그러나 부모의 의도와 별개로 지나친 개입은 건강한 성장통을 치료의 영역인 트라우마로 만든다.
아이에게 생길까 봐 두려워하던 그 일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다.
과자에 비해 질소만 가득 채운 부실한 내용물 때문에 ‘질소 과자’가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엄마의 항의가 빵빵한 질소처럼 들어찬 축구장에 아이는 바스라지기 쉬운 감자칩처럼 서 있었다.
햇빛 아래에 서도 그림자조차 생기지 않고, 자동문 앞에 서 있어도 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존재감 제로의 아이처럼
말이다.
표정 없는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 질소가 사라진 후, 현실 어른이 된 아이의 세계가 그려졌기 때문이다.
건강한 성장통을 트라우마로 오독할 때, 우리는 끝내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인터넷 뉴스에 나는 축의금을 이만큼 했는데 돌아온 축의금은 요만큼이라 고민 중이라는 기사가 가끔 눈에 띈다.
기사 밑에는 ‘손절이 답’이라는 댓글도 꽤 많다.
‘우정은 왜 그렇게 어려운가!’라는 제목의 칼럼을 읽다가 우리가 친구라고 믿는 관계의 절반 정도만 두 사람 모두가 서로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문장을 봤다.
생각보다 우정이 일방적이란 뜻이다.
우정에 대한 더 암울한 전망은 2009년 버거킹 광고에서도 보인다.
페이스북 친구를 끊으면 와퍼 세트를 준다는 광고를
보고 무려 23만명이 친구 관계를 끊은 것이다.
그러자 버거킹은 ‘우정은 강하다.
버거킹은 더 강하다!’는 대대적인 광고를 펼쳤다.
친구의 재능이 아까워 관계자에게 자기가 출연하는 작품에 친구를 추천한 남자가 술 취한 친구에게 “네가 나를 동료로 생각해 경쟁하려 들지 않고 만만히 보기 때문에 나를 옆에 두려는 거잖아!” 하는 말을 들었다면 어떻겠는가. 내 호의가 너의 상처로 둔갑한다면 말이다.
친구가 되기보다 어려운 건 친구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이다.
좋은 관계란 오해와 이해, 화해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우정의 정의가 사람마다 다른 것도 큰 걸림돌이다.
비가 오면 함께 맞아주는 걸 우정이라 믿는 사람이 있는 반면, 우산 가게를 알려주거나 가지고 있는 우산을 빌려주는 게 낫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박찬욱 감독은 가훈 숙제를 내민 초등학생 딸에게 “아니면 말고!”를 써준 것으로 유명하다.
‘아니면 말고’에는 인간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뜻이 숨어있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손절이든 지속이든 힘써 보고 아니면 내려놔야 한다.
관계를 유지하며 계속 싸우기보다 보지 않는 쪽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
관점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처럼 오랜 친구와 겪는 갈등이 오히려 어느 쪽이 진짜 내 편인지 가늠해주기도 한다.
또 종종 상처를 남기고 떠난 우정 덕분에 새롭게 다가오는 우정을 만나기도 한다.
관계에는 유효기간이 있을까. 당연히 우정에도 시절 인연이 있다.
불행과 다행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편의점 리테일 본부에서 일하는 주인공이 자기가 관리하는 알짜 점포를 가로챈 선배 일로 부아가 나 있는데, ATM 기계를 독차지한 남자 때문에 분을 삭이는 장면이 나온다.
설상가상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버스 시간을 놓칠 것 같다며 양보를 부탁하자 주인공은 짜증을 누르고 양보하는데 그가 사라진 후 반전이 펼쳐진다.
“잔액이 부족해 5만원을 인출할 수 없습니다!” 계약금 3억을 구할
수 없어 월 순이익 천만원짜리 점포를 놓치고 억울한 마음뿐이었는데 5만원, 단돈 5만원이 없는 사람이 자기 앞에 있다는 걸 깨달은 주인공은 그 순간 구겨진 마음이 펴졌다고 고백한다.
가뜩이나 힘들었을 아저씨가 자신의 양보로 버스를 놓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말이다.
최근 20·30대의 우울증 증가 원인을 SNS에서 찾는 기사를 보며 나는 이 장면을 떠올렸다.
내 할머니는 평생 고향에 머물며 고작 이웃들이 비교 대상이었다.
하지만 국제화한 요즘 세대는
세계 최고와 비교하며 스스로 초라해지는 순간을 수시로 경험한다.
그런 이유로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내면화했다.
야근에 찌든 내가 발리를 여행하는 친구의 SNS를 보는 건 부러움을 넘어 자기 비하의 원인이 된다.
내면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찾는 가장 쉬운 방법은 좁고 지저분한 내 방 대신 5성급 호텔의 침대를 찍어 올리는 것이다.
이런 경쟁적 상향식 비교는 우리 안의 불안을 자극해 이 시대 평범함의 기준을 높여 놓았다.
우리 사회는 실제 바쁜 것과 무관한
바빠 보이는 이미지에 더 열광한 지 오래다.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공동체는 뭘까. 환우회다.
나만 환자 같았는데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순간, 나만의 불행이 보편적 불행으로 변한다.
먼저 아팠던 사람이 새로 아프기 시작한 사람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세계. 위만 존재할 것 같은 세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앞과 옆을 함께 볼 수 있다.
우리의 불행이 다행으로 바뀜을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