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것은 사람(사랑!)을 아는 것

by 김동규

느 날 낯선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산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발견되어서인지 금세 편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를 묻게 되었고, 저는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분은 1년에 최소 두 번 히말라야 등반 안내를 한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니까 그분은 저처럼 취미 수준이 아니라 거의 전문 산악인이었던 셈입니다.
요즘 세상에 철학자나 산악인은 희귀종이어서인지 외로운 사람끼리 잘 통했던 것 같았습니다.

대뜸 그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철학에서 진리를 찾았나요? 진리를 봤나요?" (소위 진리를 탐구한다는) 철학자에게 당연히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인데도 단도직입으로 던져진 질문이 조금 무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짧게 "아니요 아직"이라 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산에서 진리를 찾으셨나요? 진리를 찾으셨다면, 진리를 본 사람의 특징은 어떻습니까?"라고 말이죠. 주저하지 않고 그분은 진리를 보았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진리를 찾아 나선 여행담(인생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처음 그분도 철학에서 진리를 발견할 거라 믿었답니다.
그래서 모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서 진리를 찾았지만, 철학에서는 진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더군요. 그런 다음 신학으로 전공을 바꿔 일본 유학을 떠났더랬답니다.
그러나 신학에서도 진리를 찾지 못했답니다.
마지막 종착지가 산이었고 드디어 그는 산에서 진리를 보았답니다.

저는 '당신이 본 진리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진리라는 게 있다면, 있더라도, 그걸 '진리란 ~이다'라는 형식으로 답하기 어렵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진리를 본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지요. 이건 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그분은 이렇게 답하시더군요.

진리를 본 사람은

사람을 볼 줄 압니다.

사람에 대한 판단이

정확하지요.

평범한 답변이었지만, 허투루 넘겨들을 수 없는 답변이라 생각되었지요. 그래서 좀 더 설명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에 사람들을 데리고 갈 때 리더는 정확하게 사람을 볼 줄 알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조난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례를 들더군요. 의욕(욕심)만 넘치지 몸 상태나 자기 실력을 정확하게 못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랍니다.
그건 '산에서만, 산악인들 사이에서만 있는 특수한 경우 아니냐'라며 반론을 제기해 보기는 했지만, 그분의 입장은 확고했습니다.
진리를 체험한 사람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안다는 생각을 고수했죠.

그분은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 역시 평범하고 소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말속에는 통찰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철학자, 성인으로 꼽히는 공자도 그분과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樊遲問仁 子曰 愛人 問知 子曰 知人

번지가 인仁에 관하여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인이란 애인愛人이다.

이어서 지知에 대해 질문하였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지知란 지인知人이다.

<논어>의 「顔淵」

저는 지금도 그분의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말로 제가 진리를 체현한 수준을 가늠합니다.
즉 타인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를 가지고 제 공력을 측정하지요. 매번 저는 진리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여전히 타인에게 실망하고 배신감 느끼고 분노하는 걸 보면,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지인(知人) 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소우주라고 합니다.
속담에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있지요.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우주의 축약본을 이해하는 셈이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식으로 말하자면) 지인의 정점에 '애인(
愛人)'이 있다고 봅니다.
당연히 이건 지인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훨씬 더 소중한 일입니다.

결론: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며, 사람을 안다는 것은 종국에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삶의 희비극, 채플린과 쇼펜하우어 둘 중 누가 맞을까? 

영화 <키드>(1921)의 찰리 채플린, 출처: 위키백과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리 채플린이 했다는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나오기 대략 100년 전쯤에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똑같이 희비극에 빗대면서도 정반대로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희극이지만, 멀리서 전체를 개관해 보면 비극이다'라고 말입니다.
과연 누구 말이 맞을까요?

개인의 생활을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개관하고,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끄집어내어 보면, 본질적으로는 한편의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의 활동과 괴로움, 순간순간의 그칠 사이 없는 조롱, 각 주간마다의 소망이나 공포, 각 시간마다의 사고 등 이러한 것들은 언제나 나쁜 장난을 쳐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뜻밖의 재난으로 인한 희극적인 장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망은 실현되지 않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기대는 무자비하게 운명에 짓밟히고, 생애는 불행한 오류에 차고, 고뇌는 점점 더 증대하여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이것은 언제나 비극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동서문화사, 2008. 386쪽. 번역 수정

어떤 때는 채플린의 말이 맞는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맞아 보입니다.
마치 게슈탈트 심리학에서 말하는 게슈탈트(Gestalt)처럼 어떤 인식틀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입니다.

네커 큐브와 루빈의 꽃병, 출처: 위키백과

채플린의 말은 사실 클로즈업, 롱샷과 같은 영화촬영 기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비극적 인물의 슬픔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클로즈업으로 촬영해야 할 겁니다.
반면 희극적 장면은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반응 등을 함께 카메라에 담아야 효과가 극대화되니까 롱샷으로 찍어야 할 거구요.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의 의지(욕망)론에 입각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살다보면 욕망이 성취되어 즐겁고 신나는 일들도 생기지만, 그래서 작은 규모의 희극이 펼쳐질 수 있지만, 그런 일들은 결국 고통의 미끼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비극이라는 말입니다.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고단한 인생살이마저 멀리서(떨어져서) 보면 코믹하게 보이면서, 다시 채플린의 게슈탈트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코믹함의 정체가 바로 냉혹한 냉소라는 걸 깨닫는 순간,

다시 쇼펜하우어의 게슈탈트를 가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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