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과 실제의 차이

김미옥 수필가(대구보건대 교수)

김미옥 수필가

김미옥 수필가

산을 바라보면 모든 게 완벽해 보인다.
거친 나무의 흔들림이 위엄한 지배자로 보이기도 하고 주위의 작은 잎과 꽃들이 어우러진 산세(山勢)는 아름답게만 비친다.
허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웅장한 겉모습과는 달리 발밑 언저리에 산재한 벌레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사계절 전부 보기 좋았다.
멀리 내다보이는 팔공산의 거대한 외관은 날씨 변화에 따라 오묘하게 색을 바꿔가며 사방으로 아름다운 경치를 펼쳐 보이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 막힌 일상에 탁 트인 기분을 선사했다.
나는 그 실체를 접하고 싶어서 무작정 등산로를 향했다.
정상을 향하는 길에서 오랜 기간 비바람에 노출된 나무와 돌계단을 발견했다.
더러 심한 상처가 난 곳도 있었고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려고 변화된 부분도 보였다.
문득 지금까지 자연의 속사정은 알려고 하지 않고 그저 겉모습에 환호했던 자신을 돌아보며 보이는 것과 실제를 생각하게 됐다.
인간관계 역시 자연처럼 대할 때가 있다.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해서 겉만 보고 주눅이 들거나 가볍다고 느낄 때 겉모양에 의존한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한때는 사람의 분위기에 이끌려서 함께 일을 시작했다가 멈춘 실력에 난감한 적도 있었고,
매서운 눈빛에 지레 마음의 문을 닫고 멀리했다가 동심일체가 돼 멋진 성과를 이끈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은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다.
가까운 친구나 동료를 떠올리면 그들과의 첫 만남에서 다양한 심정이 스쳐 지났던 기억이 떠오른다.
실체는 여러 경험과 함께 깨달음을 얻어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난다.
나 자신을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성장기 때 다른 사람의 잣대로 스스로를 판단하거나 부모님의 기대에 부합하려고 보이는 것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업무에 맞는 틀에 잡힌 모습이나 언행으로 고정된 나를 만들려고 겉모양에 치중했는지 모른다.
특정 모임에서는 보기에는 좋았지만 정작 내부의 어려움이 산재돼있음을 알아차린 후 나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거렸던 시간도 있었다.
이 외에도 외모가 훌륭하지 못하다고 가진 게 없다고 나만 불이익에 처했다고 착각에 빠진 경우는 훨씬 더 심각하게 스스로를 옭아매었다.
이럴 때면 나의 생각이나 가치가 실제 보이는 것과 동일한지 많은 고민을 하면서 선택을 번복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누구든 원한다면 자신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다.
매체 속에서는 행복한 순간,
즐거운 여행,
멋진 일상에서의 모습으로 포장돼 모두가 웃고 있다.
정작 내면에 담긴 어려움이나 고민과 슬픔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겉모습에 치중되어 있다.
인터넷으로 실체의 전부를 보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단편적인 부분만으로 본질 여부를 논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다.
또한 아무리 진실을 내보여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본연의 성질을 외면하려 든다면 그것 역시 한계를 넘기 어렵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건 뭘까. 내면에 자리한 속내와 가치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일치한다면 좋겠지만 다양한 사람의 마음을 생각할 때,
보이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본질을 바라보려는 마음과 태도를 고심하게 된다.
우리는 과연 있는 그대로 보이고 싶은가? 아니면 보이는 대로 있고 싶은가?

있고도 없는 ‘희망’

| 장동석 출판평론가긴 (듯 보였던) 추석 연휴가 속절없이 끝났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은 유례없는 폭염 속에서도 함께 살아온 어제와 오늘,
함께 살아갈 내일을 이야기하며 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달뜬 기분으로 어제는 추억했으되,
마음 놓고 오늘과 내일은 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누군가’가 특정 세대는 아니다.
노년,
장년,
중년,
청년,
유소년 세대 모두,
즉 우리 시대 대다수 사람들은 무언가에 쫓기며 오늘을 살고,
하여 내일을 기대하지 못한다.
팍팍한 경제 현실 때문만은 아니다.
각각의 인생은 저마다의 고민이 있고,
그 고민 속에서 희망이 영글어야 하는데,
희망이 사라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디디와 고고는 ‘고도’(Godot)라는 이름의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던 두 사람은 시답잖은 대화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 대화의 끝이 묘하다.
디디가 “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말하면 고고는 늘 “참 그래야지”라고 화답했다.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온다면 어디로 오는지도 모르는,
심지어 고도의 정체조차 모르는 두 사람은 나무 아래서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두 사람의 오랜 기다림 끝에 고도의 소식을 전하는 심부름꾼 소년이 등장하지만,
그의 말은 “고도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는 게 전부였다.
혼돈의 연속일 뿐,
고도는 끝내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디디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디디와 고고가 ‘고도’라는 이름의 희망을 기다렸다면,
독일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의 단편 <곰스크로 가는 기차>의 주인공 남자는 희망을 찾아 나선 사람이다.
그렇다고 남자가 희망의 실체를 속속들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멀고도 멋진 도시”에 대한 말만 전해 들었을 뿐,
어떤 곳인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남자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곰스크로 가는 것이었다.
결혼과 함께 곰스크행 기차에 올랐다.
남자의 꿈은 반쯤 이뤄지는 듯했지만 아내는 달랐다.
“우린 모든 것에서 멀어져 가는군요”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대신했다.
잠시 정차한 간이역에서 두 사람의 인생은 돌변한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간이식당에서 음식을 사먹고 읍내 구경에 나선 두 사람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남자는 노심초사했고,
아내의 발걸음은 용수철처럼 튀었다.
출발을 알리는 기적이 울렸을 때,
남자는 기차를 향해 내달리려 했지만 아내가 늦었다며 팔을 잡았다.
이후 남자는 기차가 들어올 때마다 기차역을 향해 뛰었고,
두 사람은 그때마다 옥신각신했다.
새 생명의 탄생과 함께 두 사람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남자가 곰스크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면 그때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곰스크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었다.
루쉰은 희망이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어지는 말을 보면 뜻은 선명해진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한 사람이 먼저 가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는 어쩌면 먼저 길을 걸어간 사람일 수도 있겠다.
곰스크에 가고자 분투한 남자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희망을 부여잡고 사는 일,
그것만이 우리네 인생의 숙명 아닐까,
추석 명절 끝자락에 생각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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