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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견식의 세계 마음 사전
‘행복한’은 ‘happy’의 협소한 해석
기쁘고 즐겁고 기분 좋은 상태부터
삶 전반의 평가까지…그러니 당신도
후딱후딱 해치우는 번역에 급급하다 보면 구태의연하거나 틀에 박힌 역문을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
앞뒤를 다 따져야 하는데 반사적으로 ‘happy=
행복한’,
‘great=위대한’ 따위처럼 빤하면서도 때로는 알맞지 않은 어휘를 고른다.
역자의 능동적 어휘가 모자라거나 일에 쫓겨서 딱 맞는 문구가 안 떠오를 수도 있다.
이제 기계번역이 워낙 발전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기계적인 번역은 번역 초보자나 비전문가가 저지를 때가 더 많다.
아들이 두살배기였을 때 읽어주던 그림책이 있다.
“마음 깊은 곳부터 온몸 구석구석까지 너를 사랑해” 같은 글이 쭉 나온다.
“네가
행복할 때나 슬플 때나 너를 사랑해”라는 대목이 탁 걸렸다.
번역서였으니 ‘happy’와 ‘sad’를 대비했을 텐데 ‘기쁠/즐거울 때나 슬플 때’가 좀 더 어울린다.
한국어에서 ‘
행복할 때’와 대구를 이루려면 ‘불행할 때’가 되므로 ‘sad’와 대조되는 ‘happy’는 ‘기쁘다/즐겁다’가 알맞다.
그래서 나는 ‘네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너를 사랑해’로도 바꿔서 읽어줬다.
원문은 “I love your happy side,
your sad side”이다.
이어지는 “말썽을 부릴 때나 심술을 부릴 때도 너를 사랑해”는 “I love your silly side,
your mad side”를 옮긴 것인데,
둘이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으나 오히려 창의적인 솜씨가 돋보인다.
페이스북의 자기소개란에는 무엇에
행복을 느끼는지 써보라는 말이 나온다.
영어 ‘what makes you happy’의 직역이다.
한국어와 달리 일본어 ‘好き’(좋아함),
중국어 ‘開心’(기쁨,
즐거움)도 그렇고 스웨덴어,
덴마크어,
노르웨이어 역시 ‘glad’(기쁨,
즐거움)로 옮겼다.
‘행복’이 여기서 꼭 안 어울린다는 것은 아니나 영어 happy는 ‘기쁘다/즐겁다/기분 좋다/만족하다/다행이다’에 두루 쓰인다.
평소
작은 일에서 느끼는 좋은 기분을 비롯한 일반적인 감정 상태부터 전반적인 삶의 평가까지 넓게 걸친다.
‘무사해서 다행이다’는 ‘I’m happy/glad you’re safe’,
‘다시 보니 반갑다’는 ‘I’m happy/glad to see you again’으로 나타낼 수 있다.
언어마다 다른 이런 용법은 ‘
행복’을 일컫는 대표적인 말들의 품사와 파생어 관계와도 연관 지을 수 있다.
영어와 스페인어 명사 ‘happiness’와 ‘felicidad’는 형용사 ‘happy’와 ‘feliz’의 파생어다.
이와 달리 독일어와 러시아어 형용사 ‘glücklich’와 ‘счастливый[스차스틀리비]’는 명사 ‘Glück’와 ‘счастье[스차스티예]’의 파생어다.
전자의 언어들은 기쁘고 즐거운 긍정적인 감정을 넓게 뜻하는
형용사에서 명사가 파생했으니 ‘
행복’의 센 느낌이 덜해서 자주 쓰는 반면,
후자의 언어들은 ‘
행복’이나 ‘행운’이라는 명사에서 파생한 형용사이니 쓰임이 제한적인 편이다.
한국어도 명사 ‘
행복’에서 형용사 ‘
행복하다’가 파생했다.
영어로 생일 축하 인사를 건넬 때 ‘Congratulations’라 하는 한국인도 왕왕 보인다.
언뜻 뭐가 틀렸지 싶은데 웬만하면 이내 ‘Happy Birthday!’를 떠올릴 것이다.
일본어도 생일이든 성취든 ‘おめでとう[오메데토]’를 두루 넣어 ‘생일 축하해’(誕生日おめでとう)나 ‘승진 축하합니다’(昇進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라고 한다.
결혼,
졸업,
합격,
승진,
출산 등 성취나 성공에 쓰는 ‘Congratulations’는 해마다 돌아오는 생일에
안 맞는다.
연중행사도 ‘Happy New Year’나 ‘Happy/Merry Christmas’처럼 ‘happy’를 쓴다.
프랑스어 ‘Bon anniversaire’(생일 축하),
‘Félicitations’(축하: 성취)처럼 딴 유럽 언어도 영어처럼 둘을 가려서 쓸 것 같지만 독일어 ‘Glückwunsch’,
네덜란드어 ‘Gefeliciteerd’,
포르투갈어 ‘Parabéns’,
러시아어 ‘Поздравляю[포즈드라블랴유]’ 모두 두 경우에 다 쓴다.
영어 어휘의 의미 변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예시가 ‘sad’,
‘silly’,
‘nice’인데 고대영어 sæd(배부른,
물린,
지겨운) → sad(슬픈),
고대영어 sælig(축복받은,
복된) → silly(멍청한),
라틴어 nescius(모르는,
무지한) → 프랑스어 nice(멍청한,
순진한) → 영어 nice(좋은,
멋진)처럼 거의 정반대로 말뜻이 바뀐 셈이다.
이 가운데 silly는 ‘모르는 게 약이다’나 ‘ignorance is bliss’(무지가
축복이다)의 함의를 뒤집은 것처럼도 보인다.
프랑스어 ‘benêt’(바보)도 라틴어 ‘benedictus’(축복받은 자)도 이와 비슷하다.
‘행복’과 관계 깊은 말 가운데 하나가 ‘만족’인데 영어 ‘satisfy’의 뿌리인 라틴어 ‘satis’(넉넉하다,
만족스럽다)도 앞서 말한 영어 ‘sad’와 이어진다.
늘 즐겁고 배부른 상태도 지나치면 탈이 나므로 이런 의미 변천도 자연스럽다.
언어 변화가 시대를 고스란히 담지는 않더라도 우리에게 귀띔하는 바는 있을 것이다.
영어 happy는 ‘happen’과 뿌리가 같고 둘 다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한다.
즉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는 것인데 아이슬란드어 ‘happ’(운수,
행운,
요행수)에 그 뜻이 남아 있다.
영어 ‘luck’(행운)의 어원인 네덜란드어 ‘geluk’(행운,
행복)과의 관계도 그렇고,
한자어 ‘행운’(幸運),
‘행복(幸福)’에 ‘다행(多幸)
幸’ 자가 들어가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즐겁고 무탈하게 잘 살면 그게 바로
행복이겠지만 나라마다
행복 또는 이와 유사한 감정,
기분,
정신 상태를 일컫는 말들은 다르다.
영어 ‘happy’와 ‘happiness’가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그 안에 담긴 영어권 특유의 가치관도 옮겨진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문구를 한번 살짝 뒤집어봐도 좋을 것이다.
저마다 다채롭게
행복해지도록
서로서로 빌어줄 수 있다면 그게
행복한 세상이 아닐까.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