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집에서 죽는 것이 최상의 마침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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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집에서 죽는 것이 최상의 마침표일까?

 

‘받고 싶고 하고 싶은 좋은 노년 돌봄’을 고민하다⑤

‘더 나은 고령사회를 위한 여성의 모임/오사카’의 대표 우에모토 마사코 씨와 필자. 2023년 6월 24일 오사카.     ©지은숙

※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okeesalon.org)은 모든 나이듦이 존엄한 사회,
다양한 나이대가 호혜적으로 연대하는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 연구소입니다.
지난 3년간 옥희살롱 연구활동가들이 노인요양시설 안팎의 돌봄에 대해 고민해온 바를 시민들과 나누려 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로운 돌봄사회로의 전환’에 대한 페미니스트 사 지평을 넓히며,
변화의 지향점을 좀 더 구체화해나갈 수 있는 토론의 장이 열리길 기대합니다.

나는 인류학자고,
2010년 무렵부터 일본의 가족과 노인돌봄에 대한 현장연구를 해왔다.
애초에는 가족돌봄자에 초점을 맞춰 가족관계와 젠더 질서의 변화를 탐구했지만,
그들의 돌봄관계와 돌봄실천을 분석하다 보니 일본의 요양서비스나 요양시설의 현황으로까지 관심 범위가 넓어졌다.
거기에 2022년 옥희살롱의 노년돌봄 보호자 연구팀에 합류하면서,
노인요양시설을 둘러싼 한국의 현황과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이번 연재에서 일본의 사례를 다루는 것은 마치 일본의 노인돌봄 시스템이 우리가 따라야 할 선례처럼 맥락없이 제시되는 현실에 옥희살롱이 모색해 온 다른 차원의 사유를 끼워넣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심하고 임종을 맞을 수 있는 장소 찾기
나는 2011년부터 일본에서 노인돌봄에 관한 현장연구를 했는데,
일본의 가족돌봄자들이 당장은 자택에서 돌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에도,
‘안심하고 임종할 수 있는 시설을 찾는 것’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가족돌봄자들은 돌봄의존자가 장래 입거할 수 있는 생활시설,
그중에서도 공공의 지원을 받는 특별양호노인홈을 찾아 미리미리 대기신청을 해두거나,
그보다는 빨리 입거할 수 있는 중간시설인 개호노인보건시설에 대한 검색을 수시로 했다.
가족돌봄자가 모이는 곳에 가면 시설에 대한 정보와 소문을 나누는 것이 주요한 화제 중 하나였다.

특히 고령의 배우자를 돌보는 이들은 당장 입거할 계획이 없더라도 새로운 시설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면,
단체로 시설 견학을 가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런 활동들은 언젠가 자택 돌봄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본인 혹은 가족을 위한 ‘행선지’를 정해놓는다는 의미가 컸다.
그렇게 해서 눈에 든 시설이 생기면,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데이케어서비스나 단기보호센터를 이용하면서 시설의 실제 운영상태도 체크해 보고,
직원들과 인연을 맺어두어 훗날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래야 갑자기 돌봄의존자의 상태가 급변해 시설로 옮겨야 할 때 시설측의 협조와 배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인돌봄을 위해 ‘시설이 좋냐,
자택이 좋냐’의 논쟁은 어딜 가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종 행선지를 병원이나 시설로 설정하는 것이 ‘국룰’로 통했다.
때문에 전국의 특별양호노인홈과 개호노인보건시설은 늘 자리가 모자라고 대기자로 넘쳐났다.

자택사에 대한 관심과 의료비 절감 정책이 맞물려
그런데 내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3년 이상 중단되었던 현장연구를 재개하기 위해 지난 6월 오사카와 교토를 가보니,
몇 년 새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지인의 주선으로 교토 북쪽에 있는 개호노인보건시설(이하 노건시설)을 방문했다.
이 시설은 2,
100명의 주민들이 기금을 만들어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입주자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각별한 노력과 주민밀착형 시설로 이름난 곳이었다.
한때 긴 대기자 명단을 자랑하던 곳이다.

그런데,
매니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수용인원 100명을 다 채우기 위해 이전에는 하지 않았던 홍보와 영업에 힘쓰고 있다고 했다.
매니저는 저가형 유료노인홈이 많이 생겨나 수요가 줄어든 것을 변화의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2주간 지내다 보니 변화는 다른 곳에서도 감지되었다.
가족돌봄자나 고령자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만나거나,
노인돌봄과 관련된 미디어를 살펴보아도 자택사(自宅死)에 대한 화제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자택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 감지되었다.
자택사란 본인이 살던 집에서,
가족과 친지에게 둘러싸여,
연명치료 없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또는 통계상으로는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집’에서 사망하는 경우를 이른다.
나는 이 자택사에 대한 관심이 노건시설과 같은 시설에 대한 수요를 떨어뜨린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원래 자택사가 당연한 것이었다.
1951년 사망자의 82.5%는 자택에서 임종했다.
1961년 전국민보험제도가 출범하면서 적은 부담으로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고,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자택사는 눈에 띄게 감소했다.
1977년에는 병원에서 사망하는 사람의 비율이 45.7%로,
자택사율 44.0%를 처음으로 웃돌게 되었다.
이후 자택사율은 급감하여 2005년과 2006년에는 12.2%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2015년까지 12%대로 제자리걸음을 했다.

이와 비례하여 병원 사망률은 점점 높아져 전체 사망자의 70%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가파른 의료비용의 증가를 수반했다.
이에 2015년 일본 정부는 의료비 절감을 내걸고 병상 수를 더 이상 늘리지 않을 것이며,
2038년까지 자택사율을 4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지역포괄지원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지역포괄지원시스템이란 고령자가 중증의 돌봄의존 상태가 되어도 살던 곳에서 임종까지 이어갈 수 있도록 의사,
간호사,
간병요원,
노인돌봄지원센터 등이 연계해 의료,
간병,
생활지원 등을 일체형으로 제공하는 구조다.

‘임종난민’과 자택사 담론 사이의 격차
의료비 절감을 위한 정부의 자택사 유도 정책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른바 ‘임종난민’의 양산이다.
‘임종난민’이란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1945년에서 1950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가 고령화됨에 따라 매년 사망자 수는 늘어나는데 병상 수는 그대로고,
지역포괄지원시스템 구축에서의 지역 간 격차를 생각한다면 병원에도 시설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도 죽을 수 있는 조건도 갖춰지지 않은 ‘임종난민’의 수가 연간 최대 40만 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기도 했다.

이렇게 임종난민이 미디어에 오르내리는 와중에도 정부는 의료보험의 가정의료 점수를 높이고 방문진료의사를 우대하는 한편,
가정임종의 점수도 올리면서 자택사 유도 정책을 추진하였다.
또한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75세 이상이 되는 2025년에는 임종난민을 눈앞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쏟아져도,
이러한 메시지가 노인돌봄을 하는 가족이나 돌봄을 받는 당사자들에게는 거의 도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택사를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필자가 방문한 개호노인보건시설 식당의 내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이 시설이 주택가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식당에서는 지역주민들도 방문해 식사를 하거나 도시락을 구매할 수 있고,
월 1회 지역 어린이를 위한 무료 식당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지은숙


예를 들어,
사회학자인 우에노 지즈코는 일찍부터 ‘1인가구가 자택에서 죽을 수 있는가?’를 주제로 연구를 진행해 왔다.
2015년에 출간된 책 『おひとりさまの最期』는 한국에서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2016)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기도 했다.
그 책에서는 혼자 살다가 와상 상태가 되거나 치매에 걸려도,
살던 집에서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어떻게 가능할지 구체적인 상은 모호했다.
나는 그 책에서 “언제든 달려와 줄 수 있는 5명이 있다면 1인가구도 집에서 죽을 수 있다는 구절을 보고,
반박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이런 메모를 적어 두기도 했다.
“친구 1명도 만들기 어려운데 5명? 그런 건 선생님한테나 가능한 얘기죠. 비혼에 혼자 사는 고령자에게 사람 부자가 되라고요,
차라리 돈을 모으라고 하세요.

2015년 이후 이런 저런 캠페인과 정책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에서 집에서 죽는 것에 대한 관심은 일각에서만 머물러 있었고,
마지막 행선지로 병원이나 시설을 선택하는 흐름은 의연했다.
2019년까지 자택사율은 13%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별 변화가 없었던 자택사율이 코로나 기간 중 눈에 띄게 높아지기 시작했다.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인구동태통계〉에 따르면 2019년에는 13.6%였던 자택사율이 2020년은 15.7%,
2021년 17.2%로 코로나 사태 2년간 3.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의 병원 사망자의 비율은 2019년 71.3%에서 2021년 65.9%로 5.4% 감소했다.
이같은 변화의 이유를 후생노동성은 코로나 기간 중 병원에 입원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 증가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앞서 방문했던 노건시설의 매니저는 “코로나 기간 동안 병원도 부족하고 병상도 부족해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눈앞에서 이용자가 죽는 것을 수도 없이 경험했다고 비통해했다.
코로나를 겪으면서 일본인들은 아직 먼 얘기로 여겼던 ‘임종난민’을 절실하게 경험했다.
병상 수 부족과 시설에서 연달아 발생한 집단감염,
그로 인한 사망 사태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는 행선지로서의 병원과 시설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 병원에도 시설에도 갈 수 없어 집에서 임종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자택사에 대한 대중의 경험치도 강제 상승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이런 심경의 변화를 발빠르게 반영해서 2021년 우에노 지즈코가 낸 책이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하다』이다.
제목에서부터 조심스러웠던 이전의 어조와는 달리 자신감이 넘친다.
이 책에서 우에노는 “시설에 가고 싶어하는 노인은 없다를 전제로,
고령자는 “절대로 자기 집을 떠나지 마라,
죽을 때까지 집을 사수해라 등의 주장을 펼친다.
덮어놓고 자택사를 주장하는 우에노에게 ‘자택사 근본주의냐’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자택사에 대한 우에노의 주장은 변화의 바람을 타고 동세대 고령자들의 동의를 획득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달리,
여성들이 1980년대부터 노년돌봄 문제의 당사자로 활발히 목소리를 내고 조직 활동을 펼쳐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더 나은 고령사회를 위한 여성의 모임’(高齢社会をよくする女性の会)이다.
이들은 2000년 개호보험제도가 출범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당시 모임의 주축은 가족돌봄자인 중장년 여성들이었는데,
그들이 이제 나이가 들어 돌봄의존 당사자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흥미로워 오래전부터 주목해 왔다.
오랜만에 이들을 만나 근황토크를 했다.
여기서도 자택사에 관한 화제가 나왔다.

올해 74세인 ‘더 나은 고령사회를 위한 여성의 모임/오사카’의 대표 우에모토 마사코 씨는 자택사를 둘러싼 심경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에노 선생이 자택사를 권한다는 책을 썼을 때,
처음에 우리들도 읽어보고 떨떠름했다.
돈도 있고,
인맥도 좋은 사람이니까 이런 말을 하지.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회 정세가 뒤집혀서 자택사가 당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으니,
우리들도 발상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택사를 하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그게 상상이 가능해야 하는데,
(바람직한 쪽으로) 그런 이미지가 아직 우리 머릿속에는 없다,
그래서 우선 이미지를 만들어보려고 함께 공부하는 중이다.

‘집이냐 시설이냐’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우에노 지즈코는 시설에 가고 싶어하는 노인은 없다고 단언한다.
실제로 요양시설에 거주하는 이들은 모두 ‘집’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 그리움에 대해서는 좀 더 다층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
일찍부터 다양한 노인돌봄 서비스를 개발하여 자택사를 지원해 온 NPO 단체의 대표이며 그룹홈의 운영자이기도 한 고지마 미사토는 자신의 책에서 이런 사례를 소개했다.

“물론 금방 익숙해지는 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그룹홈을 견학하러 와서 “나 여기 들어갈래라고 스스로 결정해서 입거한 P씨는 혼자서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나가서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렸고,
자기를 보러온 지인에게 “나는 조롱에 갇힌 새 신세라고 한탄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여기는 사람 소리가 있어서 따뜻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자유롭게 살던 자기만의 성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혼자서 살던 외로움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죠. 입거하기 이전의 생활을 싹 떨쳐버렸다기보다는 술렁이는 기분을 끌어안은 채,
새로운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거 아닐까요. -『당신은 어디서 죽고 싶습니까』(あなたはどこで死にたいですか?) 小島美里(고지마 미사토),
巖波書店,
2022.

죽음 앞에서 일관성을 지닌 주체로서 의연하라고 하는 것은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요구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인돌봄을 ‘탈시설’이라는 한가지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오락가락하는 것은 극히 인간적인 반응이고 존중받아야 한다.
우에노 지즈코가 주장하는 자택사가 가능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노인돌봄 시스템의 개혁을 촉진한다는 측면은 의의를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던 곳이 더 이상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게 되는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을 보면 답답함을 느낀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노인돌봄에 관해 영향력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임종의 문제를 ‘집이냐 시설이냐’는 양자택일의 차원으로 의제화하는 것을 보며 이같은 우려가 든다.
돌봄이 필요한 고령자를 위한 장소 만들기에서 중요한 것은 집이냐 시설이냐가 아니다.
집과 요양시설을 대치되는 개념으로 두는 것이 아니라,
요양시설이 새로운 형태의 거주지가 될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에 관해서는 “시도: 요양시설과 집의 이분법을 질문하기’(https://ildaro.com/9672)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집이든 시설이든 노인돌봄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킬 것인가,
어떻게 돌봄의존자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할 것인가다.
양자택일의 문제로 논의가 빨려 들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 소개] 지은숙.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교수,
한국과 일본사회를 현장으로 비혼/돌봄/공동체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를 진행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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