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과장과 자기 비하



자기 과장과 자기 비하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얼마 전 친구와 모임에서 찍은 사진을 받았다.
왜 이렇게 예쁘냐는 내 물음에 친구는 AI 프로필 앱으로 보정한 사진이라고 알려줬다.
사진 속 인물은 ‘나’였지만 분명 내가 아니었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에 가까웠다.
예전에는 성형외과에 연예인 사진을 들고 가는 사람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자신의 AI 프로필 사진과 비슷하게 해달라고 상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보정 필터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실상’과 ‘환상’ 사이에서 자칫 길을 잃기 쉬운 존재가 됐다.

사회적으로 이런 분위기는 외면에 그치지 않고 내면에도 영향을 미친다.
살면서 받는 상처 때문에 각종 심리 상담과 코칭을 돈을 주고 구매하는 것이 세계적인 트렌드다.
문제는 이런 상담과 코칭으로 성장하는 ‘위로 경제’ 산업은 때로 자신과 문제의 본질을 바라보는 걸 방해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최근 SNS나 유튜브에 심리 상담 콘텐츠가 많이 올라온다.
대개 친구,
가족,
동료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인데 흥미로운 건 유독 조언의 많은 부분이 ‘손절’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당신은 호구가 아니다,
당신은 소중하니 당장 손절하라. 하지만 이런 충고는 자칫 세상만사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착각에 빠지게 할 수 있다.
‘투사’로 불리는 남 탓은 당장은 위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섣부른 위로가 오히려 내면의 성장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우리는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다’는 말이 유행인 사회에 산다.
그러나 모든 것을 상처(피해)로 받아들이거나,
사소한 일에도 트라우마,
가스라이팅,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억울한 이타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희생자 코스프레로 살아갈 필요도 없다.
우리를 둘러싼 ‘필터 버블 시대’에 과도한 ‘자기 과장’은 필연적으로 ‘자기 비하’를 불러온다.

 

말과 대화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말하기와 글쓰기 중 한 가지 능력을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고를까. 대부분 말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은 생각이 깊고 창의적이다.
내가 만나본 말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곰곰이 답해본 후,
오래 그것을 성찰해온 점이다.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해 본 사람이 타인과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짝짓기 예능을 종종 본다.
인간 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이런 프로그램에는 유독 ‘말’이 넘치는데,
남녀 간 대화 양상을 관찰하며 커플로 성사될 만한 남녀를 예측하는 게 꽤 흥미롭다.
이들의 대화는 대개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차 있는데,
경험상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많이 이야기할수록 연인이나 부부가 되는 비율이 높았다.
이혼이나 파경을 앞둔 커플이 더 이상 미래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살다 보면 말을 잘하는 사람도,
못하는 사람도 만난다.
그들 중에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매스컴에 자주 나오는 유명인을 만난 적이 있다.
1분에 한 번 웃음이 터질 정도로 달변가였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대화 끝에 오는 피곤함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말을 잘했지만 대화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나’였는데 테이블에 오르는 모든 주제를 ‘나’로 전환하는 습관 때문인지,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에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는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구절이 있다.
침묵은 신뢰할 수 있는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대화 형식이다.
이런 침묵에는 ‘어색한’이란 형용사가 침범할 틈이 없다.
이때의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끝나는 곳에서 서서히 시작된다.
서로가 던진 말을 배드민턴의 셔틀콕처럼 부드러운 포물선으로 정확히 주고받는 것,
나는 그것이 최고의 대화가 아닐까 한다.

‘쿠크다스 멘털’

 

참을성과 집중력이 이전에 비해 떨어졌다는 얘길 하다가 처음 먹어본 ‘탕후루’가 떠올랐다.
‘탕후루’는 한입 먹는 순간,
눈이 번쩍 떠질 만큼 달다.
메가 히트를 친 ‘불닭 볶음면’이나 ‘틱톡’은 어떤가. 먹자마자,
보자마자,
도파민 폭죽이 터진다.
최근 유행하는 것에는 피드백이 빠르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것이 중독의 메커니즘이다.
자동 재생 기능이 장착된 OTT 드라마처럼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다.
게다가 뇌의 보상 회로는 자극에 금세 적응해 더 센 자극을 요구한다.
코인 투자로 대박을 경험한 사람은 주식 상한가 30%에도 만족하기 어렵다.

문제는 우리 몸이 시소처럼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쾌락이 오면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대표적인 게 마약이다.
펜타닐은 코카인 100배의 쾌락을 주지만 근육을 무력화해 극강의 고통을 준다.
최후엔 쾌락이 아니라 통증 때문에 마약을 다시 갈망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스마트폰,
유튜브,
배달 음식처럼 우리는 ‘누르면 즉시 나오는’ 온갖 보상 물질에 휩싸여 있다.
‘도파미네이션’의 저자 애나 렘키는 이런 도파민 중독에 빠져나오기 위해 쾌락의 반대인 ‘고통’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
명상,
채식처럼 ‘느린 피드백’을 가진 것들이 빠른 자극에 중독된 몸을 복구하기 때문이다.
단식 후 밥알 한 톨의 맛을 알고,
과도한 동영상 시청을 끊은 후 집중력 향상으로 성적이 좋아진 사례는 수없이 많다.
여기서 핵심은 ‘줄이는 것’이 아니라 단 기간이라도 확실히 ‘끊는 것’이다.

‘쿠쿠다스 멘털’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요즘 아이들의 마음을 얘기하다가 등장했는데,
나 역시 부서지기 쉬운 쿠쿠다스를 상처 없이 꺼낸 기억이 없다.
우리는 언제 더 강해질 수 있을까. 기다리고 견딜 수 있을 때다.
지름길은 없다.
자연도 계절을 건너뛰지 않는다.
씨를 뿌리고 비바람과 태양의 세례를 받고나서야 하나의 열매를 맺는다.
건강,
화해,
성장처럼 가치 있는 모든 것은 기다림의 시간을 통과해야 만난다.

 

존엄하게 사라지기

 
 

십 수년 전 이혼과 함께 루게릭을 선고받은 한 남자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처음 ‘디그니타스’의 존재를 알았다.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의사의 조력으로 죽을 수 있는 스위스 단체였다.
알츠하이머에 따른 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남편과 ‘디그니타스’로 가는 여정을 그린 ‘에이미 블룸’의 책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 제목이 ‘사랑을 담아’인 것은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테러 단체 ‘하마스’에 딸을 잃은 한 아버지가 ‘아이가 죽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봤다.
딸이 살아있길 바라는 게 아니라,
끔찍한 고통 없이 빨리 사망했길 바라는 그 비통함을 우리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뜨면 죽음보다 못한 삶은 도처에 있다.

의학의 발전에도 기대 수명만큼 건강 수명은 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초고령 사회 진입은 각종 말기 암,
치매,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다양한 기능 상실까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증가를 의미한다.
어떤 진통제로도 통증을 참을 수 없던 날,
아들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누구냐고 묻던 날,
유일하게 움직이던 왼쪽 눈꺼풀마저 마비로 잠식당하던 날,
불치병으로 죽음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 부르게 된 사람들 말이다.

2018년 나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다.
그 후 26만명 이상이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중단했다.
‘연명 의료 결정법’이 도입된 후,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등록한 국민은 164만명을 넘어섰다.
2025년에 대한민국은 노인 비율이 20퍼센트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24시간 켜진 인공 불빛 아래,
온 몸에 생명 연장 장치를 달고 수시로 주삿바늘에 몸이 찔리는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 자신으로 존엄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죽음 없이 좋은 삶도 없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

 
 

 

구글맵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해외여행이 풍성해졌다.
이전 같으면 길이 복잡해 포기할 만한 곳도 곧잘 찾아가곤 한다.
하지만 구글맵이 있어도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다.
대도시의 기차나 지하철역에 도착했을 때다.
예전의 나는 역 안의 지도나 안내도를 보면서 정확한 길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이젠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 밖으로 나간다.
밖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써 봐야 정확한 길을 찾기 힘들고,
밖으로 나와 움직여봐야 비로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잘못된 길이라도 가봐야 목적지에서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가이다.

작가 초기 나는 완벽한 플롯,
나를 목적지까지 안내해 줄 지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많은 실패를 통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후,
대략적인 아이디어가 정리되면 일단 쓰기 시작한다.
시작이 돼야 비로소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것이 옳은 방향이면 계속 나아가고,
잘못된 방향이면 원점으로 되돌아가 다른 방향으로 가보길 반복한다.

뛰어난 재능에도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실패가 두려워 애초에 시작도 못 하거나,
완벽하지 않으면 안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완벽해서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면서 완벽해지는 것이다.

살면서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를 묻게 될 때는 대개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진행돼 길을 잃었을 때다.
하지만 잘못 들어선 길이 종종 더 좋은 지도를 만든다.
성공에는 기쁨이 있지만 실패에는 배움이 있다.
인생은 편도이고 내일이라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초행길이다.
완벽한 지도는 없고 지도가 우리를 목적지에 데려다 주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과거에 비해 변화가 빠른 지금 필요한 건 가능성에 한계를 짓는 ‘지도’가 아니라 안개를 헤쳐 나갈 때 쓰는 ‘나침반’일지 모른다.
결국 끝까지 굳게 믿어야 할 건 하나. 튼튼한 우리의 두 발뿐이다.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