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언어가 아닌 울음과 표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어른으로 성장하며 언어로 자기 감정과 의견을 표현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언어는 그 사람의 인품은
물론 종종 계급까지 드러낸다.
그것이 꼭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속한 나라와 단체가 쓰는 언어를 보면 그 집단의 품격과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 위정자들이 쓰는 언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는 우리 사회의 의식과 수준을 반영한다.
그런데 언어가 부적절하게 쓰이는 예는 많다.
가령 다양한 매체에서 폭력 학생을 뜻하는 ‘일진’이라는
용어는 뭔가 앞에서 잘나가는 느낌을 준다.
전세 사기범을 칭하며 쓴 ‘빌라 왕’은 어떤가. 그 지역의 가장 비싼 아파트를 ‘대장 아파트’라고 부르는 것 역시 그렇다.
대장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졸병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식시장에는 ‘정치 테마주’가 있는데,
정치인의 정책과는 무관한 학연,
지연 등에 투자하는 것이다.
‘정치 테마주’가 아니라 ‘부정부패 관련주’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
한국어로 ‘그 집 못산다’는 가난한 사람을,
‘그 집 잘산다’는 부자를 뜻한다.
김찬호의 책 ‘모멸감’에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것이라고 지적한다.
‘잘사는 것=well being’인데
왜 한국에서는 부자를 잘산다고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난해도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차별하고 비하하는 맘충,
틀딱,
지잡대 같은 말이 폭증하고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별생각 없이 말하다보면 그것이 우리의 인성이 되고,
인성이 모여 다시 인생이 된다.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이 된다.
성격은 (당신의) 모든 것이다.
” 마거릿 대처의 말이다.
말과 대화
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말하기와 글쓰기 중 한 가지 능력을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고를까. 대부분 말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은 생각이
깊고 창의적이다.
내가 만나본 말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곰곰이 답해본 후,
오래 그것을 성찰해온 점이다.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해 본 사람이 타인과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짝짓기 예능을 종종 본다.
인간 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이런 프로그램에는 유독 ‘말’이 넘치는데,
남녀 간 대화 양상을 관찰하며 커플로 성사될 만한 남녀를 예측하는 게
꽤 흥미롭다.
이들의 대화는 대개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차 있는데,
경험상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많이 이야기할수록 연인이나 부부가 되는 비율이 높았다.
이혼이나 파경을 앞둔 커플이 더 이상 미래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살다 보면 말을 잘하는 사람도,
못하는 사람도 만난다.
그들 중에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매스컴에 자주 나오는
유명인을 만난 적이 있다.
1분에 한 번 웃음이 터질 정도로
달변가였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대화 끝에 오는 피곤함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말을 잘했지만 대화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나’였는데 테이블에 오르는 모든 주제를 ‘나’로 전환하는 습관 때문인지,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에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는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구절이 있다.
침묵은 신뢰할 수 있는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대화 형식이다.
이런 침묵에는 ‘어색한’이란 형용사가 침범할 틈이 없다.
이때의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끝나는 곳에서 서서히 시작된다.
서로가 던진 말을 배드민턴의 셔틀콕처럼 부드러운 포물선으로 정확히 주고받는 것,
나는 그것이 최고의 대화가 아닐까 한다.
일러스트=최정진
신입 사원 때 “죄송합니다”는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가장 많이 쓰는 말 중 하나였다.
나름의 방어 기제였다.
틀어진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조급한 성격
때문이었나. 미움받고 싶지 않은 소심함 때문이었나.
선배들의 눈빛이 ‘네가 잘못한 것 같아’라고 말을 걸어오면,
바로 “죄송합니다”라는 카드를 꺼냈다.
스스로에게는 비겁한 방식이었다.
내가 잘못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밤에 이불에 들어가서야 억울함이 몰려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배들도 참 답답했을 것이다.
뭐가 계속 죄송하다는 건지.
어느 날은 내리막길을 걸어가는데 올라오던 분이 내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나는 휘청이며 주저앉아서,
뒤를 돌아 외쳤다.
뭐라고 외쳤을까? “죄송합니다”였다.
맙소사. 무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온 말이었다.
저분이 나를 쳤는데,
왜 나는 죄송하다고 했을까. 습관적으로 ‘죄송함’을 자처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구나.
한 번은 “거기 문방구 아닌가요?”라고 잘못 온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문방구 아니에요. 죄송합니다”라고 답했다.
전화를 끊고서야 내가 그 말을 한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버렸다.
무엇이 죄송했던
걸까. 전화한 사람을 실망하게 한 게? ‘죄송합니다’는 내 무의식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결국 나는 포스트잇에 ‘죄송하다는 말 덜하기’라고 써서 달력 위에 붙여 놔야 했다.
그런 내게 동료가 조언을 해왔다.
자신은 죄송하다는 말을 절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 본인의 잘못일 때도 그 말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 어떤 권력 관계가 생긴다는 거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를 자주 하는 사람은 결국 ‘죄송할 짓을 많이 하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다는 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동료처럼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잘못을 빤히 저지르고 모르쇠인 동료를 보면 분통이 터졌다.
‘죄송합니다’ 한마디가 가져올 결과에 대해 비약적인 두려움을 가진 종족도 존재한다는 것을 차차 알게 되었다.
어릴 때는 먼저 사과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배우긴 했다.
하지만 나 같은 소인배에게 승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다닌 유치원에는 이름이 알려진 부모님을 가진
친구가 하나 있었다.
어느 날 뛰놀고 있었는데,
친구가 계단을 뛰어오르다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엉엉 울기 시작했고 선생님들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 때문에 넘어졌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억울해서 아니라고 했는데,
그때 원장 선생님이 나와버렸다.
원장 선생님은 친구의 말을 듣고 나를 무릎 꿇고 손 들고 있게 했다.
잘못이 없으면서도 용서를 구한 최초의 기억이다.
나는 꽤 억울했던 것 같다.
엄마도 이 일을 또렷이 기억하는 걸 보면.
미안하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끝내 스스로에게 미안한 날이 오고야 만다.
나는 나의 ‘죄송합니다’를 찬찬히 해부해 보기로 했다.
내가 주로 언제 그런 말을
쓰는지. 누구에게 그 말을 하는지. 그 안에는
‘갈등을 빨리 피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일을 하는데 갈등은 당연한 거니까,
조급함부터 내려 놓기로 했다.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가만히 있어도 별일 일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어른들의 세계에는 ‘원장 선생님’이 등장하지 않는다.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야 하는 상황도 벌어지지 않는다.
상황을 한마디로 무마하려는 조급함이 없어지자,
나의 상황과 의견을 천천히 설명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세상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이야기하는 여유 있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설명하고 생각한 후에도 내
잘못이라는 판단이 들면,
그때는 깔끔하게 사과하면 된다.
그러면 진짜 이기는 거다.
업무에 자신이 없어서. 혼내는 선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오늘도 먼저 ‘사과’하고도 이기지 못한 누군가에게 이 ‘리빙뽀인뜨’를 바친다.
정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사과하지 않는 것이 좋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언어가 생겨나기 전의 인류는 화가 나면 흔히 화나게 만든 상대방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어가 생겨나면서 화날 때면 상대방을 욕을 하는 것으로 화를 풀어 살인 현상이 많이 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근 몇 주간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세상사 말 많은 건 의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할 말이 있고,
자중해야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옛 선언들은 양반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고,
상놈이 쓰는 언어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이라고 다 말은 아니라고
훈계했다.
‘이 새끼,
저 새끼’
이 말은 사실 욕이라기보다 상투적 비속어라고 정의하면 맞을 것 같다.
욕이란 인간이면 거의 누구나 다하는 것이라고 하면 맞는다고 보는 데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까?
이 상투적 비속어를 들으면 듣는 태도에서 아무렇지 않게 듣는 이가 있느냐면,
자존심 상해 그 자리를
뜨는 분,
아니면 사과하라고 그 자리에서 지적하는 등등의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 상투적 비속어를 일반인이 아닌 지체가 높은 분들이 쓴다면 그것은 질타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언행에 신중히 처리해야 하는 것은 그가 맡은 책무가 막중하기도 하지만 신분이 공적 신분이기 때문이다.
이 비속어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면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하면.
아니 나중에라도 사과를 정중히 하면 다 지나가는 일로 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것을 사과하지 않고 하지 않았다고 우기거나 다른 말을 했다고 항변하면 할수록 세상의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만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깊은 성찰의 장을 마련한 철학자가 마틴 하이데거Heidegger이다.
그는 언어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의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이 그 언어의 집에 산다.
사색하는 자들과 단어를 가지고 창조하는 자가 이 집의 지킴이들이다. ...
인간은 마치 자신이 언어의 창조자이고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과 다른 언어의 주택에 살면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인간은 존재의 집”이라 표현했다.
인간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수준은 의식주와 같은 경제적 요소가 아닌 사용하는 언어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언어는 생각의 그릇을 담은 것이기에 생각과 존재를 결정한다.
별생각
없이 말한다고 해도 말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조상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생활한다.
한 단어가 있으면 그것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고,
대상은 말에 의하여 규정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 말대로 된다는 비정한 법칙에 예외가 없다.
희망을 노래하면 희망이 온다.
가수들의 삶을 보면,
자신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삶과 노래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울한 가사나 부정적인 기사,
즉 우울하고 부정적인 말은 그런 삶을 만들 확률이 높다.
그러나 맑고 밝고 환하고 긍정적인 기사,
다시 말해 환하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가사와 말의 고백은 그런
삶을 만들어 낸다.
민족의 흥망성쇠도 문화와 언어에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도시를 점령하기보다 마음을 지배해야 지속된다.
언어와 문화를 잃게 되면 정신도 육체도 망가지기 마련이다.
몽고족인 원나라와 만주족인 청나라의 경우 중국을 정치적으로
정복했지만 언어를 빼앗지 못해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사고를 바탕으로 언어를 창조하고,
사고의 결과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처럼 사고한 내용이 언어로 표현되고 사고의 폭이 넓어지면서 발전하게 된다.
언어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고도 달라질 수 있다.
하이데거는 게오르게의 시
<말>의 마지막 시행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Martin Heidegger
일자천금一字千金,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 한마디에 빚을 갚기는커녕 천 냥 빚을 더 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어를 통해 상대방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개인 간 혹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의 언어는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비즈니스 상대의 정직한 언어는 비즈니스 자체를 정직하게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과거 항공기 제작사인 더글러스와 보잉사가 최초의 대형 제트 여객기를 이스턴 항공사에 팔기 위해 경합을 벌였다.
에디 레켄배커 이스턴 항공사 사장은 평가결과 더글러스사를 낙점했다.
다만 소음방지 장치가 미흡하니 보잉사보다 더 우수한 소음방지 장치를 달아 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지를 답장해 달라고 말했다.
더글러스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회사의 기술자들에게 조회해 본 결과,
소음방지장치에 대한 약속은 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레켄배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나는 당신이 그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제
1억3천5백만 달러 상당의 항공기를 주문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인 느낌이나 사고,
가치,
신념 등을 언어로 표현한다.
반면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나 정신세계를 형성하거나 지배하게 된다.
어떤 경로로든 언어는 나란 존재의 집이며 우리사회라는 존재의 집이다.
오늘날 돌아가는 사회를 보면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협적인 존재는 경제위기도 아니며,
태풍도,
코로나19
팬데믹 현상도,
이해관계가 얽힌 부동산정책도,
양심 없는 정치인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위협은 바로 우리사회를 보이지 않게 휘감고 있는 집단적 어리석음의
'말'이다.
개인이건 집단의 말이건,
말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다운 일상과 행·불행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당은 윤 대통령이 언급한 단어가
‘날리면’이라고 해명하면서도 이를 최초 보도한
MBC를 고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권 내부 증언에 따르면 바이든’으로 들린다는 사람은 다 때려잡자는 분위기”라고 한다.
장르가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바뀌고 있다.
대국민 가족오락관이 된 느낌이다.
특히 요즘 무슨
'종교'나
'단체'라는 다중의 힘을 빌려 말할
때 말은 용기라는 이름의 광기로 돌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입에 재갈이 물렸던 군부독재 시절에는 숨죽이며 몸 사렸던 그 비겁한 용기들이다.
어찌 보면 이런 비겁한 용기는 막스베버의 말대로 우리 같은
'평균적인 인간들의 결함'일지 모른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비겁한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집단이나 정치적 당파,
민족의 이름으로는 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성적인
'호모
사피엔스'였다가도 집단이나 무리를 이루게 되면 어리석은
'호모 데멘스',
즉
광기의 인간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광기의 인간,
신뢰가 사라지는 정치,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