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해 사과하고, 기다리기



정혜진 조정전담변호사 (서울중앙지법 상근조정위원)

2023_lawyer_jung_hye_jin.jpg

수현이가 철수한테 처음 맞은 건 초등학교 때였다.
농구를 하다가 몸이 부딪혔다는 이유로 주먹이 날라왔다.
철수 어머니는 수현이 어머니한테 여러 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수현이 어머니는 학교 폭력 신고까지는 가지 않고 넘어갔다.

수현이와 철수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다.
CCTV 속에서 학교 복도를 걷던 수현이는 복도 중간에 있던 철수를 보고 갑자기 천천히 걸었다.
철수는 기다렸다는 듯 수현이의 앞을 막았고 또다시 수현이를 주먹으로 때렸다.
수현이 어머니는 수현의 머뭇거리는 뒷모습에서 철수에 대한 수현이의 두려움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철수 어머니의 대응은 달라졌다.
사과 대신 학교에 명확한 사건 조사를 요구했다.
CCTV만 갖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철수가 길을 막기 전 이미 수현이가 철수를 괴롭혔고 이에 대해 철수가 대응한 것이라고 했다.
수현 어머니는 괴로웠다.
모든 게 초등학교 때 제대로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간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았다.

수현이, 수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원고가 되어 직접 철수와 철수 부모님에 대하여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수현이 어머니는 소 제기 이유에 대해 진정한 사과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철수네는 이미 학교 폭력 심의 위원회에서 서면 사과 결정이 났고 서면 사과까지 했는데 민사 소송까지 제기한 건 너무 가혹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정기일, 철수네를 마주한 수현이 어머니는 아이를 지키기 위한 결정임을 거듭 밝혔다.
가해자 측 서면 사과문에는 사과의 의미보다는 본인 행동의 정당성에 대한 내용이 더 많았다는 것. 이 때문에 가해 학생이 진정으로 사과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고 본인의 행동이 잘못임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금전 청구를 제기했다고 덧붙였다.
본인의 행동이 잘못임을 느껴야 똑같은 잘못을 안 하지 않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철수네는 가혹하다고 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닌데 왜 민사 소송의 피고까지 되어야 하냐며 피해 학생 측의 대응이 과도하다고 했다.
아이들 문제를 이렇게까지 크게 만들 일은 아니지 않냐고도 반문했다.
조정은 결렬됐다.

학교 폭력 심의 위원회의 심의 점수에는 가해자의 반성 정도와 화해 정도 항목이 있다.
처벌 수위를 낮추기 위해서라도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빨리 사과하고 빨리 용서받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의 상처는 길게는 수년씩 이어진다.
폭력을 당했을 때 기억이 너무나 생생해 괴로운데 가해자 측이 빨리 용서해 달라고 재촉하는 것 자체가 폭력일 수 있다.
가해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끔찍한데 사과 할테니 제발 만나자는 제안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고문일 수 있다.

가해자 측도 할 말은 있다.
사과하려고 했는데 피해자 측이 도통 안 만나준다거나, 사과를 했는데도 도저히 안 받아 주는데 뭘 더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다.
다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사과가 충분했느냐는 판단은 결국 피해자의 몫이다.
사과가 마음에 와 닿았는지는 오로지 피해자의 마음의 영역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충분치 않다고 하는데, 가해자가 충분히 사과했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용서를 하기 싫어도 용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정도 사과했으니 이쯤 되면 용서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없다.
가해자가 할 일은 오직 마음을 다해 조심스럽게 사과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용서를 다만 기다리는 것, 거기까지가 가해자의 몫이다.

정혜진 조정전담변호사 (서울중앙지법 상근조정위원)

‘의리’를 넘어서야 정의가 보인다

권석천 고문(법무법인 태평양)

민주주의 무너뜨린 하나회그들의 의리가 아름다운가진영논리는 얼마나 다른가

2023_synopticon.jpg

 

영화 ‘서울의 봄’의 주인공은 ‘전두광’과 ‘이태신’이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각각 반란군과 진압군을 대표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이다.
그 운명의 밤에 전두광은 군 사조직인 ‘하나회’와 작당해 모반을 일으키고, 이태신은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고군분투한다.
왜 야합하는 쪽은 사람들이 몰리고, 원칙을 따르는 쪽은 소수여야 하는가.

영화엔 장교들이 하나회에 가입하며 전두광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회가 본인을 선택해주신 영광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고….” 전두광은 장교에게 사령관 자리에 앉아보라고 한다.
“앉아봐. 두렵나? 그냥 의자일 뿐이잖아?” 그는 자기 자리에 앉은 부하에게 힘주어 말한다.
“이제부터 자네는 나야. 나는 바로 자네고.”

그 장면을 보면서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1998년 1년간 김영삼 정부 때의 검찰 수사를 취재해 장기 시리즈물을 연재하던 당시의 일이었다.
12.12 및 5.18 사건 취재 과정에서 전두환씨 측근들을 여럿 만났다.
놀라웠던 것은 그들의 흔들림 없는 충성심이었다.
한 측근은 전씨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인간 전두환은 한결같죠. 사내답고, 따뜻하고, 자상하고, 얼굴도 우리보다 낫고….”

검찰 조사에 앞서 전 씨에게 보내는 유서를 써 놓은 측근도 있었다.
수사 검사들은 그들을 ‘전두환 교(敎)의 광신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그런 인간관계에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의리의 사나이들 아니냐”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사전에서 ‘의리’를 찾아보면 이런 뜻풀이가 나온다.
결코 나쁜 말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가 ‘아는 사람들’로 국한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서로 아는 이들 사이에서 유통되는 쿠폰 같은 것으로 변질된다.
“지난번에 내가 도왔으니 이번엔 당신이 도와야지.”

이 특별한 인간관계는 ‘모르는 사람’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 정도에 머물면 그나마 다행이다.
심하면 사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보라. ‘하나회’의 의리가 군사반란을 넘어 광주 학살, 군부독재, 인권 탄압 같은 반사회적 결과를 낳지 않았던가.

더욱이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놓고 공적 마인드로 임해야 할 정치에까지 ‘의리의 정신’이 범람한다면 과연 그 사회에 미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정치에 무슨 의리냐고?

그렇다면 진영논리는 어떤가.

자신이 속한 진영은 무조건 옳고, 상대편 진영은 무조건 그르다는 게 말이 되는가.

진영논리는 의리와 얼마나 다른가. 

진정 자기 진영을 위하고 아낀다면 진영 내부에서 잘못을 저지를 때 비판하고 지적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못 본 척 입을 다물고, “뭐가 잘못됐느냐?”며 쉴드(방패)를 쳐주기도 한다.
“우리끼리 공격하면 상대편을 도와주는 것”이라며 오히려 내부비판자를 코너로 몰아붙인다.

의리를 넘어서야 정의가 보인다.
한국 정치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우리 편을 지키자’는 완고함에서 벗어나 공정을 토대로 한 연대로 진화해야 한다.
의리의 밑바닥엔 결국 이해관계가 내장돼 있음을 명심하자. 영화에서 전두광은 반란군 지휘부가 집결한 경복궁 30경비단 상황실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안에 있는 인간들,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거 묵을라고 있는 거거든. 그 떡고물 주딩이에 이빠이(가득) 쳐넣어줄 기야. 내가.”

권석천 고문(법무법인 태평양)

리걸 에듀


댓글 쓰기

Welcome

다음 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