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부모 간병 끝났으면…” 대한민국 중년의 불안 셋

“치매 부모 간병 끝났으면…” 대한민국 중년의 불안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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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부모는 스무 살 넘은 성인 자녀의 삶을 어디까지 보살펴야 그 책임을 다한 걸까. 자녀의 어려움에 등 돌리면 부모의 책임을 못 한 게 아닐까. 자녀를 돕는 게 혹시 미래의 나를 위한다는 이기심 때문은 아닐까. 

 중증 치매를 앓는 노부모 병간호 생활이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문득 들 때 자식으로서 죄책감이 밀려든다. 이 감정은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성인이 된 자녀와 노부모는 중년의 ‘나’를 두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점점 멀어진다. 그래서 대한민국 중년은 더 불안하다. 중년의 ‘나’는 이 불안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혹시 알고 보니 불안은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 건 아닐까.

하지현(56·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최근 낸 책 『어른을 키우는 어른을 위한 심리학』에서 “불안의 삼중고(三重苦)”라는 말로 대한민국 중년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설명했다. 쏟아지는 부머(baby boomer)들의 은퇴, 자녀들의 취업난 등과 맞물려 중년 부모는 성인 자녀와 노부모 사이에서 독특한 불안을 맞는다고 했다.

하 교수는 왜 이 시점에, 그것도 중년 세대를 콕 집어서 그들의 정신 건강 문제를 이야기할까. 지난달 27일 하 교수를 만났다. ‘불안의 삼중고’에 대처하는 중년의 마음가짐은 무엇인지, 불안을 만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중년들이 이런 불안을 넘어 행복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그에게 물었다.

지난달 27일 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정신과 전문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왜 중년기 정신 건강에 주목했나.
중년기라기보다 중장년기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과거 심리학에서 프로이트(Sigmund Freud)나 에릭슨(Erik Homberger Erikson) 등은 인간의 생애 주기를 20, 40, 60대로 구분했다. ‘20살에 청년, 40살이면 중년, 60살이 되면 죽는다’는 걸 전제로 구분했다. 이게 지금은 ‘30대·60대·90대’로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제 60세부터 90세까지 노년기다. 인간이 이렇게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많은 부머들이 노년기를 준비하는 이 시점에 독특한 심리적 현상들이 많이 발견돼 중장년기의 불안과 고민을 이야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년을 덮친 세 가지 고통

중장년기만의 심리적 특징은.
이 시기는 ‘불안의 삼중고’라고 할 수 있다. 나, 내 자식, 내 부모, 세 영역이 새로운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불안은 ‘나’의 불안이다. 과거엔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됐지만 최근엔 빠르면 50대 초반에 직장을 관둔다. 65세에 국민연금을 받을 때까지 ‘소득 크레바스(crevasse·단절)’를 경험한다. 경제적 어려움에 더해 심리적·정신적 어려움도 함께 찾아온다. ‘남아 있는 시간이 아직 많다’고 느끼면서도 반대로 친구의 본인상(本人喪) 등을 경험하며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젊었을 때처럼 뚝심과 의지로 밀고 나가거나 에너지를 낼 시기가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두 번째 불안은 ‘자식’이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손이 안 갈 거라 생각했는데, 가면 갈수록 자녀 세대는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다. 과거보다 취업과 독립이 어려워져 30살 가까이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는 ‘자유로워졌다’는 마음을 갖기 어렵게 됐다. 경우에 따라선 자녀가 결혼하고 취업해도 여전히 손이 간다.

세 번째 불안은 ‘내 부모’의 영역이다. 과거와 달리 평균 연령이 올라가며 노부모가 85~90세까지 살아 계신다. 내가 돌봄 받고 의지했던 부모를 내가 돌보고, 병간호하고, 챙겨야 한다는 불안이 밀려온다. 이런 세 가지 불안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며 ‘나 하나만 잘하면 돼’라는 생각은 소용이 없어진다. 내 밑에서 성장하는 아이가 독립하지 않은 것, 부모가 노쇠해지며 이런 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심지어 빨리 끝나길 바라는 그 마음이 한편으론 죄책감을 가져다주는 ‘삼중고’가 중장년기 불안을 키운다.  

이런 관계 역전이 중장년 불안을 어떻게 더 키우나.
(자기 일을) 알아서 하시던 분들이 어느 순간 ‘그건 네가 좀 알아서 해달라’라고 (자식에게) 의지하면서 ‘결정권’이 넘어올 때 느끼는 책임감은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부담이다. 반면 아이는 ‘성인이 됐으니, 이제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자녀에 대한 결정권을 놓는 게 쉽지 않다.

결과적으로 부모의 결정권을 내가 가져오고, 아이에게 내줘야 할 결정권도 내가 쥐고 있다. 의무와 책임이 두 배 이상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게 중장년기 불안을 강화한다.  

‘사무직 1세대’의 은퇴와 ‘성공’의 대물림  

‘삼중고’를 겪는 중장년, 자녀 관계에선 어떤 특징이 있나.  
1958년생부터 1970년생까지 인구가 약 1200만 명이다. 1960년생부터 시행된 졸정제(졸업정원제)로 대졸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학력자, ‘사무직 1세대’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됐다. 이들은 자신이 획득한 사회적 지위·계층을 자녀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는 욕망이 어느 세대보다도 강하다.

하지만 30년 전과 달리 이들의 자녀 세대가 느끼는 ‘사회적 압력’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강력하다. 여기서 오는 그들의 좌절감은 부모 세대와 다양한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데도 부모는 본인의 성공 방식, 이전 세대의 학습된 방식을 그대로 자녀 세대에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강할 수밖에 없다. 조금 더 안정적인 직장을 갖게 해주는 게 ‘내가 내 아이의 삶에 안정을 가져다줄 최선’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그 연령대의 부모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기조다.  

만혼 등으로 자녀와 나이 차가 점점 벌어진다. 자녀 관계에 미칠 영향도 클 듯한데.  
늦게 아이를 가지면 다음 아이를 낳을 확률이 확연히 떨어진다. 나의 노후를 생각할 때 아들이면 최소 26~27살, 딸이면 23~24살까지 양육 의무가 있다고 보는데, 역산하면 아빠의 나이가 35~36살에 마지막 아이를 낳아야 하지 않을까. 자칫 내 생산력이 뚝 떨어졌을 때 아이가 21살일 수 있다. 이런 부담으로 이전과 달리 한 아이가 갖는 소중함이 더 커진다. 부모는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을 투여하게 된다.  
사진 px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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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의 결핍? 부모는 조장할 필요 있어  

그럴수록 부모는 성인 자녀에게 점점 더 많은 걸 바라게 될 듯한데.
뭔가를 바라는 마음엔 두 가지 심리가 작동한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것, 즉 ‘욕구(needs)’와 또 한 가지는 ‘욕망(desire)’이다. 이걸 나눠서 봐야 한다. 욕구는 ‘배가 고프니까 먹고 싶어’와 같은 기본적인 의식주가 달성되길 바라는 동기부여다. 이게 충족되지 않을 때 느끼는 불안은 굉장히 강렬하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이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조금 더 큰 보상과 즐거움을 바라는 마음은 자연스럽고 죄악시할 게 아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삶에서 욕구와 욕망이 뒤엉켰을 때 느끼는 심리다.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걸 마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을 때 경험하는 생존의 위협으로 오해하게 된다. 60점만 넘으면 되는 시험에서 95점 받았는데 낙제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거나 집을 한 채 가진 상황에서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려다가 이사를 못 하게 됐을 때 느끼는 불안을 굉장히 강렬하게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욕구와 욕망을 분리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한다. 물론 30대는 욕구와 욕망의 구별이 무의미할 수 있다. 욕구와 욕망이 한 가지일 수 있다. 일단 직장에 들어가 최소한의 돈을 버는 것, 욕구와 욕망이 한 덩어리일 때가 많다. 그러나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그 둘을 구별해 봐야 한다.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땐 한번 돌아보면서 내가 (이미) 이루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아’라고 자신을 안심시킬 수 있다. 불안을 심하게 갖는 분들은 욕구와 욕망, 이 두 가지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반대로 부모는 자녀가 원하는 걸 해주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많은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되고 싶다. 원하는 걸 다 해주고 싶어 한다.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위니콧(Donald Woods Winnicott)은 “모든 부모는 기본적으로 뭔가 더 잘해줘야 하는데, 그걸 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죄책감이 아이를 잘 돌보게 해줄 원동력이 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엔 자식에게의 죄책감이 과도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걸 생각해보자. ‘결핍 없이 동기부여가 될까’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에겐 어떤 방식으로 동기부여를 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어떨 땐 결핍이라는 것은 다소간에 의도적으로 조장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핍을 메꾸거나 ‘내가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노력한다.

결핍이 행동의 강력한 동력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지, 그걸 부모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설사 미안해하더라도 ‘그게 꼭 나쁜 걸까’라고 생각하면 좋다.  

부모가 죄책감을 안 갖는 만큼의 경제적 지원, 그 적정선은.
자녀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할 때 첫 번째로 할 생각은 ‘나의 안전이 우선이다’는 것이다. ‘산소마스크는 부모가 먼저 써야 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아이와 함께 비행기를 탔는데, 응급 상황이 벌어졌다고 치자. 산소마스크가 떨어졌을 때 우리는 당연히 ‘내 아이에게 먼저 씌워주고, 그다음에 내가 써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육 영상에선 그게 틀렸다고 나온다. ‘어른이 먼저 쓰고 아이에게 씌우라’고 한다. 짧은 5~10초 동안 허둥지둥하다가 내가 의식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는 실은 굉장한 이기주의가 숨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투자하면 두 배, 세 배로 돌아와 ‘나의 노후를 애들이 보장해 줄 거야’ ‘내가 안전해지고, 굉장히 안락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를 갖고 아이에게 투자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 이기주의를 거둬야 한다.

대부분의 심층 심리를 보면 내 안전을 위해서다. 그 이기주의를 포기해야 한다. 일단 부모인 나를 중심으로 보고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도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자녀 교육을 ‘투자’가 아니라 ‘소비’라고 생각하자는 얘기를 한다. 아이한테 좀 더 좋은 걸 해주기 위한 ‘적정선의 소비’ 행위로 보면 아이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도와줘야 할지 각자의 적정선이 나온다. 부모의 생각이 조금 다르면 ‘조금 더 보수적인 사람의 생각을 따르는 게 옳다’고 말씀드린다. 

‘노부모 간병 빨리 끝났으면…’, 죄책감 아닌 정상 심리  

은퇴가 중장년의 불안에 미치는 영향은.
요즘 운이 좋으면 50대 후반, 이르면 50대 초중반에 직장을 그만둔다. 그 직업이 괜찮은 자리일수록 심리적 박탈감과 공허감이 커지면서 심한 불안을 느낀다. 흔히 ‘명함이 나를 규정하는 삶을 살았던’ 분들이 그렇다. 교사나 직업 군인, 특히 ‘스타’를 달았던 분들이 경험하는 우울감이 크다.

학교와 군대라는 틀 안에서 10~15년을 의전 받고 살던 분들이 갑자기 계급장을 떼고 ‘동네 아저씨’가 됐을 때 경험하는 상실감과 우울감으로 굉장히 힘들어하는 분이 많다. 그래서 더 고립되기도 하고, 나가던 모임에 안 나가신다. 더 적극적으로 다른 관계를 만들고, 자기가 더 재미있는 것들을 찾는 게 좋다.

노부모와의 이별도 불안 요소인데.   
노부모의 노쇠와 죽음은 이성적으로 이해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근데 예를 들면 중증 치매를 앓으시거나 요양원에 계시거나 그 과정이 끝나지 않고 괴로울 땐 마음 한구석에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 게 사람이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강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럴 때 말씀드리고 싶은 건 그건 ‘정상 심리’라는 점이다.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것, 후회하거나 미련을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 좋은 기억을 많이 남기는 것, 꼭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후회나 미련을 줄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사진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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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모는 또래의 죽음에서 오는 불안도 클 듯하다.
노인들은 친구가 한두 명씩 먼저 세상을 떠나고 나면 현실적으로 심리적인 타격이 있지만, 만날 사람이 없어진다는 게 큰 문제다. 내 생활 반경이 점점 좁아지면서 상당히 위축된다. 함께 활동할 사람이 없어지는 게 실제로 굉장히 힘든 부분들이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가 어렵다. 그런 부분을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도와드릴 필요가 있다. 가능하면 다른 관계를 맺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좋다.
이런 불안 속에서 행복이란 감정을 찾는 게 어려워 보인다.  
행복이란 건 심리적으로 매우 복잡한 얘기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평소보다 꽤 강하고 긍정적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고 하면 짜릿하다, 행복하다고 느낀다.
둘째, 전체적으로 평온함을 느끼며 ‘별다른 위해가 될 만한 게 없다’고 여기는 상태다. 흔히 웰빙(well-being)이라고 말하는 상황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로 우리는 평소보다 강한 긍정적 감정이 빨리, 더 많이 오기를 바라지만 수많은 연구에서 말하는 건 첫째, 그런 감정은 금방 평상심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나쁜 일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가 나도 1년이 지나면 원래 있던 감정의 중간값으로 오게 된다. 둘째로 우린 강한 긍정적 감정이 점점 더 커지길 바라지만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강한 행복을 바라기보다 조금 덜 강한 긍정적 감정을 자주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현실적으로 행복해지는 길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다. 

그래픽 최수아 인턴

그래픽 최수아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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