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단순한 정신적 사랑이 아냐"


by 김동규

람들 사이에서 “나는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라는 표현은 사랑의 수사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표현입니다.
한 사람만을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만일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곳에서도 그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수사법이죠. 자신의 사랑의 크기를 최대로 확장해 보이는 어법입니다.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갈구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영원한 사랑을 보장받고 싶어하죠. 때문에 그 수사법이 한갓 과장된 수사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일까요?

서양의 사랑담론의 최고(最高이자 最古)는 플라톤의 사랑론입니다.
플라토닉 러브를 단순히 육체적
섹스에 대비되는 정신적 사랑으로 오해하지 않는 한,
서양의 수많은 사랑담론은 플라톤 사랑담론의 다양한 변주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지금까지의 철학을 니체는 ‘플라톤주의’라고 규정하고,
화이트헤드는 ‘플라톤 철학의 각주’일 뿐이라고 규정하였듯이 말이죠. 서양인들은 인간의 영원한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플라톤이 마련해 놓은 담론의 틀에서 새롭게 반복해서 이야기합니다.
영화 『헤드윅』을 보면,
지금까지도 플라톤의 사랑론이 유효함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플라토닉 러브의 요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플라톤은 청춘 남녀의 달콤한 사랑,
거친 육체적 욕망에서부터 예술과 철학의 원동력인 고상한 사랑을 망라하여 다루고 있습니다만,
그 모두를 관통하는 사랑의 본질을 요약해서 말하자면,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한 사랑,
곧 불멸에의 욕망이라 규정합니다.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거의 매번 대화를 이끌고 결론을 짓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사랑담론을 펼치고 있는 『향연』에서는 예외적으로 주인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의 문제에 대해서는 문외한(門外漢)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를 대신하여 여사제 ‘디오티마’가 플라톤의 생각을 대변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적어도 플라톤의 이런 인물 설정을 고려한다면,
그는 '사랑의 여성성'을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단순히 인물 배역 설정의 수준에 머무르고 말죠. 여성인 디오티마는 남성의 목소리,
즉 플라톤의 대변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 옥타비오 파즈의 지적처럼,
플라톤의 사랑의 향연에는 오직 남자만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사랑은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욕망은 충족되지 못한 ‘결핍’을 전제합니다.
무엇인가로 존재하지만,
결핍된 채 있는 것에서 욕망이 발생하죠. 달리 말하자면,
욕망은 ‘풍요와 빈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여기에서는 에로스가 양극단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에로스는 풍요와 빈곤 사이에서 양 극단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로스는 풍요와 빈곤의 극단,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죠. 디오티마의 신화적 설명에 따르자면,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풍요의 남신,
포로스가 술에 취해 골아 떨어져 있을 때 빈곤의 여신,
페니아에 의해 동침이 이루어지고 이 둘 사이에서 에로스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출생 배경을 가진 에로스는 풍요와 빈곤,
존재와 비존재,
선과 악,
미와 추,
앎과 무지 등등의 ‘사이’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풍요,
존재,
선,
미,
앎 등등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 이 연재 글들은 제 책 <멜랑콜리 미학>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수정 보완했습니다.
긴 호흡으로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을 성찰하고픈 분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사랑은 사이에 있다 

랑은 이항대립의 구조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이항대립의 ‘사이’에서만 사랑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은 사이의 존재가 자신의 ‘결핍’을 메워가려는 욕망입니다.

욕망은 철저한 풍요나 철저한 가난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부자는 더 이상 얻을 대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욕망도 불가능하죠.

물론 실제 세계에서 이런 부자(富者)는 존재하지 않으며,
실재 세계의 대부분의 부자는 보통 사람 보다 더 큰 욕망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습니다.
욕망 자체도 잃어버렸기 때문이죠. 물론 실재 세계에서 이런 빈자(貧者)는 존재하지 않으며,
대개의 빈자는 부자이기를 욕망합니다.
여기에서 실재 세계라 부르는 세계가 곧 에로스가 거주하는 곳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죠.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위상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신은 철학 하지 않습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은 철학,
곧 ‘지혜에 대한 욕망’을 느낄 필요도 이유도 없죠. 신의 입장에서 철학은 유한성의 표식일 뿐입니다.
신은 유한하지 않고,
유한할 수 없습니다.
“신은 철학 할 수 없다"라는 말은 무력(無力)의 언술이 아니라,
무력할 수 없다는 필연성의 언술입니다.
반면 앎이 전무한 자도 철학 하지 않습니다.
철학이란 '알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 물음 던지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일말의 앎도 없는 자는 철학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물음을 던질 수 없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아는 자만이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는 학생은 대개의 경우 수업내용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수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자각이 있는 학생만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알고자 하는 욕망은 철저한 무지와 완전한 앎 ‘사이’에서만 일어납니다.

이런 에로스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인간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앎과 무지,
존재와 무 등등의 이원성 ‘사이’에서 살고 있는 존재자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미추,
선악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 사이에서 사랑의 힘으로 운동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죠.

이런 이항대립의 구조 ‘사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언어는 언제나 선험적으로 은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완벽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무지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이며,
무엇인가를 중얼거리지만 선명하게 분절화시킬 수 없는 언어입니다.
모든 사랑의 밀어가 그러하듯이,
그들의 언어는 결핍의 언어이며,
그래서 욕망의 언어이자,
결국 유한자의 언어죠.

플라톤에 의하면 욕망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은 지향적이고,
욕망이 지향하는 방향은 한쪽으로 고정되어 있죠. 다시 말해서 사랑은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존재와 무 등의 이원성 ‘사이’에서 운동하고,
운동은 언제나 추에서 미로,
악에서 선으로,
무에서 존재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그 반대 방향으로 욕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아름다움과 좋음 그리고 존재를 추구하고 추와 악 그리고 무를 피하려 하는 것은 플라톤에게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사랑운동의 도식은 수평적 도식(왼쪽/오른쪽)에서 말하기보다는 수직적 도식(위/아래)으로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사랑은 수직 상승 운동입니다.
그에 따르면,
사랑에 빠진 어느 누구도 아래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아름답고 선한 진리의 세계,
천상의 세계로 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느 누구도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싶어 하지,
결코 추해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설령 다를지라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함을 피하려는 욕망의 법칙은 불변합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어떤 근거에서 이 불변의 원칙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요?
플라톤의 사랑이 수직 상승 운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사랑은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 보아야 합니다.

불멸에의 욕망

오티마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뿌리 깊고 가장 큰 욕망,
곧 에로스는 불멸에의 욕망입니다.
이항구조에서 왼편에 제시된 것들,
즉 아름다움,
선,
존재 등등은 모두 신적이고 불멸하는 것들이죠. 그리고 에로스는 그런 불멸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또한 플라톤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욕망들,
예컨대 식욕,
성욕,
명예욕,
권력욕,
과시욕 등등의 모든 욕망들 이면에는 불멸의 욕망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인간은 죽지 않으려고 먹고,
자신의 유전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섹스하고,
이름이라도 남기려고 갖은 애를 쓰고,
타인으로부터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극단적으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또는 타인을 지배함으로써 자기존재를 입증하기위해 권력을 탐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인간의 모든 욕망은 죽지 않으려는 욕망으로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죠. 불멸을 향한 에로스,
그것은 죽지 않는 불멸의 신이 되고자하는 욕망입니다.

디오티마에 따르면,
에로스 그 자신은 신이 아닙니다.
다만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할 뿐이죠. 그래서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신도 인간도 아닌 그 ‘사이’존재,
반신(半神),
정령(Daimon)이라고 말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지 않으려는 욕망을 가졌습니다.
살아있는 다른 모든 것들도 이와 유사한 욕망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욕망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직시할 수 인간만이 이런 대처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필멸의 인간이 불멸의 욕망을 성취할 수 있을까요?
이 어려운 물음에 디오티마의 대답은 예상외로 간명하고 분명합니다.
불멸의 신이 되고자 하는 에로스,
그 신적인 욕망 행위와 그 결과가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에게 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에로스,
곧 사랑입니다.

여전히 의구심이 남죠?
계속 디오티마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에로스 행위의 일차적인 의미는
섹스(sex)입니다.
사랑은
섹스로 이어지고
섹스를 통해 사랑이 확인됩니다.
2500년 전에 살았던 디오티마가 보기에
섹스는 곧바로 새로운 생명의 잉태와 출산으로 이어집니다.
플라톤이 디오티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잉태와 출산은 오로지 여성의 전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섹스하면 쾌락이 먼저 떠오르지만,
고대인들은
섹스의 근본 의미를 자신과 닮은 새로운 개체의 잉태와 출산에 두었습니다.
하나의 개체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섹스를 통해 자식을 낳음으로써 인간은 간접적으로 죽지 않을 수 있죠. 육체적
섹스를 통한 유전자 복제이자,
서로 다른 유전자의 창조적인 복합,
이 방법을 통해 인간은 불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플라톤을 대변하는 디오티마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섹스에는 육체의
섹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섹스도 있습니다.
영혼의
섹스 역시 일종의
섹스이기 때문에 새로운 영혼의 잉태와 출산 과정을 반복합니다.
이것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만나 어떤 영감을 받고 새로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며,
그 가운데 어떤 새로운 산물을 창작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지적 충격과 자극을 통해 새로운 예술작품이나 철학을 창작하는 과정이기도 하죠. 마치 남자의 성기에서 나온 정액이 여자의 자궁 속의 난자와 만나 또 다른 개체로 성장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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