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장광석티브이(TV)를
켠다.
드라마고 예능이고 출연자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유튜브를 켠다.
더 노골적으로 ‘술방'을 표방하며 부어라 마셔라 한다.
재미있다.
서점에 가도 각종 술을 예찬하는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기 있는 연예인,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이돌도 주류 광고 모델을 맡는다.
심지어 정치인도 술을 소통 도구로 활용한다.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술과 함께하는 콘텐츠가 범람한다.
한국처럼 전 국민에게 음주를 장려하는 나라는 드물다.
“와인 한 잔은 심혈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과거 연구가 뒤집힌 지 오래지만,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알코올성 간질환,
암 등 여러 장기에 각종 질환을 유발하지만 누구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마련이다.
다른 나라였다면 진작 문제가 됐을 주취 행동도 웃음거리나 무용담으로 소비된다.
술에 관대한 문화이기 때문에 본인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인식도 희미하다.
게다가 사회적 편견은 알코올중독을 개인의 나약함,
도덕적 결함과 쉽게 결부한다.
인정하고 치료받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술 권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알코올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온전히 개인의 탓이기만 할까?
‘여성은 꽃’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름답다.
얌전하다.
사랑받는다.
여성이 ‘꽃’에 비유돼 아름다운 장식물로 여겨진 이래,
그리고 사람들이 여성을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이후,
수많은 용감하고 위대한 여성들이 꽃의 비유에 맞서고,
반박하고,
비틀어왔다.
seri글/비완 그림의 <그녀의 심청>은 그중에서도 예로부터 이어진 ‘꽃 프레임’에 독창적 해석을 덧붙여 그것을 정확히 꼬집고 부숴냈다.
<그녀의 심청>은
<심청전>을 각색한 작품으로,
심청을 수양딸로 삼으려 했다던 장승상 댁 부인과 심청의 관계를 재해석했다.
이야기에서 장승상 부인은 비싼 값에 나이 많은 장승상의 후처로 팔려간 규수다.
가세가 기울어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한 부인의 집안에서는 강에서 금자라를 낚아다 승상에게 바친다.
그런데 이 금자라는 사실 용왕의 아들로,
자라를 고아 먹은 승상은 앓아눕고 분노한 용왕은 인당수에 더는 배가 뜨지 못하도록 한다.
이야기가 왜곡돼 마을에는 여우로 둔갑한 부인 탓에 승상이 자리보전하고 인당수
물길이 막혔다는 소문이 돈다.
이에 사람들은 제물로 바칠 처녀를 구하고,
심청이 제물로 바쳐진다.
부인은 처음엔 심청을 꾀어 자기 대신 제물로 바칠 요량으로 심청에게 접근한다.
그러나 심청과 함께 지내면서 그간 강요받아온 예의범절과 ‘사랑받기 위한’ 태도를 꾸며내는 삶과는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된다.
비록 비렁뱅이 신세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심청이지만 그는 부인과 달리 자유롭고 솔직하다.
한편 심청 역시 패물이나 음식 등을 얻을 속셈으로 부인 곁에 있는다.
그러나 자기를 다정하게
대하는 부인이 점점 더 소중해지고,
그를 통해 처음 ‘갖고 싶은 게 생기고,
지키고 싶은 게 생기는’ 것을 경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해지는,
서로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는 그들의 이야기는 ‘쌍방 구원 서사’다.
심청과 부인이 서로를 구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그러나 동성애가 자유롭지 않고,
동성끼리 있으면 ‘이상한 소문’이 나는 작중의 시대관에서는 그것이 하나의 금기를 깨는 사건이다.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그리고 그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은 사회적 편견의 허들이 얼마나 높은지 알게 되고,
동시에 넘고자 마음먹는다면 넘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터부시하는,
그러나 분명한 사랑의 감정은 이 만화에서 결국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는 동력이 된다.
방에 갇히고,
살해 위협을 받고,
배가 뒤집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서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서로다.
이 만화에 나오는 다양한 여성상 중 신스틸러는 단연코 뺑덕어멈이다.
<심청전> 원전에서 뺑덕어멈은 심봉사의 재물을 훔쳐 달아난 부덕한
여성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의 심청>에서는 눈먼 아버지를 모시며 비렁뱅이로 살아가는 심청에게 씻는 법을 가르쳐주는 등 심청을 어릴 때부터 돌봐준 사람이다.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심청이나 자신에게 틀을 강요하고 성추행하는 사람들을 곧바로 응징한다.
이 인물의 특히 매력적인 점은 ‘아픈 아들을 키우는 어머니’의 역할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뺑덕어멈에게는 전신 화상을 입은 어린 아들이 있다.
홀몸으로 아들을 키우지만 그는 방 안에 갇혀 주저앉아 울지도,
아들을 부양하느라 바깥 걸음을
삼가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아들을 사랑하고 돌보지만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많은 여성이 예로부터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벽의 꽃으로 치부됐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심청전>에서도,
그리고 여성,
주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야기가 지워진 숱한 동화와 고전의 틈마다 그들이 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겁이 많은 동시에 용감했고,
강렬하게 증오하고 열렬하게 사랑했던 그들의 이야기를.신채윤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웹툰 소사이어티: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는 20대의 작가가 인생의 절반을 봐온 웹툰의 ‘심쿵’ 장면을 추천합니다.
3주마다 연재
한겨레21 han21@hani.co.kr
내가 알코올중독이라고? 술꾼,주당,애주가 아닌데…
‘이렇게 마시다간 나를 죽일 수 있겠어’ 싶다가 ‘나 정도면 괜찮은데’ 갈등하다 ‘전혀 괜찮지 않다’ 받아들인 알코올사용장애 환자의 고백
등록2024-01-18 22:14수정2024-01-22 11:40
익명의 30대 알코올중독자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힘들다.
눈을 감으니 오히려 더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과음한 다음날이 으레 그렇듯 오전 내내 숙취에 골골거렸다.
점심시간에 밥 대신 뜨끈한 바닥에 휴식을 청하며 누웠다.
연말 술자리였다.
불현듯 전날 밤 귀갓길이 기억났다.
저녁부터 내린 눈은 자정 무렵까지
내렸다.
길 위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만취한 나는 휘청이는 몸으로 골목에 주차된 전동킥보드를 타려고 시도했다.
다행히 실패해서 걸어왔지만 뒷골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마시다간 내가 나를 죽일 수 있겠어.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몰라.’ 처음 든 생각은 아니었다.
3개월 전 가을 주말 아침에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알코올 클리닉’ 찾아도 원하는 결과는 없어
과음 때문에 전날 밤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이 친구는 술자리에 없었다.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대신 친구 집을 찾아가서 잔 것이다.
가족과 사는 친구에게 전화해 “너희 집에 놀러 가도 되느냐고 물어본 뒤 “와도 된다는 말에 그대로 갔다.
다음날 친구는 “마침 어제 집이 비어 있었고,
너희 부모님이 이 꼴을 보느니 우리 집에서 재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 집에 셀 수 없이 놀러 갔지만 이렇게까지 충동적으로 신세를 진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맨정신으로는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다시 만취한다면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또 킥보드를 타려 한다거나 걷기 힘들다며 벤치에 주저앉아 잠들 수도 있었다.
운이 나쁘면 범죄 표적이 될 수도,
요즘 같은 겨울엔 동사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생의 최후를 맞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절주하는 법’ ‘알코올 클리닉’ ‘보건소 알코올 치료 프로그램’ 등을 검색했다.
원하는 결과를 찾기 어려웠다.
공공기관에서 만든 절주 실천 수칙은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술자리를 피하고,
남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으며,
원샷하거나 폭탄주를 마시지 않고,
음주 뒤
3일 동안은 술을 마시지 말라.’ 이전부터 내 생활 패턴이 이랬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마땅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중증 중독 환자들이 입원치료를 받는 병원이거나 음주운전·주취폭력으로 형사재판을 받는 사람에게 양형 자료를 만들어주겠다고 홍보하는 병·의원이 대부분이었다.
보건소 누리집을 탐색하다 ‘알코올사용장애 선별검사 도구’(AUDIT-K)로 자가
진단을 해봤다.
10개 문항에 답하고 총점을 더하는 방식이었다.
결과 화면에는 이렇게 떴다.
“당신의 음주는 매우 위험한 수준으로,
술을 끊거나 줄일 것을 권장합니다.
전문 병·의원,
알코올중독관리통합지원센터,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받도록 합니다.
여성은 9점을 넘으면 알코올사용장애 추정군으로,
내 점수는 10점이다.
나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걱정 반으로…
내가? 왜? 이해하기 어려웠다.
술꾼,
주당,
애주가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20대엔 대학 신입생 때를 제외하면 술을 잘 마시지 않았다.
30대엔 사회생활 차원에서 1~2주일에
한 번씩 술자리에서 맥주 한두 잔을 마시는 정도였다.
집에서 혼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예외가 있긴 했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땐 절제력을 잃곤 했다.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실수했다.
상사 앞에서 회사 욕을 하거나 퇴사 욕구를 서슴없이 드러내는,
사회생활에
도움될 리 만무한 실언을 했다.
밤에 친구나 회사 동료들에게 돌아가면서 전화한 적도 있었다.
친구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날 함께 술을 마셨거나 단지 나와 에스엔에스(SNS)로 연락한 적 있다는 이유로 전화를 받는 사람은 황당할 만했다.
하룻밤 새 많게는 다섯 명에게 전화한
적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머리를 싸매고 후회에 몸부림쳤다.
한동안 절주했지만,
불행히도 스트레스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었다.
2~3개월 뒤면 후회와 다짐은 희미해졌고 다시 과음했다.
지난 2년간의 음주 패턴이었다.
술을 처음 마시는 20대도 아니고,
음주 습관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내가 알코올사용장애라고? 보건소 말고 다른 병원 누리집에 올라온 문항으로도 검사해봤다.
결과는 같았다.
술 많이 마시는 사람은 자기가 문제라는 생각도 없이 퍼마시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권고받은 대로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술 문제와 관련해 도움을 받을 프로그램이 있느냐’고 물었다.
담당자는 내 문제 음주 행동을 들은 뒤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했다.
얼떨떨했다.
안내한 프로그램 중 상담 일정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알코올중독은 진행성 질환이에요.
지금 선생님은 초기 상태인 것 같은데,
여기서 더 진행되면 걷잡을 수 없어요.
술로 인해 선생님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확신받고 싶지 않은 말은 점점 기정사실이 돼갔다.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만난 상담자는 중후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이 남성은 과거에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알코올중독이 심했다고 한다.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은 지 10년이 넘었고,
회복자 상담가 양성과정을 거쳐 알코올사용장애가 있는 사람을 돕는다고 했다.
‘단주’,
술을 조절할 능력이 없어 마시면 안 되는
“병원에 가서 술 문제를 이야기하고 약을 처방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AA·Alcoholics Anonymous) 모임에 참석하면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게 있을 겁니다.
그러면 선생님 마음 안에서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하는 게 더 편할 거예요.
그는 내게 ‘단주’를 권했다.
단주는 절주,
금주와는 다르다.
절주는 술을 조절해 마시는 것,
금주는 건강상의 문제나 중요한 일정 등으로 일정 기간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단주는 본인에게 술을 조절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마시지 않는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뜻한다.
앞으로 살면서 한 잔도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 이제는 사진 속 술이 될 것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무더운 여름날 목을 젖혀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걸쭉한 맛이 일품인데다 배도 부른 막걸리,
머금는 순간 입안에 향긋함이 퍼지는 와인,
톡 쏘는 청량감 넘치는 하이볼 한 잔도
안 된다고? 다른 나라로 여행 갔을 때 식사하면서,
혹은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그 나라 술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다고?
일정 기간 술을 끊었다가 내 주량에 맞춰 규칙을 정하고 도수가 낮은 술을 조금만 마시면 되지 않을까? 체질상 못 마시는 사람이나 크게 아픈 뒤 술을 끊은 사람은 봤지만,
조절할 수 없다는
이유로 술을 안 마시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위에는 없었다.
하지만 상담자의 조언에 따라 찾은 정신과 의사는 “알코올 사용 문제가 있다는 걸 지금까지 몰랐던 게 이상하다고 쐐기를 박았다.
알코올사용장애는 유전적·심리적·환경적 요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내 경우엔 이 모든 요인이 아주 역동적으로 상호작용을 한 것 같았다.
돌아가신 양가
할아버지들은 약주를 무척 좋아하셔서 주변의 걱정을 샀다.
외할아버지의 주사를 보다 못한 외할머니는 ‘술 끊게 해주는 약’을 몰래 먹일 정도였다.
아마 지금은 판매가 중단된 디설피람인 것 같은데,
이 약을 먹고 술을 마시면 두통과 구토를 유발한다.
그들의 후손인 나는 항우울제를 복용하는 등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게다가 직장은 음주에 관대한 한국 사회 안에서도 손에 꼽히게 알코올 친화적이다.
내 점수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낮은 편이었다.
친구나 회사 동료들에게 자가 진단을 해보라고 했을 때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훨씬 더 높은 경우가 많았다.
남녀 모두 20점을 상회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었고,
며칠 전 “필름이 끊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술을 마시고 있었다.
10점인 내게 문제가 있다면 숱한 사람들이 이미 중독 스펙트럼의 중증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의사에게 말했다.
“모르시는군요.
다시 한번 알려드릴까요? 이미 이전에 단주하셨어야 하는 상황이에요.
조곤조곤 말하는 모습이 얄미울 정도였다.
의사는 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냐고 반문했다.
우울증에 이어 알코올사용장애까지 정신질환 2관왕이 된다고 하면 기분이 좋을까요? 아무리 ‘정상은 없다’고 하지만,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 범주를 벗어나는 기분이 좋겠냐고요.
차마 이렇게 대꾸하진 못하고 처방전을 얌전히 받았다.
의사가 처방한 약은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을 줄여준다는 항갈망제였다.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못 받아들인다
의사가 자기 주량과 문제 음주 행동을 과소 추정하는 다른 환자 사례를 많이 겪은 나머지 나도 그런 심각한 환자로 본 게 아닐까? 혼란스러웠다.
진짜 내가 알코올중독 초입에 들어선 것
같기도,
아니면 내가 지나치게 예민한 건강염려증 환자 같기도 했다.
어느 쪽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해서 이도 저도 못하는 마음이 이어졌다.
내 주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축하하거나 위로하는 방식으로 술을 택한 거야? 그리고 왜 내가 만취해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만 해줬냐고!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좋다고 퍼마신
건 본인이면서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도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나눠준 책자는 ‘중독성 사고’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다.
부정·합리화·투사를 핵심으로 하는 ‘인지 왜곡’으로,
중독자에게서
나타나는 사고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중독자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합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인 우울함을 술이나 약물을 통해 마비시키려고 합니다. 알코올중독자가 쓴 에세이의 고전인 캐롤라인 냅의 <드링킹>에선 이를 좀더 우아하게 표현했다.
“술에 빠진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까지는 안전하고,
바로 그다음 자리에 선 사람들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심란했다.
퇴근하고 틈틈이 관련 책이나 중독 전문가들이 나오는 영상을 찾아봤다.
알코올과 같은 중독성 물질은 뇌의 보상회로에 영향을 준다.
오랜 시간에 걸쳐 ‘중독회로’가 한번 만들어지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술을 계속 마시지 않으면 이 중독회로의 스위치를 꺼둘 수 있지만,
단 한 모금이라도 마신다면 스위치가 다시 켜지게 된다.
체내에 들어가는 술의 양이 중요한 게 아니라,
체내에 술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알코올사용장애는 마실수록 중독회로가 강화되는 진행성 질환이다.
애당초 알코올사용장애가 있는 사람은 뇌의 보상회로가 고장 났기에,
이들이 술을 조절해서 마시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절주보다 단주가 더 쉬운 이유다.
그렇지만 중독자들은 절주 가능성에 집착한다.
회복자와 전문가들은 이를 ‘절주 망상’ ‘조절 망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내게 알코올 사용 문제가 있음이 맞는다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나와 내 주변을 파괴할 게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비명횡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조절 능력이 그대로 있는지 아니면 없어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인생을 걸 수 없었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었다.
과한 염려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각종
사건사고 기사를 매일같이 봤다.
단주 24일째
“안녕하세요,
알코올중독자 동작 김입니다.
결국 나는 주말의 어느 날,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고 멀쩡해 보이고 선해 보이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 모임이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주 의지를 다지거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한다.
영미권 영화·드라마에서 흔히 본 장면이라 익숙했지만,
내가 그 당사자가 되리라고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
어쩌겠나. “처음 오신 분을 환영한다.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다고,
옆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따뜻하게 말했다.
단주 24일째. 무알코올 맥주도 그럭저럭 마실 만하다.
탄수화물과 당이 제법 들어가 있지만 아마 알코올 섭취보다는 나을 것이다.
익명의 30대 알코올중독자
“한국은 ‘일하는 알코올중독자’가 많은 나라
이해국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 “다른 정신건강 문제보다 심각하지만,
OECD 국가 중 알코올 정책 최하위
서혜미기자
대부분 남루한 행색의 장노년일 것이다.
제대로 된 직업과 고정 수입처도 없기에 술을 밤낮으로 마신다.
때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주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피해를 끼치고,
혼자 고립된 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의지가 박약해 언제 어디서나 술 냄새를 풍기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다.
미디어가 흔히 재현하는 알코올중독자의 모습이다.
현실은 통념과 거리가 멀다.
전형은 알코올중독자의 극소수만을 설명한다.
이해국 한국중독정신의학회 이사장(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교수)은 “한국은 이른바 ‘일하는 알코올중독자’가 많은 나라라고 말했다.
이들은 번듯한 직장에서 멀쩡하게 일하며 성취를 이뤄낸다.
가정생활도 안정적으로 꾸려나간다.
겉으로 봐선 일상생활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기에 이런 ‘고기능’ ‘고도적응형’ 알코올중독자는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2024년 1월5일,
국내에서 중독 연구 분야의 권위자로 꼽히는 이해국 이사장을가톨릭의대 중독정책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한국처럼 술로 인한 문제에 허용적인 문화를 가진 곳은 다른 나라에 비해 문제 발견 시기가 좀 늦어지는
것뿐,
(이들이) 중독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십여년 만의 고백 “저 술 못 먹어요
일본TV아사히가 윤석열 대통령의 주량을 ‘무한’으로 소개하고 있다.
화면 갈무리“술 시킬까? 최근 대학교 때 술자리를 자주 갖던 후배를 거의 십몇 년 만에 만나서 자연스럽게 물었습니다.
후배는 “저 술 못 먹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아,
요즘 약 먹는 거 있어? 물었더니 “저 원래 술 못 먹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잠깐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후배는
대학 시절 술을 마시고 나면 몸이 너무 힘들었답니다.
다른 사람들도 똑같을 텐데 얼마나 술이 좋으면 이렇게 몸이 괴로운데도 술을 마실까,
생각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한두 잔 마시고,
술을 받아놓거나,
버리기도 하고,
마시는 척했다고 하네요.
그런데 학교 특강으로 온 만화가가 술 못 마시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자신이 겪은 알코올 섭취 뒤의 반응과 똑같았다고 합니다.
후배는 ‘술 못 먹는 몸’을 깨달은 뒤로 술자리에서 술을 못 먹는다 하고 안 마셨다고 합니다.
저는 세상에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있음을 직장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회사에 같이 들어온 경력 선배가 신입환영회 때 술을 마시다가 숨을 가쁘게 쉬더니 방에 드러눕고 말았습니다.
앰뷸런스를 불렀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면접에서 했던 말 때문에 무리해서 마셨다고 합니다.
면접에서 “술 잘 마시지?라고 묻는 게 자연스러웠던 시절이고,
그 선배는 술을 못 마신다는 사실이 합격에 영향을 줄 듯해 “그럼요,
잘 마시죠 대답했다고 합니다.
표지이야기에서 술을 못 마시는 괴로움을 이야기하는 서수빈(가명)씨는
“사람들이 비음주인이 있다는 상상 자체를 못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반드시 술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비음주인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제가 ‘술 권하는 사회’의 한 주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술 권하는 사회’를 표지이야기로 정하고 눈여겨보니 미국 드라마에서는 술 마시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한국계 이민 가족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성난 사람들>에는 한국 술문화에 관한 비판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친척이 축하한다고 술을 들이켜는데,
조카들은 술을 받는 척하면서 안 마십니다.
한국 드라마는 괴로운 일을 겪으면 혼자 포장마차에서 강술을 마시는 게 클리셰입니다.
드라마 <모래에도 꽃이 핀다>에도 술을 먹으면 필름이 끊기는 백두에게 ‘그래도 받으라’며 축하술을 건넵니다.
국가의 의사결정 과정에 술자리가 자주 언급되는 것도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합니다.
대통령은 후보 시절 ‘주량 무한대’라 썼고,
이후에도 외국에서 재계와의 술자리가 보도됐습니다.
대통령은 ‘알코올사용장애
별검사’를 꼭 해보십시오.이번호는 알코올 권하는 사회 비판과 함께, 새해 단식 체험기도 싣습니다.
올해 세운 계획은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나요? 1월 말,
한번 점검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눈이 쏟아지는 날,
영은님에게서 꽃과 케이크를 받았습니다.
모두들 모여서 누굴까,
궁금해하며 편지를 돌려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매년 <한겨레21> 명절마다 찾아오던 퀴즈큰잔치이지만,
이번 설 퀴즈큰잔치는 30주년 기념호로 미룹니다.
미리 알려드립니다.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눈이 쏟아지는 날 도착한 독자 ‘영은’님의 선물. 류우종 기자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새해맞이 단식 2주 해보니…눈이 밥알처럼 내리는구나
‘공복친구들’ 108명과 함께 새해 단식 프로그램 참여… ‘간식 천국’ <한겨레21>이 ‘음식 지옥’,
2년 전과 달리 이번엔 지방이 빠져
<한겨레21>은 간식 천국,
김밥 나라였다.
마감날이 되면 동료들은 단체로 사온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면서 우다다다 자판을 두드렸다.
오후가 되어 배가 꺼지면 피자,
치킨,
떡볶이 따위를 주문했다.
2024년 새해가 밝자마자 더욱 확실히 알게 됐다.
<21>의
마감 지옥은 곧 음식 지옥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이 단식 체험기는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21>에서 일하며 2주간 고통받은 어느 중년 노동자의 기록이 됐다.
2년 전,
새해를 맞아 단식 체험기를 신문에 썼다.
(‘새해,
단식을 해봤다… 체지방률이 늘었다’ 참조) 홀로 2주간 단식한 끝에 체중은 3㎏ 빠졌고 복부 둘레는 5㎝ 줄었다.
단식 뒤 인바디 측정 결과는 별로였다.
1㎏ 넘게 근손실이 있었고,
체지방량은 그대로,
체지방률은 1.7% 증가했다.
단식 전엔 ‘경도비만’이었지만 단식 후엔 ‘비만’으로 나타났다.
단식을 반대하던 의사들은 그것 보라는 듯 운동 처방을 내렸다.
단식 체험기가 신문에 나가자마자 이번엔 독자들이 와글와글했다.
단식을 제대로 하지 않아 결과가 나쁘게 나온 거라고 나무랐다.
한국에 단식 지지자가 이렇게 많았나?
2023년 말이 되자 다시금 주체할 수 없이 살이 쪘다.
갱년기 여성의 체중 증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돈과 시간 그리고 의지력 정도 아닐까. 돈과 시간이 없다면 기댈 곳은 오로지 의지력뿐이다.
부랴부랴 단식을 결정했다.
편집장은 체험기를 쓰라고 했다.
전단식: 마음이 널뛰다
2023년 12월 말,
무려 108명이 참여하는 단식 단체대화방에 들어갔다.
이름하여 ‘공복친구들’. 도심 속 생태공동체 ‘전환마을은평’에서 10년째 하는 새해 단식 프로그램이다.
음식을 줄여가는 ‘전단식’(준비 단식) 3일,
생수와 효소물만 먹는 ‘본단식’ 3일 반,
음식량을
늘려가는 ‘후단식’(보식) 7일을 포함해 꼬박 2주 일정이다.
1인당 2만원의 참가비를 내는데,
필요한 곳에 전액 기부한다.
(이번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해 쓰였다.)
단식을 안내하는 ‘소란’ 유희정(농부·전환마을은평 대표)씨가화상회의 플랫폼‘줌’으로 사전설명회를 열어 단식의 개념과 효과를
설명했다.
단식은 음식물을 끊어 장기를 쉬게 하고 몸의 독소를 빼내며 지방을 연소시키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공복친구들’은 단식 전날까지 원없이 먹어두려는 것 같았다.
나도 1월1일 떡국을 잔뜩 끓여 먹었고 6년 만에 최대 몸무게를 찍었다.
1월2일,
대망의 감식 첫날부터 모진 시험에 들었다.
오찬을 겸한 부서 신년회. 도시락으로 된장국과 현미밥 5분의 3 공기를 가져갔는데 눈앞에 홍어삼합,
달걀찜,
골뱅이숙회,
산낙지,
꼬막비빔밥 등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잘 참았지만 마지막 유혹은 너무도 강렬했다.
동료들이 식사 마무리로 해물라면을 시킨 것이다.
막걸리잔에 맹물을 가득 담아 꼴깍꼴깍 삼켰다.
오후부터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다.
‘브레인포그’였다.
감식 이틀째. 죽을 먹었다.
죽을 맛이었다.
소란은 “전체 단식 과정 중 오늘,
내일이 제일 힘들다고 말했다.
눈이 뻑뻑하고 힘이 없으며 두통이 시작됐고 우울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 분노가 솟구쳤지만 힘이 없어 화내지는 못했다.
동료들은 온종일 먹는
이야기를 했다.
“마라탕,
마들렌,
꿔바로우 등을 먹자고 했다.
감식 사흘째. 미음을 먹었다.
아니,
마셨다.
혀에 어마어마한 백태가 끼었다.
출판 담당이라 신간을 검토하는데 음식책이 눈에 띄었다.
편집장은 치킨을 시켰다.
평소 채식 위주로 먹기 때문에 치킨 냄새에도 꽤 초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식 중엔 다르네?
온몸이 아우성쳤다.
단톡방에 들어가 ‘공복친구들’에게 힘을 달라고 호소했다.
친구들은 어김없이 ‘파이팅!’을 외쳐줬다.
치킨을 뜯던 동료들은 마감 뒤에 맥주를 마시러 가자고 해맑게 제안했고,
누군가 또 아이스크림을 사왔다.
이 정도면 직장 내 괴롭힘 아닌가!
본단식: 단식의 이론과 경험
종교적 단식을 할 때 어떤 사람들은 영적 고양감을 맛본다.
과학적으로는 ‘케톤’에 비밀이 있다.
케톤은 분해된 지방조직이 전환되는 물질로서 뇌,
근육,
간 등에서 포도당을 대체하는 원료가 된다.
탄수화물을 끊어 뇌의 주연료가 케톤으로 바뀌면 정서적 불안정이 사라지고
생각이 또렷해진다고 한다.
캐나다 신장 전문의 제이슨 펑은 <독소를 비우는 몸>에서 비만의 원인으로 과도한 인슐린 분비를 꼽았다.
이를 보면,
단식은 인슐린 분비를 낮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는 단식으로 체중 감소,
2형 당뇨병 개선,
체력 증강,
노화 지연,
심장 건강 향상
등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단식 중에 당이 떨어져 손발이 떨리고 땀이 난다고 미리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실제 이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며.
하지만 내겐 그런 일이 벌어졌다.
2년 전 단식 때 몸이 벌벌 떨리는 저혈당 증세를 보였지만,
단식을 지지하는 전문가들은 몸이 과민하게 반응하는 ‘가짜 저혈당’이라고 했다.
과연 그런지 이번엔 혈당측정기를 2주간 팔뚝에 부착해 측정했다.
본단식 전날,
출근해서 일하는데
진땀이 나서 재보니 혈당측정앱에 새빨간 경고등이 들어왔다.
67㎎/dL(데시리터당밀리그램). 대한당뇨학회 자료를 보면,
혈당이 70㎎/dL 이하일 때 증상 발생 여부와 관계없이 즉시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서둘러 효소물을 마셨다.
30분 뒤 혈당은 94㎎/dL로 회복됐다.
그 뒤에도 이따금 혈당에 빨간불이 켜졌다.
단식 때 수시로 효소물을 마시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조치인 듯했다.
한국에서 건강단식 시작은 1980년대 일본의 니시 가쓰조(1884~1959)가 창안한 대체의학이 소개되면서다.
20~30년 전 새해를 맞아 엄격하게 실시하던 영성단식은 열악한 환경에서 인내로써 견뎌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된장차와 효소 등을 패키지로 한 상품을
판매하는 기업이 생겼고,
시민단체가 건강증진을 위한 단식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단식인은 꼬불꼬불한 대장 사이에 낀 ‘숙변’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양의나 한의나 주류 의학에서는 숙변이라는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 또한 여러 차례의 단식 동안 숙변이 쏟아지는 것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
단식 때는 매일 제산제인 마그밀을 먹으면서 장을
비우는데,
여러 사람이 “(마그밀을 먹는 동안) 방귀를 뀌면 절대 안 된다,
지린다고 경고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어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번엔 달랐다.
회의하다가 배가 아파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엄청난 악취와 함께 묽은 변이 쏟아졌다.
전날 장을 완전히 비웠다고 생각했기에,
이번에 쏟아진 찌꺼기는 숙변이라 할 도리밖에 없었다.
향수를 뿌리고 회의실에 다시 들어갔지만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단식 때마다 몸의 느낌이 달라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고,
‘공복친구들’도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다.
후단식: 단순한 생활로 돌아가다
드디어 후단식 첫날. 단톡방에서는 몸의 안 좋은 곳이 개선되고 효과를 봤다는 ‘간증’이 이어졌다.
반면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도 비슷하게 올라왔다.
눈이 펄펄 내리는 날,
‘공복친구들’은 “눈이 밥알처럼 내린다고 말했다.
2022년 단식 일기에는 만둣가게 ‘편의방’에서 만든 생선만두를 먹고 싶다고 썼다.
그러나 이제는 단식이 끝나도 그 만두를 먹을 수 없다.
만두가게 주인은 주재료인 삼치를 구하기가 힘들고 설사 생선을 구하더라도 너무 비싸 만두를 빚을 수 없다고 했다.
기후위기 탓일 것이다.
새해 단식은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고민을 함께 던졌다.
‘공복친구들’은 단식 기간에 돈을 쓰지 않는 소비 단식과 무탄소배출을 위해 노력했고 머리카락과 몸에도 세제를 거의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식 기간에 고요하고 편안한 생활을 했으며 식생활을 돌아봤다고 말했다.
미음,
묽은 죽,
된죽,
밥으로 점점 식단을 바꿔가며 보식이 끝났다.
단식 초기에 찾았던 보건소를 2주 만에 다시 방문해 인바디 검사를 했다.
측정 결과 체중은 총 3.2㎏ 줄었다.
2년 전엔 체지방률이 늘었지만 이번엔 체지방률이 33.7%에서 32.3%로 줄었다.
체지방량은
19.2㎏에서 17.7㎏으로 1.5㎏줄었다.
다만 골격근량도 20.1㎏에서 19.7㎏으로 0.4㎏ 함께 줄었다.
그래도 이만하면 근손실만 있었던 2년 전보다 성공적인 결과다.
단식 뒤 나흘간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었지만 채소 위주로 먹어선지 체중은 요요 현상 없이 유지되고 있다.
내 몸을 끝없이 돌보고 변화시킨다는 것은 어쩌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언명령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1년에 한두 번,
전환의 삶을 고민하는 계기를 만드는
일은 중요한 것 같다.
이제 날이 풀리면 달리기를 해봐야겠다.
못 먹어도 고(go),
아니,
이제는 먹으면서 고다!
이유진 선임기자frog@hani.co.kr
“단식으로 시작하는 지속 가능한 삶전환마을은평 유희정 대표
유희정(대화명 소란) 전환마을은평 대표는 10년 전부터 ‘공복친구들’과 함께하는 새해 단식을 이끌어왔다.
처음엔 15명 정도 참여한 단체대화방이었지만 이제는 매년 10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모여 함께 새해맞이 단식을 한다.
소란은 노동운동,
여성운동을 하다가 성폭력 가해자 상담도 했다.
그사이 심신이 지쳐 생태공동체인 영국 남서부 토트네스 마을로 떠났다.
기후변화 위기 앞에 재앙을 막아보자는 생활운동인 ‘전환마을운동’을 펼치는 곳이었다.
귀국 뒤 소란은 서울 은평구에서 친구들과 텃밭을
일구고,
밥상을 차리고,
풀을 뜯어 효소를 담갔다.
자립적 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고민하는 ‘퍼머컬처’ 운동과 생태철학을 바탕으로 한 전환운동을 벌였다.
“공동체에서 매년 농사지으니 풀을 뜯어 효소를 만들고,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2024년 모인 ‘공복친구들’ 108명도 대부분 전국에서 농사 기반으로 활동하는 분들이에요.
유기농 먹거리를 공급하는 농부,
활동가,
반농부 학자도
많고요.
소란은 농사짓는 한편 허브와 약초의 약효를 연구하는 ‘허벌리스트’가 됐다.
흔한 풀이 가진 약효를 익히고,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공부했다.
2주 동안 단톡방에 쉼없이 올라오는 질문 하나하나에 소란은 성실히 답했다.
짜증이 날 법한데도 유머를 섞어 위로하고 안내하는
자애로운 단식 선생이었다.
“이 시기에 마음공부 한번 한다고 생각해요.
하하. 너무 단식을 신성시하며 압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보다 느슨하게 하는 공동체 단식은 일상에서 몸의 감각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지요.
아기 돌보듯 자기 몸을 돌보고 살펴보는 2주간의 새해 단식을 통해 한 해 동안
살아가는 힘을 얻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