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욕하는 거 들으면 그 사람한테 전달하지 마.
너희들 사이에서는 다 말해주는 게 우정일지 몰라도 어른들은 안 그래.
괜히 말해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널 피해.
내가 상처받은 걸 아는 사람 불편해,
보기 싫어.
아무도 모르면 돼,
그러면 아무 일도 아니야.
”많은 사람의 인생 드라마가 된 <나의 아저씨>에서 이제는 고인이 된 이선균이 연기한 박동훈의 대사이다.
연말에 갑작스럽게 날아든 이선균의 사망 소식으로 한동안 우울했다.
내가 좋아했던 연기자 한 명을
잃어버렸다는 슬픔에 더해 왠지 모를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그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우리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모르면 아무 일도 아닌데 모든 걸 알고 싶어하는 관음증에 걸린 우리 사회의 위선이 그를 죽게 만든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혹시 ‘위선 공화국’이 아닌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총선을 목적에 두고 터진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도덕적 민낯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치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마약 혐의 수사를 받던 한 인기 연기인이 왜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함의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아도 분명해 보인다.
강압 수사를 진행한 적이 없고 모든 것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적법하게 수사해왔다는 경찰의 발표에도 석연치 않은 점은 바로 ‘공개성’ 때문이다.
혐의 사실이 확실하지 않음에도 이름과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사건 관계인을 미리 약속된 시간에 맞춰 포토라인에 세우는 공개 소환 방식은 당사자를 사회적으로 발가벗긴다.
비공개로 소환했다가 그 장면이 폭로되면 오히려 피의자에게 손해라고 생각하여 비공개 소환 요청을
거부했다는 경찰의 답변은 궤변에 가까운 위선이다.
겉으로는 피의자의 인권을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피의자의 권리와 인격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선하거나 도덕적인 체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한다.
겉과 속이 다른 것도 위선이고, 자신의 실제 동기가 아닌 다른 동기에 의해 행동한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도 위선이다.
경찰의 실제 목적은 우리 사회의 긴박한 문제로 떠오른 마약 사범을 수사하고 검거하여 해당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다.
마약 혐의가 있는 유명한 인기
연예인을 전시하듯이 대중에 공개하는 보여주기 수사가 마약과의 전쟁에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는가? 마약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적인 대화와 유족이 공개를 원하지 않는 유언장조차 국민의 알권리라는 이름으로 샅샅이 보도하는 공영방송의 행태는 도덕적 위선의 극치이다.
과도한 도덕적 요구의 부메랑
위선의 핵심은 이미지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을 가상 또는 이미지라고 한다.
남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여 비난하고 결국에는 남의 인생을 난도질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위선의 전형이다.
우리는 물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지 못한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믿고 그것이 도덕적이라고 확신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약속을 저버리고 거짓말도 한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이미지를 열심히 추구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원하는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집요하게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한다면, 결국 그에게는 다른 존재가 되는 일은 어려워진다.
”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일관성 없이 겉으로만 도덕적이고 선한 사람인 척 행동한다면, 그의
이미지는 종종 남을 기만한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가상이 실제의 모습보다 더 중요한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 문제의 핵심을 포착한 마키아벨리는 “대중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데, 많은 경우에 그들은 실재보다도 이미지에 더욱 좌우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이미지를 자기 마음대로 재단함으로써 자신의 선한 이미지를 내세운 것은 위선이다.
내가 우리 사회를 ‘위선 공화국’이라고 자조적으로 부른 것은 우리 사회 전체가 부도덕하면서도 마치 도덕적인 것처럼 행세하는
이중성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해야 마치 자신이 비난할 만한 도덕적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행위, 자신이 선한 것처럼 내보이고 싶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의 실수와 흠결에 관대할 터인데 모든 일에 각박한 태도, ‘내로남불’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하면서 남에게는 모질기 짝이 없는 자기중심주의는 모두 위선이 무성하게 자랄 훌륭한 밑거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민낯을 직시해야 한다.
수세기에 걸쳐 우리의 삶을 주조했던 유교의 도덕적 토대는
이미 붕괴한 지 오래인데, 우리는 여전히 유교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공인의 도덕적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우리가 도덕적이라는 착각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왜곡 현상은 공인이라는 개념에도 적용된다.
공인은 본래 공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이제 공인은 그 이미지가 널리 알려진 공개된 인물을 가리킨다.
공적인 일이란 ‘모든 사람의 삶과 관련된 활동’으로서 이러한 업무를 담당하는 공직자와 성직자, 그리고 정치인이 대표적인 공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미지의 강도가 공인을
결정한다.
연예나 스포츠 분야 따위에서 인지도가 높은 셀럽도 공인으로 여겨진다.
대중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는 유명 인사는 대중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포츠인이 운동만 잘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으로 선한 스포츠인이어야 한다.
배우가 연기만 잘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으로 선한 연기인이어야 한다.
그 이름과 이미지가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면 모두 도덕적이어야 한다.
도덕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해야
그들은 모두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의 도그마에 부합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해야 한다.
혹여나 어릴 적 실수가 드러나면 이미지가 심각하게 훼손되거나 영영 매장될 수도 있는 까닭에 이미지 관리는 평생 이뤄져야 한다.
개인이 숨 쉴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 철저하게 독단적인 도덕사회이다.
문제는 도덕성에 대한 과도한 요구가 본의 아니게 위선을 낳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추구하는 도덕 자체를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도덕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
겉으로라도 도덕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과도한 요구는 사적인 삶과 공적인 역할 사이의 괴리를 가져오고, 궁극적으로는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다.
왜냐하면 높은 도덕성 기준은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이며, 개인의 이미지와 겉모습이 종종 개인의 진실성을 은폐하는 문화를 조성한다.
위선을 조장하는 것은 바로 과도한 도덕성의 요구이다.
이러한 현상은 무엇보다 정치적 위선에서 나타난다.
정치 영역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이미지를 유지하라는 압력은 정치인의 진정한 동기와 행동을 가리는 가면을
채택하는 결과를 낳는다.
민주주의를 밥 먹듯이 주장하는 사람이 당내의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지 않는 비민주적 태도를 보이고,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정치인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수직적 관계로 세우는 광경을 목도하면, 우리는 ‘정치적 위선’의 역설을 간파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로 실제의 모습을 평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상의 이미지가 자신의 진짜 모습인 것처럼 생각하고 드러내는 자기기만의 위선이 발생한다.
한국 사회의 과도한 도덕적 순수성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위선을 조장하는 사회적 환경을 조성한다.
남의 도덕적 타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결점을 간과함으로써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남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 할수록 자신이 더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는 위선의 역설은 진정한 도덕적 담론을 억압한다.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강렬하게 요구하면서도 무엇이 도덕인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도덕성을 요구하는 위선적인 사회는 은연중에 도덕적 기대를 달성할 수 없다는 냉소주의를 낳을 수 있다.
현대의 다원주의 사회에서 도덕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나만 옳고 도덕적이라는 독단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공동의 도덕을 논할 수 있다.
어쩌면 그 첫걸음은 아무도 몰라도 되는 사적인 일과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하는 공적인 일을 구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치는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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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드라마의 흥행 여부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성공 여부 역시 훌륭한 무대연출에 달려 있다.
최근 우리가 경험한 한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은 2030 세계박람회 유치 실패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취임 후 첫 공개 사과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부산 엑스포 유치에 그만큼 큰 기대를 걸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엑스포에 건 기대는 무엇이었을까? 대통령의 말처럼 대한민국을 서울과 부산의 두 축으로 균형 있게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내년 총선에서 민심을 유리하게 움직이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박람회를 유치하였다면 정체의 덫에 빠진 대한민국에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할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산 엑스포 유치는 참패로 끝났다.
정보·외교력과 전략의 부재 탓일 수도 있고, 최종 프레젠테이션의 보기 민망한 ‘개념 없는’ 영상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감동 없는 드라마 뒤에는 반드시 형편없는 ‘무대연출’이 있다는 점이다.
정치는 연극이다.
특정한 이념과 정책으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
정당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드라마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가 성공하였다면, 국민의힘은 내년 총선에서 이길 수 있는 드라마를 연출하는 데 훨씬 유리한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엑스포 유치 성공이라는 스토리 위에 국민에게 감동을 줄 모든 장면을 사전에 계획하고 밑그림을 그리는 게 얼마나 쉬웠겠는가? 드라마의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모든 이미지와 이야기를 무대 위에 배열하고 조직하는 연출기법을 연극과 영화에서는 ‘미장센’(mise en scene)이라고 한다.
내년 총선의 커다란 정치적 자산이 될 뻔도 했던 미장센 하나가 날아간 것이다.
‘웃픈’ 정치의 막장 드라마 활개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좋은 드라마가 사라진 자리에 ‘막장 드라마’가 독버섯처럼 왕성하게 돋아난다.
불륜, 출생의 비밀, 복수와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사용하여 관심을 끌려고 하지만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억지스러운 내용의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라고 하지 않는가?내년 총선을
앞둔 우리 정치도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자극적이지만 받아들이기 힘들고 결말이 빤해서 새로운 가능성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막장 드라마만 난무할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힘 인요한 혁신위원회는 이미 혁신이라는 낱말이 부끄러울 정도로 김이 샜고, 개딸이 장악한 더불어민주당은 허우적거릴수록 더욱 깊이 팬덤정치의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드라마가 불가능해지고, 웃픈 막장 드라마가 활개를 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서 나오는 유명한
독백처럼 “세상은 모두 무대다”. 우리가 모두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는 무대가 바로 한탄과 분노의 대상이 되는 현실 세계다.
우리가 막장 드라마에 환호하면 세상은 막장이 되고, 우리가 신선하고 산뜻한 좋은 드라마를 원하면 세상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정치는 우리가 말과 행위를 통해 인간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말과 행위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정치 무대에는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참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다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는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고 열린 결말을 보장하는 연극이다.
만약 정치가 한 편의 연극이라면, 우리는 현실을 다루기 위한 대안적 시나리오를 다시 만들어야 하고 이 대안을 정치적 사건이라는 큰 무대에 올려야 한다.
대안이 없다는 것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대안은 우리의 정치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산 엑스포 유치 참패의 여진이 가라앉은 지금 우리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양당이 맞서 진지전을 벌이거나, 수많은 위성 정당이 난립하여 선거판을
어지럽힐 것처럼 보인다.
친윤과 친명만 출연하는 정치 무대에는 이제 무대연출도 사라지고 선거 공학적 사고만 지배할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말하더니,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표는 “모든 약속을 다 지켜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모두 정상적인 정치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상과 현실 중 현실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천박한 현실주의와 실용주의에 빠진 정치는 우리를 절망케 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도록 하는 정치는 ‘나쁜
정치’일 뿐만 아니라 정치 자체를 파괴한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것도 제시하지 않는 닫힌 사회의 통치일 뿐이다.
반면에 ‘열린 사회와 그 가능성’을 추구하는 정치는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일깨운다.
나쁜 정치는 ‘현실이 이렇다, 저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단언한다면, 좋은 정치는 ‘현실이 이럴 수도 있다,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아마 다를 수도 있다’고 열어놓는다.
지금 여당과 야당은 모두 ‘내년 총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목표에 집착하여 다른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상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정치 무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일어날 것이라고 믿는 ‘소망적 사고’는 개인이 증거나 합리적인 분석에 의존하기보다는 그것이 사실이기를 원하기 때문에 어떤 것이 사실이거나 일어날 것이라고 믿거나 희망하는 인지적 편향을 말한다.
소망적 사고의 문제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소망적 사고를 하면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거나 경시하고 자신의 욕구를 뒷받침하는 정보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가 소망적 사고 때문이었던 것처럼, 내년 총선에서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과도한 현실주의에 빠진 정당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양당이 강요하는 것 거부해야
특정한 정당이 실패하는 것은 괜찮지만 우리 정치가 실패하여 미래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가 여전히 가능한 대안의 이야기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친윤과 친명으로 대변되는 권력 집단이 새로운 가능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가능성을 정치
무대에 올려야 한다.
기존의 정당이 상호 배타적인 진영정치에 기반한 정치 드라마의 극작법을 답습한다면, 우리는 ‘기존의 극작법 바깥에서’ 움직여야 한다.
국민의힘 혁신위원회에서 익히 경험한 것처럼 등장인물이 바뀌어도 구태의연한 극작법과 무대연출로는 새로운 시작이 보이지 않는다.
다른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현행 질서를 위반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선을 넘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지평은 열리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기에 새로움의 감동을 가져다줄
정치 연극을 기대해본다.
우리를 유혹하기 위한 수많은 이미지가 무대 위에 올려지겠지만, 막장 드라마를 넘어서 가능성을 탐색하는 미장센도 연출되기를 바란다.
좋은 정치 드라마가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좋은 드라마는 사건을 의미 있게 연결하는 플롯이 좋다.
내년 총선까지 이어질 수많은 사건이 우리에게 한편의 감동적인 드라마로 다가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플롯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정치 드라마는 일방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프로바이더’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가능성의
다양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플랫폼’에서 만들어진다.
둘째, 정치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변화되어야 한다.
좋은 드라마에서는 주연과 조연이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조화를 이룬다.
특정 인물만 과도하게 등장하여 결말이 뻔한 역할만 하는 드라마는 대부분 막장이다.
정치 드라마에서 우리는 모두 주인공이다.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결말이 정해졌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미리 결정되었다고 추정되는 진로를 떠나 다른 옵션을 선택하는
순간 드라마의 플롯이 바뀐다.
새로운 주인공이 정치 무대에 등장한다고 해서 새로운 정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기존의 극작법을 떠나서 무대에 직접 참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정치가 시작된다.
새해에 새로운 정치를 원한다면 우리는 거대 양당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을 따르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