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등바등 살지 말 것!"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설 명절의 의미가 선명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일가친척들이 대거 모이지 않습니다.
평소에 먹어보지 못하던 귀한 음식들을 맘껏 배불리 먹는 날도 아닙니다.
과거의 명절은 타지에 나가 뿔뿔이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반드시 모이고, 비일상적인 풍요를 누리는 축제적 성격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그런 의미도 퇴색하였죠. 그렇다고 명절은 단순히 노동을 하지 않는 휴일도 아니고, 종교적 신을 찾는 날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설 명절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희 집 설날 제사상엔 떡국 일곱 그릇이 올라갑니다.
고조부터 시작해서 몇 년 전에 작고하신 아버님 몫으로 말입니다.
제 기억에는 조부모와 아버지만 남아 있습니다.
그중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가장 많죠. 지금 막 떠오르는 기억 한 조각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의 모습입니다.
이미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신 것 같았습니다.
마치 유언처럼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너무 아등바등 살려고 하지 말고... 또 계획했던 대로 일이 안 돼도 실망하지 말고... 지금 와 돌이켜보니, 전혀 그럴 필요가 없더라.

기력이 다 소진되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지만, 아버지는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로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땐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여태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아무튼 설 명절을 앞두고 돌아가신 분들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처럼 망자를 기억하는 것이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명절의 마지막 의미인 것 같습니다.

아마 애니메이션 <코코>를 다들 보셨을 텐데, 그 영화의 주제곡 "remember me"가 명절의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해 줍니다.
우리는 "기억해 줘"라는 죽은 연인(내게 사랑을 베풀어 주었던 사람)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선한 인간성(사랑)을 지키는 첫걸음이기 때문이죠. 명절이란 소중한 기억의 의례입니다.

죽음에 대한 명저를 남긴 필립 아리에스는 축제날 요염하게 춤추며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외친 유대인 젊은 과부 이야기가 수록된 러시아 소설을 소개하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원색적인 방식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라고 한 말은 축제 날 드넓은 초원에서 춤에 도취되어 삶의 즐거움을 표현한 외침이기도 하고, 그날그날을 살아갈 뿐 앞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사고의 표현이기도 하다.
반대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항상 대비하고 계획해야 된다는 생각이며, 세계를 합리적이고 의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리킨다.
이것이 바로 현대성이다.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고선일 옮김, 새물결, 2004, 69쪽.

미래를 준비하고 합리적으로 계획해서 내 뜻대로 살려는 사람을 우리 시대는 추앙합니다.
모범으로 삼고 있죠. 왠지 멋있어 보이고, 그런 삶의 태도를 가져야만 할 것 같지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태도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멋지고 당당한 태도를 한 꺼풀 벗기고 나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어린애 같은 내면이 등장한다는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인사드립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설 명절 날,

가족과 함께 (이미 작고하신 분들과의 추억을 포함)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구요!

(아등바등 계획 같은 건 세우시지 마시고...)


사랑은 혁명의 동력이다!

짐 피츠의 체 게바라 초상화 (출처: 위키백과)

게바라가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때 쓴 <쿠바의 사회주의와 인간>이라는 글에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터무니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혁명가를 이끄는 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자질이 없는 진정한 혁명가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혁명가는 열정과 냉정한 지성을 모두 갖추고, 물러서지 않은 채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런 점이 지도자가 만들어내는 위대한 드라마가 될 것입니다.
전위적 혁명가들은
민중에 대한 사랑을, 가장 신성한 대의에 대한 사랑을 이상화하고 불가분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약간의 일상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내려갈 수 없습니다.

스레츠코 호르바트, <사랑의 급진성>, 변진경 옮김, 오월의봄, 2017. 116쪽 재인용.

출처: 위키백과

누구나 비슷하겠지만, 저도 젊은 시절 잠시나마 혁명가를 꿈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체제가 부당하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갈아엎고 싶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터무니없는 열정이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마냥 매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시절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할만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열정이 순수한 사랑의 열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정의 치기와 맹목성을 비판할 수 있을지언정, 열정 자체의 정당성마저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대학생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앞서 배치한 체게바라 그림은 당시 대학생들에게 뜨거운 정념의 샘터였고 대학 교정 곳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대학 내에서 거의 볼 수가 없죠.

혁명가는 위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랑 그 자체가 혁명적이기에 혁명가를 낳을 수 있는 겁니다.
체 게바라 같은 혁명가는 아니지만 키에르케고어는 이 점을 분명하게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 이것은 역시 확실히 하나의 사건이고, 모든 사건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가장 행복한 사건이다.
사랑은 하나의 변화고, 모든 변화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이며 가장 바람직한 변화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의미에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변화되고 달라진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변화다.
사랑은 하나의 혁명이고, 모든 혁명 중에서도 가장 심오하고 또 가장 축복받은 혁명이다. 그래서 역시 사랑이 깃든 곳에는 혼란이 야기된다.
생명이 부여되는 이런 혼란 속에서는 사랑을 하는 사람에게는
내 것과 네 것의 구별이 없어진다. 놀라운 일이다.

키에르케고어, <사랑의 역사>, 임춘갑 옮김, 치우, 2011.

사랑이 찾아오면, 그제야 '나'는 변합니다.
'내 것과 네 것의 구별'이 사라지면서 그토록 완강했던 내가 무너집니다.
나와 네가 뒤섞인 혼란이 발생하는데, 그건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기존의 나란 것이 왜소하고 옹졸하고 쩨쩨한 나에 불과했기 때문이죠. 사랑에 빠지면서 작은 내가 좀 더 큰 나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사랑은 변화입니다.
그것도 혁명적인 변화입니다.
개인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변화입니다.

사랑은 영구 혁명의 무한 동력입니다.

"공짜는…… 있다 vs 없다"

 

상에 공짜라는 게 있을까요? 분명 있어 보입니다.
누구나 공짜 경험을 하니까요. 예컨대 길에서 우연히 돈을 줍는 경우도 있고, 로또에 당첨된 사람도 없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자주 공짜로 얻는 사람들을 두고서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실력이 있어도 운 좋은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두고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말하는 데, 꽤나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들까지 그 말을 자주 언급하지요.

그리고 공짜를 좋아하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고된 노동과 역경을 싫어하고 게으름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인 듯합니다.

그런데 과연 공짜가 정말로 있는 걸까요? 운칠기삼이란 사자성어와 함께 새옹지마(塞翁之馬)도 있지요. 인생의 길흉화복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새옹지마에 얽힌 고사를 간단히 언급하면, 변방에 사는 한 노인이 '공짜로' 멋진 야생마를 얻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주인 없는 벤츠차를 주운 셈이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노인의 아들이 그 말을 길들이려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집니다.
평생 불구로 살아가야 했죠. 노인은 또 얼마나 슬펐을까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이 터지고 아들 또래의 장정들이 죄다 군인으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노인의 아들은 한쪽 발을 쓸 수 없었기에, 군역에서 면제됩니다.
기타 등등...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아마 공짜로 얻은 말과 관련된 길흉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겁니다). 이런 점에서
공짜는 있다고도 볼 수 없고, 없다고도 볼 수 없습니다.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 대가(代價) 없이 공짜로 무언가를 얻었습니다.
여긴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공짜라는 생각'이 호된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일확천금을 얻은 사람들은 누가 빼앗아갈까 봐 전전긍긍하거나 흥청망청 돈을 탕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생의 가치 전체를 낭비해버립니다.

결국 공짜처럼 보이는 게 내게 주어졌을 때, 공짜임을 거부하는 게 현명한 태도입니다.
과거에 대가를 치르지 않아 공짜로 보인 것이니까, 반드시 미래에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짜란 미래로부터 대출받은 빚입니다.
언젠가 이자까지 더해서 갚아야 할 빚이죠.

따라서 공짜로 얻은 것은 바로 즉시 타인들과 나누는 게 좋습니다.
(뇌물 아닌)선물을 공짜로 베푸는 겁니다.
그러면 적어도 복리로 불어나는 이자를 지불하지는 않아도 되니까요.

공짜는 대가를 과거가 아닌 미래에 치릅니다.
과거와 현재만 보면 공짜라는 건 있지만, 미래를 보면 공짜는 없는 셈이지요.

사진 출처 : 매일경제신문

"사랑밖엔 난 몰라!": 사랑의 고독

 

‘사랑의 고독’이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죠.

첫째, (너를) 사랑한 만큼 외롭다는 뜻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말처럼 "
사랑이 크면 외로움이고 말고"(<완전한 하루>에서)라 말할 수 있죠. 사랑이 크면 클수록 그림자처럼 외로움도 자라나, 결국 이별 뒤엔 덩그러니 외로움만 홀로 남는다는 뜻입니다.

둘째, 사랑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전자는 우리에게 친근한 사랑인 반면, 후자는 철학자들의 사변 속에나 등장하는 낯선 사랑입니다.
모호하고 낯선 두 번째 사랑에 대해서만 짧은 설명을 덧붙이기로 하죠.

예컨대 여기 이 컵에 커피가 담겨있습니다.
그걸 바다에 흩뿌린다면 바닷물을 커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분명 그리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흩어져서 마구 뒤섞인 것은 무어라 규정할 수 없죠.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존재란 모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질이든 생각이든 언어든, 그 '무엇'이든 모여야만 (무엇으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이게 하여 결합하는 원리를 엠페도클레스는 놀랍게도 ‘사랑(Philotēs)’이라 불렀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2009. 339쪽 이하 참조) 이것은
사랑이야말로 존재의 근원이자 사랑 밖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랑이란 말은 원래 '남녀 간의 연애'에 국한된 편협한 뜻만을 가진 게 아니었던 겁니다.

이 점에서 저는 엠페도클레스를 따르고자 합니다.
현대인들은 남녀 사랑으로 축소된 빈약한 사랑 개념이 전부인 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시류를 따르기보다 엠페도클레스의 사랑 개념을 현대화시키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4원소로 대표되는 실체론적 세계에 대한 엠페도클레스의 집착을 덜어낸다면, 엠페도클레스의 사랑론은 우리와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모으는 것과 모여지는 것, 능동과 수동, 안과 바깥, (상대적인) 사랑과 불화, 자기와 타자 등은 ‘절대 사랑’의 두 양태일뿐입니다.
유일무이하고 마주한 상대가 없는(그래서 절대 고독한) 사랑의 자기 조직 원리, 자기-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자연, 생명의 본모습입니다.
사랑이란 다름 아닌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았던 존재자의 ‘존재’라는 겁니다.

'사랑 밖엔 없는' 사랑의 절대 고독을 이야기하다 보니까, 옛 유행가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사랑밖엔 난 몰라." 세상에 사랑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사랑밖엔 난 몰라'라고 고백하는 것일 테죠. 어찌 보면 이건 사랑에 눈이 멀고 사랑에 미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 잠시나마 세계의 진실을 본 것일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제 책 <철학자의 사랑법>에 등장하는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무얼 하며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 릴케의 답변

 

은 시인에게 보내는 릴케의 편지에는 사랑에 대한 명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김수영 시인이 이 대목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랑의 변주곡」에 등장하는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는 여기 이 책에서 출발한 것 같습니다.

사랑의 실패는 몹시 아리지만 아름답습니다.
젊다는 증거이기에 그렇지요. 이 경우 젊음의 기준은 나이가 아니라 인식의 성숙 여부입니다.
사랑에 빠져 사랑에 좌절하는 자가 젊은이입니다.
마음대로 안 된다고 크게 걱정할 건 없습니다.
더 자라면 됩니다.
다시 일어서는 것은 젊은이의 아름다운 특권이니까요. 릴케의 목소리를 직접 옮겨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과해진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궁극의 것이자 최후의 시련이며 시험으로서, 다른 모든 일은 단지 사랑을 위한 준비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초보자인 젊은 사람들은 아직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온 존재를 걸고, 그들의 고독하고 불안하며 위를 향하여 맥박치는 심장의 주위에 집중된 모든 힘을 다하여 그들은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사랑한다는 것은 …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보다 고양되고 보다 심화된 고독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그 자신이 세계가 되려는 숭고한 동기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2019. 55-56쪽. 인용자 강조.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요즘 시대에 사랑을 입에 담는다면, 아마 삼류 철학자로 분류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줄기차게 사랑을 말할 겁니다(그렇다고 남발한다는 게 아니라 소중히 아껴가며 말하겠습니다). 고매한 척하느라 공허한 철학 개념을 나열하는데 아까운 생을 낭비할 수 없지요.

철학의 영웅들이 만들어 놓은 권위 있고 중후한 개념의 첨탑 뒤에 더 이상 숨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 수 있는 사랑의 잣대로 철학적 역량과 보편성이 검증되어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은 내게 한 사람의 사유 수준을 측량하는 리트머스 종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 그럼 제게 사랑에 대해 말씀해 보세요.

그럼 저는 당신의 철학 수준을 알려드릴게요.

저는 사랑을 '믿습니다'. 사랑에 대한 신뢰, 이건 모든 믿음의 초석입니다.
믿음이란 것도 종국에는 사랑에서 유래한 것이죠. 영어 단어 believe 안에 있는 lieve는 love를 뜻합니다(독일어의 glauben/lieben도 마찬가지). ‘너를 믿는다’라는 말은 ‘너를 사랑한다’라는 말과 동의어이죠.

소중하고 가치 있다고 믿고 생각(思=愛) 하는 것, 그 이면에 벌써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언 가 진리가 결국 밝혀지고 선이 악을 이긴다’라는 아름다운 믿음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그리하여 굳이 비교하자면, 사랑이 진선미(眞善美) 셋보다도 더 근원적인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제 책 <철학자의 사랑법>에 등장하는 내용을 수정하고 보완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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