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라는 어리석은 환상,세상 바꾸는 좋은 착각

일출. 게티이미지뱅크

한승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종교학)

선친께서는 해마다 이맘때면 이런 곡조를 흥얼거리곤 하셨다.

“묵은해니 새해니 구별할 것 없네/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여보게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변해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아버지는 주로 뉴스 화면에 양력설을 맞아 전국의 산과 바다로 해맞이를 떠나는 인파가 비칠 때,
그리고 음력설 전날 큰집으로 가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셨다.
하기야 해돋이를 보고 싶다면 한해 중 언제라도 날씨 좋고 사람 덜 붐빌 때 움직이는 쪽이 편할 터다.
멀리 떨어져 사는 친지들이 미어터지는 귀성길을 뚫고 명절 기간에 맞춰서 모여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극히 세속적인 현실주의자였던 아버지는 이 노래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듯 몇번이고 부르셨고,
그럴 때면 나는 모처럼의 새해 기분이 식어가는 게 불만이었다.

이 범상치 않은 가사의 노래는 장사익의 ‘꿈속’이다.
그 원전은 조선 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활동한 승려 학명(鶴鳴)의 선시인 ‘몽중유’(夢中遊)다.
원래의 시는 기본적으로 장사익의 노래와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 더 전통적인 불교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의 차이가 눈에 띈다.
“덧없는 인생이 스스로 지은 꿈속에서 놀고 있네(浮生自作夢中遊).” 가요 버전과 비교해 보면,
연속적인 시간을 한해의 끝과 시작으로 나누는 분별심이 가지는 어리석음을 덜 강조하는 대신,
분절된 시간이라는 환상이란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가 지어내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꿈이라는 통찰이 좀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해가 지나가 영원히 사라지고 새로운 시간이 시작된다는 ‘꿈’은 사실 꽤 유용하다.
이전까지의 방탕한 삶을 지워버리고 금연,
금주,
운동,
외국어 공부를 시작하기에 새해라는 ‘환상’은 나쁘지 않은 계기다.
비록 그 결심의 유효 기간은 일반적으로 3일을 넘기기 힘들다고 하지만,
그런 작심(作心)의 기회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급속히 소모될 것이다.

대선이나 총선으로 구획되는 정치적 시간은 사회의 폭력적인 전복을 막는 중요한 기제다.
많은 대의제 사회에서 선거란 선택지가 대단히 적을 뿐 아니라 완벽한 정답도 없는 객관식 문제 풀이와 같다.
최선의 선택을 한다 한들 삶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드물고,
최악의 선택을 한다 한들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극도로 저질스러운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해 일상의 구조적 고통이 가중될 때면,
언젠가 이 정권의 시간이 종말을 맞이하고 새로운 미지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이 움튼다.

시간에 끝과 시작이 있다는 상상이 있기에 인간이 삶의 고통을 감내해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의 핵심적인 주장이기도 했다.
그는 전근대의 인류가 여러가지 종교적 테크닉을 사용해 시간을 지배하려 했음을 보여줬다.
엘리아데는 신화나 의례로 시간을 경험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고,
시간의 흐름에 저항할 수 있다는 감각은 근대적 역사관을 가진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것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흘러간 시간을 되살거나 새로운 시간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상상을 버리지 않았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점을 집단적으로 되풀이해서 살아가려는 시도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을 자극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억은 일방적으로 허무하게 흘러가는 역사를 거스른다.
6월25일이라는 날짜는 반공주의적 적개심을,
5월18일이라는 시점은 민주주의를 향한 영원한 전진이라는 열망을 갱신하는 기념일들이다.
또 21세기의 한국인들에게 4월16일과 10월29일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날들이 되었다.
그래서 시간을 분할하고,
특정한 시점을 다시 체험하며,
그로부터 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일련의 작업은 현재의 체제를 유지시키기도 하지만 세상의 뒤틀림과 어긋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는 집단적 꿈을 꾸고 있다.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을 때 인간은 어리석지 않다.
묵은해의 마지막은 새해의 시작과 물리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새로운 시간이라는 환상은 개인의 삶을 바꾸기에도,
세상을 변혁하기에도 좋은 착각이다.

애먼 시대정신 대신 헌법 정신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 회동에 앞서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 창밖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BR> 대통령실 제공

홍원식│동덕여대 ARETE 교양대학 교수

나라마다 헌법 1조는 그 국가공동체의 존립 목적과 운영에 관한 최우선 원칙을 담고 있다.
헌법 자체가 임의적 상황을 뛰어넘어 한 시대를 관통해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보편적인 규칙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헌법 1조가 우리가 시대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장 가까운 원칙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 헌법 1조는 훼손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을 국가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나치에 대한 반성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시대정신으로 삼고 국가에 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음을 명시한 것이다.
1791년 제정된 미국의 수정헌법 1조는 의회가 표현,
출판,
집회 등의 자유를 제약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음을 규정하고 있다.
이는 당시 신생 근대국가로서 민주주의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
이를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최우선 원칙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우리는 헌법 1조를 통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공화제에 대한 열망은 일찍이 임시정부에서부터 시작한 바 있는데,
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군주제로 돌아가자는 일부의 복벽주의 주장을 뿌리치고 왕이 세습되는 군주제와 차별되는 의미로서 공화제를 임시헌장을 통해 표방했다.
우리 제헌헌법의 입법자들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정신을 이어받아 헌법 1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것인데,
이는 군주제에 대한 부정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주권의 소재와 행사 방법에 관한 원칙을 명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민주’를 통해서 국가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확인하고 ‘공화’를 통해서 주권의 행사가 전제주의나 독재적 방식이 아닌 헌법적 권력분립의 구조원리에 의해 조직된 국가체계를 통해 이뤄져야 함을 선언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 내세웠던 공정,
정의,
상식은 국가권력의 행사 방법에 관한 헌법적 원칙을 재천명하였다는 점에서 공화주의의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정치 슬로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재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을 보면,
과연 작금의 행정권력이 정상적인 민주공화국에서 행사되고 있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의 독립성을 책임져야 하는 두 위원회에서는 공히 야당 추천 위원들이 모두 임명되지 않고 있어 사실상 장차관으로 구성된 독임제 부처처럼 정부·여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특히,
방심위에서는 김만배 녹취록 관련 징계를 일방적으로 결정하였고 이어서 ‘바이든-날리면’ 보도 징계에 착수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압박하고 있다.
민원사주 의혹이 있는 류희림 위원장은 전체 직원이 200명 남짓인 방심위에서 절대다수인 149명에 의해 권익위에 신고당했지만,
오히려 제보자를 찾겠다며 내부 감사와 수사기관 고발을 지시하고 팀장들을 무더기로 교체하는 독단적 모습을 보인다.

의심할 여지 없이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는 민주공화국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다.
이를 보호하고 구현할 책임이 있는 방통위와 방심위 운영에서 법률이 규정하는 제도적 견제와 균형을 보장하지 않고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언론을 대하는 현 정부의 모습은 윤 대통령이 대선 당시 내세웠던 공정,
정의,
상식에 대한 부정이자 우리 헌법의 최우선 원칙인 공화주의에 대한 모욕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여당은 다가오는 총선의 시대정신을 ‘운동권 특권 청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총선에서 야권의 정권 심판 프레임에 대한 일종의 대항 프레임으로 선거구도를 어떻게든 대등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슬로건으로 보이지만,
우리 사회가 이를 곧이곧대로 시대정신이라고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다.
운동권 특권이 실제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눈 안의 들보가 급하기에 거기까지 들여다볼 여력이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 정부가 보이는 언론에 대한 일방적인 모습이 우리 헌법에 담긴 공화주의의 시대정신을 다시금 일깨울지도 모르겠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신당을 창당하며,
첫번째 정강·정책으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들고나온 것은 바로 그 지점이 현 정부의 가장 약한 고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총선 앞두고 애먼 시대정신 찾아 헤매지 말고,
헌법 정신부터 챙겨 보라는 말이다.

내릴 수 없는 깃발 ‘대안교육’의 지속을 위해

‘와크(WAC: Weekend Arts College) 공연예술·미디어학교’는 ‘와크 아츠’로 이름이 바뀌어 2024년 현재까지 변함없이 운영되고 있다.<BR> 대표 실리아 그린우드 선생은 은퇴했으나 위치는 캠던구의 더 나은 다른 장소로 이전한 상황이다.<BR> 자세한 정보는 https://www.wacarts.co.uk 누리집 참조. 누리집 갈무리

‘와크(WAC: Weekend Arts College) 공연예술·미디어학교’는 ‘와크 아츠’로 이름이 바뀌어 2024년 현재까지 변함없이 운영되고 있다.
대표 실리아 그린우드 선생은 은퇴했으나 위치는 캠던구의 더 나은 다른 장소로 이전한 상황이다.
자세한 정보는 https://www.wacarts.co.uk 누리집 참조. 누리집 갈무리

 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딱 한번 마라톤 완주를 해본 적 있다.
2009년 아일랜드 수도에서 열린 더블린마라톤에서였다.
뛰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로 이메일을 보냈다.
며칠 뒤 우편물 한뭉치가 날아왔다.
어떻게 모금할지 자세히 알려주는 설명서,
단체 상징물이 새겨진 라운드 셔츠 등이 담겨 있었다.

“아직 괜찮아 보여요. 힘내서 뛰세요. 앰네스티!”

행사 당일 달리는 중간중간 국제사면위원회 셔츠를 입은 활동가들이 간식과 물을 건네며 목청 돋워 격려해줬다.
마라톤 완주를 준비하는 5개월 동안 90여만원을 모아 기부했다.
모은 돈을 따로 송금할 필요는 없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알려준 모금 전용 웹주소를 소셜미디어로 연결했더니 후원자들이 직접 기부금을 낼 수 있었다.
신용카드 번호 입력만으로도 기부할 수 있어 편리했다.
나는 건강을 챙겨서,
벗들은 나와의 인연으로 기부금을 내서,
공익단체는 후원금을 받아서 모두가 이득인 셈이었다.

42.195㎞를 달려 종료 지점에 들어오기 직전의 모습. 국제앰네스티 상징인 촛불 모양이 박힌 셔츠 덕분에 달리는 동안 많은 이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을 수 있었다.<BR> 이병곤 제공

2000년대 초 유학 시절 런던 캠던구에 있는 ‘와크(WAC: Weekend Arts College) 공연예술·미디어학교’의 대표 실리아 그린우드 선생을 만난 기억이 떠오른다.
가난한 집 청소년들에게 미술,
연극,
공연예술,
영상기술,
웹디자인을 가르치는,
일종의 예술계 대안교육기관의 운영자였다.
서류 뭉치와 온갖 장비의 선들로 뒤엉킨 사무실을 배경으로 실리아 선생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예술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의 자기 발견이 얼마나 신비롭고 중요한 일인지를 힘주어 말했다.

인터뷰 끝자락에 정부 공식 지원 없이 어떻게 300명 넘는 청소년들에게 예술교육 프로그램 수강 혜택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시민들 후원금,
지방정부 지원금,
학생들이 내는 약소한 참가비,
유럽연합이 내려주는 문화예술진흥기금,
수익사업,
공모에 지원하여 받는 사업비 등으로 꾸려나간다고 답했다.
‘연중 수십군데 기관에 공모지원 서류를 내느라 엄청 바쁘다’며 양손을 벌린 채 어깨 한번 으쓱할 뿐이었다.
공익 기능을 수행하는 민간 자선단체로서의 교육기관이 그렇게 자립적인 형태로 존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했다.

‘도시×리브랜딩’을 읽었다(박상희·이한기·이광호,
2023). 어떻게 하면 특정 도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경험하게 할 것인가. 이 어려운 주제를 놓고 고민하는 모습을 엿보았다.
도시 브랜딩의 시작은 그 도시의 비전,
철학,
핵심 가치를 무엇으로 삼을지부터 정하는 것이라 했다.
해당 도시가 가진 실체를 바탕으로 정체성을 만들고,
그와 관련한 소통 방식을 어떻게 설계하는가에 따라 외부인이 갖게 되는 도시 이미지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브랜드 경험 설계 방법’에 초점을 두어 국내외의 다양한 도시 리브랜딩 사례를 소개해 준다.

우리나라 비인가 대안학교 현장이 무척 어렵다.
지난 25년 동안 대안교육계가 힘들지 않은 해는 없었다.
하지만 지난해 말부터 상황이 정말 예사롭지 않다.
신입생이 너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3년 뒤 초등학교 취학 학생 수가 29만명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통계도 보았다.

잠들기 전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옛 기억들이 자꾸 떠오른다.
모두에게 보람과 행복감을 전해주는 세련된 기금모금 방식을 어떻게 기획할 수 있을까.
‘와크 공연예술·미디어학교’처럼 교육기관의 공익적 성격을 잃지 않으면서도 재정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또렷한 정체성을 지켜오면서도 다양한 교육 실험을 펼쳐온 대안교육기관의 실천을 어떻게 리브랜딩해서 더 많은 사람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까.

다행히 아직 학교는 든든하다.
하지만 마을 일이 걱정이다.
예비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아 1년 동안 운영해온 회사 ‘마을너머’는 사업이 아직 제 궤도에 오르기 전인데,
사람을 고용할 지원금이 모두 끊겼다.
마을과 학교를 더 든든하게 연계해줄 마을공방 추가 건립도 자금 부족으로 아직은 요원하다.

민간의 노력으로 지역사회에 바탕을 둔 공적 영역을 꼭 만들어볼 거다.
가정,
시장,
국가와는 또 다른 삶의 터전으로서 공유 공간을 이른다.
그 안에서 경쟁과 두려움,
불안 없이 자라는 청소년들을 계속 바라보며 지켜갈 심산이다.
유치환 시인이 노래했듯이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며,
결코 내릴 수 없는 ‘깃발’이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공익을 지향하는 실험이고,
도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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