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걱정 기계


 이연주월미도에서 대관람차를 탄 적이 있었다.

어릴 때 재밌었던 대관람차가 공중으로 떠오르자 예상치 않게 너무나 무서웠다.
머리로는 안전하다는 걸 알지만 가슴은 쿵쾅댔고 지상으로 내려오기를 기도하듯 빌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걱정이 많아 걱정입니다’의 저자 ‘그램 데이비’는 걱정이 올림픽 종목이라면 집 안에 금메달이 가득했을 거라고 믿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에 의하면 걱정은 유전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만들어진 습관이다.
실제 연구는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1%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무능이 탄로 날까 봐, 지각하거나,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될까 봐 수시로 걱정한다.
모든 걱정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걱정의 포로가 되어선 안 된다.
윌 로저스의 말처럼 걱정은 흔들의자와 같아서 계속 움직이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걱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생산적인 걱정’과 ‘파국적인 걱정’이다.
생산적 걱정을 하는 사람은 미래의 실패를 예비하며 플랜 B를 준비한다.
이때의 걱정은 오히려 그 사람의 경쟁력이 된다.
문제는 파국적 걱정이다.
“~하면 어떡하지?”라는 질문만 쳇바퀴처럼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이런 파국적 걱정의 처방전은 질문을 “~하면 어떡하지?”에서 “그러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지?”로 바꾸는 것이다.
‘걱정이 많아 걱정입니다’의 번역가이자 상담자인 정신아는 상담실을 방문하는 걱정 많은 내담자를 ‘먹구름 속에 있는 손님’이라고 말한다.
시인 존 밀턴은 ‘실낙원’에서 “마음은 우리 자신의 처소이며 그 안에서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도 만들 수 있다”고 썼다.
중요한 건 걱정이 없는 삶이 아니라 걱정과 잘 공존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걱정의 먹구름 속에 있다면 먹구름 위에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세네카의 말처럼 가장 비참한 건 앞날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미 불행해져 있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잘 익은 상처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이전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썼다.
“인생이 서글픈 건, 승자도 결국은 얻어맞기 때문이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상처 없는 얼굴로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복서 따윈 없다.
단지 덜 맞고, 더 맞고의 차이가 있을 뿐.” 살다 보면 누구나 상처가 생긴다.
어떤 사람은 상처를 느끼고 살고, 어떤 이는 잊으려 노력하며 산다.
하지만 우리는 ‘내 안의 어린아이’와 살며, 어른이 돼도 상처 입은 마음속 아이는 여전히 웅크리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폭력, 어떤 이에겐 냉정함이나 가난이 어린 시절 상처로 남는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양철통에 들어있는 ‘데니시 버터쿠키’만 보면 사는데, 어릴 적 짝꿍이 혼자 먹던 그 쿠키가 자신에게는 상처였다고 한다.
오래전, 배우 최진실 사후 TV 추모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쓰던 옷장에서 나온 공책과 연필을 보았다.
모친은 어릴 적 형편이 나빴던 그녀가 커서도 학용품을 사 모았다고 했다.
상처받은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 속의 충족되지 않은 뭔가를 찾아 헤맨다.
데니시 쿠키와 학용품은 그녀들이 어른이 되어 ‘내 안의 아이’에게 주는 치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
상처가 적은 인생이 좋지만 더 좋은 건 상처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를 극복해야 좋은 인생은 아니다.
현재의 고통이 모두 과거의 상처 때문이라고 믿고, 굳이 과거로 돌아가 상처를 헤집을 필요도 없다.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스스로 주워 자꾸 자신의 몸에 꽂으며 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 이미 생긴 상처를 잘 받아들이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가수 임영웅이 어릴 적 사고로 생긴 얼굴의 상처를 “내 얼굴에는 나이키가 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은 어떤가.축복을 뜻하는 ‘bless’는 상처를 뜻하는 프랑스어 ‘blessure’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우리 몸의 근육도 상처 받고 찢어지며 더 단단한 근육으로 성장한다.
비를 맞은 사람은 무지개를 볼 수 있고, 어둠 속의 사람은 별을 볼 수 있다.
복효근의 시 ‘상처에 대하여’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기억과 기록

오래전 일기를 펼쳐 보는 버릇이 있다.
가끔 일기 속 내용이 내 기억과 달라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일본의 ‘아오모리’는 사과로 유명하지만 내겐 눈의 도시로 각인돼 있다.
눈이 내리면 항상 그곳이 생각나는데, 무릎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아오모리 미술관까지 헤맸던 시간이 아득했기 때문이다.
결국 헤매다 미술관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날 마신 핫 초코와 메밀 우동의 맛은 미슐랭 별이 아깝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지금 기억하는 아오모리다.
하지만 실제 그날 내 노트의 기록은 맹추위와 폭설로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찔 때마다 잘못된 버스를 타고 중간에 내린 내 실수에 대한 자책만 빼곡했다.
어디에도 아름다운 눈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는 이처럼 다르다.
인간은 영화를 돌려보듯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비트로 기억하는 컴퓨터와 달리 우리의 뇌는 이야기 단위로 기억하고, 그 과정에서 압축과 인과를 사용한다.
‘왕이 있었다, 왕비가 있었다’ 사이에 ‘왕비가 그 비통함에 죽었다’라는 인과를 꿰어 이야기를 압축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기억의 오류가 일어난다.
겉보기에 명백한 사건이 사건 당사자의 기억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라쇼몽’의 주인공들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과거는 끝없이 재해석된다.
시간이 지나며 생긴 기억 속 모호함은 자신의 현재 상황과 감정에 의해 재편집되어 새로운 과거, 즉 추억으로 등재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기억을 너무 맹신해선 안 된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때의 상황과 실제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오모리에서의 내 기억은 눈으로 아름답게 채색됐지만 그때 내가 경험한 진짜 가치는 어쩌면 폭설로 순식간에 사라진 길 위에서 현명히 대처하고, 버스 안내도를 제대로 읽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추억은 방울방울 아름답지만 우리는 종종 기억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경험하는 순간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과오를 저지른다.
이것이 때로 기억보다 기록이 더 가치 있는 이유다.

더하기보다 빼기

새해부터 신경외과 진료실에 앉아 뇌 MRI 사진을 봤다.
작년부터 이름이나 명사가 기억나지 않아 정확한 단어 대신 ‘그거, 저거’ 같은 대명사를 쓰는 순간이 반복되면서 혹시 치매가 아닌가 하는 불안이 몰려왔다.
결론적으로 뇌에는 이상이 없었다.
상태가 좋으니 10년 후에나 점검차 다시 찍자는 의사에게 “그런데 왜 이러죠?”라는 말을 반문했다.
 MRI 사진이 걸려 있는 진료실에서 50대 중반의 의사는 내게 자신도 멀쩡한 척 앉아 있지만 어젯밤 아내와 대화 중 와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버벅였고, 콘퍼런스에서도 말이 꼬이기 일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도파민 범벅의 과도한 정보에 노출되는 20~30대에서도 엿보이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의 처방은 나쁜 음식을 줄이고, 기억나지 않는 단어가 있으면 바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대신 스스로 생각해내고, 인터넷 사용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하라’ 대신 ‘하지 말라’에 방점을 둔 의사의 처방을 곱씹다가 도파민 중독, 가속 노화, 단순 당처럼 내가 진료실에서 사용한 단어 중에 불과 몇 년 전이라면 쓰지 않았을 말이 수십 개가 넘는다는 걸 깨달았다.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는 이 세계에서 선택 장애는 개인이 아닌 구조적 문제이며 나아가 기억력 감퇴로까지 확장된다.
오죽하면 도쿄 같은 대도시에 책이 딱 한 권 밖에 없는 서점이 인기를 끌까. 사물로 꽉 들어찬 방에서 원하는 가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가장 빠른 법은 비우는 것이다.
무한대의 가능성이 종종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다.
가끔 선택의 옵션을 아예 없애는 게 답일 때도 있다.

뇌의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인터넷을 줄이는 것보다 주말에는 디지털 기기를 아예 끊는 쪽이 낫다.
담배를 줄이는 것보다 끊는 게 쉬운 것처럼 이럴 땐 100퍼센트 이행이 50퍼센트 이행보다 더 쉽다.
내가 보기에 더 심각한 문제는 과잉 정보로 파생되는 ‘의견의 과부하’다.
알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 현실에서 더 중요한 건 할 것이 아닌 ‘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빅데이터에 따르면 50대는 국적 불문, 가장 행복도가 낮다.
중년의 위기가 탈모로 시작돼 탈선으로 끝난다는 우스갯소리처럼 행복의 U자형 곡선은 50대에 최저점을 찍는다.
생애 주기상 최정점의 자산과 경험을 축적했음에도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아이러니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유가 뭘까.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젊은 시절의 낙관 편향은 사라지고, 실직과 퇴직의 쓴 현실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커리어에 정점을 찍고 있는 친구들과 상향식으로 비교하며 느끼는 상대적 초라함이다.
‘인생은 왜 50부터 반등하는가’의 저자 ‘조너선 라우시’는 타인의 소득이 증가하면 나의 행복이 훼손된다는 증거로 ‘너의 이익은 나의 고통’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소개한다.
현금 지원이 심리에 미치는 부정적 효과에 대한 연구인데, 반전은 수령자의 늘어난 만족감보다 비수령자의 불만족이 4배 이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행복의 비결은 ‘상향식’ 비교를 버리고 ‘하향식’ 비교를 택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라 ‘나이’에 좌우된다는 증거들이다.
인간은 비교를 통해서 자기 위치를 확인한다.
누구보다 많거나 적고, 크거나 작은 것이다.
특히 젊은 시절엔 이런 경향이 훨씬 더 강하고 동기부여로 작용한다.
하지만 중년 이후엔 이런 오랜 편향이 고쳐지기 시작한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탁월해지는 노년기의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경험을 나쁘게만 보지 않고, 좋은 경험을 소중히 하는 능력이 좋아진다.
그것이 50대에 바닥을 찍은 행복 곡선이 70대에 정점을 찍는 이유다.
모든 경험에는 평균값이 있으므로 완전한 만족 순간은 늘 지연된다.
목표한 봉우리에 도달하는 순간 여기가 아닌 저기, 더 높은 봉우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핵심은 정복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다.
행복의 목적지는 봉우리가 아니라 봉우리에 이르는 여정 그 자체다.

행복의 의미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왜 사냐고 물으면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행복이 뭐냐고 물으면 건강에서 경제적 자유까지 가치관에 따라 다양한 답이 나온다.
이럴 때 유용한 건 대조군, 즉 행복의 반대인 불행과 후회가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것이다.
어둠을 알기 위해 빛을 연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가장 대중적인 건 ‘죽기 전 사람들이 제일 후회하는 것’의 리스트다.
리스트는 다양하지만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삶의 많은 부분을 너무 일만 한 것. 둘째,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것. 셋째, 걱정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쓴 것.우리는 대개 성공한 커리어와 풍족한 돈을 행복이라고 믿지만 다양한 행복 연구에서 밝힌 행복의 핵심에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돈 역시 일정 수준을 넘으면 행복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혀졌다.
큰 프로젝트나 일을 끝내면 “이게 다인가?”라는 공허감이 밀려오거나, 가지고자 그토록 노력했던 걸 가지고 보니 자신이 원하던 것이 아닌 경우도 있다.
만약 가족을 위해 일에 집중하고 마침내 고급 아파트에 입주했는데 일하는 과정 중 생긴 무심한 상처들 때문에 그 큰 집에 나만 홀로 남는다면 행복할까. 함께 눈 맞추고 기뻐할 사람이 없다면 그곳에 행복은 없다.
행복의 관점에서 결과보다 중요한 건 행복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뒤집기나 걸음마, 응가를 할 때, 주먹을 꽉 쥔 채 힘을 주느라 목덜미까지 새빨개지는 아기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의 몸은 또 얼마나 유연한지, 수월하게 물에 뜨고 빠르게 언어를 익힌다.
아기는 언제 힘을 주고, 언제 빼야 하는지 아는 천재처럼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몰입한다.
이것이 아기가 그토록 충만한 삶을 사는 비밀이다.
피카소가 라파엘로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고 말한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아기의 인중이 ‘쉿!’ 삶의 비밀을 발설하지 말라는 신의 손가락 자국이라는 말은 내게 늘 행복에 대한 아름다운 은유처럼 느껴진다.

존엄하게 사라지기

십 수년 전 이혼과 함께 루게릭을 선고받은 한 남자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처음 ‘디그니타스’의 존재를 알았다.
‘죽을 권리’를 주장하며 의사의 조력으로 죽을 수 있는 스위스 단체였다.
알츠하이머에 따른 긴 고통을 끝내기 위해 남편과 ‘디그니타스’로 가는 여정을 그린 ‘에이미 블룸’의 책은 절망적이다.
그럼에도 이 책 제목이 ‘사랑을 담아’인 것은 절망을 통과하지 않은 희망은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 테러 단체 ‘하마스’에 딸을 잃은 한 아버지가 ‘아이가 죽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봤다.
딸이 살아있길 바라는 게 아니라, 끔찍한 고통 없이 빨리 사망했길 바라는 그 비통함을 우리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뜨면 죽음보다 못한 삶은 도처에 있다.
의학의 발전에도 기대 수명만큼 건강 수명은 늘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초고령 사회 진입은 각종 말기 암, 치매,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다양한 기능 상실까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의 증가를 의미한다.
어떤 진통제로도 통증을 참을 수 없던 날, 아들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누구냐고 묻던 날, 유일하게 움직이던 왼쪽 눈꺼풀마저 마비로 잠식당하던 날, 불치병으로 죽음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부르게 된 사람들의 고통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 부르게 된 사람들 말이다.
2018년 나는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작성했다.
그 후 26만명 이상이 무의미한 연명 의료를 중단했다.
‘연명 의료 결정법’이 도입된 후,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를 등록한 국민은 164만명을 넘어섰다.
2025년에 대한민국은 노인 비율이 20퍼센트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24시간 켜진 인공 불빛 아래, 온 몸에 생명 연장 장치를 달고 수시로 주삿바늘에 몸이 찔리는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나 자신으로 존엄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좋은 죽음 없이 좋은 삶도 없다.

말과 대화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램프 속 지니가 나타나 말하기와 글쓰기 중 한 가지 능력을 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고를까. 대부분 말하기를 선택할 것이다.
말을 설득력 있게 잘하는 사람은 생각이 깊고 창의적이다.
내가 만나본 말 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고 곰곰이 답해본 후, 오래 그것을 성찰해온 점이다.
자신과 진솔하게 대화해 본 사람이 타인과도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다.
짝짓기 예능을 종종 본다.
인간 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이런 프로그램에는 유독 ‘말’이 넘치는데, 남녀 간 대화 양상을 관찰하며 커플로 성사될 만한 남녀를 예측하는 게 꽤 흥미롭다.
이들의 대화는 대개 과거, 현재, 미래에 관한 얘기로 가득 차 있는데, 경험상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많이 이야기할수록 연인이나 부부가 되는 비율이 높았다.
이혼이나 파경을 앞둔 커플이 더 이상 미래를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살다 보면 말을 잘하는 사람도, 못하는 사람도 만난다.
그들 중에는 말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말도 잘하는 사람이 있다.
몇 년 전, 매스컴에 자주 나오는 유명인을 만난 적이 있다.
1분에 한 번 웃음이 터질 정도로 달변가였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대화 끝에 오는 피곤함을 참기 힘들었다.
그는 누구보다 말을 잘했지만 대화는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나’였는데 테이블에 오르는 모든 주제를 ‘나’로 전환하는 습관 때문인지, 상대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에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는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는 구절이 있다.
침묵은 신뢰할 수 있는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대화 형식이다.
이런 침묵에는 ‘어색한’이란 형용사가 침범할 틈이 없다.
이때의 침묵은 말하지 않음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끝나는 곳에서 서서히 시작된다.
서로가 던진 말을 배드민턴의 셔틀콕처럼 부드러운 포물선으로 정확히 주고받는 것, 나는 그것이 최고의 대화가 아닐까 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아기는 언어가 아닌 울음과 표정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어른으로 성장하며 언어로 자기 감정과 의견을 표현하는데, 여러 나라에서 언어는 그 사람의 인품은 물론 종종 계급까지 드러낸다.
그것이 꼭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는 아니다.
그가 속한 나라와 단체가 쓰는 언어를 보면 그 집단의 품격과 됨됨이를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북한 위정자들이 쓰는 언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단어는 우리 사회의 의식과 수준을 반영한다.
그런데 언어가 부적절하게 쓰이는 예는 많다.
가령 다양한 매체에서 폭력 학생을 뜻하는 ‘일진’이라는 용어는 뭔가 앞에서 잘나가는 느낌을 준다.
전세 사기범을 칭하며 쓴 ‘빌라 왕’은 어떤가. 그 지역의 가장 비싼 아파트를 ‘대장 아파트’라고 부르는 것 역시 그렇다.
대장 아파트에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졸병 아파트’에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식시장에는 ‘정치 테마주’가 있는데, 정치인의 정책과는 무관한 학연, 지연 등에 투자하는 것이다.
‘정치 테마주’가 아니라 ‘부정부패 관련주’라고 고쳐 불러야 한다.
한국어로 ‘그 집 못산다’는 가난한 사람을, ‘그 집 잘산다’는 부자를 뜻한다.
김찬호의 책 ‘모멸감’에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이것이라고 지적한다.
‘잘사는 것=well being’인데 왜 한국에서는 부자를 잘산다고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난해도 태도와 가치관에 따라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차별하고 비하하는 맘충, 틀딱, 지잡대 같은 말이 폭증하고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별생각 없이 말하다보면 그것이 우리의 인성이 되고, 인성이 모여 다시 인생이 된다.
“생각을 조심하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하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하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하라. 성격이 된다.
성격은 (당신의) 모든 것이다.
” 마거릿 대처의 말이다.

너 자신을 속여라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학기 내내 강의실에 있는 줄조차 몰랐던 존재감 제로의 학생이 교수실로 찾아와 학업을 지속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상담한다면 어떨까. ‘프레즌스’의 저자 ‘에이미 커디’는 고개를 숙인 채 불안에 떠는 학생 얼굴에서 자신을 보았다.
열아홉 살에 자동차 사고로 뇌를 크게 다친 후, 기억력 장애로 움츠러들던 과거 말이다.
그녀의 해법은 의외였다.
“너 자신을 속여라”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억력 장애를 지닌 채 그녀가 하버드대학의 교수가 된 주문으로, “행복해서 노래하는 게 아니라, 노래해서 행복한 것이다”의 실천판이었다.
다만 타인뿐 아니라 자신까지 속이려면 더 치밀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녀는 학생에게 움츠러든 어깨와 가슴을 활짝 펴고, 허리부터 곧추세우라고 충고한다.
‘프레즌스’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나를 속여라. 그러기 위해 더 강력한 신체 언어를 구사하라!” 이 말은 내게 “너 자신이 되라”가 최악의 조언이라고 말한 애덤 그랜트의 충고를 연상시켰다.
우리가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사람이 아닌 이상 진정성을 찾으란 말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그는 내면의 목소리를 애써 찾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외면을 먼저 찾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중요한 면접이나 시험 직전, 가슴을 활짝 편 ‘원더 우먼’ 자세를 2분만 지속해도 실제 힘이 더 세진 것처럼 느끼고,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없는 장애인들조차 자세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같은 효과를 낸다고 말한다.
이것의 의학 버전은 보톡스로, 더 이상 미간과 입꼬리를 찡그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우울증 지수가 낮아졌다는 연구가 있다.
장시간 스마트폰 사용으로 생기는 ‘거북목’ 현상이 결단력과 과단성을 감소시킨다는 연구는 어떤가. 설루션으로 나는 하늘 보기를 권한다.
숙이고 있는 고개를 들어 올리는 행위만으로 어깨와 가슴이 펴진다.
가을 하늘의 청명함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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