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위직 나무’ 정이품송은 인간의 흥망을 알고 있다
정이품송이 그린 ‘이야기 지도’
가지 들어 세조 길 터준 ‘조선 최고위직 나무’
YS 취임 직전 가지 부러지며 좌우대칭 ‘휘청’
병충해·태풍·폭설 수난에도 살아남은 생명력
학교·518묘역·독립기념관 등 전국 곳곳 전파
‘자목’ 수백 그루 따라 이식되는 나무의 시간
나무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500년은 돼 보이는데.”
남자의 말을 다른 남자가 반박했다.
“더 될걸. 내기할까?”
여자가 핀잔을 줬다.
“100년도 못 살면서 싸우기는.”
자신의 나이를 두고 논쟁하는 관광객들을 내려다보며 나무는 고요했다. 인간 누구도 특정하지 못하는 세월을 통과하며 나무는 수명 짧은 인간들의 다툼을 보고 들었다.
“사진 한장 찍어줄까?”
2024년 3월14일 속리산 법주사(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입구에서 양금순(가명·82) 할머니가 말했다. 관광객들은 할머니를 쳐다보면서도 그의 말을 받아주진 않았다. 늙고 찢겨 자태를 잃어가는 소나무의 나이를 맞히느라 떠들썩한 중년의 남녀에게 할머니가 다가가며 다시 물었다.
“사진 한장 찍혀줄까?”
스치듯 관람을 마친 사람들이 차를 몰아 떠나자 할머니는 나무 옆에 혼자 남아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30년 전에 이 자리에서 노점을 시작한” 그가 “한시간 전에 만난 사람도 못 알아보는 나이”가 될 동안 나무도 오직 그 자리에서 시간을 쌓아왔다. ‘길게 살아봐야 100년’인 인간들이 수백년에 걸쳐 흘리고 간 말들을 나이테에 차곡차곡 담았다. 뿌리 박혀 꼼짝 못 하는 나무였지만 그 몸에 누적된 말들과 ‘멀리 떠난 자식들’이 인간 흥망의 길고 오랜 ‘이야기 지도’를 그리며 여전히 가지를 뻗고 있었다.
“아름답고 수려하며 역사성까지”
1200~1400년 이 땅에 인간(한반도의 첫 인류는 15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아시아로 이동한 호모 에렉투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소나무(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소나무는 1억8000만년~1억3500만년 전 전북 진안과 황해도 사리원에서 출현)는 산과 숲을 이루며 번성(우리나라 전체 산림 면적의 22%)했다. 600년에서 800년 전 어느 날 소나무 씨앗 하나가 충청북도 보은에서 싹을 틔웠다. 처음부터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나무’가 되겠다는 의지로 땅을 밀어 올린 것은 아니었다.
1464년 “연(輦·임금이 타던 가마) 걸린다.”
나무가 실제 이 말을 들었는지 실록은 언급하지 않았다. 실록의 언어는 건조했고 아첨이 없었다.
“거가(車駕·왕의 수레)가 보은현 동평을 지나서 저녁에 병풍송에 머물렀다. 중 신미(세조의 숭불정책을 이끈 승려)가 와서 뵙고, 떡 150동이를 바쳤는데, 호종(扈從)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세조실록 32권)
역사가 쓰지 않은 나무(병풍송)의 이야기를 야사가 퍼뜨렸다. 쿠데타(1453년 계유정난) 4년 만에 조카(단종)를 죽이고 왕권을 다진 세조가 즉위 10년째 되던 해 가파르고 고불고불한 말티고개를 넘어 소나무 아래 이르렀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저주의 침을 뱉은 뒤 피부병을 얻은 임금이 치료차 신미를 만나러 복천암(속리산 법주사에 딸린 암자)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길가에 홀로 우뚝 선 소나무 가지에 어가가 닿자 왕이 ‘그 말’을 했고 나무는 가지를 들어올렸다. 기특하게 여긴 세조가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 무명의 나무는 ‘정이품송’이란 이름을 얻고 ‘충’의 상징이 됐다. 불안정한 권력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 이야기는 소나무를 조선 팔도에서 최고위직 나무로 만들었다.
1919년 나무의 충절까지 끌어다 쓴 왕조는 몰락했지만 사람들이 수백년간 옮긴 말들로 나무의 명성은 영생을 얻었다. ‘소나무 망국론’(국세가 쇠약한 나라엔 소나무가 번성한다는 일본 임학자 혼다 세이로쿠의 주장)이 번성하던 시대에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거수노수명목지’는 정이품송을 ‘명목’으로 꼽았다.
1939년 전국을 돌며 남자, 여자, 백정들을 구분해 세워두고 물건 치수 재듯 ‘체격 측정’ 사진을 찍던 총독부 직원들이 품 넓은 가지 아래 자동차를 세워두고 나무의 체격을 측정했다. 일제는 식민 지배에 활용할 목적으로 한반도 전역의 유적과 유물, 민속, 자연환경 등을 촬영해 유리건판(필름이 나오기 전 유리에 이미지 포착)에 새겼다. 사진이 된 정이품송은 번호 ‘390293’을 달고 ‘유리원판목록집Ⅱ’ 207쪽에 수록됐다.
1962년 조선총독부가 1933년 공포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 폐지되고 대한민국 정부의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됐다. 정이품송은 천연기념물 103호로 지정됐다. “곧게 자라고 수세가 왕성하고 수관 및 수형이 우산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답고 수려하며 역사성이 있다”는 지정 사유가 국가지정문화재대장에 기재됐다.
1970년 500여년 전 나무 아래서 쉬었던 임금처럼 쿠데타로 권력을 쥔 대통령이 ‘군사정변’ 10년째 되던 해 나무 앞에 섰다. ‘각하의 은덕’을 칭송하는 당시 충북도지사의 말이 정이품송 앞 속리산국립공원 표지석에 새겨져 나무의 귀에 박제됐다.
“(이해) 5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이곳에 이르시어 국민정서 순화의 요람지로서 속리산국립공원(3월24일 지정) 보호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시고 공원 환경 조성과 사찰 정화에 관하여 구체적 개발 방향을 지시하심과 아울러….”
잃어버린 좌우대칭
상록이라고 언제나 청춘은 아니었다.
1973년 우회 도로 공사 중 도로가 나무 쪽 지면보다 높아졌다. 60㎝ 두께의 흙으로 정이품송 주변을 덮었다. 잔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시름시름 앓았다. 훗날 밑동이 썩어 잘록해지는 원인(1989년 ‘외과수술’로 흙 제거)이 됐다.
말 없는 나무는 ‘몸의 숫자’로 말했다. 키 16.5m, 사람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5.3m, 수관폭(가지와 잎을 포함한 나무의 너비)은 동서 13.7m와 남북 17.2m.(현재 정이품송 앞 현황판 수치) 나무는 측정 시기마다 숫자를 바꿔가며 병충해와 모진 날씨가 가한 고통을 말했다.
1977년 말티고개 정상의 소나무 7그루에서 솔잎혹파리가 발견됐다. 세조가 정이품송에 닿기 전 넘었던 고개를 솔잎혹파리들이 점령하며 세조의 군사들보다 무섭게 정이품송을 향해 진군했다.
1981년 정이품송이 벌겋게 타들어가며 고사 직전에 이르렀다. 전체 이파리의 78.2%가 벌레혹에 장악됐다.
1982년 나무 주위에 높이 18m 크기의 초대형 방충망을 설치해 벌레의 침입을 막았다.
1989년 “하루빨리 무거운 철책을 벗었으면 좋겠어요.”
정이품송 현장관리인 박헌(당시 60)이 취재 온 기자(그해 2월7일 중앙일보)에게 말했다. 그는 “정이품송의 명성이 철책으로 둘러싸인 뒤부터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방충망은 1991년에야 완전 제거됐다.
1993년 정이품송의 서쪽 가지 1개가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에 부러졌다. 지름 26㎝에 6.5m의 가지가 잘려 나갔다. 우아했던 나무의 좌우대칭이 무너지는 시작점이었다. 부러진 가지를 본 노점상 양금순은 당시 “나라의 큰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했다. 김영삼 대통령 취임 사흘 전의 일이었다. 당선자 집무실에 대형 사진으로 걸려 있던 정이품송이 훼손되자 상처 입은 나무를 두고 인간들이 뒷말로 다퉜다. 유불리에 따라 “정권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거나 “아첨배들이 청소될 징조”라며 해석을 달리했다.
1994년 태풍 브렌던의 힘 앞에 북쪽 가지가 20~30㎝ 내려앉았다.
2004년 3월에 내린 폭설로 남쪽 중간 가지 1개가 부러졌다.
2005년 정상부 가지 하나가 꺾여 나갔다.
2007년 거센 바람에 7m짜리 큰 가지 하나를 더 잃었다. 박헌(당시 78)이 발견해 보은군에 알렸다. 서쪽 가지의 잇따른 수난으로 정이품송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2010년 강풍에 서쪽 가지 1개(4m)가 추가로 꺾였다. 박헌(당시 81)은 “몇개 남지 않은 큰 가지를 또다시 잃”어 “보기에도 민망하다”(12월7일 연합뉴스)며 탄식했다.
2024년 3월14일 나무가 뿜는 향이 상쾌했다.
보은군 오창리의 한 양묘장에서 어린 소나무들이 촘촘히 자라고 있었다. ‘검사번호’가 적힌 푯말을 건 나무들이 사이사이 섞여 있었다. 군에서 운영 중인 비밀 양묘장의 ‘정이품송 자식들’이었다.
보은군은 2010년부터 양묘장을 정비해 정이품송 ‘후계목’을 육성해왔다. 노쇠한 나무의 소멸에 대비하고 “소중한 천연생물자원의 보존·증식”을 위해서였다. 위탁받은 전문가가 솔방울에서 씨앗을 채취해 모종으로 키운 뒤 양묘장에 옮겨 심었다.
정이품송 자목 1만그루가 오창리와 개안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2012~2015년 싹을 틔운 9~12살짜리 나무들이었다. 유전자 검사로 ‘직계’가 확인된 나무들은 번호를 매겨 구분했다. 보은군은 “지금은 생김새가 제각각이지만 디엔에이가 확인된 자목들은 성장하면서 정이품송을 닮아가지 않을까 기대”(이문형 산림경영팀장)했다.
“나무가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1980년 정이품송 ‘대 잇기’는 충청북도가 먼저 시작했다. 솔잎혹파리의 공격이 한창일 때였다. 충북도는 임업시험장(현재 충북 산림환경연구소)에서 자목을 키웠다. 30년 뒤 보은군도 선택할 ‘씨앗 채취’ 방식이었다. 정이품송 솔방울 20여개를 채취해 이듬해 봄 파종했다. 1993년 취임 직전 새 대통령이 중히 여기던 나무의 가지가 부러진 뒤 충북도는 12년 키운 자목 5그루를 정이품송 곁에 이식(정이품송 생육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2007년 재이식)했다.
2001년 국립산림과학원이 정이품송과 강원도 삼척 준경묘(태조 이성계의 5대조 할아버지 묘소) 소나무의 ‘혼례’를 치렀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한 몸에 존재(암수한그루)했으나 정이품송은 자목 육성 주체와 방식에 따라 어미(씨앗 채취·발아)도 되고 아비도 됐다. 산림과학원은 “신랑” 정이품송의 송홧가루를 “신부로 간택”된 젊고 건강한 소나무(95살)의 암꽃과 교배했다. “역사적 의미와 정서”를 고려해 “혈통 보존”을 하려면 정이품송이 남성이어야 한다고 산림과학원은 설명했다.
2002년 ‘정이품송이 아내를 두고 먼 타향으로 새장가를 가 섭섭하다’는 여론이 보은 주민들 사이에서 일었다. 보은엔 천연기념물 ‘서원리 소나무’(600살 추정)가 있었다. 비슷한 나이와 두 갈래로 갈라진 줄기 탓에 정이품송의 짝인 ‘정부인송’으로 불렸다. 정이품송의 씨앗을 틔워 후계목을 키워오던 충북 산림환경연구소(옛 임업시험장)가 정이품송과 서원리 소나무를 암수 교배했다. 그 자목 150여그루 가운데 하나를 2014년 4월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로 옮겨 심었다.
2024년 3월13일 “나무가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두 팔로 안아야 할 만큼 굵어진 정이품송 자목 1그루가 국립5·18민주묘지(광주 북구 운정동)에서 솔방울을 여럿 매달고 있었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소나무는 2세를 남기기 위해 솔방울을 맺는다”고 유춘학 묘지 관리소 조경팀장이 말했다. 그는 “산림과학원에 가서 직접 받아온” 자목을 15년간 가꿔왔다.
정이품송을 삼척 준경묘 소나무와 짝지어 얻은 58그루의 “장자목”(산림과학원 “아비가 정이품송이 확실한 첫번째 자목”) 중 하나였다. 산림과학원은 2009년 분양 신청을 받아 5·18 묘역과 국회의사당, 독립기념관, 남산공원관리사업소 등 10개 기관에 1그루씩(“2021년까지 총 20그루를 분양하고 38그루는 현재 수원의 혈통보존원에서 관리”) 보냈다. 학살된 사람들의 묘지에 심긴 자목을 “주변 산들이 바람을 막아”(유춘학) 피해 없이 키워냈다.
나무가 권력자들의 것만은 아니었다. ‘찢겨도 살아 있는 생명력’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나무를 가져다 심었다.
자식들 등에 업혀 전국으로
2024년 3월15일 검사번호 ‘2021-255호’.
보은군 비밀 양묘장에서 길러져 2021년 255번째 유전자 검사를 받고 정이품송 자목 자격을 인정받은 어린 소나무가 어린 학생들의 등하교를 지키고 있었다.
보은군은 2019년 자목 분양 대상을 민간으로 넓혔다. ‘천연기념물 자목 장사’ 논란이 일었다. 당시 전국 자치단체와 연구소 등 10개 기관에서 천연기념물 46건의 후계목을 육성하고 있었으나 민간 판매는 보은군이 처음이었다. 판매 중단을 요구하며 제동을 걸었던 문화재청은 법적 검토를 거친 뒤 ‘자목은 천연기념물이 아니’라며 허가했다.
보은군은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총 212그루를 공공(88)과 민간(124)에 분양했다. 처음 두해는 ‘완판’됐다. 정이품송이 사는 충북(42)에 머무는 자목이 가장 많았고, 경기(37), 충남(23), 경북(19) 차례로 퍼져 나갔다.
민간 분양 124그루 중 20그루는 초(2)·중(3)·고(4)·대학교(10)와 책마을(1)로 갔다. 초등학교로 간 2그루 중 1그루(다른 1그루는 서울)가 2021년 세종(18)으로 향했다. 영광과 상처와 질병을 껴안고 600살 넘게 살아온 소나무의 이야기가 인공 번식된 자식들에게 업혀 전국 각지로 이식됐다.
자목 ‘2021-255호’는 세종시 부강초등학교 정문 옆에 자리잡았다. 학교는 107년의 역사를 지닌 부강면 유일의 초등학교였다. 부강초에서 정이품송의 이야기는 독립운동가 박열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당시 9)의 이야기와 만났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무적자’로 1912년 일본에서 건너온 그가 부강초의 전신인 부강공립심상소학교에 그해 4학년으로 입학했다.
총동창회가 분양받아 기증한 ‘2021-255호’(2014년생)는 아직 가늘고 여렸다. “학교 지킴이실 바로 옆에 심겨 지킴이실 그늘에 햇빛이 가리기도 했”(우상균 교감)다. “나무의 생육을 걱정한 선생님들이 지킴이실의 위치를 옮겨” 나무의 하늘을 열었다.
학생 수가 줄어 부강초도 올해부터 1학년은 한 학급만 편성됐다. 입학 4년째인 나무를 앞으로 몇명의 학생들이 볼 수 있을지 학교도 알지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신화는 나무보다 인간을 위해 존재했다. 자식들을 떠나보낸 어미이자 아비, 혹은 부인지 모인지 생각해본 적 없는, 자신이 평민인지 고관대작인지 중요치 않은 소나무가 인간 소망과 욕망과 길흉화복을 짊어지고 언제 끝날지 모를 이야기를 써나갔다.
2012년 전국에서 10명의 생명을 빼앗은 태풍 볼라벤이 보은을 지나며 정이품송의 4.5m짜리 가지를 꺾었다.
2021년 속리산에 몰아친 초속 5.8~7.7m의 강풍이 나무의 서쪽 가지 1개(3.5m)를 앗아갔다.
2023년 태풍 카눈이 북쪽 가지들을 덮쳤다. 길이 4.5m와 3.5m 가지 2개를 부러뜨렸다. 나무 의사 안철희(현대나무병원 원장)가 “잘린 부위를 수습하고 상처를 치료”했다. 그는 2010년부터 보은군과 계약을 맺고 정이품송의 건강을 지켜왔다. 근래 기후위기가 깊어지자 그도 “강풍·폭설에 대비해 지지대 등을 주기적으로 보수하고 폭염에 시들지 않도록 뿌리와 토양에 수분을 공급”하며 “긴장”했다.
그에게 카눈 피해를 알린 군청엔 “50년 동안” 소나무와 “동고동락”(2023년 8월11일 케이비에스)한 매점 상인 배옥자(81)가 연락했다. 그는 정이품송 관리인 박헌의 아내였다. 부산 출신으로 황해도 실향민 남편과 1970년대 중반부터 나무를 보살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론 군청에서 마련해준 간이매점에서 산나물 등을 팔며 나무에 닥친 긴급상황을 신고했다. “정이품송에 정성으로 치성한 사람이 소원 성취”했다거나 “까마귀가 정이품송에 앉아 울어대면 이삼일 후에 초상이 났다”(2013년 12월26일 보은신문)는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전설’이 됐다.
다만 그 자리에서 말없이
2024년 3월15일 “사진 한장 찍혀줄까?”
양금순 할머니가 거듭 물었다. 엿을 산 젊은 커플이 “괜찮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나무를 보러 오는 관광객이 예전만 못하”니 엿과 뻥튀기를 사줄 “손님도 크게 줄었”다. 사진을 찍어주거나 찍혀주고 “그 참에 물건 하나 팔면서” 할머니는 “그렇게 먹고살았”다.
나무 건너편의 매점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매점에서 정이품송을 지켜보던 배옥자는 더는 나무를 살피지 못했다. “지난해 연말부터 뇌종양으로 투병 중”이라고 딸(46)이 전화로 말했다.
“관리초소도 매점도 없이 주변이 허허벌판일 때부터 정이품송의 상태를 일지로 보고했던 아빠(박헌)와 엄마”의 시간이 나무의 길고 오랜 일생 앞에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그 사람들을 수없이 떠나보내며 소나무는 다만 그 자리에 말없이 서 있을 뿐이었다.
2월29일 보은군이 2024년 정이품송 자목 분양(200그루) 신청 접수를 마감했다.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아” 공고 수량의 절반(101그루)만 신청됐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