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과학탐구 속 피어난 미술…튤립 파동기의 유산

 

미술

17세기 과학탐구 속 피어난 미술…튤립 파동기의 유산

네덜란드 플랑드르 출신의 미술 상인이자 화가인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1573~1621)는 꽃 정물화를 독자적 장르로 확립한 최초의 화가로 꼽힌다.
그는 상징주의와 과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정교한 꽃 그림을 그렸다.
그의 독자적인 그림 양식은 세 명의 아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보스샤르트가 평생을 보낸 네덜란드 남서부의 도시 미델부르크는 네덜란드 황금기 꽃 그림의 중심지가 됐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1609),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 동판에 유채 | 퍼블릭 도메인

보스샤르트의 1609년 작 ‘명나라(만력제 시대)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은 그의 꽃 그림의 전형을 보여 준다.
동판에 유화로 그려진 이 그림은 무채색의 어두운 배경에 다채로운 꽃잎들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며 아주 도드라지게 표현돼 있다.

이 화려한 꽃다발은 인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고 세밀하게 그려졌다.
꽃병에 담긴 꽃들은 개화기가 각기 다르다.
보스샤르트는 자신이 원하는 꽃들의 정확한 조합을 위해 각 꽃을 시기별로 사전에 그려둔 후 하나의 화폭에 다시 조화롭게 배치했다.

그가 정밀하게 그려 넣은 꽃의 배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미시적・거시적 발견의 시대였던 네덜란드 황금기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속 꽃병의 세부 | 퍼블릭 도메인

세상의 축소판

쿤스트캄머의 예시. ‘예술과 호기심의 방’(1636), 프란스 프랑켄 2세 | 퍼블릭 도메인

16세기 말 네덜란드 전반에는 생동감 넘치는 발견과 탐험 정신이 가득했다.
당시 안경제조업자였던 한스 얀센과 자카리아스 얀센은 1593년 최초의 복합 현미경을 발명했다.
동시대를 살았던 네덜란드인 한스 리퍼세이와 야콥 메티우스는 1608년 망원경을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새로운 발명품의 등장은 우주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물질에 대한 문화 의식의 시야를 넓혔다.
보스샤르트는 이러한 새로운 관점에 공감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새로운 관점을 정물화에 적용해 꽃과 물체를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한 듯 그리기 시작했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속 꽃과 조개껍질의 세부 | 퍼블릭 도메인

그의 작품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에는 과학자나 수집가의 시각에서 바라본 이국적인 사물에 대한 감성이 잘 표현돼 있다.
조개껍질, 중국 명나라 시대의 화병, 살아있는 곤충 등 수집품이 함께 포함된 이 작품은 16~17세기 독일에서 각종 수집품을 모아둔 방을 일컫는 말인 ‘쿤스트캄머(kunstkammer)’를 모방해 그려졌다.
쿤스트캄머에는 지질학, 고고학, 자연사, 종교 및 역사 유물, 미술품 등 다양한 범주에 속하는 물품들이 엄선돼 전시됐다.
이른바 ‘경이로운 방’이라 불리는 이 공간은 박물관의 전신이기도 하다.

특별한 꽃

이 작품에 등장하는 튤립, 수선화, 시클라멘, 붓꽃, 장미, 카네이션 등의 꽃은 당시 일반적으로 정원에서 감상하는 식물이었다.
화가이자 미술품 판매상이었던 보스샤르트는 미술 시장의 선호도와 수집가들의 이국적 취향에 맞춰 이러한 꽃들을 배치했다.
또한 그는 부유한 수집가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의 관심사에 맞춘 많은 세부 사항을 그림에 배치했다.

이 작품은 동판에 그려졌다.
동판 표면은 매우 매끄럽기에 광택과 균일한 채색이 가능하다.
그 덕에 높은 수준의 사실감을 구현할 수 있다.
그는 유화 물감을 겹겹이 발라 변색하지 않고 오래 반짝이는 질감을 유지하는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완성했다.

그림 전경의 꽃들은 가장 많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인다.
반면 어두운 부분에 배치된 꽃은 그림자에 가려져 구도에 깊이감을 더한다.
각 꽃은 겹치는 곳 없이 배치돼 더욱 선명하고 화려하게 보인다.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들의 정물’ 흰 백합의 세부 | 퍼블릭 도메인

꽃잎에 불꽃 같은 붉은 줄무늬가 있는 세 송이의 노란색 튤립은 삼각형 구도로 배치돼 꽃다발의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준다.
맨 위에는 흰 백합이 배치돼 흰색 꽃병과 조화를 이룬다.

네덜란드 황금기 튤립 파동

튤립은 원서식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거쳐 16세기 유럽으로 전파됐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네덜란드는 국제적으로 튤립을 재배하는 대표지로 알려졌다.

튤립은 그 아름다움으로 처음부터 네덜란드인들의 마음을 빼앗았다.
그들의 튤립에 대한 과한 애정은 품종 개발과 효율적 재배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수집가들의 투기까지 더해져 17세기에는 ‘튤립 파동’으로 치달았다.
1637년 튤립 파동이 정점일 당시 튤립 구근 하나는 숙련된 장인의 연간 수입의 10배가 넘는 가격에 팔리기도 했다.

가장 비싼 꽃

‘셈퍼 아우구스투스’(17세기), 작자 미상 | 퍼블릭 도메인

17세기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됐던 셈퍼 아우구스투스는 꽃잎에 불꽃 같은 줄무늬가 있는 튤립의 한 종류다.
이 꽃은 높은 희소성 때문에 더욱 많은 인기를 얻었다.
1624년에는 이 꽃은 단 12송이만 존재했고, 한 개인이 모두 소유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정된 공급에 꽃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꽃이 있는 정물’(1639), 한스 볼론기르 | 퍼블릭 도메인

오늘날 이 종은 멸종했지만, 우리는 여러 예술 작품 속에서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네덜란드 황금기의 정물화가 중 한 명인 한스 볼론기르(1600~1645)는 ‘꽃이 있는 정물’(1639)에 이 꽃의 화려함을 아름답게 담아냈다.

20세기 영국의 원예 작가 안나 파버드는 저서 ‘튤립’에서 이 꽃에 대해 “튤립 파동이 거세지기 이전부터 이 꽃은 걸작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오늘날 더는 이 불꽃을 품은 꽃을 가질 수 없지만,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들이 영감받아 그린 많은 그림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시각에서 탄생한 걸작

‘명나라 화병에 담긴 꽃’(1628), 발타자르 반 데르 아스트 | 퍼블릭 도메인

과학기술과 국제 무역의 발전으로 탄생한 아름다운 꽃 셈퍼 아우구스투스는 비록 현재 그 실재가 전해지고 있진 않지만, 발전의 시류에서 생겨난 새로운 미술 기법으로 탄생한 수많은 걸작은 지금까지도 우리 곁에 남아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전하고 있다.

마리 오스투는 미술사와 심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그랜드 센트럴 아틀리에의 핵심 프로그램에서 고전 드로잉과 유화를 배웠다.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다른 시각…“본질은 가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한일 간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일본 육군이 위안부를 충원했으며 강제연행이 이뤄졌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지만,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연히 이 판에 발을 들였는데, 이 일을 벌써 6년째 하고 있네요.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병헌(金柄憲) 씨는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으로 향한다.
지난 2019년 처음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마이크를 잡은 김 씨는 1992년 이래 이어져 온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끝장내겠다는 각오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군이 조선인 10대 소녀를 20만 명이나 강제로 연행해서 전장(戰場)의 성노리개로 삼았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소설에 불과하죠.

그의 동료들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 ‘정의기억연대’ 측 ‘수요시위’에 맞불을 놓는 형식으로 ‘반(反)수요시위 집회’를 열자며 김 씨를 끌여들였을 때 김 씨는 ‘단발성 이벤트’로 단순히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거리에서 마이크를 손에 쥐어 보고 ‘정의기억연대’의 주장을 들여다보고 또 검토하고 연구해 보면 볼수록 김 씨는 ‘수요시위’를 반드시 중단시켜야겠다는 전의(戰意)가 불타올랐다.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

김 씨는 원래 한문학자다.
김 씨의 저서 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한자·한문 교재도 있다.
지금은 좌익 진영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맞선 투사가 됐지만 원래부터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가 하던 일은 중·고등학교 검정 역사 교과서를 비판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한문을 좀 알다 보니 고문서를 다룰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1차 사료(史料)와 교과서상 기술을 비교·분석하는 일을 하게 됐지요. 특히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오류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배우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교과서 비평을 하게 됐죠. 성과도 많았습니다.
제가 문제를 제기해서 교과서 내용 여러 곳이 수정됐어요.

김 씨가 처음 역사 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대법원의 2018년 조선인 징용공 관련 판결과 관련해 이우연(李宇衍)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의 주도로 결성된 ‘반일동상반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근·현대사 공부를 하면서 개항기부터 식민지기에 걸쳐 발행된 신문 기사들을 많이 봐 왔어요. ‘일본군 위안부’는 당시 일본제국 내에서 제도로써 정착된 공창(公娼)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개전에 따라 전선으로 옮겨간 데 불과한 것인데, 좌익 진영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걸 그 때 알게 됐어요. 참 황당했죠.

그러면서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가난’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그 전신(前身)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시절인 1990년대 초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소위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작업을 해 왔는데, 김 씨는 ‘위안부 증언집’ 모두를 분석한 결과 우리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2007년 미 하원 ‘위안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간 이용수(李容洙) 씨는 그 자리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한밤중에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내 등에 뾰족한 것을 대고 입을 막고서는 날 끌고 갔다’고 말했지만, 1993년 출판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군(軍) 위안부들>에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받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집에 알리지도 않고 선뜻 따라나섰다’고 돼 있어요. 같은 사건을 두고 완전히 다른 증언을 한 셈입니다.

“이 씨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길원옥 씨의 경우 두 번 매춘에 나섰다고 해요. 처음 매춘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빚 때문이었고 두 번째 매춘 역시 친구들과 함께 돈 벌러 간 것이라고 길 씨는 진술했습니다.
길 씨의 어머니는 길 씨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고 해요. 이 밖에도 ‘증언집’을 보면 자신을 업소에 팔아넘긴 부모를 원망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병헌 씨가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2.6 | 박순종 객원기자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는 불법…편파적 경찰도 문제

2019년 12월4일 이래 ‘정의기억연대’ 측 ‘수요시위’에 대한 ‘맞불 집회’는 중단 없이 6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김 씨는 이 ‘맞불 집회’가 경찰의 갖은 방해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관할 경찰서인 서울 종로경찰서는 애초에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김기수 변호사가 우리 모임을 대표해 경찰서에 집회 신고서를 냈는데, 당시 종로서 집회 신고 접수 담당이었던 강평준 경사는 ‘정의기억연대도 집회를 하지 못해 문화제로 행사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가 집회를 개최하고자 한 장소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집회 개최 금지 구역이라며 집회 신고를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보니 ‘정의기억연대’는 2017년 10월부터 집회신고서를 종로서에 제출했고 종로서는 이를 수리해 온 것 아니겠습니까? 경찰이 ‘수요시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죠.

서울 종로경찰서의 ‘맞불 집회’에 대한 방해 공작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른바 ‘정의기억연대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됐다.
그사이 자유·우파 시민단체 ‘자유연대’가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 선순위 집회 신고를 내면서 ‘정의기억연대’는 28년 만에 ‘수요시위’ 집회 장소를 내어주고 쫓겨났다.
하지만 ‘맞불 집회’ 측이 온전히 집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선순위 집회 신고 단체의 동의 없이는 집회 장소를 분할한다거나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경찰은 ‘상호 상반되는 성격의 단체 간 충돌’을 핑계로 ‘행정지도’를 하겠다며 우리 집회 장소를 갈라서 ‘평화의 소녀상’ 앞은 저들에게 내어주고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우리가 집회를 하는 게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핵심 요건인데, 그걸 못 하게 방해하고 있는 거죠. 경찰에 항의를 하면 경찰 측은 ‘당신네 집회 참가자 수가 적지 않은가’라고 반문을 해요. 그렇다고 ‘우리 집회 참가자 수가 얼마가 되면 우리가 신고한 장소에서 온전히 집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도 경찰은 대답을 못 해요.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점령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와 관련해 김 씨는 ‘정의기억연대’의 편을 들고 있는 정치 세력이 경찰 조직에 입김을 넣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길고 지난한 싸움…결국 진실이 이길 것

대학교 학부 수업 도중 학생과의 토론 과정에서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2020년 재판에 넘겨진 류석춘 전(前) 연세대학교 교수에 대해 류 전 교수 사건을 심리한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1단독 정금영 판사는 해당 발언이 ‘학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의기억연대’ 측은 해당 판결이 “반인권적 판결이라며 반발했지만 김 씨는 판결에 큰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제연행’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고 박유하 전 세종대학교 교수의 대법원 판결 취지를 좇아 ‘학문의 자유’를 내세워 무죄를 고하기는 했지만 사법부가 결정적으로 ‘진실’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류 전 교수 재판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일본군 위안부’가 실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음을 입증해야 하는 검찰 측이 소위 ‘강제연행’ 사실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류 전 교수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은 ‘일본군이 조선 여성들을 끌고 갔느냐 끌고 가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당시 사회적 상황이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어요. 결국 ‘구조적 강제’를 말한 것인데, 오늘날 대부분의 회사원들도 모두가 진정 원해서 회사에 나가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노예’라는 주장과 같은 논리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구조적 강제’를 처음 주장하고 나온 인물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인데, 요시미 교수의 해당 주장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궤변’이지요.

반대자들의 중단 없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는 여전히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김 씨는 지난 5년간 ‘반(反)정의기억연대’ 투쟁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처음 거리로 나섰을 땐 사실 많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지금의 여론을 보면 우리 주장이 많이 알려진 데다가 우리 주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고 봅니다.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다른 시각…“본질은 가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한일 간 논쟁의 중심에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일본 육군이 위안부를 충원했으며 강제연행이 이뤄졌다는 게 일반적 인식이지만,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있습니다.

“우연히 이 판에 발을 들였는데, 이 일을 벌써 6년째 하고 있네요.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병헌(金柄憲) 씨는 매주 수요일이면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으로 향한다.
지난 2019년 처음 거리로 나와 피켓을 들고 마이크를 잡은 김 씨는 1992년 이래 이어져 온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끝장내겠다는 각오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군이 조선인 10대 소녀를 20만 명이나 강제로 연행해서 전장(戰場)의 성노리개로 삼았다는 주장은 말 그대로 소설에 불과하죠.

그의 동료들이 주한 일본대사관 앞 ‘정의기억연대’ 측 ‘수요시위’에 맞불을 놓는 형식으로 ‘반(反)수요시위 집회’를 열자며 김 씨를 끌여들였을 때 김 씨는 ‘단발성 이벤트’로 단순히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거리에서 마이크를 손에 쥐어 보고 ‘정의기억연대’의 주장을 들여다보고 또 검토하고 연구해 보면 볼수록 김 씨는 ‘수요시위’를 반드시 중단시켜야겠다는 전의(戰意)가 불타올랐다.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

김 씨는 원래 한문학자다.
김 씨의 저서 중에는 베스트셀러가 된 한자·한문 교재도 있다.
지금은 좌익 진영의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맞선 투사가 됐지만 원래부터 그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가 하던 일은 중·고등학교 검정 역사 교과서를 비판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한문을 좀 알다 보니 고문서를 다룰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1차 사료(史料)와 교과서상 기술을 비교·분석하는 일을 하게 됐지요. 특히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오류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잘못된 역사 지식을 배우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진해서 교과서 비평을 하게 됐죠. 성과도 많았습니다.
제가 문제를 제기해서 교과서 내용 여러 곳이 수정됐어요.

김 씨가 처음 역사 문제로서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인식하게 된 계기는 대법원의 2018년 조선인 징용공 관련 판결과 관련해 이우연(李宇衍)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경제학 박사)의 주도로 결성된 ‘반일동상반대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근·현대사 공부를 하면서 개항기부터 식민지기에 걸쳐 발행된 신문 기사들을 많이 봐 왔어요. ‘일본군 위안부’는 당시 일본제국 내에서 제도로써 정착된 공창(公娼)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개전에 따라 전선으로 옮겨간 데 불과한 것인데, 좌익 진영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걸 그 때 알게 됐어요. 참 황당했죠.

그러면서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가난’에 있다고 잘라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그 전신(前身)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약칭 ‘정대협’) 시절인 1990년대 초중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소위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아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작업을 해 왔는데, 김 씨는 ‘위안부 증언집’ 모두를 분석한 결과 우리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군과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은 없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설명했다.

“2007년 미 하원 ‘위안부’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간 이용수(李容洙) 씨는 그 자리에서 ‘일본군 병사들이 한밤중에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내 등에 뾰족한 것을 대고 입을 막고서는 날 끌고 갔다’고 말했지만, 1993년 출판된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군(軍) 위안부들>에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받고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집에 알리지도 않고 선뜻 따라나섰다’고 돼 있어요. 같은 사건을 두고 완전히 다른 증언을 한 셈입니다.

“이 씨의 증언은 기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길원옥 씨의 경우 두 번 매춘에 나섰다고 해요. 처음 매춘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빚 때문이었고 두 번째 매춘 역시 친구들과 함께 돈 벌러 간 것이라고 길 씨는 진술했습니다.
길 씨의 어머니는 길 씨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다고 해요. 이 밖에도 ‘증언집’을 보면 자신을 업소에 팔아넘긴 부모를 원망하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들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을 이끌고 있는 김병헌 씨가 일본대사관 인근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2022.6 | 박순종 객원기자

◇“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는 불법…편파적 경찰도 문제

2019년 12월4일 이래 ‘정의기억연대’ 측 ‘수요시위’에 대한 ‘맞불 집회’는 중단 없이 6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런데 김 씨는 이 ‘맞불 집회’가 경찰의 갖은 방해를 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관할 경찰서인 서울 종로경찰서는 애초에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김기수 변호사가 우리 모임을 대표해 경찰서에 집회 신고서를 냈는데, 당시 종로서 집회 신고 접수 담당이었던 강평준 경사는 ‘정의기억연대도 집회를 하지 못해 문화제로 행사 진행하고 있다’며 우리가 집회를 개최하고자 한 장소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른 집회 개최 금지 구역이라며 집회 신고를 수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보니 ‘정의기억연대’는 2017년 10월부터 집회신고서를 종로서에 제출했고 종로서는 이를 수리해 온 것 아니겠습니까? 경찰이 ‘수요시위’를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고의로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죠.

서울 종로경찰서의 ‘맞불 집회’에 대한 방해 공작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른바 ‘정의기억연대 회계 부정 의혹’이 제기됐다.
그사이 자유·우파 시민단체 ‘자유연대’가 주한 일본대사관 맞은편 ‘평화의 소녀상’ 앞에 선순위 집회 신고를 내면서 ‘정의기억연대’는 28년 만에 ‘수요시위’ 집회 장소를 내어주고 쫓겨났다.
하지만 ‘맞불 집회’ 측이 온전히 집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선순위 집회 신고 단체의 동의 없이는 집회 장소를 분할한다거나 할 수 없어요. 하지만 경찰은 ‘상호 상반되는 성격의 단체 간 충돌’을 핑계로 ‘행정지도’를 하겠다며 우리 집회 장소를 갈라서 ‘평화의 소녀상’ 앞은 저들에게 내어주고 있어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우리가 집회를 하는 게 우리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핵심 요건인데, 그걸 못 하게 방해하고 있는 거죠. 경찰에 항의를 하면 경찰 측은 ‘당신네 집회 참가자 수가 적지 않은가’라고 반문을 해요. 그렇다고 ‘우리 집회 참가자 수가 얼마가 되면 우리가 신고한 장소에서 온전히 집회를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도 경찰은 대답을 못 해요.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우리가 ‘평화의 소녀상’을 점령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것이지요.

그 이유와 관련해 김 씨는 ‘정의기억연대’의 편을 들고 있는 정치 세력이 경찰 조직에 입김을 넣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길고 지난한 싸움…결국 진실이 이길 것

대학교 학부 수업 도중 학생과의 토론 과정에서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이라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2020년 재판에 넘겨진 류석춘 전(前) 연세대학교 교수에 대해 류 전 교수 사건을 심리한 서울서부지방법원 형사1단독 정금영 판사는 해당 발언이 ‘학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의기억연대’ 측은 해당 판결이 “반인권적 판결이라며 반발했지만 김 씨는 판결에 큰 하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강제연행’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하지 않고 박유하 전 세종대학교 교수의 대법원 판결 취지를 좇아 ‘학문의 자유’를 내세워 무죄를 고하기는 했지만 사법부가 결정적으로 ‘진실’을 외면했다는 것이다.

“류 전 교수 재판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일본군 위안부’가 실제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됐음을 입증해야 하는 검찰 측이 소위 ‘강제연행’ 사실을 전혀 입증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류 전 교수 재판에 검찰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은 ‘일본군이 조선 여성들을 끌고 갔느냐 끌고 가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당시 사회적 상황이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어요. 결국 ‘구조적 강제’를 말한 것인데, 오늘날 대부분의 회사원들도 모두가 진정 원해서 회사에 나가고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노예’라는 주장과 같은 논리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구조적 강제’를 처음 주장하고 나온 인물은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의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인데, 요시미 교수의 해당 주장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연행’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한마디로 ‘궤변’이지요.

반대자들의 중단 없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수요시위’는 여전히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김 씨는 지난 5년간 ‘반(反)정의기억연대’ 투쟁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한다.

“처음 거리로 나섰을 땐 사실 많이 두려웠어요. 하지만 지금의 여론을 보면 우리 주장이 많이 알려진 데다가 우리 주장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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