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기의 특징과 멋진 노인



by 김동규

펜하우어의 글을 읽다가 노년기의 특징이 언급된 부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경험하고 생각한 것과 많이 일치하기에 소개합니다.
첫 번째 특징은 편안함과 안정을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노년기의 빈곤은 커다란 불행이다.
궁핍에서 벗어나고 건강이 유지되면 노년기는 인생에서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노인의 주된 욕구는 편안함과 안정이다.
그 때문에 노년이 되면 이전보다 훨씬 더 돈을 사랑한다.
사랑의 여신 비너스의 버림을 받았으니 술의 신 바쿠스로 기분을

전환하려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홍성광 옮김, 을유문화사, 2021, 259쪽.

두 번째 특징은 환멸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화가 난 듯 보이고 냉소적이고 무표정한 모습의 노인들을 자주 볼 수 있죠. 사실 세상의 가혹한 진실을 많이 본 사람이 가지는 대체적인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삶에 자극을 주고 활동에 박차를 가한 착각이 사라져 버려, 세상의 온갖 화려함, 특히 부귀영화와 권세의 무가치함과 공허함을 인식한다.
가장 소망하던 일이나 열망하던 동경의 배후에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점차 우리의 생존 전체가 대단히 빈곤하고 공허하다는 통찰에 도달한다.
일흔 살이 되어야 비로소 전도서의 첫 구절('헛되고 헛되도다')을 제대로 이해한다.

같은 책, 같은 곳

세 번째로 노년기가 되면 더욱 굼뜨고 우둔해집니다.

고령이 되면 더욱 로봇처럼 된다.
그들은 항상 같은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행한다.
외부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아도 그런 점은 더 이상 변하지 않거나 그들에게서 어떤 새로운 것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같은 책, 같은 곳

사실 이 세 가지 특징은 불가피한 면이 있습니다.
젊은 연령층에겐 이해받기 어렵고 추해 보이지만, 나이 듦이 몰고 온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멋진 노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첫 번째와 세 번째 특징을 두 번째 특징인 환멸로 제거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환멸로 일관된 냉소주의자 자신을 마지막으로 다시 환멸하는 것이지요. 해법이 너무 철학적인가요? 하하하. 그렇습니다.
멋진 노인이 되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말을 했다지요.

“젊을 때 철학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되고, 또 나이가 들어서 철학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는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있을 수 없다.
... 젊을 때나 나이가 들어서나 사람은 철학을 해야 하며, 후자의 경우 신과의 접촉을 통하여 또 지난날들을 회고하며 회춘하기 위해 철학을 하고, 전자의 경우 어리더라도 노인들과 마찬가지로 미래 앞에서 확고해지기 위해 철학을 해야 한다.

'회춘하기 위해서 노인은 철학해야 한다' 조금 알쏭달쏭 한 말일 수 있습니다.
회춘한다는 건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는 뜻이죠. 그것은 영원한 젊음을 유지한다는 말이며, 유한자가 무한의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신과의 접촉')는 뜻입니다.
인간은 죽습니다.
탄생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자입니다.
하지만 무한과 접촉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무한과 만나는 그런 영역을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이라 불렀습니다.
이 세 영역에 관심을 두면 회춘이 가능합니다.
멋진 노인이 될 수 있지요.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특히 환멸을 환멸하는 길로 제시하고픈 게 있습니다.
그건 바로 '사랑'입니다.

행복기회총량보존의 법칙?

80이 넘으신 어르신들 30여명의 데이터를 확인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의 소감은 대체로 한 평생동안 가지게 되는 좋은 운은 총합보존이 되는 듯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경향성을 두고
행복기회총량보존의 법칙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30여명의 어르신들 중 한 분은 누가 들어도 불운하다 하실 만했지만 29여명의 어르신들은 젊을 때 고생하신 분은 노후에 편안하시고 젊을 때 편안하셨던 분들은 노후에 고생하시는 경향성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운이 조금 좋으신가 싶은 분들이 운을 유지하는 방법은 나눔을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옛날 드라마 <파도>에서 ‘석복(惜福)’이라는 단어를 배웠습니다.
아낄 석자, 복복자입니다.
복을 아끼라는 뜻이지요. 복이 누군가에게는 많이 주어지고 누군가에게는 적게 주어진다면 굳이 복을 아껴야 할 일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이 있는 이유는 여기에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 떠도는 말은 집단지성으로 유지되는 말이기는 하니까요, 물론 어떤 말이 있다고 해서 그 말이 지시하는 현상이 정당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말이 유지된다면 그 말이 유지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짜뉴스의 경우에는 그 뉴스를 횡행하게 만드는 인간의 욕망이 있다는 것이 진실이겠습니다) 한 평생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복을 다 누려버리는 태도는 복을 달아나게 만들기에 석복하는 태도가 복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행복총량보존의 법칙이라 하지 않고 행복기회총량보존의 법칙이라고 하는 이유는 행복의 총량은 보존되지 않는 것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행복의 기회의 총량은 보존되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행복의 기회를 너무 다 누려버리면 더 이상의 행복의 기회가 오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석복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법칙을 믿는 것도 자유이고 믿지 않는 것도 자유입니다.
그런데 저는 믿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법칙을 믿지 않고 나에게는 불행의 기회만 찾아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행복의 기회가 별로 없었다면 앞으로 남은 행복의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복의 기회를 찾고 잘 활용하려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의 기회를 불행의 기회로 바꾸는 사람도 있고 불행의 기회를 행복의 기회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의 기회를 최대한 잘 살리는 것뿐일 것입니다.
적어도 행복의 기회를 불행의 기회로 바꿔버리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하간 그래서 개똥철학에 가까운 말입니다만, 인생에서 이게 좋으면 저게 나쁘고 저게 좋으면 이게 나쁘기 쉽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금 나의 안좋은 조건에 너무 주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자신이 가진 안좋은 조건은 딛고 서야 하는 것이지 원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조건이 좋은 사람은 없으니까요. 더더군다나 원망에 빠져 있을 때 가장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그 조건을 어떻게 딛고 설 것인가가 나의 인생의 과제일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마다 그 과제를 어떻게 감당해나갈 것인가를 잘 고민해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나의 인생을 특징짓고 그 감당하는 방식이 결국은 나다움과 연결되니까 말입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건국대학교 강의교수와 세종대학교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는 일반인을 위한 철학저서 집필과 강의에 전념하고 있다.
철학적 성찰력의 힘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 삶에 닿아있는 철학을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일반인과 철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철학커뮤니케이터로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을 올리고자 한다.
저서로
아주 일상적인 철학 : 네이버 도서 (naver.com)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 <삶이 불쾌한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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