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주 먼지'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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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다 하나하나가 고유한 존재이지만 알고 보면 아무도 '특별'하지는 않다는 사실, 누가 더 잘났고 못났다는 둥 지금은 모두가 우러러 보는 기준들도 절대적이지 않고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하기 때문이라는 것, 우리가 지금은 절대적으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 또한 다 언젠가는 빛을 바랄 것이라는 사실들이 두렵게 느껴졌던 때가 있다.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 정해져 있고 영원하다면 그것을 추구하는 한 손 쉽게 '정답'인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어떤 인생도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 왕년에 잘 나갔던 사람도 결국은 탑골 공원에 앉에 아무도 듣지 않는 "라떼는~"을 노래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싶지 않았다.
현실을 직면하는 순간 더 이상 '잘 살 방법' 같은 건 없게 되어서 깊은 우울에 빠져버릴 거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 때는 의외로 이런 사실들을 깨달을 때 얻는 해방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모두가 비슷한 겁을 집어 먹고 자기 자신에게도 또 남에게도 사회에서 정한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조금만 벗어나거나 조금만 늦게 도달하면 큰일 날 것처럼 가스라이팅을 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나 역시 눈을 뜨고 있었지만 감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 안 되는 정답 인생을 살기 위해 모두에게 내 삶은 정답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그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오래도록 노력했다.
정답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인정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정답에 집착할수록 오답이 수두룩한 내 인생, 이미 고치기에는 늦어버린 내가 더 뚜렷하게 다가왔고 결국 나를 가급적 숨기고 (가짜로) 완벽한 내 모습을 꾸며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죄책감과 불편함이 마음 속 한 가득이었다.
노력해서 많은 조건들을 갖춰 갈수록 불안과 인정 욕구는 심해지기만 했다.
이 때의 나는 내가 마치 어떤 물체, 예를 들어 상자처럼 뚜렷한 형태가 있어서 여기에 꽃도 달고 예쁜 색의 포장지를 붙이면 더 나은 내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적으로 성취를 해도 문화 생활을 하거나 취미 생활을 해도 이것들이 훈장처럼 나의 외벽에 덕지덕지 붙어서 나를 괜찮은 상자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고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냥 내가 내 머리 속에서 만든 '나의 이미지'일 뿐 진짜 내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정해진 생김새가 있고 겉으로 보여지는 객체가 아니라 내 눈 앞에서 일어난는 일들을 경험할 수 있는 내 경험의 주체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잔뜩 꾸밀 수 있는 외벽 같은 존재가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 경험과 의식의 흐름임을, 그래서 굳이 따지자면 우주 먼지 같은 존재이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하는 모든 것, 모든 경험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정해진 무엇이기보다는 흘러가는 물이고 물 자체이기 보다 물의 '여정', '물의 경험, '지금까지 만나왔던 땅과 이루어 왔던 물줄기, 또 앞으로 이룰 물줄기와 흘러감'임을 알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우주 먼지인 동시에 하나의 우주인 것이다.
이를 알고 나니 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것, 증명해 내는 것 등이 이전처럼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에 대한 현대 심리학적 탐구를 처음으로 시작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자아의 구성 요소에 있어 객체로서의 나(me)와 주체로서의 나(I)를 구분했다.
예전에는 이러한 개념이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아하'를 외치는 나를 보곤 한다.
내가 나를 객체로 취급하기보다 주체로 알고 그렇게 살아야 진짜 내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닐까.비대한 자아에 대비해서 '작은 자아'에 대한 연구들도 있고 자기 자신을 1인칭으로 바라보느냐 또는 3인칭으로 바라보느냐에 관한 연구들도 있지만 고체이기보다 액체 같고 정해져 있기보다 흘러가는 자아에 대한 연구들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소개박진영.《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에게》를 썼다.
삶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연구를 알기 쉽고 공감 가도록 풀어낸 책을 통해 독자와 꾸준히 소통하고 있다.
온라인에서 '지뇽뇽'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미국 듀크대에서 사회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반복되는 모든 것

주말에는 남편과 카페에서 수다를 떨며 데이트한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서로 궁금한 게 있냐며 지겹지도 않냐는 말을 하며 다른 친구가 웃었다.
빨래를 개다가, 이를 닦다가, 원고를 쓰다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게 삶인가 싶어 허무할 때가 있는데 그 기저의 감정은 지겨움이다.
하지만 반대로 반복되는 걸 잘 다루는 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것은 없다.
반복이 모든 친밀한 관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유독 관계가 좋은 부부나 친구들을 관찰하면 공통점이 있는데, 같은 얘길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잘 듣는다는 것이다.
‘일상다반사’라는 말을 좋아한다.
소박하게 밥 먹고 차 마시는 보통 날의 반복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의 핵심이 반복된 ‘지겨움’일지 모른단 생각을 종종 한다.
사실 매일 보는 사람을 새롭게 느끼는 능력은 결국 서로에 대한 깊은 책임감이다.
영어 단어Responsibility(책임)는response(응답)와ability(능력)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보고 싶지 않아도 보고, 듣고 싶지 않아도 듣고, 응답하기 싫어도 끝내 응답하는 것이 책임감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임감을 사랑이 아니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평범한 남편과 아내가 비범해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사랑받는 순간뿐이다.
반복된 일상에서 시간의 희미한 발자국을 찾는 건 사랑 없이 불가능하다.
매일 보던 남편과 아내의 얼굴에서 흰머리와 주름살을 찾아내며 측은지심을 느끼고, 정신없이 반복되는 출근길에서 이제 막 움트기 시작한 꽃과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를 발견하며 계절의 매듭을 느끼는 일. 사랑이 특정한 존재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자 응답인 이유다.
지겨움은 어떻게 친밀함으로 변화하는가. 비밀은 평범한 일상의 반복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때로 ‘발굴’하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있다.
우리가 지겹게 하는 매일의 일, 매일 만나는 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또한 나를 매 순간 사랑하는 방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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