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아름다운 집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오래전 한 시인이 ‘석가헌(夕嘉軒)’이라는 이름을 지어놓고 자랑하셨다.
‘저녁이 아름다운 집’. 평화롭고 의젓한 어떤 정경이 피어난다.
아름다운 석양 무렵이다.
그가 노래한 “이것들 저것 속에 솔기 없이 녹아/ 사람 미치게 하는/ 저 어스름 때”(정현종, ‘나의 명함’) 내 마지막 하루도 저물면 어떨까 싶었다.
겸허한 노후 안식처에 그 이름을 붙이리라 내심 탐도 냈었다.

태양이 빛 갈채 속에 무대로 등장하고 퇴장하는 때는 둘 다 너무나 장엄하고 압도적인 시간인지라 일출과 일몰 중 어느 하나만 택하기가 힘들다.
그래서인지 러시아 여류 시인 츠베타예바는 노을 녘에 죽고 싶다고, 아침노을과 저녁노을 두 번 죽고 싶다고 했다.

수학여행, 성지순례, 고산 등반 같은 집단행동형 여행에는 대개 일출 감상이 포함된다.
뜨는 해를 마주해 ‘만세!’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은 건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몰은 단체 감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운의 시간, 운수 좋은 하루였다면 감사하고, 운 나쁜 하루였다면 서럽게 울거나 위로받고 싶은 사적인 시간이다.
내면으로 스며드는 뉘엿뉘엿 시각의 한잔 술맛도 최고다.
전망을 중요시하는 외국에서는 일출보다 일몰 조망 주택이 인기가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게 다 젊음의 관점에서 하는 말이지, 노년의 관점은 다를 수 있다.
요양보호 교육서에 ‘석양 증후군(sundown syndrome)’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해 질 무렵 치매 환자에게 악화하는 불안, 격앙, 우울, 망상, 혼동 등의 이상 증세로, 전체 환자의 20% 정도가 시달린다.
노인요양원 입소자들을 관찰해 온 간호사가 1987년에 ‘낭만적’으로 명명한, 그러나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이 병증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불면증, 수분 부족, 약물 부작용, 통증, 피로, 낮 동안의 과도한 흥분, 어둠 등과 관련된 증상으로만 설명된다.

젊음은 늙음을 추측할 따름이다.
의학도, 문학도 여기서는 한계에 부딪힌다.
직접 체험하지 못한 것을 얼마나 알고 설명할 수 있을까? 건강한 사람이 아픈 사람을, 젊은이가 늙은이를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인생의 한창때 바라보는 석양과 종착지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다르다는 자명한 사실을 언제가 되면 실감할 수 있을까?

19세기 시인 튜체프는 쉰 살 전후에 ‘마지막 사랑’이라는 연애시를 썼다.
가정이 있는 몸으로 자신보다 무려 스물세 살 어린 처녀(딸의 동급생)와 사랑에 빠져 쓴 시다.
이 사랑은 그녀가 결핵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기까지 14년간 이어졌다.
첫사랑에 대한 시는 많아도 마지막 사랑에 대한 시는 드물다.
과연 마지막일지 아닐지는 삶이 끝나기 전까지 모르는 터, ‘이것이 마지막이다’의 전제야말로 가장 강력한 사랑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서른이면 인생 다 살았다고 생각되던 시대의 ‘노인’ 시인은 쓴다.

“삶이 저물어갈 무렵의/ 사랑은 우리를 얼마나 애틋이 사로잡는지…/ 비추어라, 비추어라, 작별의 광휘여/ 마지막 사랑의 노을이여!// 어둠이 하늘 절반을 뒤덮어/ 광휘는 저기 저 서쪽에서 서성인다/ 저녁 빛이여,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천천히/ 황홀한 이 순간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혈관의 피는 옅어져도/ 심장의 사랑은 옅어지지 않느니/ 오, 은총이요 절망인/ 그대, 마지막 사랑이여!”

“조금만 천천히, 조금만 더.” 어둠이 코앞에 닥쳐 있기에, 저녁 빛은 더없이 간절하다.
당연히 마지막 사랑의 행복감은 깊은 절망감과 교차한다.
병증으로서의 ‘석양 증후군’에 대해서도 비슷한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황혼 때 발현하는 이 증상은 종말에 대한 불안감과 맞닿았다.
강건한 의식이 병든 무의식에 고삐를 빼앗겨 드러내는 본능의 제스처라고 본다면,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리라는 사실과 화해할 수 없다”(M. 뒤라스)는 절규의 양상일 수 있다.
실제로 석양 증후군의 완화법으로는 친숙한 환경 유지와 어둠 차단이 권고된다.

그러나 이 또한 덜 늙고 덜 아픈 내 입장의 해석이다.
병리학이 규명하지 못한 현상을 이토록 단순하게 심리 해석하는 실례는 내가 아직은 마지막 지점에서 석양을 감상하지 않기에 함부로 범하는 것이다.
‘마지막’과 ‘마지막 이전’의 심연이 궁금하고 무섭다.
그래서 요양보호에 대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석양이 아름다운 집’을 지으려 한다.
석양이 아름다운 집은 ‘마지막’의 두려움과 스스로 화해하는 공간이다.
아무리 위대한 문학도 그 비밀만큼은 잘 가르쳐주지 않는다.

윤한동주(尹·韓同舟)

그들은 결국 검찰 출신 同種人… 한쪽 망하면 다른 쪽도 망해
韓 대표 유일 출구는 정부 돕는 것… 尹 대통령도 마찬가지 韓을 동반자로 보고 겸손·포용을
윤한 갈등하면 누가 좋은가… 이대로는 '보수의 반역자' 될 것
 

‘한동훈’ 하면 떠오르는 것은 ‘국민 눈높이’라는 단어다.
국민 눈높이는 국민이 바라보는 시각 또는 그 수준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그 말은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씨가 디올백 받은 것을 국민 앞에 사과하라는 뜻이고 해병대 사건을 특검으로라도 풀자는 뜻이 담겨있다.
‘사과’, ‘특검’이라는 단어를 쓰기 거북해서 눈높이로 치장 또는 위장한 것이리라. 이에 윤 대통령이 분노했고 그 좋던 형제지교가 깨졌다.
한동훈씨가 이끌었던 국힘당이 4·10 총선에서 참패하자 잠시 주춤했던 ‘국민 눈높이’는 그가 전당대회에서 승리하자 또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결론부터 말해서 한 대표는 왜 또다시 그 일에 말려들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사과’ 싸움을 지켜보던 국민도 이제는 지쳤다.
‘해라’ ’했다’ ‘아니다’로 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 자체가 이제 국민 눈높이에 어긋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과’에 함몰돼 있을 것인가? 이제 사과 논쟁은 그만했으면 한다.
국민은 이미 각자가 그에 대한 판결을 마음속으로 이미 내렸다.
그래서 선거에서 졌다.
그런 만큼 이제 다른 산적한 국정으로 넘어가자고 제안하고 싶다.
‘탄핵 놀이’에 함몰된 야당과 ‘개딸’들은 디올백과 이 문제를 천년만년 붙들고 시비하고 싶겠지만 나라의 안보와 국민의 경제생활이 날로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집권 세력은 이제 다른 과제로 넘어가는 것이 진정 국민 눈높이에 합당한 것이리라.

한 대표가 당 대표로서 해야 할 첫 과제는 윤 대통령과의 관계 설정이다.
당을 정부와 일치시키는 것이 한 대표의 우선적 과제다.
솔직히 말해 한동훈은 윤석열을 떠나서 존재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한동훈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은 한국의 검찰을 대표하는 동종인(同種人)이다.
그들은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다.
한쪽이 망하면 다른 쪽도 망하게 돼있다.

지금 한 대표의 처지에서 정통 보수정당을 개혁한다는 것은 벅찬 일이다.
현역 국회의원도 아니고 정당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여당 중진들을 압도할 정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당을 젊게 개혁적으로 또는 리버럴 보수 쪽으로 이끌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윤 대통령으로서도 해내지 못한 당 장악을 몇몇 젊은 객원(客員)들을 데리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현실을 너무 모르는 과욕이다.
고색창연한 보수당 노선을 옹호해서가 아니라 소수당으로 패색이 짙어진 정당을 몇 청년 과객(過客)들로 개혁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당내에서는 벌써 친윤이니 친한이니 패 가르기가 나오고 누구를 어디에 앉힐 것이냐로 자리싸움이 벌어지고 있다니 국민의힘 미래뿐 아니라 한 대표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일을 교훈 삼아 말하건대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면 당·정은 물론 윤·한 모두에게 미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한 대표에게 열려있는 유일한 출구는 윤 대통령의 정책을 옹호해주고 정부를 위해 길을 뚫어주는 소수 여당으로서의 투신이다.
과거 다수 의석을 가진 집권당의 위세로 정부도 견제하고 야당도 다스리던 당 우위적 발상으로는 현 여소야대의 정국을 헤쳐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는 윤 대통령의 포용력과 지도력도 필수적이다.
당과 한 대표를 동반자 위상으로 보고 당과 당 대표를 대우하는 겸손한 리더십, 그것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한 대표와 국힘당의 분골쇄신을 유도하기 어렵다.
한동훈은 더 이상 윤 대통령의 검찰 수하가 아니다.
검찰 출신, 법조 출신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네 편, 내 편 가르며 옹졸하게들 굴지 말아야 한다.

한 대표가 여당의 공세에 맞받아치는 장면을 보면 마치 법정에서 검사와 변호사가 다투는 것을 연상케 한다.
한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받아친다.
그런데 여기는 법정이 아니다.
여당 대표가 검사도 아니다.
정치는 말싸움으로 판가름 나지 않는다.
대표 즉 당수는 말이 아니고 머리로 싸우는 사람이다.
한 대표는 이제 검사도 아니다.
정치인이다.
침몰해가고 있는 대한민국 보수 정권을 지켜낼 책임이 있는 ‘9회 말 구원투수’다.
지금 국민의 새로운 눈높이는 당·정이 서로 균열하지 않고 같이 힘을 합해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켜내라는 것이다.
윤·한이 갈등하면 결국 이재명씨를 도와주는, 보수의 반역자들일 뿐이다.

김대중 칼럼니스트

김대중 칼럼니스트

'마음 컴퓨터'를 기본 모드로 돌려보라

자연스럽게 생긴 글쓰기 습관이 있다.
일단 글 주제를 정하고 나면 관련 자료들을 집중해서 읽는다.
그리고 3~4일 정도는 입력된 정보들이 ‘마음’이라는 광야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도록 ‘마음 여행’의 시간을 갖는다.
이런 과정에서 새 지식과 기존 지식 간의 상호 작용이 일어나고 거기에 통찰도 가미되어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마음과 뇌를 컴퓨터에 비교한다면 마음이 소프트웨어이고 뇌가 하드웨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쉰다는 것은 뇌의 스위치를 끄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실제 컴퓨터와 다르게 마음 컴퓨터는 쉼을 가질 때 ‘기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는 회로가 오히려 켜진다.
즉, 뇌가 쉰다는 것은 ‘스위치 오프’가 아닌 ‘모드 체인지’의 과정이다.
기본 모드에서도 에너지 소비량은 일할 때 대비 20%정도만 감소한다.
쉰다는 것이 의외로 능동적 과정이다.

기본 모드에서는 어떤 일들을 처리할까. 업무 수행 등 목적 지향적 모드 상태에서는 외부 세계와 연결되어 내가 주인공 역할을 했다면, 기본 모드에서는 외부와 연결을 잠시 끊고 관객 입장에서 내면의 감정이나 생각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과의 감정과 소통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살펴본다.
또 여러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과정도 이루어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누구인가,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같은 내 인생의 서사(narrative)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통합한다.
내면의 마음 여행 시간인 것이다.

‘잘 일하기 위해서 쉬어야 한다는 말’이 짜증 난다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일 모드와 쉼 모드는 상호 보완적이다.
외부 세계와 접촉하며 목적 지향적 업무를 수행하는 ‘일 모드’에서 얻은 여러 정보를 ‘쉼 모드’에서는 내면 세계의 내 데이터베이스와 연결하여 통합하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만약 일 모드일 때 자꾸 쉼 모드가 켜지는 것은 어떨까. 이건 업무 몰입 등을 방해해 일의 효율을 오히려 떨어뜨린다.
집이나 사무실에서 집중이 잘 안 될 때 커피숍 같은 장소에서 오히려 집중력이 올라가는 것을 경험한다.
소음 등 적당한 외부 자극이 기본 모드로 빠지는 것을 줄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치매의 경우 기본 모드 활성이 감소했다는 보고가 있는 등 마음의 기능에서 기본 모드에 관한 관심과 연구가 증가한 상황이다.
그만큼 쉼은 삶의 옵션이 아닌 중요한 과정이다.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일도, 쉬기도 쉽지 않은 시기이지만, 가벼운 산책, 티타임 등 나만의 기본 모드 스위치를 켜는 노하우를 개발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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