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이 최고의 수행이다

편집자주사람마다 감정을 통제하는 방식은 다르다.
강한 책임감 때문에 감정을 통제하기 시작한 사람도 있고, 문제가 발생한 당시는 꾹 참지만 그 상황이 지나고 나서 취미나 인간관계 같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사람도 있다.
저자의 경우는 마음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에 공감하면서부터 일희일비하지 않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기쁘고 슬프고 하는 것들이 결국 하나의 현상을 내 마음이 어떻게 인식하느냐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감정에 반응하는 것이 조금 둔감해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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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호사다마, 전화위복, 새옹지마의 교훈을 모두 알고 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사이클을 두고 반복됨은 물론 좋은 일이 안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오히려 큰 기회로 다가오는 경우도 흔히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현상들이 인간사회에서는 늘 일어나는 일임을 알고는 있지만, 막상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생기면 그 감정을 고스란히 표출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성공한 리더들은 다르다.
그들은 참을 줄 알고 더 정확히는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참는 것에 훈련이 된 사람들이다.
타고난 성정이 예민한 사람 중에도 기업의 리더로 커 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일반인들보다 감정을 통제하기 더 힘든 성향이 있어서 리더가 되기까지 그리고 리더가 된 후에 감정을 다스리는 데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동료 한 명도 걱정을 늘 달고 사는 예민한 성격이었는데 탁월한 실력과 업적으로 임원이 된 사람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고 바꿔 쓰는 것이란 말은 그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았다.
임원이 된 후 그는 최소한 겉으로는 감정의 동요가 점점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내가 느낄 정도로 평정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MBTI가 전형적인 I였는데, 그의 이전의 모습을 못 본 사람들이라면 E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넉살도 좋아졌다.
그것은 그의 노력과 훈련의 결과라 믿는다.
감정을 통제하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 임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임을 알았기에 그는 노력했고 결국 바뀔 수 있었다.
그에게 슬쩍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정도로 바뀌기엔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내게 그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책임져야 할 후배들이 많아지니 자기가 그렇게 해야 할 거 같아서 힘들지만 바꾸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불찰로 본인이 피해를 보는 것은 괜찮지만 그것 때문에 구성원들이 힘들어지는 것은 도저히 볼 수 없다는 절실함이 그를 변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직장 생활이 최고의 수행이다<3>

편집자주성공한 리더들은 현실주의자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주의자란 미래에 대한 이상향만 꿈꾸는 사람이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에 발목이 잡혀 도전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다.
대신 현재 주어진 과업을 달성하는 데 충실한 사람들이 바로 현실주의자인 리더들이다.
이 책의 두 번째 장 '오직 지금 이 순간, 현재만 존재한다'에선 과거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현재에 집중하는 방법을 안내한다.
글자 수 1033자.

회사생활이란 인간관계에 있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주고, 주고 또 주고, 그리고 잊어버리란 것이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그 미팅 이후 그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계속 주기만 하고 잊어버려라…. 그럼 왜 줘야 하는 거지? 이런 일반 범인들의 생각들로 궁금증이 계속되던 중, 갑자기 떠오른 것이 위의 바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었다.
그랬다.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무언가를 남에게 주었다고 한다면 응당 그것에 대한 반대급부의 기대를 하게 된다.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 너도 이만큼은 최소한 나에게 해주겠지라는 바람이다.
하지만 회사 안에서의 인간관계는 계약서를 쓰고 하는 거래가 아니다.
그냥 그 상황이 되어서 또는 그 시점에 내가 그런 권한을 가지고 있어서 결정하고 집행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리더와 구성원들 사이에선 더 명확하다.
리더로서 후배 직원을 평가하고, 승진시키고, 좋은 교육 과정에 파견하고, 심지어 법카로 회식을 시켜주고 하는 것들은, 회사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아 집행하는 리더의 당연한 회사업무이다.
그런데 종종 리더 중에는 그런 일들을 후배에게 베푼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저 친구 승진을 시켜줬으니', '저 친구 평가를 잘 줬으니' 등등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저절로 그 후배에게 뭔가를 기대하게 된다.
자신에 대한 더한 충성이든 아니면 듣기 좋은 아첨이든 뭐가 되든 기대한다.
하지만 후배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도 얘기했듯 조직 속에서의 개인은 일이 잘되면 모두 그것이 자기가 잘해서 된 것이라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자신을 밀어준 리더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것을 갚아야 할 빚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조직의 리더라서 후배에게 베풀어 준 것을 가지고 그 후배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채무자는 없는데 채권자가 생기는 것 같은 상황이 되기 쉽다.
따라서 이런 잘못된 생각에 대해 그 사외이사님은 리더로서 후배들에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그렇게 표현해 준 것이었다.

용의 숨결 느끼는 '용산가족공원·거울못둘레길'

용산가족공원에서 국립한글박물관 야외, 국립중앙박물관 거울못을 일주하는 약 5㎞가량의 코스다.
용산가족공원의 산책로(2㎞)를 한 바퀴 돌아 국립한글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이 연결된 야외전시장을 구경하고 거울못을 한두 바퀴 돌고 4호선 이수역이나 신용산역에 도착하면 5~6㎞ 정도 된다.
요즘처럼 더울 때는 국립중앙박물관 두 건물 사이의 바람길(큰 중앙계단)에 앉으면 1분 만에 땀이 마른다.

용산가족공원 7만5900㎡(2만2960평) 규모로 시원스럽게 탁 트인 잔디밭과 연못, 산책로, 눈길을 끄는 조각작품 등이 발걸음을 바쁘게 한다.
1991년 5월까지 미군 골프장이 있었다.
1992년 서울시가 인수해 공원으로 조성했고, 1997년 11월 국립중앙박물관이 건립되면서 공원면적이 축소됐다.
용산가족공원 입구에서부터 한국·프랑스·스위스·독일·영국·미국·캐나다를 대표하는 예술가들로부터 기증받은 조각작품 9점을 차례로 구경하고, 국립한글박물관 뒤뜰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산책로지만 비교적 숲이 우거져 미르못·미르다리·미르폭포를 지날 때는 간혹 안개가 피어올라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마치 용이 콧김을 내뿜는 느낌이다.
'미르'는 용을 뜻하는 옛말로 박물관이 위치한 용산이라는 지명을 땄다.
'용의 숨결'을 지나면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영거화상탑(국보 104호),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365호), 보신각종(보물 2호, 미세균열로 1985년 이곳으로 옮겼고, 현재 보신각종은 1896년 새로 만든 종), 개성에서 옮겨온 남계원 터 칠층석탑(국보 100호) 등을 보며 탑돌이도 할 수 있다.
탑돌이를 마치면 탁 트인 하늘과 연못을 만난다.
박물관의 모습이 못에 비친다고 해서 '거울못'이다.
거울못 주변을 걷다 청자정(靑瓷亭)에 올라 거울못에 비친 박물관의 흔들리는 외관을 보는 잠시 구경하는 것도 좋다.
청자정은 2009년에 건립된 한국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상징물이다.
거울못을 두어 바퀴 돌았으면 길 건너 동부 이촌동 아파트 숲으로 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귀가하거나, 남산이나 한강으로 나가 더 걸을 수 있다.
역사와 예술이 공존하는 독특한 걷기 공간이 용산가족공원·거울못둘레길이다.
퇴근 이후 2시간 정도만 투자하면 즐길 수 있는 걷기 코스다.

마복림전

| 고영 음식문화연구자“고추장 비밀은 며느리도 몰라. 아무도 몰라.” 1996년 한 고추장 회사의 광고 영상에서 이 한마디를 뱉으며 단박에 유명해진 마복림은 192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열아홉에 목포로 시집갔던 마복림은 1945년 이후 서울로 이주한다.
마복림 부부가 정착한 신당동은 서울 동부 교통의 요지이자 팔도의 이주민이 모여든 ‘변두리’였다.
도심과 부심으로 일 나갔다 돌아오기 좋은 동네였다.
마복림은 남편과 함께 보따리장사 등을 하다 떡볶이 좌판을 낸다.
동화극장 앞이었다.
동화극장은 1932년 개관한 극장 신부좌(新富座)가 이름만 바꾸어 다시 연 지역 명물 영화관이었다.
그때의 동화극장 앞이 오늘날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다.
여기서 신당동사거리는 지척이다.
신당동사거리는 광희문사거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이어진다.
광희문사거리는 한때 중앙시장보다 흥성했던 시구문시장(광희문시장)의 시작점이었다.
서울 을지로 6가에서 신당동사거리에 이르는 구간이 노점과 좌판과 행상으로 빽빽할 때다.
동화극장은 그 분주한 데서 한 걸음 비켜난 데 자리했다.
오락과 휴식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기에는 도리어 마침맞았다.
마복림은 어려운 시절 목 좋은 데서 장사를 시작한 셈이다.
마복림은 1953년 어느 날 지인의 결혼 피로연에 갔다가 먹던 흰떡을 짜장면 그릇에 빠뜨린다.
그런데 짜장면 양념 묻은 떡은 맛있었다.
마복림은 우연히 포착한 그 맛을 놓치지 않았다.
황교익 칼럼니스트의 설명에 따르면 “고추장의 맵고 칼칼한 맛과 춘장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어우러”져 대중이 좋아할 만한 새로운 양념이 태어났다.
춘장의 달콤함과 짭짤함 도 다채롭고 맛난 풍미를 더했을 테다.
1978년 동화극장 앞 개천의 복개 공사가 시작돼 더 이상 길거리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마복림은 살던 집을 개조해 떡볶이 가게를 열었다.
아울러 그즈음 보급된 프로판가스 화구로 즉석에서 떡볶이를 끓여 먹는 ‘신당동 떡볶이’ ‘즉석 떡볶이’ 또한 시도했고, 인기를 얻게 되었다.

마복림은 그 뒤로도 일평생 떡볶이를 만들고 팔다 2011년 12월13일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91세. 어려운 시대에 한 분야를 이룬 고인에게는 상인, 요리사, 컨설턴트 등의 면모가 있다.
시대의 추이에 올라탔다면 가게를 넘는 산업을 일으켜 세웠을지도 모른다.
아무려나 한국인은 고인을 오로지 ‘할머니’로 부른다.
기록도 별로 없다.
그나마 <서울을 먹다>(황교익·정은숙) 속에 귀한 해제가 있어 고인과 함께 떡볶이 연대기의 편린이나마 돌아본다.
고인이 ‘현대 떡볶이의 발명자’는 아니다.
그렇게 불러서는 안 된다.
고인은 조선 말기의 일품요리였던 떡볶이가 막 길거리로 나와 대중의 음식으로 바뀔 때에, 여느 서민 여성처럼 떡볶이 좌판을 시작한 이다.
서민에게 떡볶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간 이다.
그러면서 현대 떡볶이에 새로운 미각 관능을 더하고, 떡볶이 운용의 또 다른 방식을 더한 이다.
이쯤의 의미 부여가 온당하다.
더는 지나치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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