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콜릿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아메리카

쵸콜릿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1502년 잉카제국의 땅에서 마야인들이 교역하는 카누를 우연히 보게됩니다.
그가 목격한 것은 마야인들이 뭔가를 교역하던 광경이었습니다.
한 마야인이 실수로 아몬드 비슷하게 생긴 작은 알맹이 뭉치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 마치 그들은 자기들 눈깔이라도 떨어뜨린 것처럼 그것들을 줍느라 북새통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앞을 다투어서 주었을까요 ?

그것은 바로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열매로 다름아닌 초콜릿의 원료로 쓰이는 카카오 열매 입니다.
카카오는 화폐로 썼을 만큼 마야인들에게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카카오는 어떻게 해서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기호품이 되었을까요?

콜럼버스의 발견

야인들이 교역하다가 떨어뜨린 이 물건은 다름아닌 열매였습니다.
마치 아몬드처럼 생긴 이 열매는 바로
카카오 열매 입니다.
당시 마야말로는
카카와(ka ka wa)라고 불리웠는데, 아즈테카인들이 이를 카카오로 바꿨고, 스페인어에서는 다시 초콜릿으로 변했습니다.
초콜렛이 바로 아즈텍과 마야인들의 화폐였던 셈입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기원전부터 카카오 열매를 대단히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첫 문명인 올메크(Olmec)문명이 이미 카카오를 사용했었고 이것이 다시
마야인들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열대지방의 낮은지대에서만 서식하는 카카오는 테오티우아칸(Teotithuacan)과 그 뒤에 등장한 마야 등 고원지대의 문명권과 이 低지대사이의 중요 교역품이었습니다.
카카오는 마야인들의 손을 거쳐 마야왕국을 정복한 아즈텍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카카오 열매는 맛도 맛이지만 약리적 효과와 희소성때문에 사람들의 갈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카카오 음료를 마시는 아즈텍인

신비의 열매

야인들에게 카카오는 흥분제와 마취제, 환각제, 최음제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카카오의 카페인 성분은 전쟁에 나가는 마야 전사들에게 강철같은 용기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특히, 환각을 경험하려고 발효시킨 초콜릿을 마시거나 열매를 먹기도 했는데, 특히 덜익은 열매로 만든 초콜릿의 효과가 좋았다고 합니다.
카카오는 다양한 음료와 죽으로 만들어졌고, 옥수수와 섞었으며, 꽃, 꿀, 바닐라, 고추, 사포테 씨앗, 아치오테 페이스트, 올스파이스(Pimenta dioica ) 등으로 풍미를 더했으며, 카카오를 담는 그릇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헌정 공식이 새겨진 정교한 도자기에 담겨 제공되었습니다.

아울러 남자들은 최음제로 카카오를 복용하였습니다.
아즈텍 왕국의 황제 목테수마(Moctezma, Montezuma 2세)는 여러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하기위해서 하루에 50잔의 초콜릿을 마셨다고 합니다.
카카오 음료는 이밖에도 불안감을 없고, 열을 내리고, 기침을 멎게하는데도 애용되었습니다.

물론 맛도 중요했습니다.
보통은 카카오 가루에 물을 섞어서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카카오에 다양한 향신료를 섞어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후추와 비슷한 칠레 고추나 석회수를 섞어서 마시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또 옥수수 가루를 섞어 되게 해서 먹기도 했습니다.
마아인들이나 아즈테카인들이 카카오에 꿀이나 바닐라를 섞어 마시고 나서야 카카오 음료는 지금 우리가 마시는 것과 비슷해지게 되었습니다.

 

카카오 열매의 모습

돈이 열리는 나무

카오 열매는 워낙 가치가 컷던 데다가 희소성이 있어서 화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아즈테카에서 대부분의 경제행위는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직접 만나 물물교환을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카카오의 등장은 화폐경제가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카카오 열매 10개에 토끼 한마리, 100개면 최상급의 노예1명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아즈테카에서 카카오 열매를 진짜 화페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카카오 열매를 위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 합니다.
빈 카카오 껍질에 진흙을 채운 이 위조 화폐는, 초대 스페인 총독에 따르면 "진짜와 너무 똑같아서, 진짜 카카오처럼 알이 실한 것도 있고 부실한 것도 있었다.
"고 말하였습니다.

아즈테카 시장에서 초콜릿은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요는 대단히 컷지만 공급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였기 때문입니다.

열대의 저지대에서 자생적으로 자라는 카카오 나무들이 제법 있지만 이 지역에 살던 마야인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하던 농민들 이었습니다.
또 마야제국안에 큰 도시들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밝혀졌지만 시장이 이었다는 증거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즈테카 지배집단은 공물의 형태로 약간의 남는 카카오 열매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귀중품의 경우 원거리 교역이 이루어진 몇몇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마야인들 사이에 중요한 상인계급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따라서 멕시코 고원지대에서 카카오의 수요는 대단히 컷지만 그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모자랐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돈이 나무에서 자란다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멕시코 중부 지역에서는 수십 년간, 중앙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수세기동안 이 전통이 지되었습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18세기까지도 총독이 물품을 구입할 때 카카오 열매를 사용하였습니다.
카카오를 유럽에 소개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몇몇 가톨릭 사제들은 스페인에서도 카카오 열매를 화폐로 사용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자본주의와 고리대금에 비판적이었던 사제들에게는 썪어 없어지는 돈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좌) 초콜릿의 고향인 마야 왕국과 이를 정복한 아즈텍 왕국 위치 (우) 몬테수마2세와 아즈텍의 정복자인 코르테즈의 만남

금욕(?)의 상징에서 기호품으로..

복자 스페인과 이웃나라들에서 카카오를 초콜릿으로 대중화시킨것은 금욕주의적 사제들이었습니다.
커피가 처음에는 무슬림들의 음료였던 것처럼 초콜릿은 처음엔 가톡릭의 음료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가톨릭 예수회 사제들은 직접 카카오 열매 생산에 관여할 정도로 초콜릿에 빠졌습니다.
( 스페인이 아메리카 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에는 늘 가톨릭 사제들이 동행하였습니다.
정복과 포교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 심지어 이들은 세속의 경쟁자들에게서 카카오를 독점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초콜릿은 처음엔
'금욕을 상징하는 종교적 음료'로 본국 스페인에 소개되었지만 머지 않아 멕시코에서 처럼 귀족들이 여유와 사치, 기품 따위를 과시하는 음료로 취급되었습니다.
사실 카카오를 금욕의 상징이라고 소개한 사제들의 설명은 좀 납득이 안갑니다.
최음제나 환각제로 마셨던 음료가 금욕의 상징이라니요? 사제의 입장에서 불경스런 물건을 들여온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지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비싸고 귀한 것이라서 유럽으로 가져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므로 목적 달성을 위해서 이런 미담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도입 초기인 16세기 스페인 에서는 초콜릿에 물과 설탕, 계피, 바닐라 등을 섞어 마셨습니다.
이후로 부터 2세기가 지난뒤에서야 마침내 뜨겁게 데운 우유에 카카오 가루를 타서 마시는 '핫 초콜릿'도 만들어 졌습니다.

카카오의 세계화

럽에서 인기를 끈 최초의 흥분제이기도 했던 카카오는 이제 스페인령 아메리카의 대표적인 농산물로 자리잡게 됩니다.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돈이 되는 이 카카오의 생산을 대폭 늘이는 재배법을 고안하여 생산을 확대하게 되었습니다.
카카오의 생산은 멕시코의 야생군락지가 아니라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베네수엘라와 중앙아메리카에서 재배되던 카카오 나무는 필리핀, 인도네시아, 브라질까지 거너갔고, 마지막에는 아프리카에도 이식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카카오는 화폐에서 세계적인 '상품'이 된것 입니다.
18세기 까지는 오로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만 자라던 작물이었던 카카오는 대규모로 세계 도처에서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써 서민들도 초콜릿을 맘껏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28년 반 호텐이라는 네델란드인이 개발한 코코아가 나오고, 19세기 후반에는 밀크 초콜릿까지 개발되면서 초콜릿 과자류도 많이 등장했습니다.
이런 식품들은 주로 여성과 아이들이 좋아하게 되면서 초콜릿은 얌전히 길들여져 일반 가정의 식탁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초콜릿은 세계인인 좋아하는 달콤한 기호품입니다.
그러나 초콜릿이 아즈텍 추장과 전사들의 음료로서 최음제 역할을 하면서 자뭇 당당하고 씩씩했던 시절에는 카카오가 나무에서 열리는 화폐였었다는 사실도 기억하기 바랍니다.
( 끝 )


아메리카

대항해시대 작물의 이동과 부의 원천 

콜롬버스가 연 신대륙 아메리카는 유럽인의 입장에선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았습니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 기득권을 가졌던 유럽의 변방국 스페인은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얻게 되었는데 처음엔 그저 향신료가 나는 인도로만 알았지만 이내 그곳은 인도가 아니라 새로운 땅이라는 것을 알아냅니다.
비록 향신료는 없지만 그에 못지 않은 보물들을 하나씩 발견되기 시작합니다.
잉카와 아즈텍 제국의 보물을 필두로 드디어 당시 세계화페격인 거대한 은광산을 발견하여 막대한 양의 은을 유럽으로 들여오게 됩니다.
스페인은 은을 바탕으로 유럽에서 힘과 부를 지닌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또한 신대륙에는 금.은 같은 귀금속뿐만아니라 구대륙에서 보지 못했던 많은 작물들이 발견되어 구대륙으로 전해졌는데 옥수수, 감자, 코코아, 담배, 고추, 고무나무, 코치닐 등이며, 한편 구대륙에서 돈이 되는 작물들이 신대륙으로 이식되어 대거 재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커피, 사탕수수, 면화 등이 바로 그것들 입니다.
이들 작물은 유럽 국가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는데 오늘은 이러한 작물을 소개합니다.

붉은색 염료 코치닐

코치닐(Cochineal)은 한 때 유럽에서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직물의 염료이름입니다.
진홍빛 색상으로 물들여주는 천연염료로 매우 비싸고 귀한 염료입니다.
그런에 이염료는 작은 벌레로 만들어 졌습니다.
연지벌레라고 하는 선인장에서 기생하는 매우 작은 벌레입니다.
중미지역에 사는 인디도들이 오재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코치닐 염료를 생산해 왔던 것입니다.
코치닐은 아즈텍에 공물로 바치기기도 하였고 화폐의 역할을 할만큼 대단히 귀중한 것이었습니다.
코치닐 염료는 연지벌레의 암컷으로만 만들어 지는데 이 벌레는 제한된 지역에서만 자라는 노팔레아속의 한 선인장만 먹고 자란다고 합니다.
인디오들은 이 선인장에서 벌레를 잡아 뜨거운 물이나 찜통에 집어넣어 염료를 만들어 냈습니다.
1판운드의 염료를 얻으려면 무려 7만마리의 벌레가 필요할 정도로 시간과 수고가 들어가는 정교한 작업이었던 것입니다.
벌레를 잡으려고 선인장을 찾아서 다니는 일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으므로 나중에는 새끼를 밴 종자벌레들을 잡아다가 옥수수잎으로 만든 주머니를 선인장에 매달아 놓고 그 속에 벌레를 키우는 경작법을 개발하였습니다.
벌레를 키우는 재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컷들이 새끼를 낳으면 새끼들은 기어나와 선인장 잎사귀에 달라 붙게되고 3개월 정도 지나면 수확할 만큼 자라난다고 합니다.
재배라기 보다는 벌레 목축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벌레 목축이라는 것이 적당한 선인장 확보, 날씨 등의 조건이 맞아야만 재대로 수확할 수 있는 것이지 비가 많이 내리거나 메뚜기 떼가 몰려오면 그야말로 흉년이 드는 매우 까다로운 목축이었습니다.
그래서 코치닐 염료를 스페인 사람들은 직접하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현지의 인디오들로부터 사모으는 방법으로 확보했습니다.
따라서 코치닐 제조는 19세기 중반 인공염료가 나올 때 까지는 한동안 인디오들이 독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 스페인은 천연 코치닐의 유통을 독점함으로써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로부터 많은 수익을 보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 세금의 2위가 바로 코치닐에서 나왔을 정도 였습니다.

 

붉은 의사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인디오들이 선인장에서 코치닐을 잡는 모습(우)

푸른색 염료 인디고(INDIGO)

빨강색과 더불어 고대부터 가장 인기있는 색상은 파랑색입니다.
파랑색 역시 중세부터 귀족이나 군인의 제복으로 널리 쓰였습니다.
특히 오늘날 청바지의 염료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염료도 역시 천연에서 나오는데 바로 인디고라는 나뭇잎으로 만들어 집니다.
인디고는 콩과의 식물로, 학명은 인디고페라 틴토리아(Indigofera tinctoria)이며, 인도가 원산지로 기원전 4000년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중국 및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디고는 쪽이라고도 불리우는데 , 인디고는 쪽의 잎과 줄기를 발효시켜 얻을 수 있으며, 특유의 남색을 냅니다.
인디고는 고대시절부터 염료로 사용되었으며, 의류, 천, 종이, 식품 등에 사용되었습니다.
인디고는 중국에서도 중요한 염료로 사용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쪽을 재배하고 인디고를 생산하는 산업이 발달했습니다.
1289년,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인디고를 유럽에 소개하면서 인디고는 유럽에서 인기를 얻기 시작했으며 의류, 천, 종이 등의 염료로 사용되었으며, 인디고로 염색된 의류는 코치닐 의류와 함께 귀족과 부유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6세기들어 본격적으로 멕시코에서도 인디고가 생산되어 스페인으로 가져가게 되었습니다.

인디고는 19세기까지만 해도 가장 중요한 염료 중 하나였지만, 이후 합성 염료의 개발로 인해 사용이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인디고는 천연 염료로 사용되며, 일부 식품에도 사용됩니다.

인디고 잎을 따는 모습

성경에 없어서 터부시되었던 식물

감자는 원래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인 작물입니다.
16세기 스페인 탐험가들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하면서 감자를 유럽으로 전파했습니다.
감자는 처음에는 유럽에서 주로 가축 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없다는 이유로 먹지 않았던 것이지요. 하지만 18세기경부터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가 알려지면서 유럽인들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감자가 주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감자의 유럽 전파는 유럽의 식량 사정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감자는 곡물에 비해 재배가 쉽고 수확량이 많아서, 기근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감자는 유럽인의 식단을 다양화하는 데에도 기여했는데, 감자튀김, 감자 샐러드, 감자 스프 등 다양한 감자 요리가 유럽에서 개발되었습니다.
또한, 감자는 유럽의 산업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감자 전분은 섬유, 종이, 화약 등의 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감자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 중 하나입니다.

 

밀레의 만종과 그림속의 감자

아일랜드의 감자기근

아일랜드의 기근은 1845년부터 1852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입니다.
감자마름병의 확산으로인한 기근으로 인해 아일랜드 인구의 약 10%인 100여만명이 사망하고, 약 100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했습니다.
아일랜드 기근의 원인은 감자 역병입니다.
1845년, 아일랜드에 감자 역병이 유행하면서 감자 수확량이 급감했는데 감자는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약 80%가 주식으로 먹을 정도로 중요한 작물이었기 때문에 감자 역병은 아일랜드에 큰 재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기근으로 인해 아일랜드에서는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또한, 기근을 피해 아일랜드를 떠난 사람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이주했습니다.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아일랜드 기근의 트라우마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아일랜드 기근은 19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가장 큰 기근 중 하나입니다.
이 기근은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아일랜드 기근은 아일랜드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기근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기근의 역사와 의미를 배우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빨간 김치는 후기 조선부터 먹기 시작했다

김치나 깍두기하면 붉은 고추가 연상됩니다.
고추가루 없는 김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물론 백김치도 있지만 한국인에게 김치는 역시 붉은 김치입니다.
고추가루는 한국의 고유음식이라 할 정도로 한식의 여러가지 요리에 가미되어 쓰입니다.
그런데 고추는 조선 후기인 17세기전후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청나라 또는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온 것인데 고추는 원래 남미에서 탄생되었습니다.
고추는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로 고추의 기원은 약 7,500년 전으로 추정되며, 페루와 멕시코에서 처음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고추는 원래 신성한 식물로 여겨졌으며, 종교 의식과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고추는 약용 작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고추는 16세기초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유럽으로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관상용 식물로 재배되었으나, 점차 식용 작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윽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전파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남미 원주민들은 고추를 제사용과 고문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고추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매운맛은 죄인을 고문하기에 충분했다고 합니다.
일본에 처음 고추가 전래되었을 때도 고문용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시대와 독재정권시대에 물에 타서 눈, 코 등에 붓는 고문용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고추의 종류는 50여가지인데 피망이나 파프리카도 고추과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 고추가 처음으로 들어온 경로는 두가지로 추정됩니다.

첫째는 일본을 통해 전래된 경로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에 고추를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포르투갈이 상관을 설치하여 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에서도 16세기 말부터 고추가 재배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 고추가 조선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는 중국을 통해 전래된 경로입니다.
중국은 16세기 중반부터 고추가 재배되기 시작했으며, 조선과 중국은 활발한 교역을 하였기 때문에, 중국을 통해 고추가 조선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고추가 조선에 전래된 이후, 점차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17세기 초에는 조선의 농서인 『농사직설』에 고추에 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또한,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의 문헌에 고추를 이용한 음식에 대한 기록이 등장합니다.
고추역시 대항해시대의 대표적인 산물입니다.

이밖에도 고무, 담배, 옥수수, 고구마 등이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퍼져나가 플랜테이션화 되어 널리 세계인의 작물이 되어 인구의 급격한 팽창과 부의 이동을 가져옵니다.
감자와 고구마 그리고 옥수수는 구황작물이 되어 중국을 비롯하여 아시아 및 아프리카 지역의 식량문제를 해결과 인구증가에 크게 일조하였으며, 고무나무와 담배 등도 플랜테이션화 되어 이를 통해 유럽국가들의 자본이 축척되었습니다.

사탕수수 및 설탕정제 산업은 보다 광범위하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집트에서 재배되어 설탕이 생산되었다가 베네치아 상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서아프리카 마데이라 제도의 섬들에서 재배되기에 이릅니다.
이후 사탕수수는 콜롬버스에 의해서 아메리카에 심어졌으며 브라질로 본격 이식되어 대량생산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아이티 등 카리브해의 섬에서 대량으로 설탕정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영국 등 유럽의 자본가들은 설탕농장 재배와 정제에 투입할 노동력을 대량으로 아프리카에서 데리고 왔는데 이들이 바로 노예입니다.
18세기까지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데려온 노예는 1천만명이 넘습니다.
모두 사탕수수 농장, 커피농장, 면화농장 등으로 배치되어 가혹한 조건에서 일을 하며 작물을 생산하였습니다.

사탕수수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

고무나무도 처음엔 남미의 아마존 열대림에서 인디오인들에 의해서 채취되어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이후 헨리위컴이란 영국인에의해서 고무나무가 아시아의 식민지로 이식되어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고무나무가 플랜테이션화되어 대량생산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천연고무는 그야말로 산업화시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원료가 되었습니다.

고무나무에서 고무원액을 채취하는 모습

아시아의 대만(타이완)이나 인도네시아는 네델란드와의 관련성이 많은데 17세기초 대만에 상관을 설치한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대만에 사탕수수를 들여와 재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1650년경 한때는 대만이 세계적인 설탕생산지중의 하나가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정성공에 의해서 대만 기지를 상실하여 더 이상 대만에서 사탕수수 재배는 확대되지 않게 됩니다.
만약 네델란드가 대만을 상당기간 지배했더라면 지금의 대만은 어쩌면 국토가 황폐화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탕수수와 설탕정제는 삼림을 모조로 파괴하는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커피 역시 중남미지역과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널리 재배되는 작물로 대표적인 대항해시대의 작물입니다.

이러한 작물의 이동과 재배는 세계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여기에는 자본과 기술을 보유한 기업과 국가들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토지 노동 자본이 생산의 3요소라고 합니다.
생산의 3요소라는 것은 바로 '부를 창출하는 3요소'라는 얘기입니다.
이 원리에 가장 적합한 사례가 바로 이러한 작물들이며, 3요소를 지배한 자가 곧 세계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그럼 이제 지금의 4차산업혁명시대에 생산요소 또는 부의 요소는 무엇일까요 ? (끝)


작물과는 다르지만 잠시 심심풀이 이야기 하나 소개합니다.

잠깐 ! 심심풀이 재밌는 얘기

옛날에 아주 똑똑한 소년이 있었다.
웬만한 어른보다생각이 훨씬 깊은 소년이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높은 벼슬을 가진 분으로 얼마 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중국에 다녀오신 뒤부터 끙끙 앓는 것이었다.

소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계시는 아버지께 걱정거리를 여쭈었다.

아버지가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들이 하는 말이, "조선같이 그 좁은

땅에서 살려니 얼마나 답답하겠소, 저 들판을 보시오.
저 들판에서

나는 곡식과 채소만으로도 조선 백성 모두를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오.

만리장성이라고 들어봤소? 성의 길이가 만리나 된다고 해서 만리장성이라 한다고. 당신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성이지요. 하하"

이런 말들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아버지는 "허허. 그까짓 걸 가지고 뭘 그러시오.

우리 나라엔 하늘 나라에도 밭이 있는데." 라고 말해버렸고,

중국 사람들은신기해하며, 석달 뒤 조선을 방문하여 하늘나라를 구경하기로 했던 것인데,

이제 그 날이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는 거였다.

소년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웃음을 터뜨리며 아버지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러자 아버지도 무릎을 탁 쳤다 !

드디어 중국사람들이 오는 날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부터 환갑이 넘은 노인들을 성문 앞으로

불러모아 잔치를 벌였다.

노인들은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술을 먹으며 즐겁게 놀았다.

절로 노랫소리가 흥겨워지고 어느새 춤판도 벌어졌다.

그 동안 소년은 그 잔치판 옆으로 동네 조무래기 소년들을 불러모았다.

"얘들아! 여기서 큰 소리로 울도록 해라. 그러면

이따가 엿을 한 아름씩 줄게~ 알았지?"

소년의 말에 아이들은 빽빽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아버지와 소년은 중국 사람들을 맞이했다.

성문앞을 지나던중국 사람들이 흥겹게 놀고 있는 노인들과 그 옆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노인들을 가리켰다.

"저 노인들은 하늘 나라 밭으로 일하러 갔다가 사흘 전에 돌아온 사람들이오.

하늘 나라 밭은 너무 멀어서, 가는 데 30년 오는데 30년 걸린다오.

60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쁘겠소! 그래서 저렇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 거라오."

"그리고 저 아이들은 ....하늘 나라 밭을 매러 가는 길이라오.

이제 가면 60년 뒤에나 다시 올 수 있는데 어찌 서럽지 않겠소."

중국사람들은 이 얘기를 듣고 머뭇거리자 아버지가 일부러 중국 사람들의 팔을 잡아 끌며

"자. 우리도 갈 길이 바쁘니 어서 서둘러서 하늘나라 밭을 보러 갑시다! "

그러자 중국인들은 저마다 슬슬 꽁무니를 빼며 허둥지둥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ㅎ ㅎ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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