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인표의 소설을 읽다가, 연기하던 배우를 소설 쓰는 작가로 만든 비결이 궁금해 그의 강연을 찾아본 적이 있다.
그는 매일 일기 쓰기,
운동하기, 금주, 금연 같은 습관을 말했다.
어찌 보면 뻔한 얘기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에 느닷없이 크리스마스에 그의 집 벨을 누른 박찬호 선수가 등장한다.
한창때의 스포츠 스타가 그의 집 거실에서
한 행동은 뜻밖이었다.
모두가 술과 음식을 즐기는 흥겨운 크리스마스에 두 남자는 거실에 앉아 명상했다.
그는 “성공하려면 남들이 다 누리는 것 중, 반드시 누리지 않는 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티브 잡스도 “내가 이룬 것만큼 내가 하지 않은 것도 자랑스럽다”는 말을 했다.
금주나 금연 같은 자제하는 행동이 주변을 바꿔 비슷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이것이 보통 사람의 삶과 자신을 다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강연을 듣다 보면 결국 잘 자라, 좋은 음식 먹어라, 운동해라 같은 판에 박힌 말이 대부분이다.
사람들 반응 역시 그렇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라거나 “워런 버핏은 콜라에 햄버거 먹고 구십 넘게 잘만 산다” 같은 반응도 꼭 끼어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사실 대부분의 진실은 교과서만큼 뻔하다.
중요한 건 뻔한 얘기를 ‘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근력 운동이
더 중요하다”라는 말을 “국민연금처럼 노후에 쓸 근육 연금을 들자”거나, 노년 의학 전문가인 정희원 교수의 말처럼 “노년 근육 1킬로는 1300만원의 가치” 같은 말로 바꾸면 메시지가 피부에 더 와 닿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이 뻔한 얘기를 실천하는 소수와 그러지 않는 다수가 있을 뿐이다.
같은 70대인데도 뛰는 노인과 누워 있는 노인의 건강 격차는
이렇게 생긴다.
시간이, 돈이 없어서 운동을 못 하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하기 싫어서 안 한 거다.
차인표의 말처럼 실패는 남이 만들지만, 포기는 ‘내가 한 것’이다.
도전처럼 거창한 말까지도 필요 없다.
적어도 내가 나를 포기하지는 말자.
나만의 활 쏘는 법
흔히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갔다”고 말한다.
한번 쏜 화살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올림픽 경기에서 양궁 경기를 자주 보는데,
한 양궁 해설자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지고 있던 선수들에게 아직 기회가 있음을 강조하며 “바람은 불다, 안 불다 하기 때문에 자기 활을 쏴야 한다!”고 격려하듯 외치던 말이다.
눈에 비슷해 보여도 선수들의 화살 길이는 제각각이라고 한다.
선수들의 팔 길이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좋은 화살도 자기 것이 아니면 쓸모없고, 남을 흉내 낼 게 아니라 자기 활을 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양궁을 보며 내가 배운 또 한 가지는 과녁에 명중시키려면 목표보다 조금 더 높은 곳을 겨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예상하고 노력한 것보다 나를 낮게 평가하기 마련이다.
세상의 질투와 시기가 중력처럼 우리를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을 이루려는 사람에겐 늘 여분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70m 거리에서 지름 12cm에 불과한 골드 존을 향해 하루 1000여 발의 활을 쏜다고 한다.
하지만 소수의 선수는 훈련이
끝난 저녁 시간 이후에도 남아 200발을 더 쏜다.
메달리스트들의 유달리 가뿐해 보이는 활시위는 그렇게 단련된다.
말하듯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 바람처럼 가벼운 점프, 쉽게 읽히는 단순한 문장이 역설적으로 반복적인 연습과 수많은 퇴고로 완성되듯 말이다.
제주의 올레길에서 갈림길에 들어설 때마다 방향을 알리는 화살표를 만났다.
하지만 인생에는 이런 화살표도, 내비게이션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흔들리지 않으려 해도 세상은 수시로 나를 흔들 것이다.
올해 역시 우리 삶에 수많은 바람이 불다 멈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바람 속에서도 과녁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바람의 유무보다 중요한 건 예상치 못한 바람 속에서도 끝내 중심을 잡으려는 태도, 그리고 나의 화살을 들고 과녁에 명중시키겠다는 그 마음이다.
한국은 '바깥의 적'과 싸워야 한다는 '오겜2'
며칠 전 ‘오징어 게임 시즌2’가 개봉했다.
오징어 게임은 ‘정보의 비대칭 게임’이다.
겉으로는 목숨 걸고 하는 잔인한 게임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게임 참가자와 게임 운영자 사이 권력의 비대칭 이야기다.
이 권력의 비대칭은 정보의 비대칭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시즌1에서 게임 참가자들은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한다.
반대로 게임 운영자들은 모니터를 통해서 모든 것을 감시한다.
게임 참가자는 얼굴이 노출되지만, 게임 운영자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다.
이런 정보의 차이는 권력의 차이를 만든다.
시즌2 속 많은 이야기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투표’다.
게임 참가자들은 이 잔인한 게임을 계속할지 아니면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갈지를 게임 하나를 마칠 때마다 투표로 정하게 되어 있다.
겉으로는 참여자에게 선택권을 준 민주적 절차로 보인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겨져 있다.
우선 투표가 비밀투표가 아니라 공개투표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투표한 결과를 가슴팍에 붙이게 하고, 숙소 바닥에 O와 X로 영역을 나누어 그 위에 서게 하였다.
무리는 둘로 나뉘었고 잠도 좌우로 나누어진 영역에서 잔다.
이제는 게임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경쟁하는 것 외에도 게임 참가자들이 좌우로 나뉘어서 싸우는 이중 갈등 구조가 되었다.
이 투표는 사람을 두 가지 종류로만 나눈다.
그리고 상대방은 나의 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공개적인 공간에서 나의 지지층과 모여서 대결 구도를 가지게 된다.
딱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이 그렇다.
민주주의 선거를 하지만 결국 1번이냐 2번이냐 두 개의 선택지에서 고른다.
결과는 박빙의
승부가 난다.
결과에 승복하고 맘에 들지 않으면 다음번 선거에서 또 투표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 후에 이슈를 만들어 공공의 공간에서 집회를 한다.
양측은 주말마다 길거리를 점유하고 세력을 과시한다.
오징어 게임 숙소에서 양측으로 나뉘어서 으르렁거리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더 무서운 것은 공개적으로 내가 누구를 지지하는지를 드러내고, 일반인에게 너는 누구를 지지하는지 밝히라고 겁박한다.
가수 임영웅에게 입장 표명을 하라는 것이 대표적 예다.
이때 자기편을 지지하면 깨어있고 의식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대역죄인 매국노 취급을 한다.
투표는 민주적 절차다.
집회의 자유도 민주주의의 한 형태다.
그런데 그 투표가 비밀이 아니고, 집회를 통해 공공연히 어느 편인지 밝히라고 강요하는 분위기는 반민주적 행태다.
민주적인 방법들이 모여서 반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다.
그런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지겹게 반복되고 있다.
두 종류의 사람만 있다고 몰아가는 게임 운영자와는 반대로 드라마 속에서는 다양한 개인적 이야기를 보여준다.
우리는 각기 다르고
각자의 문제가 있다.
드라마에는 트랜스젠더, 미혼모, 코인으로 망한 자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드라마의 가장 명장면은 주인공 성기훈의 친구가 반대편인 O로 투표해서 미안한 마음에 멀리 혼자 앉아 있을 때, 배우 강하늘 캐릭터가 같이 밥을 먹자고 불러서 옛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는 장면이다.
투표는 개인 상황에 따라 나와는 반대로 할 수도 있고, 나중에 맘이 바뀔 수도 있다.
다른 투표를 해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린 공통점이 더 많고 그 사람의 좋은 면을 믿기 때문이다.
그게 휴머니즘이다.
드라마에서는 해결의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5인 6족 게임을 할 때는 다른 팀도 응원한다.
다른 팀이 성공했을 때도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5인 6족 게임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게임이고 각 개인의 전문성을 인정하는 게임이다.
무엇보다 경쟁 상대가 상대방 팀이 아닌 게임이다.
반대의 게임도 나온다.
그룹핑 게임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친구를 버리는 잔인한 ‘편갈이’ 게임이다.
이 게임은 썸 타던 남녀 사이를 깨고, 부모·자식도 깨고, 심지어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살기도 한다.
드라마 속에서 주요 인물은 2명이 한 방에 들어가야 살 수 있는 게임에서 방에 3명이 들어온 것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살려고 한 명을 죽인다.
이 사건에 반대되는 이야기는 주인공 성기훈이 운영자와 싸우기 위해서 게임 숙소 공간을 깨고 밖으로 나가는 사건이다.
시차를 두고 나오는 이 두 사건은 극명한 가치관의 차이를 보여준다.
누구는 공간의 한계를 깨어서 문제를 해결하고, 누구는 좁은 방에서 옆 사람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한다.
계급 갈등을 보여주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가 있다.
상위 계급을 타도하며 위 칸으로 계속 올라가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최종 방법은 기차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지금 오징어 게임 2 속 사람들처럼
두 색깔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공간적 한계를 짓는 벽을 뚫고 밖으로 나가서 진짜 적과 싸워야 한다.
좁은 한반도에서 편을 나누고 상대편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을 버리고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한반도 역사에서 밖으로 진출했을
때는 내부 갈등이 줄어들고 잘 살게 되었다.
1970년대 우리 부모 세대와 선배는 중동에 건설 노동자로 진출했고, 1980년대에는 자동차와 반도체를 만들어서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지금은 좁은 국토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를 죽이려 하고, 공공의 공간에서 세력 과시를 하며 너는 누구 편인지를 밝히라고 강요한다.
이런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해결해야 할 진짜 적이 누군가에게는 환경 문제, 누군가에게는 빈부격차, 누군가에게는 전체주의 공산국가일 수도 있다.
무엇이 되었든 좁은 공간에 갇혀서
사고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민주주의 방식이라도 디테일에서 조금 비틀어졌을 때 나치나 인민 재판 같은 반민주주의가 될 수도 있다.
투표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식이지만 그렇다고 투표가 절대적 선(善)은 아니다.
오징어 게임 2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