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어요. 김장철이란 24절기에서 입동(立冬) 전후를 뜻해요. 대체로 11월 7~8일 경이 겨울이 시작된다는 입동일이죠. 우리나라에서 김장은 예로부터 굉장히 중요한 겨울 행사였어요.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왕실에서 매년 대대적으로 김장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랍니다.
하지만 이제는 김치 소비량이 줄며 과거에 비해 김장을 잘 하지 않는 집들도 많아졌어요. 실제로 김치 소비량은 1970년대 1인당 하루에 250g에서 지난해 87g까지, 50년 만에 삼분의 일로 줄어들었죠.
옛날 사람: 겨우내 먹을 양식을 입동에 다 마련해야 하거늘, 요즘 사람들은 김장도 제때 안 하고 말이야. 떼잉. 어피티: 요새는 파는 김치도 잘 나와요. 어르신. 옛날 사람: 집집마다 김치에서 어떤 맛이 나느냐! 그게 아주 중요한 문제란 말이야. 어피티: 그렇지만 김치 시장은 더욱 커졌는걸요. 김치로 돈 버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 아닐까요? 옛날 사람: 라떼는~ '김치 시장'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어!
과거 김장이 얼마나 중요한 행사였냐면, 좋은 회사인지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11월에 김장 보너스를 주는지 여부였어요. 김장 보너스는 월급의 최소 30%에서 많게는 100%까지 지급됐죠. 학교에서도 집안 김장을 도우라며 김장철이면 며칠간 ‘김장 방학’을 할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김장이 언제부터, 왜 공장에서 만든 김치를 사는 것으로 대체되었을까요?
일자리가 있는 도시에는 마당 있는 집이 없어요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 경제는 고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어요.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농어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죠. 인구 밀도가 높아지며 주거의 질은 그만큼 낮아졌어요. 도시로 막 올라온 사람들은 좁은 단칸방으로, 원래부터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대규모 인구를 수용하는 데 적합한 아파트로 서서히 옮겨 갔는데, 모두 김장에는 알맞지 않은 장소입니다.
김치가 정말 중요한 반찬이던 시절에는 평균 배추 50포기와 무 수십 개로 김치를 담갔어요. 그런데 김장용 통배추는 한 포기에 2~3kg 정도 합니다. 50포기만 한다고 해도 벌써 100~150kg이에요. 게다가 김장은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것부터가 진짜 시작이에요. 그만한 배추를 다 절이기 위해 필요한 소금의 무게와 양도 만만치 않겠죠. 여기에 고춧가루와 마늘 같은 기타 부재료까지 생각하면 엄청난 무게와 부피예요.
어피티: 그 당시 아파트에는 엘리베이터도 없었는데, 그걸 다 들고 계단을 올라가는 상상을 하니까 정말 쉽지 않았겠는데요… 옛날 사람: 힘들긴 했어…
시골이라면 마당에 배추며 무를 잔뜩 쌓아놓을 수 있어요.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다 함께 몰려들어서 일손을 나눌 수 있죠. 하지만 도시에는 재료를 보관할 곳도 없을 뿐더러, 그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일할 공간도 없어요.
양을 줄여서라도 어떻게든 김장을 해보지만 이번에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생깁니다. 11월이면 김장비닐, 고무장갑 같은 ‘김장폐기물’이 10톤 가까이 쏟아져 도시의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렇다 보니 1969년 서울시는 ‘서울 근교에 김장 공장을 만들어, 주부의 일손을 덜어주고 도시를 깨끗하게 만들겠다’라고 선언하기까지 해요. 옛날 사람: 맞아 그랬지… 영세 기업들이 그냥 넓은 곳에 장소를 마련해서 직원들을 고용해 김치를 담그면서 공장 김치 생산이 시작됐지.
10여 년 만에 백 배 늘어난 김치 공장 수 1977년 기사를 보면 서울 시내에 기업화된 김치 공장이 여섯 군데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요. 이 적은 수의 공장들이 7만2천 톤, 약 150억 원어치의 김치를 공급했죠. 그런데 8년 후인 1984년에는 기업화된 김치 공장이 전국적으로 500여 군데로 늘어납니다.
1980년대 후반에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이 열렸는데 이 국제적인 행사들이 김치 세계화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를 맞아 우리나라 정부와 기업은 한국식품을 세계인의 기억에 남게 만들려고 최선을 다했죠. 라면은 물론 불고기와 비빔밥, 그리고 당연히 김치도 포함됐어요. 특히 정부는 김치 상품화 정책까지 실행했는데, 바로 이때 최초의 포장 김치 브랜드 ‘종가집’이 등장해요.
작전은 성공적이었어요. 이후 김치의 해외 수출은 크게 늘어납니다. 시장성이 확인됐으니 이제 대기업이 등장할 타이밍이었죠. 두산이며 현대, 미원까지 발 벗고 나서 김치 상품화에 눈독을 들입니다. 그러자 농협은 물론 중소기업들이 크게 반발했고, 김치는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돼 대기업이 진출할 수 없게 돼요. 물론 대기업 계열사들이 시장에 참여하긴 했지만, 해당 규제가 완전히 풀린 것은 2012년입니다.
김칫독 대신 김치냉장고를 들이다 1990년대가 되자 대기업 계열사들이 생산한 상품 김치가 시장에 활발히 등장합니다. 깔끔하고 편리하게 포장된 상품 김치를 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김치를 사 먹게 됐어요. 이에 따라 김장하는 배추 포기 수가 줄어들었죠. 김장 문제가 해소되자 이번엔 김치를 신선하게 보관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커졌습니다.
옛날 사람: 도시에서는 김칫독을 묻을 데가 없으니까 말이야. 어피티: 예전에는 김치 항아리를 땅에 묻었었어요? 옛날 사람: 냉장고가 없을 때는 땅 밑이 온도 변화가 가장 적었단다. 어피티: 그럼 아파트에선 김치 보관을 어떻게 했어요? 옛날 사람: 각종 방법을 다 동원했지. 그러다가 김치냉장고가 등장한 거야. 김치독을 묻을 마당이 없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김치를 시선하게 보관하기 위해 무척 애를 썼어요. 아이스박스에 넣어둔다든가, 플라스틱으로 김장독을 만든다든가, 스테인리스로 된 김치통에 신문지를 몇 겹으로 싼다든가하는 방법이 동원되었고, 이 모든 보관물은 꼭 북쪽 베란다 햇빛이 안 드는 구석에 보관하거나 지하실에 두어야 한다는 사설이 매해 신문에 실렸어요. 최초로 히트를 친 김치냉장고는 1995년 위니아에서 개발한 ‘딤채’입니다. 그전에도 김치 보관용 냉장고가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1984년 금성(LG)과 1993년 삼성이 김칫독냉장고니 하는 김치 보관용 냉장고를 만들어 내놓았거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김치통이 딸려 있고 보관공간만 좀 넓을 뿐이라 섬세한 온도 조절 같은 건 불가능했죠. 소비자는 그런 김치 보관용 냉장고를 외면했어요. 처음에 사람들은 김치냉장고를 낯설어 했어요. 기능도 믿을 수 없었고, 무엇보다 자리를 많이 차지했으니까요. 하지만 사용해 본 사람들이 입소문을 냈고, 1997년쯤 되자 외환위기에도 불구하고 고가의 김치냉장고가 하루에 1천 대씩 팔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정작 위니아는 작년 2023년 임금체불사태까지 일으키며 부도를 맞았지만 여러 대기업이 그 사이 김치냉장고 개발에 뛰어든 덕에 김치냉장고 시장 규모는 이제 1조7천억 원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어피티: 1조7천억 원짜리 시장을 만든 입소문이라니, 초기 사용자들은 김치냉장고의 어떤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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