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면 응당 느끼는 감정이 있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기는 동정과 연민이다.
그런데 이것이 결여된 채 나르시시스트에 빠진 이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 피해자를 욕하고 조롱하면서 2차 가해를 저지르고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할 말은 하고 사는 시니컬한 독설가'쯤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지난해 12월 29일 전국을 슬픔에 빠트린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다.
해당 사고로 항공기 기체는 충돌 후 꼬리 칸을 제외하면
형체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불에 탔다.
전체 탑승자 181명(승객 175명·승무원 6명) 중 승무원 2명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를 허망하게 잃은 사람들에게 마음껏 슬퍼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참사 원인 규명 등의 현실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들을 제일 괴롭히는 것은 바로 악성 댓글이었다.
가슴을 찌르는 화살들이 유족들을 향했다.
온라인에서는 희생자와 유족들을 모욕하는 악성 댓글이 이어졌다.
특히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유족들만
횡재했다, 보상금 받을 생각에 속으로는 싱글벙글일 듯"이라는 조롱 글은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했다.
해당 글을 올린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30대 남성은 "뉴스를 보다가 별생각 없이 글을 올렸다"고 진술했다.
너무나도 가벼운 이유였다.
유족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이는 과도한 자기 과시와 주목 욕구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스트들이 '다른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속 이야기를 나는 밖으로 내뱉었다'는 기분을 만끽하며 온라인상에서나마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뽐내고
싶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된다.
범죄심리학자 박지선 교수는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자신이 늘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본인보다 아래에 있거나 지위가 낮은 혹은 친구나 가족이라도 자기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찾아 약점을 조종한다.
책임감과 공감력 또한 낮다"면서 "사이코패스보다 나르시시스트가 더 위험한 유형의 사람일 수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신나게 악성 댓글 세례를 쏟아냈던 나르시시스트들은 아마 지금도 자신이 저지른 '사회적 타살'은 잊은 채 떳떳하게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목표물을 찾아 같은 잘못을 반복할 것이다.
이들에게 상처를 입은 유족들을 위로하는 길은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처벌에서 시작된다.
또한 다른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패륜적 게시물 게시자와 동조자들을 영구적으로 차단해 그들의 마이크를 빼앗는 커뮤니티, 온라인 사이트 등의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우리의 역할도 중요하다.
나르시시스트의 힘을 키워주는 '관심과 반응'을 지양하고, 재빠른 신고로
그들의 글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루빨리 피해자들은 온전히 위로와 동정을 받고, 가해자들에겐 차가운 법의 심판만이 있는 세상이 찾아왔으면 한다.
현경미 시인"같이 걸어요."운동장을 걷던 동료가 지나쳐
가는 내게 툭 던졌다.
같이, 걷는다, 나도 모르게 몇 번을 되뇐 기억이 떠오른다.
같이 걷는다는 것에는 많은 것이 담겼다는 생각이 든다.
잘했어! 손뼉 쳐줄 수 있을 만큼, 더러는 손잡아 줄 수 있을 만큼, 아주 가깝지도 않게 그렇다고 너무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서로를 맞춘다는 뜻이 담긴 듯하다.
발걸음을 맞추려면 마음부터 맞춰야 하나 싶다.
마음을 맞추지 못해 삐거덕거리며 흘려보낸 시간들을 마주한다.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해 저 혼자 내달리고 더러는 엉뚱한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나 보다.
서로가 서로를 맞추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을 더듬어 보면, 어디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높았고 또 어디에서는 울음이 터져 올랐다.
같이 걷자는 말에 보폭을 줄이거나 늘여가며 걸음을 맞출 수도 있었을 텐데. 무심히 지나치기만 했던 기억들이 한겨울 찬바람 되어 가슴을 가로지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월에 친구가 보내준 서재환 선생님의 '새 달력'을 들여다본다.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 새끼 비둘기 같은 숫자들이 / 반듯반듯한 창문을 열고 나와 / 피어나는 꽃잎의 몸짓으로
/ 줄을 지어 앉아 있다.
//중략// 종소리를 울려주고 / 언 강물을 풀어주고 / 휴전선을 열어줄 것 같은 숫자들이 / 비둘기장 같은 새해 새 달력 속에 / 저마다 날아오를 날을 기다리며 / 푸른 날개를 다듬고 있다.
'반듯반듯한 창문 달린 하루하루. 문을 열면 갓 깨어난 비둘기 같은 숫자들이, 종소리를 울려주고 언 강물을 풀어주고 휴전선을 열어줄 것 같은 숫자들이, 날아오르기 위해 날개를 다듬고 있을 것 같다.
그런 숫자에 깃든 푸르른 나날들이 활짝, 펼쳐질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달력이리라.새해에는 서로에게
조금 더 마음을 맞추고 발걸음을 맞춘다면 어떨까. 달력 속 칸칸에 박힌 숫자들 그 하루하루가 더 다정해지지 않을까. 해마다 돌아오는 일월은 우리에게 주워진 다시 없는 기회며 최고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현경미 시인
새들의 시
김용택 시인아침밥 먹고 빨래 개서 옷장에 정리하고 빨아 놓은 빨래를
거실에 잘 털어 널었다.
빨래를 널거나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는 내 모습을 내가 생각하면, 내가 착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보르헤스'의 시를 읽다가 시집을 배 위에 올려놓고 이불속에 누웠다.
방바닥의 따사로운 온기가 몸으로 전이 되어 왔다.
내 몸과 이불 속의 온도가 일치되는구나, 하면서 정신이 가물가물 스르르 잠이 들었다.
포근한 온기로 푹 잤다.
낮잠을 길게 자고 일어나니, 겨울이 겨울 같다.
몸이 환하게 개여 가뿐하였다.
밖에 나갔다.
하늘이 청명하였다.
정말 맑았다.
고개를 들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둘러보았다.
산 능선들이 선명하다.
눈부신 겨울 하늘이다.
오랜만에 본 하늘 같다.
강을 건넜다.
낙엽이 쌓여 있는 오솔길을 걸었다.
참나무 잎이 수북하다.
참나무 잎은 두껍고 미끌미끌하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바스락 소리가 듣기 좋다.
자꾸 뒤가 돌아보아진다.
강길인데, 어쩐지 깊은 숲속 길 같다.
물속에 잠긴 돌들을 오래 바라보았다.
한번도 말을 해 본 것 같지 않은 물속 돌들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자갈들이 밟히는 길이 끝나고
흙길이 나타났다.
따뜻한 양지다.
흙 위에 낙엽들이 쌓여 폭신폭신하였다.
멧돼지들이 땅을 뒤집어 놓았다.
뒤집힌 땅이 마치 서툰 사람의 괭이질 솜씨 같다.
든든하게 땅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막강한 나무들을 올려다보았다.
나무들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사람도 저렇게 삶에 구차함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나무들은 비겁하지도 않고 다른 나무를 속이지 않을 것 같다.
따로 무엇을 강하게 주장 하지도 남을 욕할 것 같지도 않을 것 같다.
누구를 지저분하게 이기거나 누구에게 비굴하게
지지 않을 것 같다.
불의를 모를 것 같은 반듯하고 당당한 나무들 곁에 서 있으면 내가 졸아든다.
오래된 나무들은 아무 데나 서 있어도 넘볼 수 없는 고결한 인격을 갖춘 상상 속의 어떤 인물 같다.
내가 사는 마을 앞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50년도 더 되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에 사셨던 서춘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한다.
서춘 할아버지는 평생 홀로 사셔서 자손이 없다.
이 느티나무가 할아버지의 자손이다.
느티나무의 천년을 넘게 산다고 한다.
이 느티나무는 살아 숨
쉬는 나의 책이다.
나는 이 나무를 78년째 바라보는 중이고, 77년 동안이 나무 아래를 지나다녔다.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이 나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봄이 오면 까치가 집을 수리하고, 새잎이 피고 꾀꼬리가 날아와 운다.
여름밤이면 둥근달이 나무 위를 지나간다.
가을이면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이 강물에 떨어지고 겨울이면 나뭇가지마다 하얀 눈이 쌓여 놀라운 마을 풍경을 그려준다.
이 느티나무는 해마다 새로운 정부를 세워주는 나의 나라다.
날이면 날마다 지치지 않고 새로운 시를 써주는 놀라운 '시 나무'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게 인문이다.
보고 배우고 익혀 새로운 세상을 만나 사람을 귀하게 가꾸며 자기가 하는 일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게 책이라면 내게 이만한 책이 없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씻고 날마다 새로운 역사를 써서 보여 주는 이 책은 공부도 하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책도 안 읽는다.
지금도 강 건너 큰 소나무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는 이 나무가 불러주는 시 한 편을 받아 적었다, '나무는 정면이 없다/바라보는 쪽이 정면이다/나무는 언제 보아도/ 완성되어 있고 /언제
보아도 다르다/ 나무는 경계가 없어서 /자기에게 오는 모든 것들을/받아들여 새로운 정부를 세운다/ 달이 뜨면 달이 뜨는 나무가 되고/새가 날아 와 앉으면/ 새가 앉은 나무가 된다/ 나무는/바람의, 눈송이들의, /새들의/詩다' -졸시'새들의 시' 전문. 김용택 시인
태종과 원경왕후
이건 부부간의 일입니다.
" "이래라 저래라, 이젠 이 용상에라도 앉고 싶은 겐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드라마 <원경>에서 조선의 3대 국왕 태종과 원경왕후 간 살벌한 부부싸움 장면이다.
원경왕후가 태종이 자신의 옛 시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고, 이들을 궐내로 들인 것을 뒤늦게 알고 폭발한 것이다.
과도한 설정이지만 현 시대에 맞춰 변주한 게 흥미 요인이 되고 있다.
드라마 <원경> 포스터[사진 출처] 티빙원경왕후는
태종의 정비(正妃)이자, 세종의 모후(母后)다.
그녀는 고려 최고의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 민제(閔霽)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원경왕후는 인현왕후(숙종의 계비), 명성왕후(고종의 정비)와 함께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조선의 왕비로 평가받는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여흥 민씨다.
원경왕후는 태종이 왕권을 차지하는데 1등 공신이자 여걸이었다.
정도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동생들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무기를 숨겨놓고 결정적 순간에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출전을 독려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태종의 바람기는 특출났다.
후궁을 19명이나 두었고 조강지처의 여종까지 취했다.
내서사 이지직과 좌정언 전가식이 올린 상소문 중에 "전하께서는 성색(聲色·놀이와 여색)을 즐겨 하심이 여전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아이러니한 점은 태종과 원경왕후가 여자 문제로 다퉜지만 '금슬'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태종과 원경왕후는 슬하에 8남 4녀(4명은 요절)를 두었다.
원경왕후는 만47세인 1412년(태종 12년)에 마지막 왕자(요절)를 낳기도 했다.
이는 동생인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비명횡사한 지 2년여 뒤의 일이다.
권력은 냉혹한 현실이다.
태종은 보위(寶位)에 오른 뒤 처가를 도륙했다.
자신을 위해 선봉에 섰던 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귀양 보낸 뒤 사약을 내렸다.
그 아랫동생들인 민무휼·민무회도 유배 보낸 뒤 교수형에 처했다.
외척의 발호는 태종의 경계 대상이었다.
처가의 권력 팽창은 왕권의 약화를 의미했다.
그 정점에 원경왕후가 있었다.
드라마에도 나오듯이 태종은 원경왕후와 처가의 도움이 없었으면 대권을 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태종은
앞서 정도전의 '재상정치론'에 반발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바 있다.
태종이 처가와 며느리 집안을 '멸문지화'(滅門之禍)에 몰아넣으면서까지 정권의 기반을 다져놓았기에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등장해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태종은 당대에 '비정한 군주'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왕권과 후대를 위해 '외척 리스크'를 제거한 것이다.
우리 현대사에서도 대통령의 처가는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는 위험 요소이자, 좀처럼 풀기 어려운 난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그랬고, 윤석열 대통령도 부인과
처가 문제에 발목이 잡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처지가 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