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해지고 싶다고 누구나 생각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뇌 자체는 위험을 예측·탐지하는 데 최적화된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행복을 만끽하라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착같이, 의도적으로, 행복감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모든 문화와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기본 감정 여섯 가지는 기쁨·슬픔·분노·놀람·혐오, 그리고 공포. 긍정적인 감정이라고는 기쁨 한 가지뿐입니다.
부정적 감정은 그 강도 자체도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웬만해선 기쁘기 어려운데, 엔간한 일로도 쉽게 슬퍼지고 손쉽게
자기 혐오할 수 있지요.
생존을 위해 위협적이고 부정적인 일을 늘 염두에 두는 뇌에게, 즐겁고 긍정적인 일들은 우선순위가 아닙니다.
30년 전 사회신경과학의 창시자인 심리학자 존 카치오포가 ‘부정적 정보에 자꾸만 큰 비중을 두는 뇌의 패턴’을 뇌파 연구로 밝힌 이래로 수많은 연구가 이를 반복 입증했습니다.
생존
위해 부정적 감정 패턴 발달
누구나 저마다의 우울로 고통
순간 음미, 재미 찾는 버릇 들여야
그러니 지금의 뇌에 속지 마세요. 그 친구는 700만년 내내 긴장하고, 경계하고, 생존에 가장 진심인 기관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척박하더라도, 더 진화되고 세련된 방식으로 내가
길을 새로 내면 됩니다.
오늘 시도해 볼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음미하기(savoring), 그리고 즐거움을 찾기.
순간을 음미하세요. 처음에는 어려울 거예요. 습관을 만들어주세요. 뭔가를 ‘단지 경험하는 것’과 ‘그 의미를 이해하고 감사하는 것’은 뇌의 각기 다른 영역이 처리하는 일인데, 이 별개의 작업을 계속해서 함께 해내려 할 때 뇌 안에서는 새로운
연결이 만들어집니다.
본래 따로 움직여왔던 서로 다른 뉴런들은 저도 모르게 패키지로 묶여 팀 작업을 시작합니다.
‘어떤 일을 경험한다+음미하고 감사를 느낀다’ 팀입니다.
불 곁이 따스했다면, 음미합니다.
밥의 온기가 기분 좋았다면, 날씨가 청명하다면, 놓치지 않고 음미합니다.
누군가의 덕분으로 무탈한 하루를 보냈다면, 음미하고 감사해 합니다.
그렇게
하루 몇 분만이라도 일상 중의 명상에 진입하고, 감사하고, 마음을 챙기며 내공을 쌓습니다.
그까짓 음미, 정신승리 아니냐 치부할 수 있겠지만, 뇌내 신경전달물질의 입장은 명확합니다.
지난달 네이처에 게재된 연구처럼, 유쾌한 일을 경험할 때 우리 뇌에서는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모험하게 하는 도파민’이 경쟁하듯 나옵니다.
내가 감사해 하고 기뻐하는
순간순간 이러한 신경전달물질의 농도가 점차 차오른다고 잠시 상상해 보면, 그 정도 음미,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 번째로, 내 삶의 재미와 즐거움을 어떻게든 찾아내세요. 인지행동치료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임상심리학자 앨버트 엘리스(1913~ 2007)는, 인간의 가장 비합리한 생각 중 하나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이 찾아온다는 믿음’을 꼽습니다.
아무 콘텐트도 업로드 하지 않아도 구독자 수가 늘어나는 유튜브 채널, 아무 공부도 하지 않아도 유창해지는 외국어 실력, 아무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손님이 밀어닥치는 식당만큼이나 허황된 것입니다.
나의 행복은 내가 작정을 하고 발견해야 합니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시간을 들이는 취미나 신체 활동에서, 곁에 선 아이의 볼록한 볼
윤곽에서, ‘나 이런 거 좋아했네’ 하며 나 자신을 발견하세요. 그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의 허무와 절망을 이겨내는 작고 귀여운 장치들입니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느냐, 물으신다면, 네. 그것이 인간의 삶이니까요. 질병과 재난, 가난, 고립에 불안해하고, 운이 나쁘면 어느 순간 칼날 아래로 추락하는, 한계가 있는 인간이니까요. 삶이란 참 난이도가 높아,
순간순간의 재미를 찾으며 살지 않으면 어느 순간 우울과 불안의 비합리적이고 왜곡된 렌즈로 자기 삶을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이니까요. 가만히 놔두면, 뇌는 부정적 감정과 생각의 물결에 몸을 싣고 무력감의 지옥에 다다릅니다.
그러니 뇌가 가자는 대로 가만 내버려 두지 마세요.
저 역시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저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우울과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을 가만히 떠올립니다.
때로는 이름 모르는 이들과 한없는 슬픔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다들 인간이니까, 누구든 삶이 참 힘든 거야.’ 그리고는 반추의 문을 닫고는 팔에 닿은 이불의 감촉을 음미하고 늘 들려왔던 가족의 숨소리에서 새삼스러운 기쁨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다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삽니다.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박단 "돈 안 쓰는 의료개혁은 사기…尹, 눈속임하려 의사만 때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정당성을 강변하는 담화를 낸 지난 12일, 박단 대전협 비대위원장을 만났다.
궤변 가득한 이번 담화는 과거 의료개혁 관련 윤 대통령이 내놓은 담화와 맥락이 비슷했다.
김경록 기자
전공의 의견 수렴 없는 독단적 여야의정협의체 불참, 책임 안 지고 뒤에서 권한만 행사하는 수렴청정….
의정 갈등의 선봉에 선 사직 전공의를 대표하는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비대위원장을 향해 쏟아진 비판이다.
각을 세운 윤석열 정부뿐 아니라 숱한 언론, 심지어
의료계 내부에서도 적잖은 이들이
정부 주도 협의체 참여를 거부하고 SNS를 통해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내놓는 그의 소통 부족을 지적한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의협) 임현택 전임 회장 탄핵과 박형욱 비대위원장 선출이 그의 뜻대로 이뤄지는 과정에서 드러났듯 그의 영향력은 지난 10개월의 의료대란을 겪으며 더 공고해졌다.
특히 '전공의 처단' 문구를 담은 윤 대통령의 계엄 포고문 발표 이후 겨우 명맥만 유지해온 의정 간 모든 대화가 중단되면서 이대로 가면 내년에도 의료 공백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하다.
의료공백을 넘어 의료붕괴를 앞둔 지금
그의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지난 12일 박 위원장을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부, 진정성 없이 언론플레이
의료 공백 뻔한데 갈등 유발만
소송·일자리 문제 해결 없이는
젊은 의사, 필수의료 안 간다
지난해 9월 대전협 회장 취임 후 복지부-의협 간 의료현안협의체(이하 협의체)나 비공식 채널을 통해 의사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만나 요구를 분명히 전달했다.
정부 주장의 오류를 반박하고, 강행 시 미칠 파장도 구체적 근거를 들어 얘기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신중한 정책 집행이나 설득을 위한 부가 설명이 아니라 업무개시명령에 이은 면허 박탈과 사법 처리와 같은 겁박이었다.
구속당할 아무
사유는 없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정부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당할 수 있겠다 싶었다.
각오했다.
2월에 일찌감치 계엄의 공포를 겪은 셈이다.
더 큰 문제는 나 역시 국민의 한사람으로 의료 질은 떨어지고 비용은 비싸져 국민 모두 손해 본다는 점이었다.
정부는 그걸 다 알면서도 아무것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느꼈다.
대통령 직속 의료개혁특위든 국민의힘 주도 여야의정협의체든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 테이블로 삼지 않고 그저 대화했다는 알리바이 만들기로 접근했다.
정부가 진정성이 없으니 회의체 참여가 무의미하다고 봤다.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떠난 직후인 지난 2월 23일 정부는 윤희근 당시
경찰청장(오른쪽)과 박성재 법무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의사 집단행동 중대본 회의를 열어 전공의를 겁박했다.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조규홍 복지부 장관, 2월 초 박민수 차관을 각각 만났을 때 심각한 의료현장 왜곡을 불러온
구조적 문제 해결 없이는 실질적 의료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논리적 설명 없이 "정부는 어쨌든 밀어붙일 것"이라고만 했다.
자아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가 발표된 2월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4월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2시간 넘게 뭐가 문제인지 설명했더니 살짝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끝내 "정책은 수정할 수 없고, 2000명 증원도 정부가 잘 준비하면 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6월에 만난 장상윤 사회수석, 이주호 교육부총리도 마찬가지였다.
"9월을 넘기면
전공의·의대생
없는 의료대란이 내년에도 이어질 텐데 대책 있느냐"고 물었더니 구체적 답변 대신 "그렇게 될 리 없다, 우리가 플랜 B·C 없이 일할 것 같으냐"고 화를 내더라. 그게 계엄령이었다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지 않나. 윤 대통령 만나기 사흘 전 독대했던 이관섭 당시 비서실장 말고는 누구도 현장 이야기를 경청하거나 해결하려는 태도가 아니었다.
※이 실장은 여당의 총선 패배 후 사퇴했고, 다른 관계자들은 전부 현직이다.
- -국민 눈엔 정부 노력을 전공의가 외면한 거로 보인다.
정부는 책임을 전공의들에게 떠넘기려고만
했다.
전공의를 계속 때리는 한덕수 총리 등 관료들이 합세해 의사 악마화와 함께 전공의들이 아무 요구 없이 대화를 거부한다는 식의 언론플레이만 했다.
정부는 2~8월에만 의료개혁을 빙자한 의사 비판 광고로 120억원을 집행했다.
돈 펑펑 쓰며 알맹이 없이 일하는 시늉만 하면서 브리핑을 매일 열어 언론을 도배했다.
우린 돈·매체 등 아무 수단 없이 당하기만 했다.
잘못된 사실이나 단편적 숫자, 연봉 몇억 운운 하는 자극적 숫자 몇 개로 국민을 오도하는 정부를 보면서 정말 답답했다.
의사 집단행동 관련 중대본 브리핑에 나선 박민수 복지부 차관. 복지부는
지난 2월 전공의 집단 사직 이후 거의 매일 브리핑을 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섰다.
6개월 동안 쓴 홍보비만 120억원에 달한다.
연합뉴스
쉬우니까. 대통령의 2000명 출처는 모르겠다.
최소한 정부는 의료개혁의 우선순위가
의대 증원이 아니고,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로는 의료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걸 분명 알았다.
다만 윤석열 정부 누구도 고통이 따르는 구조 개혁을 총대 메고 할 용기가 없어 의사 때리기로 여론몰이를 했을 뿐이다.
한마디로 '척'만 했다.
사기다.
핵심은 돈이다.
정말 의료개혁을 할 마음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훨씬 더 많은 재정을 쏟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동시에 의료 소비자인 국민에게 건보료 인상 등 돈을 더 써야 한다고 설득했어야 한다.
그런데 패키지를 보면, 필수의료 수가 인상에 5년간 10조원(1년에 2조원) 투입이 사실상 전부였다.
대한민국 의료비가 연 200조원인데 고작 1%로 필수의료를 어떻게 살리나. 수가 왜곡엔 손을 안 댄 채 정부가 비상진료대책 명목으로 의료대란 이후 8월까지 쓴 돈만 해도 2조원이다.
건보료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솔직히
얘기하는 대신 돈은 더 안 쓰면서 더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포장했다.
국가가 돈을 쓰지 않고 의사를 쥐어짜는 '저비용 고효율 정책'이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오면서 필수의료 붕괴와 비급여 팽창과 같은 의료현장 왜곡이 심각해진 것인데 그걸 가속하는 정책으로 어떻게 개혁이 가능한가.
윤석열 대통령은 전공의 사직 직후 직접 의사 집단행동 대응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한덕수 총리(왼쪽)도 마찬가지다.
연합뉴스
필수의료 위기는 젊은 의사들이 응급의학과·흉부외과·소아과를 안 가서 벌어진 문제다.
진짜 해결을 원한다면 젊은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선택할 수 없는 장애물을 없애주는 게 먼저인데, 립서비스하듯 나열은 했지만 정작 실현 가능한 아무런 구체적 내용이 없었다.
가장 큰 게 소송 리스크다.
한 대학병원 응급실 환자에게 5억7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지난해 12월 있었다.
신장병 앓던 환자는 응급실 찾기 이틀 전부터 호흡 곤란 증세가 있었고, 내원 당일 체온이 40도였다.
응급실엔 걸어왔으나, 점차 의식을 잃어가 의료진이 삽관을 했고 뇌 손상이 왔다.
재판부는 불필요한 삽관에다 주의관찰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배상 판결을 했다.
당시
윗 연차 응급의학과 선배들이랑 저년차 교수들에게 물었다.
"최선을 다한 교과서적 진료였고, 응급의학과 의사 누구라도 똑같이 했을 거 같은데 이것마저 배상하라고 하면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하느냐. " 아무도 답을 못했다.
혼란스러웠지만 당장 눈앞의 환자 보느라 생각할 겨를 없이 그냥 응급실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 정부의 필수의료 패키지 발표를 계기로 '내 선택이 맞나'를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수가 정상화나 사법 리스크 완화 등 구체적 해결 방안 없이 인턴 1년을 2년으로 하는 등 의사를 더 쥐어짜는 방향이라
더는 응급의학과
전공의를 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일자리 문제다.
가령 상급종합병원들은 장비는 비싼데 수가는 터무니없이 낮아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흉부외과 전문의를 충분히 뽑지 않는다.
힘들게 전공의 생활을 견디고 전문의를 따도 일자리가 없다.
심장 수술 하고 싶어 흉부외과 갔는데, 전문의 따고 로컬(개원의 시장)에서 하지정맥류 수술을 해야 한다면 누가 선뜻 흉부외과를 지원하겠나. 병원이 전문의를 충분히 뽑을 수 없는
구조가 필수의료 의사 부족의 한 요인이다.
이국종 교수만 봐도 그렇다.
대중적 인지도 있는 인물이 중증 외상을 어떻게든 유지하려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결국 국군대전병원장으로 옮겼다.
※9일 마감한 내년 전공의 모집에서 심장혈관흉부외과 지원율은 3%(65명 중 2명)였다.
그렇다.
전공의는 기성 의사집단보다 순수하다.
어려워도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필수의료를 선택한다.
그런데 힘들게 전문의 따도 좋아하는 일을 하기 어렵다는 암담한 현실을 정부가 강하게 주입해준 꼴이 됐다.
소아과·산부인과 전문의를 따고도 미용
등 다른 과 일반의로 빠진 사람들을 돈만 좇는다고 손가락질하는데, 그들도 만약 소아과·산부인과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분명 그 과를 했을 거다.
하고 싶은 일을 최선을 다해 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현실과 타협했다고 본다.
과거엔 전문의 딴 후 이런 고민을 했지만 정부의 일방적 정책 덕에 몇 년 앞당겨 하게 됐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전공의들이 엄청나게 각성한 상태다.
지난 8월 서울청 광역수사단에 출석한 박단 위원장. 참고인 자격이었지만 경찰은 10시간 넘게 이어진 조사에서 피의자 대하듯 했다.
다른 전공의 대표도 전부 포토라인에 세웠다.
연합뉴스
지난 2월 대전협이 정부에 요구한 7가지 요구(^필수의료 패키지와 2000명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 ^과학적 의사 수급 추계 기구 설치 ^수련 병원 전문의 인력 채용 확대 ^불가항력 의료 사고에 대한 법적 부담 완화할 구체적 대책 제시 ^주 80시간 열악한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전공의 겁박하는 부당한 명령 전면 철회와 전공의들에게 정식으로 사과 ^의료법 59조 업무개시명령 전면 폐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나는 안 돌아간다.
복귀를 설득할 명분도 없다.
- -윤 대통령의 2000명 고집만큼 비타협적 아닌가.
응급의학과 등 필수의료 의사는
다른 진료과목 의사보다 돈을 잘 버는 것도, 근무 환경이 좋은 것도, 자리가 많아 정년 넘겨 오래 진료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송 리스크만 크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걸 선택하는 게 비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사람을 살린다는 보람, 남들이 안 하는 걸 한다는 사명감으로 한다.
그런데 보람과 사명감만으론 닥쳐올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분명하게 자각한 만큼 그런 환경이 바뀌기 전엔 돌아가기 어렵다.
내년에 7500명 아니라 1만명을 뽑아 부실을 감수하고 교육한다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6년 뒤 필수의료를
선택할 전공의는
거의 없을 거다.
- -2025학년도 입시 중지 요구는 비현실적 아닌가.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 가장 현실적이다.
내년 정원을 되돌리지 못하면 2026학년도엔 정부가 먼저 정원 줄이자고 요구할 수밖에 없다.
의료계가 나설 필요도 없다.
덧없는 삶, 불가피한 죽음 일깨우는 흔들리는 얼굴들
언젠가 다뤄볼 계획은 있었지만 이 시점에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비극이다.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작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얘기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는 2021년에 사망한 프랑스 작가이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76세,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오픈을 석 달 앞둔 시점이라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그의 죽음은 세계적인 도박사와의 내기가 걸려있는 예술작품의 일환이기도 했다.
종이로 해골 등 만들어 벽면 투사
1980년대 중반 명성 안긴 시리즈
유대인 트라우마 68 저항 결합
사적 기억물 통해 죽음 다뤄
헌 옷더미 50t 낙하시킨 ‘사람들’
집단적 죽음 애도하는 방법
자신의 죽음을 예술작품으로 베팅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1986년 작 ‘그림자 연극’,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벽면에 투사돼 흔들리는 해골 그림자가 덧없는 삶을 일깨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야기는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볼탕스키는 파리의 한 레스토랑에서 지인의 소개로 호주의 유명 도박사이자 미술 컬렉터인 데이비드
월시를 만났다.
예술가와 컬렉터가 만났으니 작품 구매에 대한 얘기가 오갔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볼탕스키는 월시에게 독특한 제안을 한다.
자신의 남은 삶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프로젝트를 작품으로 구매하라는 것. 작품의 제목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삶(Life of C. B.)’, 제작연도는 계약 시점부터 작가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작품의 가격은 두 사람이 비밀리에 합의한 후, 8년 완납을 기준으로 매월 할부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단, 할부금의 지급은 볼탕스키의 사망 시 종료된다.
8년이 되기 전에 작가가 사망하면
컬렉터가 작품을
정가보다 싸게 구입하는 셈이 된다.
8년 이상 살면, 작가는 매달 추가금을 받게 된다.
월시는 내기의 형태를 띤 이 제작의뢰 구매 계약에 합의하고 그 이후로 10년 이상 할부금을 지급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둘 다 술이 꽤 취한 상태였다.
두 사람은 그날 처음 만난 사이에 언어도 통하지 않아 주로 손짓과 표정으로 소통했다고 하는데 죽이 잘 맞은 모양이다.
볼탕스키는 자신은 막사는 스타일이라 당신이 이길 것이라고, 월시는 기왕이면 스튜디오에서, 카메라 앞에서 죽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고약한 농담을 나누었다.
그 이후로 볼탕스키의 스튜디오에는 24시간 가동되는 세 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그가 작업하는 모습을 호주로 실시간 송출했다.
월시는 10년 이상 할부금을 지급했다.
작품 가격이 완납되는 2017년 기준으로
4년이나 더 살았기 때문에, 돈 내기에서는 볼탕스키가 이긴 셈이다.
2010년에서 2021년까지 11년간의 촬영 기록은 현재 호주에 있는 월시 소유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에 출품했던 설치작품 ‘위안부’. 역사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작업이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의 제목에는 ‘삶’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사실상 죽음을 전제로 성립되는 개념 미술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가능했던 것은 볼탕스키가 ‘죽음’을 평생의
테마로 삼은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그가 25세에 만든 작품은 자신이 불미의 사고로 사망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후 사고와 관련된 사진과 신문기사 등의 기록물을 모아둔 스크랩북의 형태를 띠었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을 농담처럼 다룬 이 작가는 사실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공감과 애도를 끌어내는 작품을 만들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볼탕스키는
194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이었다.
의사였던 아버지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어머니와 이혼을 가장한 후 18개월간 마룻바닥 아래에 마련된 지하 공간에 숨어 살았다.
볼탕스키는 홀로코스트가 남긴 트라우마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주변의 유대인들은 모두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유가족이었다.
어머니는 특히 불안이 심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수년간 가족 구성원 누구도 혼자서는 외출하지 못했다고 한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을 타고 난 데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나서인지
볼탕스키는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0대 후반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볼탕스키는 20대 중반부터는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저항한 프랑스 68운동의 영향 하에서 개념주의적 성격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일상적인 물건들을 통해 관람자 개개인의 사적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방식으로 평범한 개인의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었다.
그는
한 개인의
수집품과 기록물, 빛바랜 사진 등을 즐겨 사용했다.
너무나 사소해서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런 재료들은 죽음에 대한 그의 소박한 고민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죽음이란 참 이상한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유일한 존재이며 저마다의 작은 역사와 지식, 그리고 기억들을 지니고 있지만, 한순간에 보잘것없고 불쾌한 물체가 되어 버립니다.”
볼탕스키라는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림자를 이용한 설치 작품을 발표한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이 시리즈 작품이 한 점 소장되어 있다.
제목은 ‘그림자 연극’. 98년에 볼탕스키의 개인전을 개최하면서 구입한 것으로, 종이로 만든 사람의 얼굴·해골·가면 등의 형상을 철사에 매달아 전시장 벽면에 그림자로 투사하는 설치 작품이다.
전시장에는 선풍기가 설치되어 가느다란 철사에 매달린 형상들을 흔든다.
어두운 전시장 벽면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희미한 빛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며 불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리
삶의 나약함과 덧없음, 그리고 이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죽음의 편재성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한국 첫 전시서 ‘위안부’ 설치작품도
2010년 파리 그랑팔레에 설치됐던 ‘사람들’. 사람의 대체물인 대규모 헌 옷을 통해 집단적 죽음을 연상시킨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볼탕스키는 집단적인, 사회적인 죽음에 각별히 관심이 있었다.
이런 주제를 다룬 그의 작품들은 유대인이라는 작가의 정체성 때문에 홀로코스트를 다룬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집단적 죽음이라는 사건을, 그 속에서 무명으로 희생된 개인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어 조망해 보려는 성격이 강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에서는
한국에서의 첫 전시를 기념하여 ‘위안부’라는
설치 작품을 만들어 기증했는데, 역사 속에서 희생된 평범한 개인들을 추모하는 데 주력한 작품이었다.
볼탕스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2010년에 파리의 그랑 팔레에 설치된 ‘사람들’이다.
그랑 팔레의 거대한 공간 속에 50t에 이르는 헌 옷더미가 산처럼 높이 쌓여 있다.
커다란 크레인이 마치 인형 뽑기 기계의 집게처럼 옷더미 하나를 집어서
천장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떨어뜨린다.
크레인의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움직임은 우리 삶을 관장하는 운명처럼 무심하고 무작위적이다.
이 압도적인 광경에 1만5000여 명의 심장박동 소리를 녹음한 사운드가 더해진다.
삶의 증거물이자 흔적으로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녹음할 수 있는 관객 참여형 작품이다.
이 사운드 작품은 ‘심장의 아카이브’라는 제목으로 현재도 일본 데시마 섬에 설치된 채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왜 헌 옷일까? 볼탕스키는 헌 옷을 즐겨 사용했다.
누군가가 입었던 옷은 그 사람의 대체물로서 가장 친밀한 느낌을 주면서도 부재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헌 옷의 무더기로 이루어진 작품 ‘사람들’은 우리가 대형 참사라고 부르는 어떤 집단적인 죽음을 연상시키며, 그 압도적인 규모로 관람자를 망연하게 만든다.
한순간에 벌어지는 수많은 사람의 죽음은 개개인이 이런저런 사유로 맞이하는 죽음과는 다른 차원의 비극이다.
우리는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처럼, 죽음의 시간에도 마땅히 각자의 사연과 맥락, 나름의 필연성이 있기를 기대한다.
탄생을 위한 축하만큼 소멸에 대한 애도의 시간도 보장되기를 바란다.
이런 기대를 모두 배반하는 집단적인 죽음은 인간의 개별성을 한순간에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허망하고 무참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건의 우연성은
잔인함을 더할 뿐이다.
“누구나 죽는다”라는
보편적인 명제와 “내가 죽는다”는 개별적이고도 특수한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괴리가 한 번 더 뒤틀린다.
비극의 기억 너무 빨리 사라져
무안에서 항공기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우연히 그 시간에 같은 항공기를 탄 하나의 집단으로서, 그리고 각자의 소중한 이야기를 지닌 개별적인 존재들로서 그들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죽음을 충분히 애도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마음이 무겁다.
이 거대한 비극은 공공의 관심과 기억에서 너무 빨리 사라지고 있다.
이는 물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일상을 혼탁하게 만드는 비상 체제가 끊임없이 연장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빈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바보야, 문제는 능력이야!”
지난해 5월 20일
JP모건체이스의 주가가 갑자기 곤두박질쳤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은 탄탄한 실적을 바탕으로 주가가 고공행진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주가는 이날 무려 4.5%나 급락했다.
발단은 이날 열린 JP모건 투자자 행사였다.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질의·응답 때 남은 임기에 대해 “더 이상 5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5년부터 JP모건을 이끌어온 다이먼 회장은 그동안 은퇴 시점을 묻는 말에 항상 “5년”이라고 농담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장은 이 발언을 조기 은퇴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주가는 급락했다.
1956년생인
다이먼 회장은 당시 68세였다.
3~4년을 더 재임한다면 70세를 훌쩍 넘긴다.
그런데도 시장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한 건 그의 리더십과 경영 능력 때문이다.
지난 20년간 JP모건은 세계 1위 은행으로 올라섰고 주가는 6배 이상이나 뛰었다.
JP모건은 지난해 연간 순이익이 585억 달러(약 85조원)에 달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연간 이익 500억 달러를 넘어선 은행이 됐다.
그래서 그에겐 ‘월가의 황제’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한국, 지난해 말 초고령사회 진입
정년 연장에 대한 발상 전환 필요
우주·방산·디지털이미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는 텔레다인 테크놀러지스의 로버트 메라디안(84) 회장 이력은 독특하다.
MIT대 교수, 카네기멜론대 총장 등을 거치며 30여년간 학계에 몸담은 그는 2000년부터 2018년까지 텔레다인 테크놀러지스 회장을 18년간 맡은 뒤 77세의 나이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은퇴 후 22개월만인 2021년 10월 다시 회장으로 복귀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활동적인 장년층이 늘어남에 따라 미국 S&P500 기업의 최고경영자(CEO) 평균 연령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2009년엔 50세 미만 CEO는 16%였으나 지난해에는 7%에 불과했다.
많은 기업이 CEO의 의무 퇴직연령도 폐지하고 있다.
골드만삭스(75세) 등 S&P500 기업 중 60%가량이 70~80세를 의무 퇴직연령으로 정하고 있으나 이마저도 이사회 의결로 유연하게 적용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빠르게 늙고 있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12월 23일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1024만4550명)를 넘어서며 UN이 규정한 ‘초고령사회’에 들어섰다.
한국의 법적 노인 연령은 65세다.
1981년 노인복지법 제정 당시 기대수명이 66세였던 점을 고려한 때문이다.
그사이 세월이 44년이 지났고 평균 수명도 17년가량이나 늘었다.
하지만 노인 연령은 그대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노인 연령을 높이고 정년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중근 대한노인회 회장은 지난해 10월 노인 연령을 현재 65세에서 75세로 단계적으로 높이는 방안을 정부에 제안했다.
정부는 즉각 화답했다.
보건복지부는 올해 주요 업무 추진 계획에서 노인 기준 연령 상향에 대한 논의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는 ‘액티브 시니어’(활동적 장년)의 등장을 주요 이유로 꼽는다.
액티브 시니어는 이미
사회 현상이 됐다.
지난해 말 기준 70세 이상
인구 네 명 중 한 명(고용률 24.8%)은 ‘취업중’이다.
국회에서는 정년을 현행 60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법안이 발의됐고 행정안전부는 공무직 근로자의 정년을 최대 65세로 늘렸다.
이런 흐름에 따라 금융권에서도 ‘70세 룰’ 적용이 유연해지고 있다.
KB금융과 우리금융에 이어 하나금융도 대표이사가 중도에 만 70세가 넘어도 남은 임기를 보장하도록 내부
규범을 바꿨다.
40여년 전 기준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낡은 제도에 대한 혁신적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20년간 ‘JP모건 제국’을 세계 1위로 올려놓은 다이먼 회장 사례처럼 선임 기준은 나이가 아닌 능력이 돼야 한다.
1992년 미 대선 당시 빌 클린턴 캠프의 슬로건을 빗대서 말하면, “바보야, 문제는 능력이야!”
김창규 경제산업에디터
행복이란 파랑새
행복경제학의 창시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지적행복론』에서 행복의 3요소로 ①물질적 부 ②건강 ③가족을 포함한 사회관계를 꼽았다.
부는 다른 요소와 달리 일정 수준에 이르면 행복도를 높이지 않는다.
물질 소유로 인한 행복의 한계효용은 계속 낮아지고 결국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한국의 1인당 GDP는 1953년 67달러에서 2023년 3만2142달러로
480배 늘었지만 행복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유엔 ‘세계행복지수’ 순위는 조사가 처음 시작된 2012년 56위에서 2022년 59위로 떨어졌다.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20여년째 1위다.
특히 30세 이상에선 감소 추세지만 10~20대에선 되레 늘고 있다.
20대 우울·불안장애 환자도 2017~2021년 13만 명에서 28만 명으로 급증했다.
외형적으론
10위권의 경제대국에, 세계가 열광하는 K컬처의 나라지만 국민 개개인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어릴 적부터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며, 누적된 좌절 속에 열패감이 쌓이기 쉽다.
타인과의 비교는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어쩌다 한번 잘되면 과시와 갑질을 한다.
압박과 스트레스가 일상인 ‘하이 텐션(high tension·고도불안) 사회’의 전형적 모습이다.
최근 ‘묻지마 범죄’의 급증도 이와 무관치 않다.
“남들도 불행하게 만들고 싶다”던 조선(33)이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는 정유정(24)은 ‘소용돌이 사회’가 낳은 괴물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온 국민이 명문대와 전문직, 좋은 아파트를 향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가지만 현실의 대다수는 경쟁에서 낙오한다.
도피처로 찾는 SNS에서 물신화한 명품과 사치스러운 소비행태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만 커진다.
가장 시급한 건 사회 양극화 해소다.
하지만 개인의 의식변화도 필요하다.
“산 너머 행복을 찾아 친구 따라갔다 눈물만 머금고 왔다”(Uber den Bergen, 산 너머)는 독일 시인 칼 붓세의 말처럼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타인과 비교하는 대신 자존감을
키우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정한 획일적 목표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 결단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게 행복의 본질이다(존 스튜어트 밀).
윤석만 논설위원
아버지의 앨범
아버지의 첫 번째 기일이
가까워지자 나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의례적인 제사를 떠나 당신을 기릴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찾아낸 게 바로 사진이었다.
아버지가 나온 사진을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가족들이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형제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형제들의 핸드폰 속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사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거의 없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변명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섰다.
며칠 고민 끝에 내가 찾아낸 해법은 앨범이었다.
언젠가부터 고향집 장롱 깊은
곳으로 밀려난 여러 권의 앨범을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첫 기일 기리려 꺼내 펼쳤지만
결혼 사진조차 남아있지 않아
엄마 감자적 꾸역꾸역 씹을 뿐
그래, 앨범을 펼치면 되는 거야! 그 앨범 속 사진에는 우리 가족의 지난날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터였다.
앨범을 찾아 고향집으로 달려가는 길은 내내 즐거웠다.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달리 앨범이 늦게 등장했다.
그렇다고 벽에 걸어놓는 사진액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어쩌다 사진이 들어오면 서랍 속에 보관하는 게 전부였다.
어린 시절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벽에 걸린
액자 속 사진들을 구경하는 거였다.
그중 가장
이채로웠던 것은 월남전에 참전했던 친구 아버지의 사진들이었다.
나는 마치 월남을 여행하듯 그 사진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친구의 집에는 액자도 모자라 월남 사진이 빽빽하게 들어찬 앨범까지 있었다.
부럽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우리 집엔 왜 앨범이 없단 말인가. 친구들 집에서 앨범을 보고 오는 날이면 나는 늘 그게 억울했다.
고대하던 앨범을 우리
집에 처음 들여놓은 건 객지에 나가 직장생활을 하던 형이었다.
그다음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한 큰누나였다.
나는 서랍에 있던 사진들을 두툼한 앨범 속에 넣는 일이 그렇게 즐겁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안에 내 사진들도 하루빨리 넣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내가 산골에서 사진을 찍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찍은(찍힌) 사진이라곤 10장을 채 넘지 않았다.
가장 처음의 돌 사진, 운동회 날 마을 사진사가 찍어준 사진, 소풍날에도 따라온 사진사가 소나무밭에서 찍은 사진, 어느
겨울 외사촌 형이 사진기를
빌려와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이후 초등학교 때 찍은 마지막 사진은 졸업앨범에 들어갈 단체 사진이었다.
이 중에 개인 사진은 돌 사진이 유일했다.
나도 형과 누나처럼 잔뜩 폼 잡고 찍은 독사진이 갖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개인 사진기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사진관에서 사진기를 빌려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진기를 빌리고
필름을 구입했다.
마을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필름을 잘못 감아 한 통을 다 버리는 일이 생겨도 개의치 않았다.
찍고 또 찍었고 그 사진들을 찾아 앨범에 채웠다.
이제 필요한 건 나만의 앨범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에야 임기응변으로 누나의 앨범에 있던 사진들을 몽땅 꺼낸 뒤 나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끼워 넣었다.
12월의 마지막 날
고향집에 도착한 나는 장롱 깊은 곳에 있던 앨범을 거실에 꺼내놓고 앉아 아버지가 나온 사진들을 핸드폰으로 다시 찍었다.
자꾸만 키가 작아지는 어머니는 싱크대 옆에서 감자적을 부쳤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혼례식 사진도 찍지 못했구나. 사진 속 아버지는 관광버스 안에서 술병을 들고 춤을 추는구나. 아버지는 남해의 어느 섬에서, 금강산의 커다란 바위 앞에서, 주문진의 횟집에서, 회갑상 너머에서, 자식들의 결혼식장에서, 마지막으로 고향집에 도착한 장의차의 관 속에서…. 나는 허리가 아파 주먹으로 두드리며 어머니가 부친 감자적을
돌배술
안주로 꾸역꾸역 씹었다.
감자는 땅속에서 하늘을 봤는지 맛이 아렸다.
아버지는 자식들과 손주들이 만든 동영상 앨범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시 사진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역정을 내진 않을까. 빛이 바래가는 앨범 속 사진들을 찍으며 나는 조금씩 취해갔다.
엄마, 아버지와 혼례를 올린 게 몇 년도야? 잘 몰라. 그럼 몇 살 때 시집온 거야? 스무 살. 아버지는
엄마보다 두 살이 많으니 스물두 살에 장가를 갔다는 얘기다.
다시 앨범을 들여다보니 아버지는 할머니 산소 성묘를 마치고 내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계셨다.
김도연 소설가